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대왕 9(GO! 고이 GO!)

2026. 6. 7. 02:14백제, 신라, 가야, 왜

 

 
고이대왕(재위 234 ~ 286년)
 
고이가 구수대왕의 뒤를 이어 辰왕이 되었습니다.
이때 新彌多離를 위시한 남방은 고이의 명을 잘 따랐을까요?
 
담로제의 특성상 역성군주가 되면 한번 본때를 보여줘야 비로소 대왕의 명을 듣습니다.
본래 우씨가 창업했음에도 힘이 전부인 시대인 겁니다.(우씨 = 비류 → 고이)
 
고대 = 약육강식 + 적자생존 + 섹x와 폭력이 난무 + 야만적인 시대

초고대왕이 한바탕 휘몰았던 것처럼 고이 역시 대군을 이끌고 힘을 과시해야 합니다.(초고대왕 1)
이에 고이대왕은 240년에 사로국을 공격합니다.
 
<고이>
7년(서기 240), 병사를 보내 신라를 침범하였다.①
여름 4월, 진충(眞忠)을 좌장(左將)으로 삼아 중앙과 지방의 병마의 임무를 맡겼다.②
가을 7월, 석천(石川)에서 대대적으로 군대를 사열하였다.③ 기러기 한 쌍이 날아가는 것을 임금이 쏘아 모두 맞혔다.④
 
근데 진충한테 중앙과 지방의 병권을 맡겼다?
 
<온조>
28년(서기 10) 봄 2월, 맏아들 다루(多婁)를 태자로 삼고 중앙과 지방의 병무를 맡겼다.
 
온조는 태자한테 병권을 맡겼다지만, 고이와 진충의 관계는 대관절 뭣이길래 병권을 맡겼을까요?
혹시 진충이 남편이라면 얘기가 통합니다.
왜냐하면 眞씨는 辰(백제)의 성골이기에 그렇습니다.
 
眞 = 眞牟 = 성골(聖骨)
 
근데 여기서 예전부터 간과하고 있던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조선의 기준왕(箕準王)이 내려와 韓왕을 칭하고 韓을 창업했으면, 箕씨는 韓의 성골이 아닌가?
 
기(奇)씨 족보에 의하면 이 箕씨가 기(奇), 한, 선우씨가 되었다고 합니다.
 
<행주 기씨 - 나무위키>
《행주기씨보(幸州奇氏譜)》와 《청주한씨세보(淸州韓氏世譜》에 따르면 시조는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창건했던 상나라의 왕족 기자(箕子)의 48대손 기우성(奇友誠)이다. 고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마한(馬韓) 건마국의 초대 왕이었던 기자의 40대손 준왕(準王)의 후손인 기자의 47대손 마한 8대 원왕(元王) 훈(勳)에게는 아들로 우성(友誠), 우평(友平), 우량(友諒)의 3형제가 있었는데 우성은 백제로 가 행주 기씨(幸州 奇氏), 우평은 고구려로 가 태원 선우씨(太原 鮮于氏), 우량은 신라로 가 청주 한씨(淸州 韓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다만 족보가 대체로 그렇듯이 사료와의 교차검증은 부실하다.
 
사실 여부는 그렇다치고, 그럼 기존에 있던 오리지날 箕씨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거냐?
♣ 삼형제는 왜 성을 바꿔야 했던 건가? (← 나름 고대사의 미스터리임, 아래 해명함)
 
기(奇)씨는 고려 말까지 권세가 있었지만(기황후와 기씨 가문),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기씨는 원나라의 몰락과 함께 공민왕의 개혁파에 축출 당합니다.(← 기씨가 많이 없는 이유?)
 
그러다 한씨는 조선 초에 한명회라는 불세출의 인물이 나와 그 권세가 절정에 이르고, 한씨는 조선 초부터 왕비를 많이 배출한 가문입니다.(이성계의 정비이자 이방원의 어머니도 한씨)
이 한씨가 고려에서도 왕비를 배출한 가문이라면, 그야말로 이들이 한반도의 성골이란 얘기가 됩니다.(기씨 조선의 기씨 분가이기에)
 
여기서 정작 (성골이라는) 眞씨는 고려 이후로 보이지않으니, 이들은 모두 열도로 건너간 건가?
야마토의 대솔 가문이 천황가(天皇家)로 변신했으니 이들이 열도로 전부 건너갔나?
거기서 그들은 眞에서 진시황의 秦(하타씨)으로 변신한 건가?
 
근데 기씨, 한씨, 선우씨는 정작 삼국시대에 보이지않는 점도 이상합니다.
이들은 원래 韓의 성골이지만 眞씨가 韓을 이은 후 노예와 천민으로 전락,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복권된 건가?
반대로 眞씨는 노예와 천민으로 전락했겠지요.
 
최소한의 계층이 서민이고, 극단적으론 노예와 천민입니다.
하지만 고대에 서민은 곧 노예와 천민이고, 반대로 노예와 천민이 서민이라 볼 수 있습니다.
 
<진(성씨) - 5. 眞(참 진) - 나무위키>
삼국시대 백제(百濟)의 귀족층을 대표하는 대성팔족의 일원으로, 건국 초기부터 멸망 이후인 8세기 초까지의 기록에 등장한다. 진모씨(眞牟氏)라고도 한다. 일각에서는 신라 제31대 ①신문왕 때 대아찬을 지낸 진공(眞功), 상대등을 지낸 진복(眞福)과 연관짓기도 하나, 진골만이 오를 수 있는 관등을 지낸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들의 실제 성은 김씨(金氏)로 추정된다.
5.1. 서산 진씨(瑞山 眞氏)
②시조 및 본관의 유래, 세계 등을 알 수 없다. 1930년 조사 때도 개성 본관의 1가구만 존재했는데, 어떻게 다른 본관의 진씨가 존재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2000년도 인구조사 당시 서산 1,555명 등 전체 1,579명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15년 후인 2015년에는 오히려 45명까지 크게 감소하여 266위까지 격감했다.
 
을 보면 眞씨는 신문왕 때도 권세를 이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멸문지화를 당한 건지 역사에 보이지않습니다.
를 보면 삼국시대의 그 권세있던 眞씨들은 거의 없다 봐도 무방할 정도로 크게 감소합니다.
 
이건 무얼 말하느냐?
 ← 이것의 과정을 겪었다는 얘깁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피눈물 나는 한반도의 2천년 역사입니다.
 
기, 한, 선우씨 = 성골 → 노예, 천민 → 복권
眞씨 = 성골 → 노예, 천민 → 멸족
 
또한 비류·온조가 眞牟씨 韓을 이어 辰(백제)을 창업했으니 우씨와 해씨 역시 성골 아니면 진골입니다.
이들은 眞牟씨를 성골로 우대하고 대대로 중용한즉, 이는 眞牟씨 韓을 파괴치 않고 흡수·화합하여 자신들은 진골이 됐다는 뜻입니다.
 
이 전통은 구태가 비류·온조의 辰을 그대로 이어갑니다.(구태 = 초고)
그리고 고이 역시 이 전통을 따라 구씨 왕족은 보전됩니다.(이에 대한 건 글 마지막에 설명)
 
眞牟씨 韓 → 비류·온조의 辰 → 구태 辰
 
하지만 이상하게도 우씨와 해씨, 구씨는 삼국시대 이후로 보이지않으니 이것도 같은 과정을 겪었다는 거냐?
이를 표로 보면 이렇습니다.

기(箕)씨 韓 진모(眞牟)씨 韓 우·해(優·解)씨 辰 구(仇)씨 辰 우(優)씨 백제 부여씨 백제
기씨 사라짐
→ 노예, 천민?
진·♧모씨 사라짐
→ 노예, 천민?
♧우·해씨 사라짐
→ 노예, 천민?
♧구씨 사라짐
→ 노예, 천민?
♧우씨 사라짐
→ 노예, 천민?
♧여씨 사라짐
→ 노예, 천민?

 
♧ 현재의 성들은 한자가 다르거나, 중국에서 온 성이거나, 이 왕족에서 나온 성들이 아님.
 
위 행주 기씨 족보에 의하면, 기(箕)씨가 나라가 망해 멸문지화를 당할 때, 삼형제는 각지로 달아나 서민으로 살다 고려 때 복권된 경우라 보면 얘기가 통합니다.
기, 한, 선우씨 = 성골 → 서민(노예, 천민) → 복권
 
우린 고려 王씨의 운명을 압니다.
즉 고려 왕씨를 보아도 이건 명백한 진실로 보여집니다.
金신라에 의해 전 왕조의 왕족들이 멸족된 걸까요?
 
<사상 최초로 밝히는 정리>
이 사라진 왕족들의 공통점: 한반도 중·남부에서 토착민에 동화된 고대 일어 사용자로, 예맥(고대 한어 사용자)에 의해 ♠멸족됨
멸족 = 노예·천민화
 
다시 돌아와, 근데 공격한 날짜가 없습니다.

<조분>
11년(서기 240), 백제가 서쪽 변경에 침입하였다.⑤

편년체 역사서에 날짜가 없다?
이는 뭔가 중요한 걸 숨기거나, 없던 사실을 날조했기에 날짜가 없다고 봐야 합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신라본기에 기록은 있지만 날짜는 없는 걸로 보아, 뭔가를 숨기고 짧게 기록한 겁니다.

아마 이때 대군을 휘몰아 대대적으로 사로국을 공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지만 기록에는 달랑 이렇게만 나옵니다.
병사를 보내 신라를 침범하였다.

항상 그렇듯 침범했다고만 나오고 어떻게, 왜 침범했는지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즉 고이 7~8년, 조분 11~12년 기록이 사람 손에 의해 삭제된 겁니다.

공격 이유: 아무 이유없이 심심해서?
 
보면 240년 7월에 공격해서 그 다음 해까지 전쟁한 걸로 보이고, 백제가 대승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만약 반대로 사로국이 대승하면 삭제되지 않고 날짜와 함께 나올 겁니다.
왜냐하면 전 글에서 언급했듯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근데 그 전년도인 239년 역시 삭제되어 기록이 없습니다.
이는 당시 뭔가 정치적인 문제 (고이의 심기를 거슬렸기에?) 때문에 240년에 사로국을 공격한 걸로 봐야 합니다.
당장 생각할 수 있는건 다음과 같습니다.
 
사로국에서 조공을 안 받친 걸까요?
혹은 쿠데타 세력을 다스릴려고?
아님 고이의 어떤 명을 안 들었나?
설마 고이가 보낸 사신을 죽였나?
 
이때의 사로국 임금은 조분으로, 내해부터 흘해까지 미스터리한 점이 참 많습니다.
내해 → 조분 → 첨해 → 미추 →유례 → 기림 → 흘해
전 글 벌휴는 손자에게 살해되었다 참고.
 
북방은 238년, 공손씨의 대방군을 공략해 당분간 안정화 시켰습니다.(고이대왕 5)
그래서 240년, 여력이 있기에 사로국을 공격한 걸로 보입니다.
 
지금까지 진행한 결과에 따르면 아래 지도와 같습니다.

원본 지도 출처: 구글 맵

 
이때 사로국을 공격하면서 따로 일군을 보내 新彌多離까지 진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백제가 사로국을 공격한 방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백제가 서쪽 변경에 침입하였다.⑤
 
이를 다시 지도로 보면 이렇습니다. ↓

원본 지도 출처: 구글 맵

 
즉 고이도 온조의 백년대계를 따르고 있는 겁니다.(온조대왕 2)

고이는 도성을 지키고, 진충에게 내외병마사의 일을 맡겨 사로국을 공격했을까요?
진충(眞忠)을 좌장(左將)으로 삼아 중앙과 지방의 병마의 임무를 맡겼다.②
 
<북부 본군 편성>
1군 대장 - 진충 2000명 + 철기 500기
2군 대장 - 진물 2000명 + 철기 500기
3군 대장 - 우두 2000명 + 철기 500기
4군 대장 - 곤노 2000명 + 철기 500기
5군 대장 - 유기 2000명 + 철기 500기
 
이 2천의 군사는 초등학생들이 운동장에 전원 집합했을 때를 생각하면 됩니다.
각 반을 50명으로 잡으면, 
1학년 1반에서 7반 = 350명
2학년 1반에서 7반 = 350명
3학년 1반에서 7반 = 350명
4학년 1반에서 7반 = 350명
5학년 1반에서 7반 = 350명
6학년 1반에서 7반 = 350명
그래서 총 2100명입니다.
 
이는 아래 그림을 보면 대충 감이 오실 겁니다.

1군 대열

 
1군의 보병이 2천명이니 전군의 대열을 보려면, 위 그림의 병력 x 5 하면 됩니다.
거기에 각군 500기의 철기는 덤입니다.(총 2천5백기)
 
4년 동안 백제 기마대를 업그레이드해서 철기 500기를 더 확보했습니다.(고이대왕 5에 이어)
이 철기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

출처: 일본 속의 아라가야를 찾아서(4)일본의 아라가야 철기 < 전통문화 < 문화 < 기사본문 - 경남도민일보

여기서 판갑이니 찰갑이니 따지지 않기 1

 
출정 전에 먼저 군대를 사열합니다.
가을 7월, 석천(石川)에서 대대적으로 군대를 사열하였다.③

이 석천은 어디냐?

<삼국사기 제37권 잡지 제6 미상 및 기타>
주양성(走壤城) 석두성(石頭城) 고목성(高木城) 원산성(圓山城) 금현성(錦峴城) 대두산성(大豆山城) 우곡성(牛谷城) 횡악(橫岳) 견아성(犬牙城) 적현성(赤峴城) 사도성(沙道城) 덕안성(德安城) 한천(寒泉) 부산(釜山) 석천(石川) 구원(狗原) 팔압성(八押城) 관미성(關彌城) 석현성(石峴城) 쌍현성(雙峴城) 사구성(沙口城) 두곡(斗谷) 이산성(耳山城) 우명곡(牛鳴谷) 사정성(沙井城) 마포촌(馬浦村) 장령성(長嶺城) 가불성(加弗城) 위천(葦川) 호산(狐山) 혈성(穴城) 독산성(獨山城) 금현성(金峴城) 각산성(角山城) 송산성(松山城) 적암성(赤嵒城) 생초원(生草原) 마천성(馬川城) 침현(沈峴) 진도성(眞都城) 고울부(高鬱府) 갈령(葛嶺) 지라성(支羅城)[주류성(周留城)이라고도 한다.] 대산책(大山柵) 욱리하(郁里河) 숭산(崇山) 장토야(張吐野) 절영산(絶影山) 청진(淸津) 유봉도(遺鳳島) 대거(大阹) 견롱(汧隴) 부서도(鳧栖島) 봉택(鳳澤) 용구(龍丘) 연성원(連城原) 부운도(浮雲島) 천마산(天馬山) 해빈도(海濱島) 학중도(壑中島) 옥새(玉塞) 연봉(連峯) 총림(叢林) 승천도(升天島) 승황도(乘黃島) 팔준산(八駿山) 절군산(絶群山) 구린도(求麟島) 부도도(負圖島) 토경산(吐景山) 하정도(河精島) 유기산(遊氣山) 평원(平原) 대택(大澤) 기린택(騏驎澤) 섭경산(躡景山) 금혈(金穴) 난지(蘭池) 서극산(西極山) 포양구(浦陽丘) 철가산(鐵伽山) 도림(桃林) 석력산(石礫山) 서린원(瑞驎苑) 녹원(麓苑) 사원(沙苑) 풍달군(風達郡) 왈상군(曰上郡)

신라가 삼한일통한 후에 9주5소경을 설치합니다.
이때 지명 미상인 곳들을 한데 모아 기록해 뒀는데, 그중 하나가 석천입니다.
(지명 미상 = 어디인지 모름)

당시에도 위의 눈에 익은 여러 곳들이 지명 미상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백제의 역사서가 소실되었기 때문이겠죠.
(백제의 역사서 = 백제삼서 = 백제기 + 백제본기 + 백제신찬)

훗날 백제삼서는 물 건너 일본으로 갑니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서기가 편찬된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일본서기 편찬 후, 백제삼서는 폐기 처리됐다고 봅니다.
 
또한 이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서가 폐기 처리된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 백제삼서에 지도가 포함된 백제의 상세한 행정구역이 있었을 걸로 보이나, 이것이 없기 때문에 신라 조정은 지명 미상 처리한 겁니다.

다시 돌아와, 그래서 석천은 어디냐?

부산(釜山) 석천(石川) 구원(狗原)

부산과 구원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초반부에 보이는 지명으로, 백제의 초기 영역, 즉 경기도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전 글에서 부산은 경기도 화성이라고 했습니다.(고이대왕 4)
그럼 석천(石川)은 돌이 많은 강이라는 지명에 따라 유추해 보면, 서울 강남에 유명한 곳이 있습니다.

바로 송파구 석촌동 일대입니다.(석촌동 백제 고분군 근처)

원본 지도 출처: 구글 맵

고이의 시대는 하북 한성이 도성임
근초고왕 때 하남 한성으로 옮김

 
한강에서 남쪽으로 길게 뻗은 하천의 이름이 탄천입니다.
여기가 석천일 가능성이 큽니다.
탄천 = 석천
 
탄천을 기준으로 우측은 백제의 고분군이기에 좌측에서 군대를 사열했을 겁니다.
이는 온조가 군사들의 훈련장으로 쓰던 곳과 일치할 가능성이 큽니다.
 
<탄천 - 나무위키>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위례성으로 도읍을 정한 이후, 백제 군사들의 훈련장으로 쓰던 곳에서 군사들의 배식을 위해 연료로 숯을 많이 만들었고, 훗날 군사들에게 줄 냇물의 정수를 위해 숯을 물에 남겨두고 가서 물 색깔이 숯 색깔로 검게 변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또한 韓왕이 비류와 사냥을 하고 최후를 맞이한 곳으로도 추정됩니다.(온조대왕 2)

원본 지도 출처: 구글 맵

강남 일대는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석천은 피로 물들어 血川이 됐을까?

 
여기서 군대를 사열한 고이는 날아가는 기러기 한 쌍을 모두 맞힙니다.
가을 7월, 석천(石川)에서 대대적으로 군대를 사열하였다.③ 기러기 한 쌍이 날아가는 것을 임금이 쏘아 모두 맞혔다.④

4년 전, 사슴 40마리 쏘아 맞힌 명궁에서 이젠 날아가는 기러기를 맞히는 신궁이 된 겁니다.(名弓 → 神弓)
그것도 1만여의 군사가 지켜보는 사열장에서 쌍화살을 날려 날아가는 기러기 두 마리를 맞힌 겁니다.
 
↓ 이렇게 쌍화살을 장전 후..

원본 사진 출처: ㅎH적 킴남로드님 활쏘는거 이런 느낌 ❘ 네이트 판

 
마침 날아가는 기러기를 향해 쌍화살을 날립니다.

원본 사진 출처: 기러기 - 나무위키

쌍명중이요!

 
이때 자신감이 넘친 고이는 하늘을 향해 펀치를 날립니다.
고이: 다 나와~~!!

원본 사진 출처: 주먹을 쥔 채 하늘 앞으로 치켜들었다. 스톡 사진 2675082625 ❘ Shutterstock

 
1만 군사: ..................................
 
그녀는 고대 일어를 쓰는 군사들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다시 펀치를 날리며)
고이: みんな出てこい!!! (민나 데떼 코이!!!)
 
이에 1만 군의 함성이 강남에 울려퍼집니다.
1만 군사에이 에이, 오~~~!!!
 
연이어 군사들은 누구랄거 없이 고이를 연발합니다.(0.5초 간격으로)
고이! 고이! 고이! 고이! 고이! 고이! 고이! 고이!
 
이 1만 군이 동시에 연발하니 한강 건너 강북에서는 이렇게 들립니다.
GO! 고이! GO! 고이! GO! 고이! GO! 고이! GO!
 
고이의 쌍화살 연출과 그것이 기러기를 명중해 군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릅니다.
 
당시 한중일 통틀어 동북아에서 제일 매력녀인 고이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고이가 234년 재위에 오를 때의 나이는 25세 전후로 추정됩니다.(고이대왕 5)
여기에 ±5년은 물론입니다.
 
화살을 그렇게 쏠 정도면 다져진(날씬한) 몸매에 20대 초반으로 봄이 타당합니다.
그럼 계산하기 좋게 20세로 잡으면,
234 - 20 = 214년생이고,
286 - 214 = 72세에 죽습니다.
 
그럼 240년 군사들의 사열을 받을 때의 나이는 26세입니다.
 
20대 중반의 고이는 여성이라 특히 백마를 탔을 겁니다.
혹 비류가 타던 말의 혈통일까요?
이 백마는 辰의 대왕이 타는 명마이기에 말의 이름이 있음은 물론입니다.

원본 사진 출처: 동물 백마 사진 및 무료 다운로드를 위한 그림 - Pngtree

고이의 애마 = 信長

 
이 애마를 타고 금동 오라관을 쓴 20대 중반의 고이는, 화살을 쏜 걸로 보아 갑옷까지 입은 채였습니다.
금동 오라관은 전 글을 참고.(백제대왕, 금동관을 하사하다)
아마 화려한 철갑옷을 입지 않았을까 추정해 봅니다.

사진 출처: 2059-태후갑옷 대여 ❘ 삼국시대 갑옷·병사 의상 · 전투 캐릭터 · 사극촬영 · 행사 렌탈 ❘ 각시탈 의상대여

여기서 판갑이니 찰갑이니 따지지 않기 2

 
화려한 철갑옷을 입고 백마를 탄 고이.
그녀의 퍼포먼스는 이게 끝일까요?
 
이때 고이는 큰 돌에 박혀있던 칼을 뽑아 하늘 높이 치켜 세웁니다.
바로 엑스칼리버 칠지도입니다.

원본 사진 출처: 한일도검 - 신모델 판타지 검 - 칠지도(七枝刀) : 롯데ON

칼날에 햇빛이 반사되는 칠지도

 
칼 손잡이는 이걸로 봐주시고.. ↓

사진 출처: 한반도 태고의 검 ❘ 텀블벅 - 크리에이터를 위한 크라우드펀딩 (출처. 국립김해박물관)

용봉문 환두대도

↑ 백제 대왕의 종합선물셋트에서 빠질 수 없죠.(백제대왕, 금동관을 하사하다)
 
둘이 결합하면 이런 모양새가 됩니다. ↓

원본 사진 출처: 칠지도·환두대도 옛모습 그대로 복원 ❘ 세계일보

 
천하에 둘도 없는 보검이자 명검입니다.(백제에서만 만들 수 있음)
총 길이 약 80 cm로 보면 됩니다.
 
여기에 명문(銘文)이 없으면 칠지도가 아니지요.
앞면은 이렇게 금상감(金象嵌)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19자)
 
진왕은 천하의 대왕으로, 북은 말갈을 정벌하고 남은 *하이를 복종시키니 싸워서 반드시 이겼다
辰王天下之大王, 北伐靺鞨, 南從蝦夷, 戰而必勝
 
*하이(蝦夷) = 에조

원본 사진 출처: 칠지도·환두대도 옛모습 그대로 복원 ❘ 세계일보

 
뒷면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습니다.(19자)
 
왕을 거역하면, 천지신명의 분노로 머리를 잃고 사지가 절단되리라
若或逆王, 以天地神明之怒, 將頭失而, 四肢切斷

원본 사진 출처: 칠지도·환두대도 옛모습 그대로 복원 ❘ 세계일보

 
그래서 혁거세의 머리와 사지가 절단되었던 걸까요? (眞혁거세)
 
이 칼은 辰(백제)의 대왕이 대대로 물려주는 大王 칠지도이고, 훗날 열도 조몬을 마저 정벌할 때 한자루 더 만듭니다.
그게 현재 일본에 모셔져 있는 大君 칠지도입니다.
열도 조몬 = 에조(蝦夷) = 에미시(毛人)
 
<大君 칠지도>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왕은 대대로 혈통이 고귀하니 왜왕이다. 뜻을 받들어 후세에 이를 전하라
先世以來未有此刀, 百濟王世世奇生聖音, 故爲倭王, 旨造, 傳之後世
 
기생성음(奇生聖音) = 기이한 출생, 성스러운 음성 = 고귀한 혈통

원본 사진 출처: 칠지도·환두대도 옛모습 그대로 복원 ❘ 세계일보

참고: 앞면은 오탈자가 많아 생략함

 
백제 대왕이 왜왕이란 건 바로 이걸 뜻합니다. ↓

원본 지도 출처: 구글 맵

백제의 10라

 
즉 백제 대왕이 열도까지 다스릴 수 없으니 大君을 보낸 겁니다.(대군 = 왕자)
大君 칠지도는 그 증표인 거죠.
 
다시 돌아와, 고이는 이 칠지도를 높이 들고 1만여 군을 사열합니다. ↓
모두가 정예군임은 물론입니다.

 
칠지도를 들고 한바퀴 달려줍니다.
햇빛을 반사시켜 군사들을 눈부시게 한 건 덤입니다.
 
고이! 고이! 고이! 고이! 고이! 고이! 고이! 고이!
 
참고로 고이는 일어로 こい, 오라는 뜻입니다.(동사 '오다(来る·쿠루)'의 명령형으로, "와라!" 또는 "이리 와!"라는 뜻)
근데 정작 고이는 곱다의 파생어인 한어로, 한국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이름인 겁니다.
 
고이는 군사들의 함성소리를 출정에 오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걸까요?
 
고이: 요시! 나도 출정하겠다! 가즈아!
군사들: 에이 에이, 오~~~!!!
GO! 고이! GO! 고이! GO! 고이! GO! 고이! GO!
 
이렇게 해서 고이대왕도 남방 정벌에 출정하게 됩니다.
 
이때 고이가 20대 중반이니 책계를 임신한 상태였을까요?
 
책계(재위 286 ~ 298년)
 
위에 나이를 역산한 바, 고이가 214년생이니 26세인 240년에 임신, 241년에 출산했다고 하면, 책계는 241년생으로 재위에 오른 286년은 45세입니다.(향년 57세)
고이가 70대 초중반까지 살고, 그 아들인 책계가 늦은 나이에 재위에 오른 걸까요?
 
만약 고이가 30세에 출산했다면, 책계는 244년생으로 재위에 오를 때 나이는 보다 이른 42세입니다.(향년 54세)
어찌 됐거나 고이가 70대 초중반까지 살고, 그 아들인 책계가 늦은 나이에 재위에 오른 겁니다.
 
근데 책계가 고이의 아들이 아닐 수 있습니다.
 
<책계>
책계왕(責稽王)[혹은 청계(靑稽)라고도 한다.]은 고이왕(古尒王)의 아들이다. 키가 크고 뜻과 기개가 웅대했다. 고이왕이 돌아가시자 왕위에 올랐다.
責稽王[或云 靑稽] 古尒王子 身長大 志氣雄傑 古尒薨 卽位
 
하지만 책계는 재위에 오르자 시조인 비류의 묘에 참배합니다.
참고로 비류는 동명, 주몽은 동명(성)왕이라 밝혔습니다.(온조대왕 2)
 
2년(서기 287) 봄 정월, 동명왕의 사당 동명 묘에 참배하였다.
二年 春正月 謁東明廟
 
일본측 사료에 보이는 도모왕은 동명(성)왕 주몽 혹은 동명 비류, 둘 중 하나가 되겠습니다.
 
<도모왕 - 구글 AI>
도모왕(都慕王)은 주로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와 《속일본기(續日本記)》 등에 등장하는 백제의 시조를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하지만 백제의 시조를 가리키는 것이니 온조의 후손은 동명(성)왕 주몽을, 비류의 후손은 동명 비류를 각각 말하는 거겠죠.
즉 이렇게 정리가 됩니다.
 
<비류의 후손이 말하는 백제의 시조>
1대 동명 비류 = 우씨, 우태의 아들, 실질적인 辰(백제)의 창업자, 즉 시조
2대 온조 = 해씨, 주몽의 아들, 비류의 同母 동생, 비류가 죽자 뒤를 이음
 
<온조의 후손이 말하는 백제의 시조>
1대 동명(성)왕 주몽 = 해씨, 해씨 후손들이 시조로 추존.
2대 동명 비류 = 우씨, 우태의 아들, 실질적인 辰(백제)의 창업자, 즉 시조
3대 온조 = 해씨, 주몽의 아들, 비류의 同母 동생, 비류가 죽자 뒤를 이음
 
이에 대한 건 전 글을 참고하세요.(온조대왕 2)
각 후손들은, 자신의 선조가 진짜 시조라고 주장한 결과가 당시와 오늘날 혼동을 일으킨 겁니다.
즉 비류와 온조가 同父형제였다면 이같은 일은 없었겠죠.
 
근데 이게 왜 이렇게 된 거냐?
당시 일본 조정에서 온조의 후손은 온조가 1대라고 첨엔 그랬다가, 비류의 후손이 비류가 원래 1대라고 하니까 안되겠다 싶어 주몽이 1대라고 말을 바꾼 겁니다.(완전 애들 장난)
 
다시 돌아와, 근데 책계의 다음 임금인 분서는 이렇게 나옵니다.
 
<분서>
분서왕(汾西王)은 책계왕(責稽王)의 맏아들이다.
汾西王 責稽王長子
 
2년(서기 299) 봄 정월, 동명왕의 사당 동명 묘에 참배하였다.
二年 春正月 謁東明廟
 
즉 책계와 그 장자인 분서는 확실히 비류(동명)의 후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분서의 다음 임금인 비류(比流)는 비류의 후손이 아닌 구수의 후손으로 나옵니다.
 
<비류(比流)>
비류왕(比流王)은 구수왕(仇首王)의 둘째 아들이다.
比流王 仇首王第二子
 
여기서 구수와 비류는 나이가 맞지않으니 둘째 아들이 아닌 후손으로 봐야 합니다.
第二子 = 후손
 
상식적으로 계산해도 이건 답이 나옵니다.

구수 → 고이 → 책계  분서 → 비류
214년 ~ 234년 234년 ~ 286년 286년 ~ 298년 298년 ~ 304년 304년 ~ 344년

 
304 - 234 = 70년
 
과연 70년 후에 둘째 아들이 재위에 오르고, 40년 후에 죽었을까요?
사반이 어려 고이가 재위에 올랐다고 한 걸로 계산하면 이렇습니다. ↓
 
234년, 사반의 동생 비류의 나이가 1세라고 하면, 
1 + 70 = 71세에 재위에 올랐고, 71 + 40 = 111세에 죽은게 됩니다.
1세보다 더 많으면 나이가 더 많아지고, 111세가 훌쩍 넘습니다.
 
그렇기에 비류는 구수의 둘째 아들이 아닌 겁니다.
 
다시 돌아와, 그럼 고이는 비류의 후손, 책계와 분서도 비류의 후손입니다.
즉 고이, 책계와의 관계는, 아들(子)이라고만 나오니 이렇다 할 수 있습니다. ↓
서자 아니면 양자입니다.
 
근데 고이는 여성으로, 책계가 고이의 서자일 수 없으니 양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책계 = 고이의 양자?
 
즉 고이가 불임이거나 남편(진충?)이 무정자증일 수 있다 하겠습니다.
혹 고이가 불임인데 남편이 진충이라면, 책계는 진충의 친자입니다.
그럼 책계는 성이 眞씨이고, 母王인 고이를 이어 비류(동명)의 묘에 참배한 거라 하면 얘기가 통합니다.
고이 = 책계의 양어머니?

성이 眞씨인 책계와 그 장자인 분서까지 이어지다, 구수의 후손이 대를 이은 것이 비류왕이라 하겠습니다.
혹은 어머니 고이의 성(우씨)을 따른 것이라 해도 왕통에 별 문제는 없습니다.
 
<분서>
7년(서기 304) 겨울 10월, 임금이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분서는 재위 7년에 죽어 자식이 없던 걸까요?
그래서 구수의 후손이 추대받아 백제 대왕을 이은 걸까요?
 
아니나 다를까 삼국사기에 이렇게 나옵니다.
 
<비류(比流)>
 분서왕(汾西王)이 죽고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 어렸기에 임금으로 세울 수 없어서 신하와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이건 고이가 재위에 오를 때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고이>
구수왕(仇首王)이 재위 21년에 죽고 맏아들 사반(沙伴)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나이가 어려 정사를 돌보지 못하므로, 초고왕(肖古王)의 친동생인 고이가 왕위에 올랐다.
 
그렇다면 이건 역성쿠데타가 아니고 진씨, 우씨, 해씨, 구씨는 혼인을 통해 모두 혈연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럼 구수대왕이 죽고 고이가 추대받아 이은 것이니 정치적 반발은 크게 없으리라 봅니다.
 
다시 돌아와, 남부에서도 북부의 병력만큼 징집해 최소 2만5천 대군은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북부 본군>
1군 대장 - 진충 2000명 + 철기 500기
2군 대장 - 진물 2000명 + 철기 500기
3군 대장 - 우두 2000명 + 철기 500기
4군 대장 - 곤노 2000명 + 철기 500기
5군 대장 - 유기 2000명 + 철기 500기
합 1만2천5백명
 
<남부 원군>
1만2천5백명
 
총 2만5천 대군입니다.
 
240년에 辰의 병력이 그것밖에 없었냐?
나머지 북부 병력은 혹시 모를 조위의 군현과 고구려를 대비해 남겨뒀습니다.(고이대왕 5, 대방군을 공략하다)
든든한 고이의 삼촌 우질이 도성을 지키고 있는 한 염려없습니다.
 
<고이>
9년(서기 242) 여름 4월, 임금의 숙부 질(質)을 우보로 삼았다. 질의 성품이 충성하고 굳세었으며, 일을 계획하는데 실수가 없었다.

우질: 군막 안에서 계책을 세워 천리 밖의 일을 결정짓는다.
 
또한 고이는 대방국과 군사동맹을 맺습니다.
 
<책계>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쳐서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대방왕의 딸 보과(寶菓)를 부인으로 삼았기에, 임금이 이르기를 “대방은 장인의 나라이니 그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드디어 병사를 내어 구원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그후 책계와 보과를 혼인시키기에 이릅니다.(→ 혼인동맹)
 
그렇게 해서 하북 한성에 2천, 하남 한성에 2천, 위례성에 1천 수비 병력이면 문제 없을 겁니다.
 
참고로 위례성은 목책으로 만든 목조성이었는데, 온조 비류 17년에 낙랑에 의해 불에 탑니다.
 
<온조 비류>
17년(기원전 2) 봄, 낙랑이 침범해서 위례성에 불을 질렀다.
 
그후 온조는 목조 위례성을 석조성으로 변신시킵니다.(온조대왕 2)
 
<온조>
41년 2월, 한수 동북쪽의 여러 부락에서 15세 이상 된 자를 징발하여 위례성을 수리하였다.
 
이 석조 위례성을 다시 책계가 업그레이드 합니다.
 
<책계>
임금이 장정을 징발하여 위례성을 수리하였다.
 
참고로 100리는 약 39 km 입니다.
이 반경은 철원군을 포함하고 연천 삼곶리 백제 돌무지무덤까지 아우릅니다. ↓

원본 지도 출처: 구글 맵

 
좌측으론 (동맹) 대방국, 우측으론 험한 산세로 가로막혀 위례성이 남북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보입니다.
즉 군사적 요충지이고, 이곳이 뚫리면 바로 도성임은 물론입니다.
그래서 韓왕이 비류를 보내 말갈로부터 지키게 한 것이고, 온조에서 책계까지 약 250년에 걸쳐 철처히 지킨 겁니다.
 
고구려 동천왕 239~241년까지 기록이 없는 걸 보아, 이때 고구려는 중국 군현을 상대로 많이 바쁩니다.
중국 군현 = 조위의 군현
즉 삼국사기는 고구려와 중국 군현 간의 전쟁 기록도 삭제한 걸로 보입니다.

이는 고이가 북방을 한시름 놓고 남방에 신경 쓸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이제 남방을 출정하게 됩니다.
출정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