2026. 7. 30. 11:34ㆍ백제, 신라, 가야, 왜

지금까지 쓴 글들이 50편이나 됐음을 기념하고, 그동안의 개념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워낙 방대해서 총망라한 내용은 아님)
먼저 이 글부터 시작할까요?
전 글에 추가한 내용인데, 훈민정음의 뜻과 해석입니다.(사상 최초로 밝히는 백제인 후손 30만 大학살)
백제 멸망 후, 한반도 중·남부의 백제 유민들이 金신라와 고려의 노예·천민이었다는 시각에서 보니, 단번에 이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사상 최초로 밝히는 훈민정음의 뜻과 해석>

나랏말이 중국과 다른 것하고 대체 뭔 상관이길래 한글을 창제하셨는지 생각해본 결과, 얼마 지나지 않아 불x을 탁 쳤다.
이건 분명 당시 한반도, 특히 중·남부의 백성들, 즉 천민(백제의 유민)들이 쓰던 언어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종은 신숙주를 일본에 보내 한왜의 발음을 연구하고, 불쌍한 천민을 위해 한글을 만든 것이다.
金신라에 의해 노예·천민화된 백제의 유민은 백제 멸망(660년) 이후, 대한제국 멸망(1910년)까지 자그마치 1250년 이상 동안 예맥의 노예·천민으로 살았다.

훈민(訓民) = (한왜의) 백성을 새로 만든 글로 가르쳐
정음(正音) = 예맥의 언어를 하게끔 하는 바른 소리
즉 세종의 한글 창제는, 한반도 중·남부의 천민들이 예맥의 언어를 사용하게 된 결정적인 도구가 된다.
1번째 목적 = 불쌍한 백성을 위해 한글 창제
2번째 목적 = 이들이 예맥의 언어를 사용하게 함
<나라의 말에 대한 부연설명>
나라 = 미마나(彌摩那)의 나와 가라(加羅)의 라가 합쳐진 말로 반도 왜를 뜻함.
즉 나라의 말 = 좁은 의미로 미마나와 가라의 말을 뜻하고, 넓은 의미로 백제 유민의 말을 뜻함.
<中國에 대한 부연설명>
중국 = 대륙의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란 뜻이지만, 한반도의 중국은 나라의 중심, 즉 왕실, 왕가, 조정 등을 뜻함.
따라서 훈민정음의 중국은 조선 왕실 혹은 조정을 뜻함.
이는 곧 유학과 明에 대한 사대주의의 영향으로 조선을 소중국(小中國)이라 한 것과 같은 의미임.
<사상 최초로 밝히는 金신라가 나라 먹은 얘기>
-사상 최초로 밝히는 말갈의 정체에서 발췌-
한 2층 건물이 있습니다.
이 건물주인 백제는 1층에 살고, 한쪽 구석방에 사로가 세들어 삽니다.
백제는 사로의 어려운 형편을 잘 돌봐주는 착한 건물주입니다.
근데 2층에는 말갈이라는 사람이 들어와 무단점령해 버립니다.
그래서 백제와는 사이가 무척 안 좋습니다.
근데 2층은 추워서 말갈이 자꾸 1층으로 내려오려고 합니다.
이 건물의 옆집엔 왜라는 백제의 아들이 살고 있습니다.
백제는 왜와 함께 말갈을 쫓아보려고 했지만 말갈은 끄덕 없습니다.
하인을 보내 길 건너 앞집 당이라는 중국인에게 부탁도 해봤지만 소용 없었습니다.
이제 사로가 나가고 金신라가 새로 들어옵니다.
金신라가 강제로 사로를 나가게 하고 맘대로 들어온 겁니다.(강탈)
그래서 백제와 金신라가 다툼이 벌어집니다.
이에 화가 난 金신라는 직접 당을 찾아가 작당을 합니다.
백제와 말갈을 없애주면 2층은 당이 갖고 1층은 金신라가 차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을 움직이려면 백제와 말갈을 함께 없애고, 2층과 함께 1층의 보물을 전부 가져가라는 조건인 것입니다
金신라는 1층만 차지하면 그만입니다.
이렇게 해서 당과 金신라에 의해 백제와 말갈은 없어졌습니다.(살인)
1층에 살고있던 백제의 가족은 전부 옆집 왜의 집으로 쫓겨갔습니다.(강탈, 공갈, 협박)
근데 1층엔 백제의 일기장이 있었습니다.
훗날 경찰이 와서 이 일기장을 발견하면 사건의 전말이 들통날 것임은 자명한 일입니다.
이에 金신라는 일기장을 축소, 삭제, 날조해서 원래의 건물주는 자신이라고 조작합니다.(사문서 위조)
옆집 왜의 빈 집도 마침 하인들이 차지하고, 가게를 차려 간판을 일본이라고 지었습니다.(강탈)
백제가 죽자 아들이 복수하려고 당에게 갔지만, 그 아들도 죽임을 당한 것이었습니다.(2차 살인)
金신라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당과 일본에게 일기장을 보여주며 입을 맞춥니다.
그렇게 해서 이 비극적인 얘기는 끝납니다.
<金신라가 본격적으로 나라 먹은 얘기>
- 韓의 지방행정제 = 마한·진한·변한
- 진한의 소국 중 하나 = 사로국(경북 경주)
- 韓왕이 보낸 갓난아기 왕자 = 혁거세 ← 이는 개로왕이 곤지를 열도에 보내 사마대왕이 열도의 섬에서 태어난 것과 같고, 辰(백제)왕이 비미국의 비미호를 열도에 보내 야마토의 임금으로 삼은 것과 같음.(= 담로제)
- 사로국의 토착 임금 = 탈해 ← 왜인
- 사로국의 이민족 임금 = 아달라 ← 흉노 또는 서역인으로 추정, 기마군단+서역문화(철기, 유리 등) 보유, 비단길→만주→함경도 해안가→강원도 해안가→경북 경주항 도착. 당시 경주는 항구.(해수면 하강 전)
- 아달라~미추 = 파란만장한 역성 쿠데타의 역사 = 개막장 역사
- 내물~소지 = 고구려의 속국.(마립간은 고구려가 내린 칭호)
- 지증~진평 = 전부 허수아비 무능한 임금들이고, 실권은 金씨들이 장악. 고구려·백제에서 완전 독립
- 선덕~진덕 = 金씨들의 농간으로 성골의 씨 말리고, 여왕 나란히 등극, 허수아비 무능한 임금의 극치를 달림. 당나라의 속국 자청
- 태종 무열 = 결국 金춘추, 왕으로 등극, 金신라 시작. 당나라를 끌여들여 고구려·백제 멸망시키고 삼한일통
<이후의 얘기 = 피눈물 나는 한반도 역사>
- 金신라, 백제의 유민을 노예·천민화 함.(향·소·부곡 거주)
- 백제 멸망(660년)부터 대한제국 멸망(1910년)까지 1250년 동안 백제의 유민은 개·돼지만도 못한 노예·천민의 삶 시작.
특히 헬金신라~헬고려. 더이상 뭔말이 필요해?
<사상 최초로 밝히는 백제와 일본 ①>
선사시대 한반도와 열도에는 고아시아인이 살고 있었다.
이들이 이곳의 원주민이고, 편의상 각각 반도 조몬인, 열도 조몬인이라 부른다.
반도 조몬인 + 열도 조몬인 = 고대 일어 사용자

그후 요동을 중심으로 (고)조선이 들어선다.
이하 조선.
<조선의 고유 기술>
① 商나라에 버금가는 청동기술 → 철기로 발전
② 商나라로부터의 목재 건축술 → 고층 건축술로 발전
商은 周에 멸망하고, 주무왕은 기자를 조선에 봉한다.
이때 그 핵심 기술자들은 조선으로 간다.
조선人 = 예족

그후 중국은 商의 갑골문을 발전시켜 춘추시대 도래.
↑ 중국의 역사서가 주나라부터 시작하는 이유.
이 문자를 가지고 제자백가 나옴.
제자백가 = 니가 잘났냐? 내가 잘났지
한편 조선에는 앞서 말한 기술들이 발전하게 된다.(중국보다 더욱 발전함)
이 조선은 중국에서 부르는 명칭으로, 조선에서는 스스로 낙랑이라 칭한다.
BC 206~202 초한시기 조선후 기준, 부왕(否王)을 이어 즉위 (칭왕)
BC 194 한나라 여후 때 연왕 노관 흉노로 망명, 위만집단 기씨조선 찬탈
BC 193(?) 준왕집단 韓땅 접수, 한왕 칭왕
(3대 후)
BC 108 한무제 때 위씨조선 1차 공격했으나 실패(육 5만+수 7천 軍), 2차 공격 성공(내분), 위씨조선 멸망(86년 만에)
이때를 지도로 보면 아래와 같다.
요서·요동은 漢의 영토.

또한 북방 맥족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틈틈히 넘보고 있다.(← 말갈의 출현)

고대중국 Top 4 황제들: 한 무제, 후한 광무제, 수 양제, 당 태종
그후 한무제가 쳐들어와 위만조선 멸망, 한사군 설치.(BC 108년)
고대 Top 4 황제의 첫번째인 한무제가 바다 건너 쳐들어온 이유?
한무제 = 2층 궁궐 사용 ← 잠을 못잠.
조선왕 = 3층 궁궐 사용
한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킴 = 조선의 역사서, 건축물, 보물 모두 말살함.
그후 예족의 극심한 저항으로 한사군은 오래 못가고..
나중에 후한 광무제가 또 한번 쳐들어 온다.(서기 44년 30년)
역시 같은 이유로 쳐들어 옴.
후한 광무제 = 중국 최고의 성군 (← 글쓴이 생각)
사료를 좀더 들춰보니 다른 이유 때문이다.
후한 광무제 = 1층 궁궐 사용 ← 잠을 못잠. 유수는 성격상 별 관심 없음.(유수 = 후한 광무제의 이름)
낙랑군 태수 = 2층 궁궐 사용
여기서 중국 황제의 궁궐이 2층에서 1층이 된 이유는? ↓
<후한 광무제 - 위키백과>
전한 말 이래의 혼란으로 중국은 피폐해져, 전한의 전성기에는 약 6천만 명에 달하던 인구가 광무제 시대에는 2천만 명 정도로 감소해 있었다. 광무제는 이에 대한 대책으로서 노비 해방 및 대사면령을 몇 차례에 걸쳐 실시하고 자유민을 늘려 농촌 생산력 향상과 민심 확보에 힘썼다.
전란으로 인해 장안이니 낙양이니 전부 쑥대밭이 되고..
피폐해진 국력으로 당장 지을 수 있는 궁궐이 1층인 거다.
그럼 유수가 서기 30년에 낙랑을 쳐들어온 이유는? ↓
<낙랑 연표>
BC 108년, 한무제가 쳐들어와 위만조선 멸망, 한사군 설치
~116년 후~
서기 8년, 왕망, 신 건국. 낙랑군은 그대로 유지?
~15년 후~
서기 23년, 신 멸망
서기 25년, 후한 광무제, 후한 건국
동년, 토착인 왕조(王調), 낙랑태수 유헌(劉憲) 살해 후 대장군 낙랑태수 자칭, 낙랑군 독립
~5년 후~
서기 30년, 후한 광무제, 왕준(王遵)을 보내 낙랑군 재설치 (3세기 조위의 대방태수 王遵과 동명이인)
낙랑태수를 살해 후 독립했다?
이건 반란이기에 그냥 두면 안된다.
그것도 피폐해진 국력때문에 5년 후에야 군대를 보낸다.
그 말인즉슨 이 과정에서 한번 더 조선의 유물이 말살된다.

후한 광무제: 재위 25 ~ 57년
고구려 3대 대무신왕: 재위 18 ~ 44년
辰(백제) 2대 다루대왕: 재위 28 ~ 77년
이때 낙랑에 적이 쳐들어오면 스스로 울리는 자명고가 있었다는 호동·낙랑 설화는 믿거나 말거나.(← 삼국사기 출전)
그만큼 낙랑은 주변국들보다 우월한 존재였음.(뭔가 시대를 앞서가는 특별한 기술이 있었을까?)
이때 낙랑의 연표를 더 보자면,
서기 32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최씨 낙랑국 등장
서기 37년, 대무신왕, 낙랑국 습격해 멸망시킴
~7년 후~
서기 44년, 후한 광무제, 고구려 공격해 낙랑군 재설치 (← 이것이 세간에 알려진 낙랑군임)
~후한시대, 삼국시대, 위·진시대~
서기 313년,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낙랑군 멸망 (← 약 270년 존속)
서기 44년의 기록 = 사실 뜬금없이 유수가 낙랑을 공격한 것도 이상하고, 무엇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만 있고 중국 사료에 없는 기록이다.
이건 혹시 ↓ 이게 아닐까?
서기 44년, 다루대왕, 고구려 공격해 낙랑 점령
다루대왕 17년(서기 44년), 앞뒤 10년 통삭제
대무신 27년(서기 44년), 대무신왕 죽음 ← 辰의 대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
이 얘긴 차후 다시 논하겠다.
암튼 그후로 고구려와 중국, 辰(백제) 간의 피 비린내 나는 역사가 시작된다.
하지만 이 파란만장한 역사는 축소·삭제됨.(→ 삼국사기)
① 기씨조선 멸망 = 1차 조선 유민 남하 (BC 194년)
② 위씨조선 멸망 = 2차 조선 유민 남하 (BC 108년)
③ 토착 낙랑군 멸망 = 3차 조선 유민 남하 (30년)
④ 토착 낙랑국 멸망 = 4차 조선 유민 남하 (37년)
① ← 위만 집단에 의해 멸망 (BC 194년)
② ← 한 무제에 의해 멸망 (BC 108년)
③ ← 후한 광무제에 의해 멸망 (30년)
④ ← 고구려 대무신왕에 의해 멸망 (37년)
그렇게 한반도 중·남부는 이들이 남하할 때마다 청동·철기가 발전한다.
고층 건축술도 발전함은 덤이다.
이것이 백제의 청동·철기와 고층 건축술이 뛰어난 이유인 것이다.
백제의 건축물 특징 = 웅장·화려
이 백제의 고유 기술은 이걸로 귀결된다. ↓
백제의 장인이 만든 걸작들이다.

세계 최대 청동 불상, 도다이지 대불

세계 최대 목조 건물, 대불전
그리고 먼 훗날 백제의 건축술은 이렇게 발전한다. ↓

히데요시의 거성, 오사카성
<사상 최초로 밝히는 백제와 일본 ②>
삼한시대에 반도 조몬인과 열도 조몬인은 이런데서 살았다.

고대 모계 중심의 사회
衣 = *가죽옷 → 삼베옷 , **남녀 모두 몸에 문신 함
食 = 어패류·해산물, 수렵·채취 → 초기 논농사 (+ 밭농사)
住 = 움집과 막집 → 움집
* 여름엔 가죽 끈을 단 가죽 쪼가리로 중요 부위만 가림.
겨울엔 제대로 가죽옷을 입지만, 이·벼룩 득실.(냄새는 덤)
** 출처: 삼국지 한전
근데 ①에서 설명한 대로 조선(낙랑)에서 유민들이 유입되면서 나라가 발전한다.
당시 한반도 중·남부 = 韓 (마한·진한·변한)
→ 삼한 70여개 국
그후 비류·온조 집단이 망명하고, 뒤이어 韓은 멸망, 辰을 세운다.
삼국사기: 온조~개루
그리고 남옥저 망명인 구파해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구태가 즉위, 이가 초고대왕이다.(← 구태백제)
삼국사기: 초고~구수
다시 비류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고이가 즉위, 이때 백제를 건국한다.
이 과정에서 辰(백제)은 열도를 정벌, 큐슈 북부~긴키까지 20여개 국을 설치하니 이것이 야마토다.
→ 야마토국(邪馬臺國)을 위시한 20여개 국 (← 각 이름은 삼국지 왜전에 보임)

大백제의 행정구역, 10라
이때 백제대왕은 복속된 조몬의 수장들에게 종합선물셋트를 하사한다.(← 충성 맹세 차원)
즉 위세품이자 하사품이다.
백제대왕의 종합선물셋트 = 금동관, 환두대도, 금동신발, 청동거울, 곡옥, 비단옷 등.
또한 복속되지 않은 반도와 열도의 각 조몬 수장들을 초대해 이걸 보여준다. ↓
이거 1 = 한성의 웅장·화려한 궁궐 (← 반도)
이거 2 = 야마토국의 웅장·화려한 궁궐 (← 열도)
실물이 없어 아래로 대신함. ↓
어차피 동일한 목적으로 백제의 장인들이 만든 거임.

세계 최대 목조 건물, 대불전
또한 이들에게 불교를 소개하고 전파함은 덤이다.(← 정치적 목적)
백제 불교 + 조몬 신토 = 일본식 불교

일본 도다이지(東大寺) 15m 청동 대불 몸 닦는 날 | 중앙일보
세계 최대 청동 불상, 도다이지 대불
백제의 웅장·화려한 건축물에 압도된 조몬의 수장들 曰,
c발 졌다. 이제 항복하고 광명 찾자!
이것이 바로 大백제인 거다.
백제대왕은 大君을 야마토국에 보내, 백제대군이 왜왕이란 증표를 이걸로 만든다. ↓
大君(오오키미) = 왕자
백제대군이 왜왕이란 증표 = (대군) 칠지도

참고: 앞면은 오탈자가 많아 생략함
<大君 칠지도>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왕은 대대로 혈통이 고귀하니 왜왕이다. 뜻을 받들어 후세에 이를 전하라
先世以來未有此刀, 百濟王世世奇生聖音, 故爲倭王, 旨造, 傳之後世
기생성음(奇生聖音) = 기이한 출생, 성스러운 음성 = 고귀한 혈통
대군 칠지도가 있으면 대왕 칠지도도 있는 법, 바로 아래의 칼이다.
大王 칠지도 ↓

진왕은 천하의 대왕으로, 북은 말갈을 정벌하고 남은 *하이를 복종시키니 싸워서 반드시 이겼다
辰王天下之大王, 北伐靺鞨, 南從蝦夷, 戰而必勝
*하이(蝦夷) = 에조

왕을 거역하면, 천지신명의 분노로 머리를 잃고 사지가 절단되리라
若或逆王, 以天地神明之怒, 將頭失而, 四肢切斷
이 보검이 실전된 이유: 金신라가 말살해서 일까?
<사상 최초로 밝히는 백제와 일본 ③>
혹자가 어느 포털사이트에서 한반도와 열도의 기마 출토물에 대해 의문을 제시한다.
의문: 열도에 가야 출토물이 나왔으니 가야가 열도를 정복한 것이 아니냐?
어차피 한번은 다뤄야 할 내용이기에 필자의 견해를 제시해 보겠다.
아래 내용은 필자의 블로그에 있는 내용을 발췌했다.
→ 초고대왕 2(大王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참고로 아래 내용은 본문과 함께 앞뒤 전후의 글을 읽어야 역사적 흐름과 이해가 빠름을 밝혀두는 바다.
시작. ↓
<초고>
5년(서기 170) 겨울 10월, 병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침범하였다. 흥선, 거열형 처단
↕ 이 사이 16년 통삭제
21년(서기 186)
요 16년 통삭제 기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난 걸까요?
<고국천>
6년(서기 184), 한나라 요동 태수가 군사를 일으켜 우리나라를 쳤다. 임금이 왕자 계수(罽須)를 보내어 한나라를 막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임금이 직접 날쌔고 용감한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한나라 군사와 좌원(坐原)에서 싸워 물리쳤다. 베어진 적의 머리가 산처럼 쌓였다.
184년까지는 확실하게 고구려가 후한과 전쟁하느라 너무 바쁩니다.
그럼 초고는 공손씨와 혈맹에다 말갈이 바빠 북방을 마음 놓을 수 있으니 新彌多離와 남부를 평정합니다.(초고대왕 1)
그리고 이제 사로국과 열도 왜를 평정할 차례입니다.
166년 개루대왕이 죽고, 열도 왜는 첫번째 왜국대란이 옵니다.
초고를 辰왕으로 인정치 않아 辰왕의 공백기라 생각하고 그새 세력 다툼을 한 것입니다.
<아달라>
20년(서기 173) 여름 5월, 왜(倭)의 여왕 비미호(卑彌乎)가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이에 초고는 170~173년에 대군을 보내 열도 왜를 평정합니다.
단기간 접수를 위해 철갑 기병 수천 기를 보냈음은 물론입니다.
그리고 비미국에서 비미호를 보내 야마토국 왕으로 즉위시킵니다.
이때 사로국은 구도를 기용해 초고와 대립할 기세입니다.
<아달라>
19년(서기 172) 봄 정월, 구도(仇道)를 파진찬으로 삼고 구수혜(仇須兮)를 일길찬으로 삼았다.
구도는 구태의 친족으로 서로 사이가 나빠 보입니다.
초고의 대군이 쳐들어가면 구도가 방어하는 식입니다.
<초고>
25년(서기 190) 가을 8월, 병사를 내어 신라 서쪽의 변경의 원산향(圓山鄕)을 습격하고 나아가 부곡성(缶谷城)을 포위하였다. 신라 장군 구도(仇道)가 기병 5백 명을 거느리고 대항하였다. 우리 병사가 거짓으로 물러나니 구도가 와산(蛙山)까지 추격해왔다. 우리 병사가 반격하여 크게 이겼다.
그럼 변진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변진12국 중에서 구야한국은 辰왕 직할령이고, 반파국은 훗날 대가야로 제법 큰 소국입니다.
이 두 나라를 점령하면 다른 소국들은 항복하므로 변진은 평정하는 겁니다.
그래서 초고는 철갑 2천기를 사백개로에게 주어 먼저 반파국을 공략하라고 보냅니다.
참고로 이 반파국은 '삼국지 한전'에 반로국(半路國)이라 나오는데, 일본서기는 백제삼서를 보고 편찬된 것이기에 반파국(伴跛國)이 맞아 보입니다.
정사 삼국지를 쓴 진수가 희미한 글자의 반파국(伴跛國)을 반로국(半路國)으로 쓴 것 같습니다.
<반파국 - 나무위키>
반파국(伴跛國): 일본서기에서 사용되는 명칭. 양직공도 백제국사에서는 ‘반파(叛波)’로 나온다. 정사 삼국지에 등장하는 반로국(半路國)과도 연관된 이름으로 추정된다.

당시의 성은 목조성으로 빨리 건설하는 장점이 있지만 불에 약한 단점이 있습니다.
약간의 보병으로 불화살을 목책에 쏘아 뚫리면 대기하고 있던 철갑 2천기가 돌진해 휩씁니다.
철갑 2천기 + 변진의 우호적인 나라의 군사면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이런 역사를 안고 있기에 훗날 삼한과 열도는 방어하기 좋은 산에다 성을 쌓습니다.
그래서 일본 전국시대의 수많은 성들은 대부분이 산성입니다.
여기서 반파국이 저항했는지 항복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167년 말에서 170년 말까지 3년 삭제된 걸로 보아 오랜 기간은 끌지 않은 걸로 추정됩니다.
<3년 기록 공백기간>
1년째 - 초고대왕의 변진 정벌 (반파국을 시작으로 구야국까지)
2년째 - 반란 진압, 회유, 속국화
3년째 - 정략혼인 등 수습·안정기
<초고>
2년(서기 167) 가을 7월, 신라군이 몰래 우리 동쪽 변경의 두 성을 습격하여 남녀 1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
8월, 우리 왕이 사백개로(沙白蓋盧)에게 병사 2만을 거느리고 신라의 서쪽 여러 성을 침범하게 하고, 우리 임금도 또한 친히 정예병 정예기병 8천을 거느리고 뒤를 이어 한수(漢水)로부터 그곳에 다다랐다. 신라 임금은 크게 두려워하여 잡아갔던 남녀들을 돌려보내고 화친을 구걸하였다.
↕ 3년 삭제
5년(서기 170) 겨울 10월, 병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침범하였다.
↕ 16년 통삭제
21년(서기 186) 겨울 10월, 구름도 없었는데 우레가 쳤다. 혜성이 서북쪽에 나타났다가 20일 만에 없어졌다.
<167년 말>
- 초고, 사로국에서 계원을 거열형으로 처단
- 사백개로, 철갑 2천기 받고 변진으로 진격
- 초고, 본군 2만6천 군을 이끌고 新彌多離로 진격
<168년>
- 초고 본군, 新彌多離 평정
- 사백개로군 변진 평정
- 초고, 민정 살피며 귀국
- 新彌多離 1만 원군, 구야한국 도착
<169년>
- 사백개로, 정이대장군으로 임명
- 철갑 2천기 + 변진 본군 1만 + 新彌多離 원군 1만 = 총 2만2천 대군 열도 침공

<170년>
사백개로, 열도 왜 정벌
<171년>
- 사백개로, 열도 왜 평정
- 왜국대란 진정됨
- 비미국에서 비미호(15세 전후로 추정), 열도로 출발
(참고로 비미호는 247/248년에 죽음, 향년 92세 전후)
<172년>
- 비미호, 야마토국 왕 즉위
- 열도 왜 정국 수습, 안정기
<173년>
비미호, 초고대왕에게 사신 보냄
(훗날 金신라는 173년 비미호가 초고대왕에게 사신 보낸 걸 삭제)
<아달라>
20년(서기 173) 여름 5월, 왜(倭)의 여왕 비미호(卑彌乎)가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21년(서기 174) 2월, 가뭄이 심해 우물이 말랐다.
↕ 10년 통삭제
31년(서기 184) 봄 3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초고대왕의 열도 왜 정벌과 비미호의 즉위는 시기가 맞아 떨어집니다.
항상 그렇듯 아다리가 맞지 않으면 이런 주장을 하지도 않습니다.
↑ 이것에 대해 이의 있나요?
사백개로를 정이대장군으로 삼았는데, 왜 그러냐면 아직도 정벌하지 못한 조몬의 소국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이대장군이라 했습니다.
철갑 2천기로 동네 한바퀴 돌 듯 한바탕 진격해주고, 선진문화도 전해줍니다.
어차피 이들과는 학살, 살육,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의 전쟁이 아닙니다.
이들은 모두 辰왕의 백성들이기 때문에 초고대왕의 이름으로 최대한 타협, 허용, 대우, 동화 등을 이끌어 냅니다.
즉 평화적 정벌이요 평정인 것입니다.

사백개로의 철갑 2천기 + 변진 본군 1만 + 신미 원군 1만 = 총 2만2천 대군이 지나간 곳을 알 수 있는 전방후원분 분포도입니다.
이들은 2세기 말에 열도를 평정하고 아들, 손자 대에 큰 무덤을 만듭니다.
일부는 남고 일부는 고향으로 돌아와 新彌多離의 전방후원분이 생긴 요인이 됩니다.
참고로 훗날 일본 전국시대 가이(甲斐)의 호랑이 다케다 신겐의 영토인 가이(甲斐), 시나노(信濃)에도 전방후원분이 들어차 있습니다. ↓
다케다군은 기마로 유명한데 저런 산지에 말들이 많은 이유가 목초지가 있기도 하지만, 사백개로의 철갑 2천기가 지나간 흔적입니다.

<전방후원분 - 나무위키>
일본사에서는 전방후원분을 포함한 고분이 대거 조성된 시기를 고훈 시대(古墳時代, 고분 시대)로 분류하며, 기원후 3세기에서 7세기 초까지에 해당한다.
고훈 시대에 수많은 고분(古墳)들이 생겨 현재 일본 전역에는 고분만 약 16만(...) 기가 남아있다고 한다.
한반도의 전방후원분의 조성시기는 5세기 후반이라고 추정하는데, 상술하듯 일본 열도에서 발견되는 마키무쿠 고분군 조성 시기보다 1-2세기 늦다.
新彌多離의 전방후원분은 5세기 후반으로 추정한다고 하는데, 4말5초는 동성대왕과 사마대왕의 시기입니다.
이들이 열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시기와 맞물립니다.
즉 이 시기의 백제 영역은 아래 지도와 같습니다.

辰(백제)의 행정구역, 10라
내용 끝.
백제 기마대는 온조 때서부터 이미 1천기 이상을 거느렸다.
<온조>
22년 9월, 임금이 기병 1천을 거느리고 부현(斧峴) 동쪽에서 사냥하다가 말갈의 적병을 만났다. 한 번 싸움으로 그들을 격파하고 포로를 사로잡아 장수와 병사에게 나누어 주었다.
가야 지역에 철갑 기마가 출토되는 이유?
백제 기마대의 對신라 방어 겸 열도로 보내기 위한 주둔병들의 유물이다.
고구려 기마가 열도에 출토되는 이유?
비류·온조는 본래 고구려 출신 집단이다.
그리고 비류는 말갈 기마대를 이끄는 주몽의 제1군 대장이었다.(← 주몽의 졸본성은 연변 연길시다! 참고)
<사상 최초로 밝히는 백제와 일본 ④>
처음에 ①편의 첫글에서 이렇게 썼다.
선사시대 한반도 중·남부의 원주민은 반도 조몬인이고, 열도의 원주민은 열도 조몬인이다.
이들은 모두 고대 일어를 썼다.
그럼 반도 조몬인이 어떻게 고대 일어를 썼는지 알 수 있냐?
간단히 말해 반도와 열도의 땅 속 출토물이 같고, 무덤 매장물이 같고, 무덤의 풍속(빨간색으로 주칠한 벽)이 같으니 1차적으로 알 수 있다.
또한 우시산국(于尸山國), 마시산군(馬尸山郡), *오시사카(意柴沙加)처럼 동일한 언어를 쓰지 않고선 반도와 열도의 지명이 같은 한자 구조일 수 없으니 2차적으로 알 수 있다.
<*意柴沙加宮 뜻 - 구글AI>
의시사가궁(意柴沙加宮, 오시사카노미야)은 일본 고대 기록과 유물에 나오는 궁궐 이름으로, 일본 나라현의 '오시사카(忍坂)' 지역에 있던 궁궐을 뜻합니다.
결정적으로, 백제대왕을 부른 호칭에서도 알 수 있다.
백제의 지배층(예맥)이 부른 호칭 = 어라하(於羅瑕)
피지배층(한왜)이 부른 호칭 = 건길지(鞬吉支)
여기서 피지배층, 즉 반도 조몬인이 백제대왕을 건길지라고 불렀고, 당시의 발음도 알 수 있다.
<코니키시 - 구글AI>
코니키시는 고대 일본에서 백제의 왕이나 왕족을 부르던 말인 '건길지(鞬吉支)'의 일본식 발음입니다.
즉 건길지를 고대 일어로 코니키시라고 발음했다.
근데 일본서기에 이 코니키시가 어떤 뜻인지 알 수 있는 한자가 나온다. ↓
<웅략 5년(461년) - 일본서기>
6월 병술 초하루에 임신한 부인이 카스리노키시(加須利君, 개로왕)의 말처럼 츠쿠시(筑紫)의 카카라 섬(各羅島)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래서 아이 이름을 세마키시(嶋君)라 하였다. 이에 코니키시(軍君, 부여곤지)가 곧 배에 태워 세마키시를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이가 무령왕(武寧王)이다. ※백제 사람들은 이 섬을 니리무세마(主島)라 불렀다.
즉 코니키시는 원래 軍君이니, 군사(무력)로서 휘어잡은 왕이란 뜻이다.
이 말인즉슨, 辰(백제)에서 열도를 정벌해 그 임금을 코니키시(軍君)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는 거다.
또한 ※표를 보면 백제인들이 니리무세마(主島)라 불렀다고 하는 명백한 증거도 나온다.
근데 우린 君이 현대 일어로 키미라고 하는 걸 안다.
단순히 고대의 발음과 현대의 발음 차이라고 하는 것보다, 당시 君을 키시라고 읽는 건 반도 조몬어의 발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역대 천황들의 조몬식(和식) 독음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즉 예를 들어 天皇을 미코토라고 발음하는데, 이는 현대 일본인들도 왜 그렇게 발음하는지 모른다.
덴지 천황 = 천명개별천황(天命開別天皇) = 아메미코토히라카스와케노미코토 = 아마츠미코토사키와케노미코토
어떤 한자를 왜 그렇게 발음하는지 현대 일본인들도 모르는 현상은, 그것이 곧 백제어(= 반도 조몬어)이기 때문이다.
이런 한자들은 일본서기 등 사료를 찾아보면 수없이 많다.
이제 백제의 장인이 만든 대표적 건축물과 걸작품을 올리며 마칠까 한다.

金신라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 만드는 황룡사 9층 목탑

백제 장인 아비지(阿非知)가 만듦

백제 도성 사비성의 웅장·화려한 간지를 느낄 수 있는가?

열도 조몬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만드는 백제금동대향로
<사상 최초로 밝히는 백제와 일본 ⑤>
원래 처음에 이 ↓ 의문점을 풀려고 글을 쓴다는 것이 ⑤까지 왔다.

한반도는 커녕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풍경
일본 작은 마을 곳곳에 존재하는 도랑에 사는 물고기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것이 일본의 작은 마을에 존재한다?
20년 전 어느 방송에서 봤을 땐 도랑 속에 민물고기들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관광 명물이 되었는지 비단잉어로 바꼈다.
도랑 속에 인위적인 비단잉어보단 자연의 민물고기가 사는게 훨씬 충격적임은 물론이다.
왜냐하면 도랑에 비단잉어를 놓았다는 건 어떤 인위적인 목적(관광)이 있어 마을사람들이 작정하고 기르는 것이고, 민물고기가 도랑에 산다는 건 자연 속 그대로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기에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기에 신기하고 충격적인 거다.
이 도랑의 뜻은 이렇다. ↓
<도랑 - 구글 AI>
도랑은 물이 흐르도록 좁고 얕게 파놓은 작은 물길이나 수로를 말합니다.
정의: 빗물이나 지표수가 흘러가거나 논밭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든 좁고 긴 고랑
고랑의 뜻은 이렇다. ↓
<고랑 - 구글 AI>
고랑은 두둑한 땅과 땅 사이에 길고 좁게 들어간 곳을 뜻합니다.
고랑의 특징과 역할배수 기능: 비가 올 때 물이 흘러나가는 물길 역할을 합니다.
통로 역할: 사람이 다니거나 농사를 지을 때 지나가는 길로 쓰입니다.
즉 둘의 의미는 별 차이가 없다.
너네들 발꼬랑네가 보통 이 도랑의 냄새인즉, 여기에 개똥, 설겆이물, 빨랫물 등 온갖 것들을 버림은 물론이고 심지어 인분까지 버린다.
근데 마을 안 도랑에 민물고기가 산다?
이거 실화야?
<일본 마을 도랑 물고기 - 구글 AI>
일본 마을 도랑에서 물고기가 헤엄치는 모습은 깨끗한 용수가 흐르는 일부 지역의 특별한 풍경으로, 대표적인 곳은 시마바라, 히다 후루카와, 구조하치만이 있습니다. 이 도랑들은 더러운 하수도가 아니라 맑은 샘물이 흘러서 물고기가 살 수 있습니다.
유명한 지역과 특징
시마바라 (나가사키현): 땅에서 맑은 샘물이 솟아 나와 만들어진 깨끗한 수로에 알록달록한 비단잉어를 풀어놓아 관광 명소가 되었습니다.
히다 후루카와 (기후현): 전통 가옥가 사이로 흐르는 수로에 수많은 비단잉어들이 헤엄쳐 전통적인 시골 풍경을 보여줍니다.
구조하치만 (기후현): 마을 곳곳의 수로 물을 생활용수로 쓰고, 물고기를 함께 기르며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 곳입니다.
지금은 일부 지역의 특별한 풍경이지만, 근대화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 전역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었을까?
그럼 언제부터 일본은 마을 도랑에 민물고기들이 살았던 거냐?
바로 백제 멸망 후, 백제 유민들이 열도로 도래하고 부터라고 추정된다.
적게는 60만(필자의 계산)에서 100만 명(일본학자의 계산)이 열도로 간 걸로 추정하는데, 이들이 간 후로 일본이 건국된다.(덴지·덴무의 아스카 시대)
즉 당시 대부분이 밀림·오지인 열도를, 백제 유민들이 열도 조몬인들과 함께 수많은 마을을 조성한 시기가 바로 이때인 거다.
백제 유민의 건축술 + 열도 조몬인의 인력 = 새로운 마을들 탄생 (feat. 도랑 속 물고기)
이것에 대해 필자가 썼던 글을 옮겨와 본다.
시작. ↓
-사상 최초로 밝히는 백제 미마나 60만人 구출 대작전에서 발췌-
이제 60만의 미마나인이 당장 거주해야 할 집이 문제입니다.(미마나인 = 백제유민)
서민들은 열도까지 와서 또다시 움집에서 살 수는 없습니다.(→ 새출발하는 인생)
남아도는 조몬의 인력과 풍부한 목재, 그리고 백제의 건축술로 (서민용) 목조주택을 이때 비로소 짓습니다.
당시 일본 조정의 정치력도 한몫했을 듯 싶습니다.
어차피 天智조정도 새 나라를 열었습니다.(→ 日本)
모든 걸 혁신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이참에 백성들의 집도 움집에서 목조집으로 지으라는 명을 내립니다.
알고보니 움막집이란 것도 움집과 막집으로 구분합니다.
<움집 - 나무위키>
막집과 외형적으로나 구조적으로나 매우 유사하지만 큰 차이점이 하나 있는데 움집은 바닥을 파 주변 지면보다 집 바닥이 낮지만 막집은 그냥 평지에 그대로 짓는다는 것이다. 막집은 구석기시대, 즉 농사가 발전하지 않은 시대이기 때문에 사냥과 채집을 위해 자주 이동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 결과 짓는 시간이 짧은 막집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물론 농경사회가 시작되면서 막집은 차츰 사라져갔다.
즉 지금까지 써온 움막집이란 움집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움막집 → 움집
다다미도 이때 만들어진 걸까요?

의미심장(?)한 웹사이트 이름입니다.
하지만 다다미는 귀족을 위한 겁니다.
<다다미 - 위키백과>
다다미라는 용어는 '접다' 또는 '쌓다'를 의미하는 동사 타타무(畳む)에서 파생됐다. 이는 초기의 다다미는 사용하지 않을 때 접거나, 층층이 쌓아 놓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다미는 일본의 귀족의 향유물이었다.
당시 서민들은 대나무 돗자리를 깔았을 겁니다.(대나무의 쓰임새는 다양함)
위 사진 속 창호지가 들어오기 전에는 대나무 발이 쓰입니다.
그럼 겨울에 찬바람은 어떻게 하냐?
일본 남부에서 중부까지의 겨울이 그렇게 혹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래 방법으로 추위를 이겨냅니다. ↓
<창호지 - 구글 AI>
사용 방법 (전통 방식)
가을: 찬바람을 막기 위해 창호지 전체에 풀을 발라 붙입니다.
봄: 공기 순환을 위해 창살에만 풀을 바르거나, 풀칠한 다른 종이를 덧대 붙였다 떼는 방식으로 사용합니다.
창호지에 풀을 먹이는 것처럼 대나무 발에 풀을 먹여 틈을 없앱니다.
즉 종이가 들어오기 전에는 대나무가 쓰였고, 이 정도 기술 쯤은 이 시대에 있었습니다.
집 안에 화로를 피운 건 덤입니다.
반면 북부로 갈수록 三韓화가 안된 조몬인의 땅이라 이들은 막집에서 삽니다.
이들은 농사가 아닌 수렵·채집을 하니 움집이 아닌 막집인 겁니다.
三韓화가 안된 조몬 = 에미시
三韓화가 된 조몬 = 야마토
<에조 - 나무위키>
에조(蝦夷えぞ)는 일본의 도호쿠 북부와 홋카이도에 거주했던 민족이다. 시대에 따라 '에미시(毛人)', '에비스'라고도 표기했었다.
저는 에미시라고 부릅니다.
워낙 옛적이라 당시의 기와없는 목조건물 사진이 없습니다.
(지진 나고 폭격 맞는 등 대부분 사라지고 없음)
움집에서 살다 목조집에서 살게 된 조몬인들.
뿐만 아니라 옷, 신발, 젓가락, 농기구 등 크게 의식주와 생활의 혁신을 일으킵니다.
즉 조몬의 서민들은,
옷, 신발 - 원시적인 가죽옷을 버리고 백제옷을 입게 됨
젓가락 - 그때까지 손으로 먹던 반찬을 이제 젓가락을 씀 ♨
농기구 - 농기구의 철제화, 전반적인 농업생산량 증가
♨ 부연설명이 필요해 보입니다. ↓
<젓가락 - 나무위키>
끈기가 있는 자포니카 계열의 쌀을 주식으로 삼는 동아시아의 식문화에 맞추어 만들어지고 발전해 온 도구로, 중국 상나라의 왕 주왕이 상아로 젓가락을 만들었다는 고사를 한비자가 전한다. 이후 진나라가 멸망한 뒤 한나라와 초나라가 전쟁을 치를 때에 젓가락에 관한 고사가 등장하는데, 역이기가 6국의 왕을 봉해 봉건제를 부활시키자는 제안을 하자 장량은 유방이 밥을 먹던 젓가락을 뺏어 분지르며 그 계책의 문제점을 설명했다.
즉 젓가락은 고대중국에서 왕족·귀족의 식사도구라는 건 확실합니다.
한반도에서도 최소 삼국시대부터 젓가락과 숟가락을 함께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숟가락은 고조선 시대 청동기 유물도 발굴된 반면 젓가락은 삼국 시대 이전 것은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 시대 중기까지 서민 계층에서는 숟가락 위주로 사용한 경우도 많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김홍도 등 당대 화가들이 그린 풍속화들을 보면 젓가락을 사용한 증거들도 많이 나오기 때문에 단순한 지역별, 가족별 특색이라 볼 수 있겠다. 한국은 또한 독특하게도 다른 젓가락 문화권 나라들과 달리 전통적으로 숟가락이 차지하는 비중이 좀 더 크다.
즉 삼국시대에 젓가락은 서민용이 아니었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일본-
○ 길이가 짧다. 밥을 젓가락으로 쓸어 먹거나 접시나 그릇을 들고 먹는 습관이 있어서 중국의 젓가락처럼 길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 밥을 쓸어 먹는 이유는 예전 일본에서는 쌀이 귀했다보니 여러 가지 잡곡을 섞어 밥을 지어 먹는 경우가 많았는데 잡곡밥이 끈기가 적다 보니 밥 덩어리를 집어 먹는 것이 아니라 밥그릇을 들어 입에 대고 쓸어 넣듯 먹는 습관이 생겼다고 한다. 애니메이션 같은 데를 봐도 밥그릇을 입에 대고 젓가락으로 끌어 넣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 젓가락 끝이 뾰족한데, 일본이 섬나라인 만큼 생선을 많이 먹기 때문에 생선 가시를 쉽게 발라내기 위해서이다.
○ 일본에서는 국물 요리가 있어도 건더기가 거의 없는지라 숟가락을 쓸 필요가 없다. 전통적으로 일본에서 숟가락을 쓰는 계층은 불교 승려들뿐이었다. 아침 식사를 죽으로 먹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주 작은 건더기 같은 것을 집어 먹기 위해서 젓가락이 짧아졌다.
○ 일본에서는 숟가락이 귀족적이고 젓가락이 서민적인 물품이었다. 헤이안 시대 때 귀족들이 젓가락과 함께 숟가락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더불어 이 시기까지는 일본도 한국처럼 귀족들은 그릇을 들고 먹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귀족과 서민간 문화 차이가 생기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귀족이 여유를 바탕으로 불필요할 만큼 복잡한 예절과 문화를 향유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귀족이 편하게, 서민들이 불편하게 생활하는 것이다. 이 같은 대조는 유럽사에서도 흔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귀족 문화는 쓸데없이 어렵고 복잡하게 발달해서 서민층이 향유하기 어려웠다.우리가 오늘날 '유럽 정찬 문화'라 하면 떠올리는 그 까다로운 예절들이 사실은 프랑스 귀족 문화다. 일본은 헤이안 시대 이후로 막부 정권 시대가 도래하고 전란이 지속되면서 귀족식으로 '차려 먹는 식사'가 군 진영에서 '들고 먹는 식사'에게 밀려나, 다이묘들까지 숟가락을 쓰지 않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숟가락은 젓가락 사용이 서툰 어린아이들이 사용하거나 카레 같은 몇몇 음식을 먹을 때나 사용하는 한정적인 역할로만 남았다.
즉 종합적으로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고대한국 서민들의 식사도구>
밥과 국은 숫가락 이용해 먹음 (밥을 국에 말아서 먹음)
반찬은 손으로 먹음 (주로 김치류로 추정)
→ 젓가락은 귀족용으로 보임 (중국에서 건너온 물건으로 귀족만 허용)
→ ① 오늘날 비빔밥이 괜히 있는 게 아님 (← 서민음식)
→ ② 오늘날 찌개와 전골이 괜히 있는 게 아님 (← 서민음식)
→ ③ 이 찌개와 전골은 큰 냄비에 모두가 숫가락으로 떠먹음
<고대중국 서민들의 식사도구>
밥과 반찬은 젓가락 이용해 먹음
국은 숫가락 이용함
→ 역사가 오래된 만큼 서민이라도 젓가락 사용을 일찍 시작한 걸로 보임
→ 튀김요리가 많은 만큼 젓가락이 필수
<고대일본 서민들의 식사도구>
밥은 그릇을 들고 손가락 두개를 이용해 먹음 (검지와 중지)
국은 그릇을 들고 들이마심
반찬은 손으로 먹음 (주로 생선구이, 해산물로 추정)
♨ 이제 서민들에게 젓가락이 대중화 됨
요인: 미마나인의 이주, 그들과의 결합, 일본의 건국으로 문화·제도 혁신
→ 조몬인이 밥그릇을 들고 먹게 된 이유는?
- 밥그릇은 있음 (← 조몬토기)
- 三韓에서 쌀이 들어와 퍼짐 (← 야요이 시대)
- 밥은 지었지만 이걸 어떻게 먹을까?
- 결국 밥그릇을 들고 손가락 두개로 먹음
동시에 유·불교도 대중화 됩니다.
<유교의 대중화>
충효, 예의범절의 대중 인식 시작
<불교의 대중화>
백제 불교 + 조몬 신토 = 일본식 불교
그래서 이들을 神이라고 칭송해 마지않는 조몬인들.
왓쇼이! 왓쇼이!
(이들이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본문에 나옴)
당시 빠르게 혼혈화가 진행됐을 걸로 보입니다.
그리고 굳이 신분을 구별하자면 이렇습니다.
- 미마나인 + 야마토인 = 일본의 新귀족 (← 훗날 신찬성씨록을 만든 이유)
- 미마나인 + 조몬인 = 일본의 중산층(?)
- 조몬인 = 기존 대다수 야마토의 서민들 (
서민 = 노비)
이때가 아스카 중기에서 후기로 추정됩니다.
즉 백제 멸망 후 대규모의 백제유민이 야마토로 이주한 무렵(662~663년)부터 아스카 시대 말(710년)까지.
일본의 건국 시대이자 일본 역사의 꽃 = 아스카 시대
(역사의 꽃 = 모두가 행복했던 시대, 즉 황금기)
조몬 → 야요이 → 고훈 → 아스카 → 나라 → 헤이안 → 가마쿠라
참고로 헤이안 시대 - 당시 지구에서 제일 낙원이었던 시대 = 지상낙원(地上樂園)
· 여성 - 겐지모노가타리가 이 시대의 소설로 여성문학가들이 많이 배출
이들이 글을 알고 문학활동을 했다는 건 여성의 지위와 자유를 그만큼 보장했다는 뜻임
· 남성 - 요바이가 이 시대의 결혼풍습으로, 실은 남성 미마나인과의 결혼을 위한 풍습임 (남성이 여성을 선택)
미마나인과의 결합을 위해 혼음도 행해짐, 누구의 자식인가는 따지지 않음 (요바이 - 나무위키)
요바이가 미마나인과의 결합을 위한 풍습임을 모르면 요바이 자체를 이해할 수 없음
→ 남성 미마나인 = 지체 높고 돈 많은 남성이면 더없이 좋은..
<아스카 시대 - 나무위키>
아스카 시대(飛鳥時代あすかじだい)는 일본의 시대 구분 중 하나이다. 기간은 아스카쿄가 세워진 592년(양력 593년)부터 헤이조쿄(나라) 천도인 710년까지이다.
내용 끝.
그러니까 백제 유민들은 언젠가는 다시 본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을 것이다.
이는 이북의 실향민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열도 조몬인들과 마을을 조성하며 하천의 물을 끌어들여 도랑을 치니 그곳에 자연스럽게 물고기들이 들어와 산다.
이들은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이곳 섬은 잠시 있다 가는 곳이라는 생각에 자연과 생물을 훼손치 않았던 것이다.
이는 당시 불교가 들어와 살생을 금지하는 불법과도 맞물린다.
백제 유민 = 불교도
이런 백제 유민들의 희망이, 근대화 이전까지도 마을 도랑 곳곳에 물고기들이 생존했던 역사적인, 피눈물 나는 이유인 거다!
끝으로 당시 그들을 열렬히 반기며 적극 도와주고, 그들과 피를 섞기를 마다치 않았던 열도 조몬인들에게 경외의 박수를 보낸다.

열도 조몬인의 상징, 포비
'백제, 신라, 가야, 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사상 최초로 밝히는 백제인 후손 30만 大학살 (0) | 2026.06.13 |
|---|---|
| 고이대왕 9(GO! 고이 GO!) (1) | 2026.06.07 |
| 고이대왕 8(사상 최초로 밝히는 웅·완·무주) (0) | 2026.05.25 |
| 사상 최초로 밝히는 한반도 중·남부 원주민의 실체 (2) | 2026.04.26 |
| 가즈아! 백제삼서 찾으러! (호버 카에서 타임머신까지) (0) | 2026.03.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