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6. 13. 13:33ㆍ백제, 신라, 가야, 왜

(feat. 록키1 엔딩곡)
전 글의 앞부분에서 백제 왕족의 행방에 대한 글을 쓰고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
<사상 최초로 밝히는 정리>
이 사라진 왕족들의 공통점: 한반도 중·남부에서 토착민에 동화된 고대 일어 사용자로, 예맥(고대 한어 사용자)에 의해 ♠멸족됨
♠멸족 = 노예·천민화
추가한 것도 있고 해서 못 보신 분들을 위해 그 내용을 이곳에 옮기고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근데 여기서 예전부터 간과하고 있던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조선의 기준왕(箕準王)이 내려와 韓왕을 칭하고 韓을 창업했으면, 箕씨는 韓의 성골이 아닌가?
기(奇)씨 족보에 의하면 이 箕씨가 기(奇), 한, 선우씨가 되었다고 합니다.
<행주 기씨 - 나무위키>
《행주기씨보(幸州奇氏譜)》와 《청주한씨세보(淸州韓氏世譜》에 따르면 시조는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창건했던 상나라의 왕족 기자(箕子)의 48대손 기우성(奇友誠)이다. 고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마한(馬韓) 건마국의 초대 왕이었던 기자의 40대손 준왕(準王)의 후손인 기자의 47대손 마한 8대 원왕(元王) 훈(勳)에게는 아들로 우성(友誠), 우평(友平), 우량(友諒)의 3형제가 있었는데 우성은 백제로 가 행주 기씨(幸州 奇氏), 우평은 고구려로 가 태원 선우씨(太原 鮮于氏), 우량은 신라로 가 청주 한씨(淸州 韓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다만 족보가 대체로 그렇듯이 사료와의 교차검증은 부실하다.
사실 여부는 그렇다치고, 그럼 기존에 있던 오리지날 箕씨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거냐?
♣삼형제는 왜 성을 바꿔야 했던 건가? (← 나름 고대사의 미스터리임, 아래 해명함)
기(奇)씨는 고려 말까지 권세가 있었지만(기황후와 기씨 가문),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기씨는 원나라의 몰락과 함께 공민왕의 개혁파에 축출 당합니다.(← 기씨가 많이 없는 이유?)
그러다 한씨는 조선 초에 한명회라는 불세출의 인물이 나와 그 권세가 절정에 이르고, 한씨는 조선 초부터 왕비를 많이 배출한 가문입니다.(이성계의 정비이자 이방원의 어머니도 한씨, 왕륭의 부인이자 왕건의 어머니도 한씨)
<태조(고려) - 위키백과>
송악(松嶽)의 호족 왕륭과 그 부인 한씨 사이에서 877년에 태어났으며, 896년에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 그의 장수가 되었다.
이 한씨가 고려에서도 왕비를 배출한 가문이라면, 그야말로 이들이 한반도의 성골이란 얘기가 됩니다.(기씨 조선의 기씨 분가이기에)
여기서 정작 (성골이라는) 眞씨는 고려 이후로 보이지않으니, 이들은 모두 열도로 건너간 건가?
야마토의 대솔 가문이 천황가(天皇家)로 변신했으니 이들이 열도로 전부 건너갔나?
거기서 그들은 眞에서 진시황의 秦(하타씨)으로 변신한 건가?
근데 기씨, 한씨, 선우씨는 정작 삼국시대에 보이지않는 점도 이상합니다.
♨이들은 원래 韓의 성골이지만 眞씨가 韓을 이은 후 노예와 천민으로 전락,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복권된 건가?
(그럼 왕건의 어머니가 한씨이니 왕건은 서출이든가 왕건에 의해 복권된 걸로 보임)
반대로 眞씨는 노예와 천민으로 전락했겠지요.
모두가 알다시피 하위의 계층이 서민이고, 최하위는 노예와 천민입니다.
하지만 고대에 서민은 곧 노예와 천민이고, 반대로 노예와 천민이 서민이라 볼 수 있습니다.
즉 고대에 서민이란게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진(성씨) - 5. 眞(참 진) - 나무위키>
삼국시대 백제(百濟)의 귀족층을 대표하는 대성팔족의 일원으로, 건국 초기부터 멸망 이후인 8세기 초까지의 기록에 등장한다. 진모씨(眞牟氏)라고도 한다. 일각에서는 신라 제31대 ①신문왕 때 대아찬을 지낸 진공(眞功), 상대등을 지낸 진복(眞福)과 연관짓기도 하나, 진골만이 오를 수 있는 관등을 지낸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들의 실제 성은 김씨(金氏)로 추정된다.
5.1. 서산 진씨(瑞山 眞氏)
②시조 및 본관의 유래, 세계 등을 알 수 없다. 1930년 조사 때도 개성 본관의 1가구만 존재했는데, 어떻게 다른 본관의 진씨가 존재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2000년도 인구조사 당시 서산 1,555명 등 전체 1,579명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15년 후인 2015년에는 오히려 45명까지 크게 감소하여 266위까지 격감했다.
①을 보면 眞씨는 신문왕 때도 권세를 이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멸문지화를 당한 건지 역사에 보이지않습니다.
②를 보면 삼국시대의 그 권세있던 眞씨들은 거의 없다 봐도 무방할 정도로 크게 감소합니다.
이건 무얼 말하느냐?
♨ ← 이것의 과정을 겪었다는 얘깁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피눈물 나는 한반도의 2천년 역사입니다.
기, 한, 선우씨 = 성골 → 노예, 천민 → 복권
眞씨 = 성골 → 노예, 천민 → 멸족
또한 비류·온조가 眞牟씨 韓을 이어 辰(백제)을 창업했으니 우씨와 해씨 역시 성골 아니면 진골입니다.
이들은 眞牟씨를 성골로 우대하고 대대로 중용한즉, 이는 眞牟씨 韓을 파괴치 않고 흡수·화합하여 자신들은 진골이 됐다는 뜻입니다.
이 전통은 구태가 비류·온조의 辰을 그대로 이어갑니다.(구태 = 초고)
그리고 고이 역시 이 전통을 따라 구씨 왕족은 보전됩니다.(이에 대한 건 글 마지막에 설명)
眞牟씨 韓 → 비류·온조의 辰 → 구태 辰
하지만 우씨와 해씨, 구씨는 삼국시대 이후로 보이지않으니 이것도 같은 과정을 겪었다는 거냐?
이를 표로 보면 이렇습니다.
| 기(箕)씨 韓 | 진모(眞牟)씨 韓 | 우·해(優·解)씨 辰 | 구(仇)씨 辰 | 부여씨 백제 |
| 기씨 사라짐 → 노예, 천민? |
진·♧모씨 사라짐 → 노예, 천민? |
♧우·해씨 사라짐 → 노예, 천민? |
♧구씨 사라짐 → 노예, 천민? |
♧여(餘)씨 사라짐 → 노예, 천민? |
♧ 현재의 성들은 한자가 다르거나, 중국에서 온 성이거나, 이 왕족에서 나온 성들이 아님.
♣ 위 행주 기씨 족보에 의하면, 기(箕)씨가 나라가 망해 멸문지화를 당할 때, 삼형제는 각지로 달아나 서민으로 살다 고려 때 복권된 경우라 보면 얘기가 통합니다.
기, 한, 선우씨 = 성골 → 서민(노예, 천민) → 복권
우린 고려 王씨의 운명을 압니다.
즉 고려 왕씨를 보아도 이건 명백한 진실로 보여집니다.
金신라에 의해 전 왕조의 왕족들이 멸족된 걸까요?
<사상 최초로 밝히는 정리>
이 사라진 왕족들의 공통점: 한반도 중·남부에서 토착민에 동화된 고대 일어 사용자로, 예맥(고대 한어 사용자)에 의해 ♠멸족됨
♠멸족 = 노예·천민화
상술한 대로 기(箕)씨는 기(奇), 한, 선우씨로 살아남아 멸문지화는 넘겼습니다.
일단 살아남기만 하면 훗날 복권의 가능성은 열려있는 겁니다.
하지만 진(眞)씨 이하 다른 백제의 왕족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거냐?
진(眞)씨, 우·해(優·解)씨, 구(仇)씨, 여(餘)씨
다수의 백제 유민들이 열도로 건너갔다곤 하지만, 남아서 생존한 왕족과 유민들이 있을거 아닙니까.
또한 백제의 대성팔족(大姓八族)도 사라졌습니다.
예맥과 동화되어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는 건 천만의 말씀입니다.
전 글들과 위에서 보아왔듯 고대는 전 왕족의 씨를 말려도 이상할게 없는 시대입니다.(古代니까)
고대 = 약육강식 + 적자생존 + 섹x와 폭력이 난무 + 야만적인 시대
그럼 그러한 시대라는 걸 인식하고서 객관적인 시각으로 한번 살펴봅시다.
백제의 왕족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건가?
고구려 장수왕의 대군이 백제를 멸망시켰을 때, 개로왕 이하 다수의 왕족과 귀족이 참살되거나 생포됐습니다.(475년)
또한 김춘추와 유신이 힘을 합쳐 金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백제를 멸망시켜 의자왕 이하 약 1만3천 명이 당에 끌려갔습니다.(660년)
이는 왕이 생포되거나 참살될 정도면, 그 휘하의 왕족과 귀족은 어찌 됐을지 안봐도 비디오입니다.
하지만 당시 다수의 왕족과 귀족이 참살되더라도 멸족까지는 아닐 겁니다.
지방에도 왕족과 귀족이 다수 분포돼 있을 것이기 때문이죠.
근데 통일신라 이후 오늘날까지 이들의 성씨가 안보인다?
씨가 말랐다는 건 무얼 의미하느냐?
바로 金신라에 의해 이들은 노예와 천민으로 전락한 겁니다.
그걸 어찌 알 수 있냐?
바로 향·소·부곡(鄕·所·部曲)의 존재가 그것입니다.
여기선 향·소·부곡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고, 다만 통일신라 이후로 백제의 유민이 향·소·부곡민이었다는 것에 포인트를 둡니다.
이 향·소·부곡에 대한 설명은 구글링하면 많이 나오니 참고하시면 됩니다.
金신라에 의해 노예와 천민으로 전락한 백제의 유민들은, 이 향·소·부곡에서 살게 되는 향·소·부곡민이 됩니다.
<향·소·부곡민의 3가지 특징>
- 일반 군현보다 세금이 무거움, 즉 하는 일이 많고 노동이 고됨
- 거주지 이전 불가, 즉 평생 한곳에서만 살아야 함
- 과거 시험 불가, 즉 신분상승 원천봉쇄함
위는 곧 노예와 천민의 3가지 특징이기도 합니다.
즉 향·소·부곡민 = 노예와 천민이란 얘깁니다.
사료에 통일신라가 9주5소경을 설치할 때 처음 향과 부곡을 설치했다고 나옵니다. ↓
참고로 향과 부곡은 농업에 종사시켰고, 소는 수공업에 종사시켰습니다.
여기선 고려 때 소가 나온 것이 아닌, 편의상 향·소·부곡을 통일신라 때부터 나온 한 셋트로 다룹니다.
이유: 고려 때 따로 소(所)가 나온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향·소·부곡 - 위키백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은 서술이 등장한다: "이제 살펴 보건대, 신라가 주·군(州郡)을 설치할 때 그 전정(田丁)이나 호구(戶口)가 현(縣)에 미달하는 곳은 향(鄕)을 두기도 하고 부곡(部曲)을 두기도 하여 소재읍(所在邑)에 속하게 하였다. 고려 때에는 또한 소(所)라고 칭하는 것이 있었는데 金所·銀所·銅所·鐵所·絲所·紬所·紙所·瓦所·炭所·鹽所·墨所·藿所·瓷器所·魚梁所·薑所 등이 구별이 있어 각기 그 물건을 바쳤다.
즉 통일신라 때 향·소·부곡이 설치됐다는 건, 이때 백제 유민의 거주지를 따로 정했다는 얘깁니다.
군·현의 하위행정체 = 향·소·부곡

수많은 향·소·부곡이 빠져있음
삼국사기엔 9주5소경의 군·현만 기재돼 있고 향·소·부곡은 보이지않습니다.
하지만 실재론 당시 수많은 향·소·부곡이 있었습니다.(← 노예·천민 백제 유민의 거주지)
(그 수많은 향·소·부곡은 글 마지막에 자료로서 첨가함)
이는 곧 삼국사기에 각 군의 현이 2~3개밖에 되지않는 이유입니다.
군·현 = 신라·고구려 유민 이주민 = 예맥
향·소·부곡 = 백제 유민 = 한왜
구삼국사의 9주5소경 산하에 수많은 향·소·부곡이 있었던 것을, 고려 중기 삼국사기 편찬 시 의도적으로 이를 삭제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인구는 적어도 수십만 명은 되지 않았을까 추정해 봅니다.
다행히(?) 그중 약 60만 명은 열도로 건너갔습니다.
근데 왕족과 귀족이라고 해서 특별한 대우를 받았을까요?
金신라 입장에서는 그들을 한데 모아 향과 부곡에 나눠 살게 함이 가장 관리하기 쉽습니다.
즉 백제의 왕족과 귀족도 역시 똑같은 신분차별을 받았을 겁니다.
처음엔 그래도 명색이 왕족과 귀족이니 대우를 해줬겠죠.
그러다 인간의 탈을 쓴 악마의 본색을 드러내듯이 서서히 목죄여 갔을 겁니다.
이 과정은 다음과 같이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 백제 멸망함
- 9주5소경 설치
- 관군이 각 왕족·귀족의 저택 방문
- 거주지 강제 이주시킴
- 도착지는 향·소·부곡의 움집
- 천민의 옷(삼베)으로 갈아입힘
- (막)노동·노역 시작
- 대부분의 노약자 사망
누구 씨인지 모르는 아기 대량 출생
이는 북쪽 정치범 가족이 아xx탄광으로 끌려가는 과정과도 같습니다.
이들의 재산은 金신라의 고관대작이 차지한 건 덤입니다.
또한 이때부터 구한말까지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았음은 물론입니다.
백제 멸망(660년)
대한제국 멸망(1910년)
1910 - 660 = 1250년 동안 개·돼지만도 못한 노예·천민의 삶이 시작된 겁니다.
이건 백제 유민들 얘기지만, 더 크게 보아 한왜와 예맥의 대결로 본다면 약 2천년 동안 한왜는 노예·천민의 삶이 시작됩니다.
이에 대한 설명은 전 글 참고.(사상 최초로 밝히는 한반도 중·남부 원주민의 실체)
또한 양녕대군이 궁궐을 나가 이들의 삶을 목격한 후 충격을 받은 얘기는 전 글에서 밝혔습니다.
(사상 최초로 밝히는 한반도 중·남부 원주민의 실체)
이들의 삶을 목격한 세자도 충격을 받을 정도면, 대체 어떠한 삶이었을지 감히 상상불허입니다.
다만 구한말까지 지방에 머리에 꽃 꽂은 여자들이 많았다는 것만은 밝혀두는 바입니다.
룰루~랄라~~♪
이 머리에 꽃 꽂은 여자들이 양반집 규수는 커녕 중인의 여식은 아닐 겁니다.
선천적 실성도 아닌, 후천적으로 실성할 정도로 충격적인 무언가를 겪었다는 말일까요?
사람이 정신적으로 강한 충격을 받으면 꿀먹은 벙어리가 되기도 합니다.(실언증)
이 강한 충격은 십중팔구 사람에 의해 만들어짐은 물론입니다.
백제인의 후손 → 노예·천민
남자 → 꿀먹은 벙어리
여자 → 머리에 꽃 꽂음
이와 같이 된 과정을 이해하기 쉽게 간단한 스토리로 만들면 이렇습니다.
.....만들까 하다가 손가락이 떨려 포기, 생략하겠습니다.
이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이와 같이 피눈물 나는 역사를 밝힐 때마다 키보드 치는 손가락이 떨린 적이 두어번 됩니다.
근데 이번은 좀 큽니다.(역대급)
나 지금 떨고있니?
때론 당근을 주고 때론 채찍을 들며 노예와 천민을 대상으로 집단 가스라이팅을 실시합니다.
이들은 구세주가 나타나길 빌며 미륵신앙이 널리 퍼집니다.
이때 나타난 ♥영웅이 궁예대왕이고, 그는 이들을 위한 정치를 베풀려다 왕건의 역성쿠데타로 시해 당합니다.
♥영웅 = 한국사 통틀어 유일한 영웅 = 자력으로 일어나 일국의 임금이 된 만백성의 구세주
이는 영국의 아더왕에 비견됩니다.
고려 → 마진 → 태봉
국호를 바꿀 때마다 강도 높은 對천민 정책을 실시한 것으로 보이며, 반대파는 때를 기다립니다.
기회는 찬스다!
이때 궁예대왕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한국사의 최대 미스터리 중 하나입니다.
역사 미스터리 = 승자가 기록해서 사실을 왜곡, 진실을 모름
그럼 이걸 여기서 잠깐 보고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궁예/생애 - 나무위키>
그 해 ①6월 을묘에 ②기병 장군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이 비밀히 짜고 밤중에 태조의 저택으로 가서 그를 왕으로 추대할 뜻을 함께 말하였다.
~중략~
이때에 분주히 달려와서 함께 참가한 자들이 이루 헤일 수가 없었고 먼저 궁문으로 와서 북을 치고 떠들면서 기다리는 자도 ③만여 명이나 되었다.
~중략~
궁예는 산골로 도망하였으나 이틀 밤을 지난 후에는 배가 몹시 고파서 ④보리 이삭을 잘라 훔쳐 먹었다. 그 후 곧 ⑤부양(斧壤) 백성에게 살해되었다.
《고려사》
고려사의 기록대로라면,
- 1등 공신이 4명밖에 없음(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이들은 모두 기병 장군, 즉 마군 장군들임
- 보리는 6월이면 이삭은 커녕 4,5월에 꽃이 핌, 즉 6월에도 한창 꽃이 핀 시기임 (음력을 감안해도)
- 부양은 강원도 평강군으로, 철원성에서 동북쪽 평야 지대임
- 4명의 마군 장군들이 수백·수천의 기마병으로 추격하는데, 산길이 아닌 평야로 도주했다?
<보리 - 위키백과>
줄기 속은 비어 있고, 높이는 1m 정도로 자란다. 일반적으로 가을에 심어 다음해 봄에 수확한다. 원줄기는 속이 비고 원주형이며 마디가 높고 마디 사이가 길다. 잎은 어긋나며 넓은 선상 피침형으로 너비 10-15mm이다. 꽃은 4,5월에 핀다.
<부양 - 구글AI>
부양(斧壤)은 현재 북한 강원도 평강군 일대의 옛 지명입니다. 백제 시대에는 어사내현으로 불리다 뒤에 부양현으로 고쳐졌고, 신라 영토가 된 후 광평현으로 변경되었다가 고려 태조 때 현재의 이름인 평강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는 결국 ↓이 기록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궁예는 산골로 도망하였으나 이틀 밤을 지난 후에는 배가 몹시 고파서 보리 이삭을 잘라 훔쳐 먹었다. 그 후 곧 부양(斧壤) 백성에게 살해되었다.
즉 궁예대왕은 백성에게 죽은게 아니라 4명의 마군 장군들에게 죽임을 당한 겁니다.
똥인지 된장인지 찍먹을 하다못해 찍먹해도 모르는 만백성을 속인 고려사.
①궁예대왕 내놔 이 개xx들아~~~!!! ㅠㅠ
그럼 이 4명의 마군 장군들은 궁예대왕을 어떻게 죽였을까요?
이왕 쿠데타를 일으킨 이상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확실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당합니다.
이때는 고대이기에 궁예대왕을 곱게 보냈으리라 생각하면 현대인의 엄청난 착각입니다.
홍술: 자 폐하, 이제 칼 들어가옵니다.
궁예대왕: 오냐, 니 맘대로 하세요.
하필 이들이 4명이라는 것이, 전 글들에서 누차에 걸쳐 언급한 형벌을 생각나게 합니다.
사지절단형 = 거열형
군사들은 명령에 따라 추격해 잡은 인물이 궁예대왕이라는걸 알고 나서길 꺼려합니다.
이에 4명의 마군 장군들이 직접 나섭니다.
- 밤중에 4명의 마군 장군들이 쿠데타를 일으킴 (
적은 혼노지에 있다!) - 궁예대왕, 변복하고 궁궐 밖으로 도망 (변복해도 민머리에 애꾸눈)
- 이틀 후, 4명의 마군 장군들에게 사로잡힘
- 이들에게 죽지않을만큼 구타 당하고 발가벗김
- 4마리의 말들에 사지 묶임

<준마 - 구글AI>
준마(駿馬)는 '뛰어나게 잘 달리는 말'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근데 이때 변수가 일어납니다.
4마리의 말들이 앞으로 나아가기를 거부하는 겁니다!
말들이 궁예대왕을 알아본 걸까요?
그래서 4명은 다른 말들로 교체하고 다시 진행합니다.(← 짐승만도 못한 4명)
궁예대왕은 발가벗긴 채 하늘을 향해 사지가 묶입니다.(6월달)
그렇게 한반도 2천년 역사의 유일한 영웅, 궁예대왕은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이들이 왕건에게 궁예대왕의 머리와 사지를 보여줍니다.
백옥삼: 시중, 이제 용상에 오르시지요! (나 잘했지?)
왕건: 폐..폐하, 아니 된다~! 아니돼~~!! ㅜㅜ (이랬을까요?)
<태조(고려)/생애 - 나무위키>
하여간 왕건이 망설이고 있는 이때 아내 신혜왕후 유씨가 갑옷을 내와 직접 입혀주면서 무언의 설득을 했고, 마침내 왕건도 결단을 내려 충성을 맹세한 4명의 무장들과 함께 궐기하였다.
이들이 아무리 충성을 맹세해도 임금을 한번 해쳤으니 왕건도 해치지말란 법이 없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왕건은 죽을 때까지 불안하게 살았을 겁니다.
중세 고려시대 이의민의 별명: 금강야차
고대 후삼국시대 4명의 별명: 홍술, 백옥삼, 삼능산, 복사귀
모두 천민에서 시작해 장군의 신분을 너머 최고위층 귀족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들입니다.
이들의 공통점 = 천민, 역심, 임금 시해, 잔인함, 입지전적
→ 천민으로 시작해 역심을 품고 임금을 잔인하게 시해한 입지전적인 인물들
한번 싸워 공을 세우려면 적의 수급을 베야 전공으로 쳐주기에 잔인하지 않으면 수급을 벨 수 없습니다.
대략적인 수급과 승진 관계 ↓
- 수급 하나 = 죄가 있으면 사하여 줌 / 노예·천민의 관적에서 본인 삭제
- 수급 두울 = 가족이 죄가 있으면 사하여 줌 / 노예·천민의 관적에서 가족 삭제
- 수급 세엣 = 쫄병에서 5인장으로 승진
- 수급 네엣 = 5인장에서 10인장으로 승진
- 수급 다섯 = 10인장에서 백인장으로 승진
- 수급 여섯 = 백인장에서 천인장으로 승진
- 수급 일곱 = 천인장에서 낭장으로 승진
- 수급 여덞 = 낭장에서 중랑장으로 승진
- 수급 아홉 = 중랑장에서 장군으로 승진
- 수급 여얼 = 장군에서 마군 장군으로 승진
즉 최소 10명의 목을 베야 마군 장군이 된다 보면 됩니다.
하지만 전장에서 수급 하나 베면 적어도 3~4명을 더 죽인거다 보면 됩니다.
실제로 몇명을 죽이든 가져오는 수급의 수에 따라 전공으로 인정해 승진합니다.
즉 고대는 잔인해야 출세하고, 출세하려면 잔인해야 합니다.
잔인 = 전공 = 출세

고대 = 고위층 귀족은 손에 피를 묻히지않음, 다만 위에서 명령함
예 = 율리우스 카이사르, 조조, 김유신 등
피를 묻혀 승진하는 계층 = 고위층 귀족 이하 ~ 핫바리
다시 돌아와, 결국 반대파는 왕건을 추대하고 역성쿠데타를 일으킨 후, 고려는 철저히 귀족 중심의 나라가 됩니다.
그후 자의든 타의든 왕건은 전국 각지의 유력호족의 딸들과 혼인관계를 맺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리고 궁예대왕은 미친 놈으로 역사에 기록됩니다.
이 궁예대왕의 시대는, 한반도 2천년 역사에서 노예와 천민을 위한 단 한번의 기회였습니다.
그 기회를 잃어버린 노예와 천민은 이후 대한제국 멸망 때까지 대대로 노예와 천민으로 살아갑니다.
궁예대왕이 시해 당한 후, 추측하건대 나라의 주인이 바꼈다는 사실을 지방의 노예와 천민은 몰랐을 가능성이 큽니다.
<궁예대왕 시해 후의 역사 흐름>
- 만백성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궁예대왕 시해
- 쿠데타 세력에 의해 나라의 주인이 바꼈음을 극비로 함
- 궁예대왕파 하나씩 제거
- 왕건, 지방 유력 호족들의 딸들과 혼인
- 지방 유력 호족 하의 각 호족들 입단속 함
- 노예·천민들은 태봉의 군사로서 통일전쟁에 참여
- 金신라와 후백제 멸망시키고 삼국통일
- 그후 나라가 바뀌고 나라의 주인이 바꼈음을 공표함
노예·천민들은 글도 모르고, 태어난 곳에서만 살기 때문에 궁예대왕이 시해 당한 걸 모릅니다.
이제나 저제나 세상이 바뀌길 고대하던 노예·천민들은 ⑧을 듣고 모두 꿀먹은 벙어리가 됩니다.
하늘을 향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 건 덤입니다.(← 망연자실)
노예·천민들에게 ⑧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을 겁니다.
인생에서 청천벽력과 망연자실을 몇번 겪을까요?
이때의 궁예대왕은, 한반도 2천년 역사에서 가장 청천벽력을 듣고 가장 망연자실해 했을 겁니다.
그 다음이 노예·천민들임은 물론입니다.
②궁예대왕 내놔 이 개xx들아~~~!!! ㅠㅠ
나라가 바뀌고 주인이 바꼈으니 나름 경사인가요.
고려 조정에서 백성들 먹으라고 떡이라도 돌렸을까요?
똑 드세요~~~
궁예대왕이 이루고자 했던 나라는 뭐였을까요?
혹시 모두가 자유·평등한 나라를 꿈꿨던 걸까요?
그래서 반대파가 그를 시해하고 미친 놈이라고 역사에 기록한 걸지도 모릅니다.
반대파 = 왕이 되고싶고, 귀족이 되고싶은 4명
<송악의 대호족 가문>
작제건(作帝建) = 왕건의 할아버지 = 자식을 왕으로 만들고싶은 사람
용건(龍建) = 왕건의 아버지 = 왕이 되고싶은 사람 1
왕건(王建) = 왕이 되고싶은 사람 2
<본래 귀족이 아니었던 4명, 즉 천민 또는 노예>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 귀족이 되고싶은 4명
홍유, 왕건으로부터 홍유(洪儒)라는 성과 이름을 하사받았으며, ~하략~
본명: 미상(未詳)
이칭: 홍술(洪術, 洪述)
배현경, 본래 궁예의 부하로서 병사로 시작하여 ~하략~
본명: 미상(未詳)
이칭: 백옥(白玉), 백옥삼(白玉三, 白玉衫)
신숭겸, 본래는 태봉(泰封)의 왕 궁예(弓裔)의 부장(部長)이었으나 ~하략~
본명: 미상(未詳)
이칭: 능산(能山), 삼능산(三能山)
복지겸, 태봉의 마군 장군으로 있다가 ~하략~
본명: 미상(未詳)
이칭: 복사귀(卜沙貴), 복사괴(卜砂瑰)
본래 천민이었던 이들을 궁예대왕이 거두어 모두 장군의 신분이 됐으나 통수 때림.
이유: 왕이 되고싶은 왕건과 힘을 합쳐 귀족이 되고싶어서.
즉 만백성의 희망을 저버리고 자기들만 귀족이 되겠다고 한 겁니다.
이것이 역사의 진실임을 알아야 합니다.(← 피눈물 나는 역사)
③궁예대왕 내놔 이 개xx들아~~~!!! ㅠㅠ
궁예대왕 = 노부나가
왕건 = 히데요시
노부나가가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어 거저먹은 히데요시가 생각납니다.
일본인이 존경 내지 흠모하는 인물로 노부나가를 항상 손가락에 꼽습니다.
한국인은 왜 궁예대왕을 존경(흠모)하지 않고 미친 놈 취급하냐고 묻는다면?
저는 할말이 있지만, 여러분은 대답할 수 있나요?
이 귀족 중심의 고려는 노예와 천민에겐 지옥의 나날이었을 걸로 추정됩니다.(→ 헬고려)
그 절정이 무신정권기이고, 농민·천민의 난이 잇따라 일어납니다.
관군의 진압으로 난은 진정되었다지만, 수천·수만에 달했을 걸로 보이는 농민·천민 반란군과 이들 가족의 운명은?
참고로 궁예대왕이 처음 양길한테 군사를 받아 명주(강원도)를 함락했을 때의 병력이 약 2천.
성인 남자 → 참수
어린 남자 → 노예로 전락
대부분의 여자 → 관노비
젋고 이쁜 여자 → 사노비
설마 이때 수천·수만에 달해 처치 곤란이어서 남자들을 구덩이에 집단 생매장한건 아니겠죠?
임금을 시해할 정도의 무리이니 그러고도 남습니다.(← 이의민의 의종 시해)
2. 거주지 이전 불가, 즉 평생 한곳에서만 살아야 함
이들 노예·천민은 평생 한곳에서만 살아야 하는데, 도망갈 수는 없었냐?
한 명이라도 도망 못 가는 이유: 이마에 먹물 낙인을 찍음
노예: 奴
천민: 賤
<자자형 - 구글AI>
자자형(刺字刑)은 죄인의 얼굴이나 팔뚝 등에 죄명이나 글자를 새겨 넣고 먹물을 들이는 문신 형벌입니다. ‘묵형(墨刑)’, ‘경면형(鈒面刑)’이라고도 불리며, 평생 지울 수 없는 낙인을 찍어 사회적으로 격리하고 수치심을 주는 가혹한 형벌이었습니다.
즉 위 귀족이 되고싶은 4명은 이마에 먹물 낙인이 찍혀있었다고 봅니다.
벽에 이 먹물 낙인은 생략하고 그렸겠죠.(← 삼한벽상공신)
아래 표에 헬金신라와 헬고려의 신분제가 나오지만, 그렇게 놓고 보면 이들 4명은 한왜가 아닌 예맥, 특히 말갈의 후손으로 추정됩니다.
말갈 = 북방 기마족 = 특히 잔인함
다시 돌아와, 만약 도망가면?
연좌제를 실시합니다.
노예: 가족 몰살
천민: 당사자는 참수, 가족은 노예로 전락
혹은 노예가 몰살은 안되더라도 이렇게 됩니다. ↓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소, 어찌!
남자 → 꿀먹은 벙어리로 변신
여자 → 머리에 꽃 꽂은 여자로 변신
그리고,
젋고 이쁜 여자 → 사노비
백제의 유민을 노예·천민으로 전락시킨 金신라는, 그중 젊고 이쁜 여자들을 가려뽑아 고관대작이 차지했다고 위에 썼습니다.
→ 이들의 재산은 金신라의 고관대작이 차지한 건 덤입니다.
고관대작 = 권문세가 = 권문세족
그럼 이는 곧 첩이고, 첩에서 난 자식이 바로 서자가 됩니다.(→ 서출)
줄줄이 자식이라 했던가요?
이때부터 한반도 중·남부(金신라)는 서출의 세상이 됩니다.(너도 나도 서출)
하지만 좋은 점도 있으니 그건 인구증가입니다.
첩의 존재이유: 설명이 필요한가요?
일개 가문의 첩은 일국의 후궁에 비유됩니다.
후궁의 존재이유: 설명이 필요한가요?
→ 첩과 후궁 = 만악의 근원
근데 고대에 사노비는 돈으로 매매와 물물교환도 가능합니다.
고대 = 약육강식 + 적자생존 + 섹x와 폭력이 난무 + 야만적인 시대
또한 가문만 보전하면 대대로 거느릴 수 있으니, 통일신라에서 고려, 조선, 구한말까지도 가능합니다.
무려 1250년 동안 고관대작의 가문은 이 사노비를 첩으로 대대로 거느릴 수 있었단 얘깁니다.(←소위 말하는 명문가)
그럼 백제의 유민인 이 사노비는 대체 어떤 모습일지 몇장의 사진을 통해 보실까요?

하얀 소복에 창백한 얼굴의 백제 소녀들
꿀먹은 벙어리마냥 무표정이 압권
백제 멸망(660)부터 대한제국(1910) 멸망까지 자그마치 1250년 동안 예맥의 노예·천민으로 살았다는 것이 마음 아픕니다.
이들이 얼마나 오뉴월에 한이 서렸으면 한반도에 귀신이 많을까?

일본여자 뺨치게 생긴 백제 선녀 소녀
백옥같은 우유빛 때깔 보소.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멸망하고 이들은 비로소 신분해방이 됩니다.
비록 갑오개혁이 1894~1896년에 시행되나 얼마나 전국적·효과적·현실적으로 실행됐을지 미지수입니다.
실질적인 신분해방은 대한제국이 멸망했을 때 아닐까 싶습니다.
<갑오개혁 - 나무위키>
갑오개혁(甲午改革) 또는 갑오경장(甲午更張)은 1894년 (고종 31년) 음력 7월 초부터 1896년 (고종 33년) 2월 초까지 군국기무처의 개화파 관료들에 의해 추진된 조선의 서구화·근대화 개혁. 정치, 경제, 군사, 법률, 사회의 전 분야를 망라하는 넓은 범위의 개혁이었다. 총 2차례에 걸쳐 개혁이 이뤄졌다.
<갑오개혁 - 위키백과>
갑오개혁(한국 한자: 甲午改革)은 1894년 7월 27일(음력 6월 25일)부터 1895년 7월 6일(음력 윤5월 14일)까지 추진한 근대화 개혁으로서 갑오경장(한국 한자: 甲午更張)이라고도 불렸다.

백제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얼굴과도 같은 백제 소녀
머리에 꽃이라도 꽂으려는 걸까?
비록 사진 속의 주인공들은 구한말의 기생이지만, 위에서 설명한 ②이것으로 인해 이들이 곧 백제의 유민입니다.
<향·소·부곡민의 3가지 특징>
- 일반 군현보다 세금이 무거움, 즉 하는 일이 많고 노동이 고됨
- 거주지 이전 불가, 즉 평생 한곳에서만 살아야 함
- 과거 시험 불가, 즉 신분상승 원천봉쇄함
백제 유민은 본시 고대 일어 사용자로 보는 바, 사진 속의 주인공들에게 기모노를 입히면 1천 수백년 전의 백제 여인이 다시 살아돌아온 것과도 같습니다.(→ 순수 혈통의 백제인)
이들은 백제 멸망 후부터 노예·천민으로서 백제인의 혈통을 유지했습니다.(예맥이 건드리지 않는 한)
그리고 일본의 기모노는 백제의 옷이라고 보는 바, 추후 설명할 날이 있을 겁니다.
사진 속의 주인공들은 모두 10대 후반으로 보이는데, 그 나이에 이미 기생입니다.
아마 가족을 먹여살려야 하기에 일찍부터 사회전선에 뛰어든 걸까요?
대한제국이 1910년 멸망한 후, 당시의 전국 기생들은 일제시대에 어찌 됐을까요?
신분해방이 되어 자유롭게 연애해 좋은 남자 만나 시집갔을까요?
당시의 자유연애는 사회적 충격이었습니다.
<구한말 자유연애 - 구글AI>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자유연애는 부모가 짝을 정해주는 전통적인 중매혼과 조혼에 맞서 개화 지식인과 '신여성'들이 주도한 근대적 혁명이었습니다. 이는 신분제 철폐와 남녀평등을 기반으로 자신의 반려자를 주체적으로 선택하려는 새로운 사회 운동이었습니다.
당시의 자유연애 흐름과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 배경 및 등장: 1896년 창간된 독립신문 등에서 신분제 철폐와 조혼의 폐지를 주장하며 혁신적인 자유연애 결혼론이 싹텄습니다. 이후 서구의 자유주의 사상이 일본을 통해 유입되며 본격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 신여성의 선구적 실천: 나혜석, 김일엽 등 당대 엘리트 신여성들은 가부장제와 전통적인 정조 관념에 저항하며 연애와 결혼, 이혼의 주체성을 부르짖었습니다.
- 사회적 갈등: 자유연애는 봉건적인 유교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야말로 금수와 같은 추행"이라며 비판하는 보수적인 시선과, 청춘남녀의 애정을 옹호하는 진보적 입장이 팽팽히 맞섰습니다.
이 시기 자유연애는 개인의 행복과 주체성을 찾는 계기가 되었으나, 사회적 편견과 경제적 빈곤 속에서 비극적인 결말을 맞거나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는 등 과도기적인 모순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건 예맥과 한왜 간의 연애·결혼을 가능하게 해준 민족융합이란 측면에서 혁명이었습니다.
즉 예맥과 한왜의 종족적인 결합은 불과 100년밖에 안된다는 얘깁니다.
그 전에는 한왜가 노예·천민의 신분이기에 불가능했던 겁니다.
물론 부분적으로 귀족(예맥)이 사노비(한왜)와 관계해 서출을 낳았지만, 그건 전체에 비하면 소수입니다.

또한 이건 우리네 할아버지 세대(일제시대)까지는 위 사진 속의 주인공과 같은 순수 혈통의 백제 선녀들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당시 일본인들이 와서 왜 이렇게 자기네랑 비슷하게 생긴 선녀가 많노 했을 겁니다.
하지만 전에도 누차 언급했듯 우리가 일본인과 동족이란 얘기는 아닙니다.
다만 조상을 공유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에 대한 설명은 전 글들 참고.
대신 교육계 포함해 각종 언론계는 고대에 일본과 교류가 깊었다고 표현합니다.
조상을 공유하면 교류가 깊을 수밖에 없고, 교류가 깊으면 조상을 공유할 수밖에 없습니다.
안 그렇나요?
한국 = 예맥 + 한왜
일본 = 한왜 + 에미시
참고로 양녕대군은 어리라는 어느 노인네의 첩을 데려오는데, 이것이 당시 문제가 됩니다.(어리를 사형 시키네 마네)
하지만 양녕이 미치지 않고서야 아무 이유없이 다른 사람의 첩을 데려오지는 않았을 겁니다.
<어리 - 구글AI>
어리(於里)는 조선 초기 왕세자였던 양녕대군의 첩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자색이 매우 뛰어나다"고 기록할 정도로 당대 최고의 미녀였으며, 지중추부사 곽선의 첩이었습니다.양녕대군이 그녀와 사랑에 빠져 몰래 궁으로 불러들이면서 조선 왕실 최대의 스캔들이 일어났고, 결국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폐위되는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랑이든 뭐든 어떤 이유가 있었을 걸로 추측됩니다.
그리고 이 어리는 위 사진 속의 주인공과 비슷한 미모였을테지요.(당시 기준으로 선녀?)
저번 글에도 그렇도 이번에도 양녕대군을 자주 출연(?)시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입니다.
즉 려 말·선 초의 격동기에 양녕대군이 조선의 첫 정식 세자로서 한 행동을 보면, 노예·천민과 깊은 연관이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여기서 못다한 얘기를 마저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양녕대군은 궁궐에서 최고의 교육, 즉 세자 교육(제왕학)을 받고 자랍니다.
출생: 1394년
왕세자 책봉: 1404년 (10세)
폐세자: 1418년 (24세)
어리를 만난 때: 10대 후반 ~ 20대 초반으로 추정
10세에 이미 사서삼경을 떼었는지 왕세자로 책봉됩니다.
그후 다방면에서 최고였고, 그 하나의 증거가 당시 조선 최고의 명필로 유명합니다.
이런 양녕대군은 이방원의 자랑이자 가장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이방원의 금지옥엽 = 양녕대군
<양녕대군/생애 - 나무위키>
~중략~
다만 이것을 근거로 삼아 태종이 양녕대군을 미워했다고 여겨서는 안 되는 연유가 있는데 태종은 왕자의 난 당시 보여주던 피도 눈물도 없을 거 같은 이미지와 달리 양녕대군이 폐위되던 날 장례식 분위기를 연상케 할 정도로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대성통곡한 이유는 아래에 나옴
근데 양녕이 어리를 만난 과정은 여기에 나오는데.. ↓
https://www.sejongnewspaper.com/2843
여기에 따르면 1416년(태종 16년) 12월이라 하지만, 막상 자료를 찾아보니 그 내용은 전혀 나오지않습니다.
덕분에 조선왕조실록을 처음 열람해봤네요.
https://sillok.history.go.kr/search/inspectionDayList.do
즉 사실이 아닌 허구인가요?
아니면 조선 중기에 지어진 소설에서 발췌한 건가요?
저도 양녕이 어리를 만난 과정을 한번 써보겠습니다. ↓
어느 날, 양녕은 궁궐 밖으로 구경 나갑니다.(사복 차림)
동행한 이는 내관 몇명과, 부왕 이방원이 신변을 지키라 보낸 조선 최고의 검객과 함께입니다.
이방원은 세자가 너무 온실 속의 화초로 자랄까봐 뒷배를 돌봐줍니다.(세상 구경도 시켜줄 겸)
이때 시장 바닥에서 끌려가는 한 여인을 미행합니다.(이뻐서?)
내관: 세자저하, 그냥 가시지요~
양녕: 쌩까고 쫓아감
아마도 매매 업소에 팔려가고 있는 중인가요?
양녕은 검객을 부릅니다.
양녕: 가서 저들을 혼내주고 이리 데려와라.
말없이 실행에 옮기는 검객.
양녕: 이름이 어찌 되오?
여인: ...어리라 하옵니다.
이때 양녕은 어리의 얼굴을 보고 가슴이 불타는 걸 느낍니다.(불타는 가슴으로 서로를 느끼면서~♪)
양녕: 갈데는 있소?
어리: 고개만 저으며 흐느낌 1
내관: 네 이 분이 뉘신지 아느냐?
양녕: 어허.. 눈짓하며 말림
어리: 고개만 저으며 흐느낌 2
이렇게 해서 양녕은 어리를 데리고 갈데를 찾지만 막상 갈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데려간 곳이 자기 처가집입니다.ㅡㅡ;
<양녕대군/생애 - 나무위키>
~중략~
양녕대군은 어리를 장인어른의 집에 숨겨 두고 임신까지 시켰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태종이 대노하여 질책했다.
그렇게 10대 후반의 양녕은 어리와 사랑에 빠집니다.
참고로 어리와의 사이에 외동딸이 있습니다.
양녕: 내 이제부터 널 지켜줄 것이야..이 안에 너 있다..
<양녕대군/생애 - 나무위키>
~중략~
그러나 세자 이제는 이오방, 구종수와 궐을 나가 놀거나, ①전 중추원부사 곽선(郭璇)의 첩인 어리를 납치해 ②궐로 데려오는 등 큰 사건 이전에도 숱하게 말썽을 부리고 공부를 게을리해 태종과 원경왕후를 속 터지게 했다.
중간중간 양녕에 대한 안 좋은 말들은 걸러내고, ②어리를 궐로 데려와 부모님에게 인사를 시켜줍니다.
그 부모님이 왕과 왕비임은 물론입니다.
이때만 해도 건국 초기라 태종과 왕비의 위엄은 보통사람이나 다름없다고 봅니다.
즉 한고조 유방과 그 개국공신들을 생각하면 됩니다.(= 동네 양아치+시정잡배들)
그후 양녕대군은 어리에게서 ①노인네 곽선에게 온 경위와 노예·천민의 삶에 대해 듣습니다.
혹시 어리의 친언니가 머리에 꽃 꽂은 여자로 변신한 걸까요?
이후로 그가 노예·천민의 삶을 직접 목격했음은 물론입니다.
이때 부왕 이방원의 뒷배로 효령, 충녕과 같이 궁을 나가 이들의 삶을 목격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전 글에 설명한 것처럼 이들의 인생행로가 그렇습니다.(사상 최초로 밝히는 한반도 중·남부 원주민의 실체)
양녕: 결정적으로 어리로 인해 폐세자됨 (조정 신료의 주청)
효령: 승려가 됨 (승려가 된 이유?)
충녕: 서민(천민)을 위한 정치를 함 (서민정치를 한 이유?)
실상은 이방원도 천민에 대한 애환이 있거나 對천민 정책을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이유 아래 나옴)
하지만 그걸 이행할 인재들이 없거나, 있어도 반대하기에 차기 왕에게 그걸 물려줄 생각 아니었을까요?
이는 이방원이 원해서 양녕이 폐세자된 것이 아니라는 것, 위 삼형제의 인생행로가 그 증거입니다.
즉 실록의 기록이 전부가 아니란 얘깁니다.
또한 이는 이방원의 업적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
<향·소·부곡 철폐 - 구글 AI>
향·소·부곡 철폐 시기와 배경: 이 제도는 조선 태종(재위 1400~1418) 시기에 지방 행정 제도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제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일반 군현에 편입되며 폐지되었습니다.
또한 사병들의 혁파도 이방원이 이루었습니다.(사병 혁파 → 이방원의 大업적)
이방원 일 좀 했네?
이방원의 사병 혁파 (태종 11년, 1411년) = 세자 양녕대군이 17세 때.
이로써 이방원의 건국이념을 알 수 있습니다.
※ 이방원의 조선 건국이념 = 귀족·승려 중심의 고려에서 서민(천민)·유생 중심의 조선
태종 = 성군 아냐?
성군은 아니라도 명군은 맞습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⑴ 이방원, 평소 천민에 대한 애환이 있음
태종, 對천민 정책 시행
① 사병 혁파 (사병이 천민과 관련 있음은 ♨아래 설명)
② 향·소·부곡 점진적 철폐
⑵ 부왕 이방원의 뒷배로 삼형제, 궁궐 밖에 나가 세상 구경
⑶ 양녕, 어리를 만나 사랑에 빠짐
⑷ 조정 신료의 주청으로 양녕, 폐세자 됨 (이방원이 원해서 폐세자된 것이 아님)
⑸ 이방원, 대성통곡 함 (☆대성통곡한 이유는 아래에 나옴)
<양녕·효령·충녕의 인생행로>
양녕: 천민과 스스럼 없이 어울림
효령: 승려가 되어 천민을 위한 헌신의 길
충녕: 세종, 對천민 정책 시행
결론: 이러한 삼형제의 인생행로는 결국 부왕 이방원의 지대한 영향 때문으로 분석·이해됨
참 어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저번에는 초상권 때문에 사진을 못 올렸지만, 생각해 보니 유명 연예인이라 괜찮을거 같습니다.(← 공인)
백치미에 무난한 얼굴을 찾다보니 전 글에서도 언급한 한 명이 떠오릅니다.(고이대왕 6)
참고로 저는 이름만 들었지 모릅니다.

특별출연: 이시하라 사토미 (32세 때)
옷이 날개라고 어리는 한복을 갖춰 입으니 천하의 절색으로 변신합니다.
한낱 사노비가 실록에 자색이 매우 뛰어나다고 기록될 정도의 경국지색이었던 걸까요?
노인네 곽선: 쓰읍..얘가 이렇게 이뻤나?
그후 폐세자 됐어도 둘은 백년해로합니다.(← 이방원의 뒷배)
↑ 조선 최초의 러브스토리
근데 여기서 어리의 말년 정보가 2개로 나눠집니다. ↓
<양녕대군/생애 - 나무위키>
폐위시켜 유배지로 보낼 때도 신하들이 원지로 보내라고 청했지만 당시 사이가 안 좋던 원경왕후 핑계를 대면서까지 도성과 가까운 경기도 광주로 보냈다. 양녕대군이 종묘사직에 누를 끼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동궁전에서 쓰던 기물들도 모두 딸려 보내고 수발을 들 노비들, 생활비까지 줘가며 사는데 부족함이 없게 해주었으며 신하들이 참수하라고 닦달했던 ③어리까지 유배지로 같이 보내주었다.
③에 따르면 이방원의 뒷배로 백년해로한 것이 됩니다.
<어리 - 나무위키 & 위키백과>
~중략~
다만 그렇다고 양녕대군에게 직접 뭐라 할 순 없으니 대신 만만한 어리에게 분풀이한 것으로 보인다. 어리는 자신의 신세에 대한 한탄 때문인지 ④그날로 목을 매어 생을 마감한다.(1418년경)
하지만 ④는 1418년에 생을 마감한 걸로 써져있습니다.
또 아래의 내용이 있는 걸로 보아, 당시 조정 신료들이 양녕대군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어리 - 위키백과>
~중략~
한편, 후대의 기록 가운데에는 양녕대군이 그녀의 비극적 최후를 전해 듣고도 동요하지 않고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다만 이는 실록에 보이는 내용은 아니며, 당시 양녕대군의 태도를 묘사한 후대의 서술로 전해질 뿐이다.
이는 양녕에 대해 사실대로 기록 안했음을 보여줍니다.(폐세자됐기에)
즉 이건 양녕을 위해 태종 이방원이 뒷말이 없게 벌인 정치적인 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1418년에 어리가 죽었다고 기록된 겁니다.(← 이게 단서)
- 1418년, 양녕이 폐세자 됨
- 그날 이방원은 대성통곡함 (☆대성통곡한 이유는 아래에 나옴)
- 신료들이 어리를 죽이라고 함
- 이방원은 어리가 위 내용대로 목을 맷다고 (거짓말) 함
- 누구도 감히 사실여부를 못 따짐 (분위기 + 임금이 하는 말에 토를?)
- 사관은 어리가 그렇게 죽었다고 기록
- 그후 폐세자 양녕, 경기도 광주로 유배
- 이방원, 어리도 같이 보내줌
↑ 제가 본 바로는 이런데, 이게 진실이라면 그야말로 이방원의 아들에 대한 찐사랑을 어김없이 보여줍니다.ㅜㅜ
☆양녕이 폐세자된 날 이방원이 대성통곡한 이유: 양녕이 왕이 되면 조선의 건국이념에 몇걸음 더 다가감을 알기에.
제(禔)야! 제(禔)야! 한낱 첩년때문에 보위에 못 오르고, 이거이 다 무시기 일이네?! ㅠㅠ
아바이가 너를 위해 다 준비했디비, 만백성을 위해 다 준비했디비! ㅠㅠ
이거이 다 무시기 일이네~~~!!! ㅠㅠ
그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울었음은 물론입니다.
참고로 세종이 부형(父兄)의 지대한 영향으로 親천민 정책을 시행하고, 그 중 하나인 훈민정음에 대한 뜻과 해석을 해봅니다.
사상 최초로 밝히는 훈민정음의 뜻과 해석입니다.

나랏말이 중국과 다른 것하고 대체 뭔 상관이길래 한글을 창제하셨는지 생각해본 결과, 얼마 지나지 않아 불x을 탁 쳤습니다.
이건 분명 당시 한반도, 특히 중·남부의 백성들, 즉 천민(백제의 유민)들이 쓰던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종은 신숙주를 일본에 보내 한왜의 발음을 연구하고, 불쌍한 천민을 위해 한글을 만든 것입니다.
金신라에 의해 노예·천민화된 백제의 유민은 백제 멸망(660년) 이후, 대한제국 멸망(1910년)까지 자그마치 1250년 이상 동안 예맥의 노예·천민으로 살았습니다.(헬金신라와 헬고려의 신분제 참고)
훈민(訓民) = (한왜의) 백성을 새로 만든 글로 가르쳐
정음(正音) = 예맥의 언어를 하게끔 하는 바른 소리
즉 세종의 한글 창제는, 한반도 중·남부의 천민들이 예맥의 언어를 사용하게 된 결정적인 도구가 된 겁니다.
1번째 목적 = 불쌍한 백성을 위해 한글 창제
2번째 목적 = 이들이 예맥의 언어를 사용하게 함
<나라의 말에 대한 부연설명>
나라 = 미마나(彌摩那)의 나와 가라(加羅)의 라가 합쳐진 말로 반도 왜를 뜻함.
즉 나라의 말 = 좁은 의미로 미마나와 가라의 말을 뜻하고, 넓은 의미로 백제 유민의 말을 뜻함.
<中國에 대한 부연설명>
중국 = 대륙의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란 뜻이지만, 한반도의 중국은 나라의 중심, 즉 왕실, 왕가, 조정 등을 뜻함.
따라서 훈민정음의 중국은 조선 왕실 혹은 조정을 뜻함.
이는 곧 유학과 明에 대한 사대주의의 영향으로 조선을 소중국(小中國)이라 한 것과 같은 의미임.
다시 돌아와, 또한 최충헌의 동생인 최충수가 이의민의 망나니 아들과 비둘기를 뺏네 마네 한 사건이 바로 사노비인 겁니다.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습니다.
동생이 비록 공이 있으나 한낱 사노비 때문에 이의민의 망나니 아들과 뺏네 마네 한 것을 역사에 그대로 기록하면 가문의 大망신입니다.
그래서 최충헌의 명으로 사노비가 비둘기로 변신합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에 그렇습니다.
사노비 → 비둘기
이때부터 지금까지 만백성을 속인 고려사의 기록입니다.
이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래 내용입니다. ↓
<최충헌 - 나무위키>
명종 폐위 뒤 옹립할 왕으로 최충수는 제8대 현종의 6대손인 왕진을 지지했다. 이는 최충수가 왕진의 노비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외조카인 박진재가 금나라에서 왕진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니 왕진을 왕으로 세운다면 왕위를 찬탈했다며 트집을 잡을 것이라고 반대하였다. 이에 최충헌은 제17대 인종의 다섯째 아들이자 명종의 친동생인 평량공 왕민을 왕으로 세우니 그가 바로 제20대 신종이다.
통일신라 이후부터의 이 사노비는 가문이 보전되는 한 대대로 사노비입니다.
그 말인즉슨, 1250년 동안 한반도에서 대대로 근친이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이는 당시 金신라와 고려시대에 왕족 간의 근친혼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겁니다.

적자인 아들이 서출인 딸(이복남매)과 관계해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은 다시 ☎서출이 됩니다.(← 아래에 설명)
이 서출은 곧 사노비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고 대감마님으로 불러야 합니다.
민감한 내용이라 더이상의 설명은 생략하고, 그림도 간략화 했으니 양해 바랍니다.(각자 알아서 해석)
이걸 더 파고들 역사블로거 용자 분 계실까요?
근데 각 가문과 호족들이 사병을 갖고 있었는데, 이들을 월급 주고 부린거라 생각하면 현대인의 엄청난 착각입니다.
이들은 대감마님이 사노비와 관계해 낳은 서출들이고, 그 서출들은 다시 적자들과 관계해 또다른 서출을 탄생시킵니다.
고대 = 약육강식 + 적자생존 + 섹x와 폭력이 난무 + 야만적인 시대
숫자가 많아지면 그때 비로소 논밭 몇 마지기 떼주고 출가시킵니다.
또는 소작농처럼 대규모 논밭을 모두가 농사짓고 관리합니다.(← 대규모 농민의 탄생 원인)
하지만 여전히 본가 주위를 지키는 사병 집단임은 물론입니다.(← 대규모 집성촌의 탄생 원인)

모두 대가족, 즉 친척 일가친척
한국인의 끈끈한 정은 여기서 나온걸까?
우리가 남이가?
이들은 작게는 대가족이고, 크게는 ♨가문을 지키는 사병들입니다.
王家의 왕족들이 많음은 곧 나라의 든든한 자산임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수많은(?) 왕자들)
하지만 상술했듯 이방원이 이 사병을 혁파합니다.
중요한 건, 王家가 근친혼을 하는데 하물며 귀족들이야 말할 거 있나요?
만백성(노예·천민)들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조선은 좀 나아졌다지만, 중세인 고려시대엔 근친이 허용됐던 걸로 보입니다.
고대인 삼국시대는 말할 것도 없지요.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모든걸 말해주는 이 한장의 사진
이 움집에 한 가족이 들어가 살던 시대에, 가족 구성원은 어찌 됐을까요?
보통 아빠, 엄마, 형, 누나, 나, 남동생, 여동생 해서 일곱 식구가 정상입니다.
하지만 고대에도 이런 가족 구성원일 거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현대인의 엄청난 착각입니다.
엄마, 아빠A, 아빠B, 누구 씨인지 모르는 자식들 줄줄이..(← 노예·천민이 성씨가 없던 근본적인 이유)
이것이 이른바 고대의 모계 사회란 겁니다.
즉 사진 속의 움집에는 모계 중심의 가족이 들어가 살았던 시대였다는 얘깁니다.
(움집이 초가로 바뀌기 전까지, 즉 삼한 시대에서 삼국 시대를 거쳐 고려 초까지로 추정하지만, 냉정히 보면 고려 말까지도 움집이었을 가능성 높음. 왜냐하면 고려는 하층민 따위는 생각치않는 귀족 중심의 나라이기에)
이 고대의 성의식이 어떠한 수준이었을지 보여주는 간접 사진을 조심스레 올려봅니다.
구한말에 찍은 칠반계층의 아낙네 둘입니다. ↓
<칠반계층 - 구글AI>
칠반계층(칠반천역)은 조선 시대에 신분상으로는 양인(자유민)이었으나, 국가에서 천하게 여기는 7가지의 고된 일(천역)을 도맡아 하던 계층을 뜻합니다. 일반 상민보다 차별을 받았으며, 이를 '신량역천(身良役賤)'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칠반계층의 아낙네 둘
조선 초, 태종과 세종의 親천민 정책과 양녕과 효령의 노력에 의해 향·소·부곡이 점진적으로 철폐되면서 천민의 신분도 사라진 걸로 보입니다.
<천민 - 나무위키>
3. 천민 집단 사이의 관계
~중략~
신분상 천민은 노비가 유일하며 나머지는 천하게 여겨지는 직업일 뿐이지 신분상 평민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말한 노예·천민 중에서 천민만 신분이 사라졌을 뿐, 노예는 그대로 존재했습니다.
이 노예는, 크게 사노비와 관노비로 나눠집니다.
<사노비 - 구글AI>
사노비(私奴婢)는 국가(관청) 소속인 공노비와 달리, 양반이나 개인에게 재산처럼 소속되었던 전통 사회의 최하층 신분입니다. 상속, 매매, 증여의 대상이었으며 거주 형태에 따라 크게 두 종류로 나뉘었습니다.
사노비의 종류와 생활
1. 솔거노비 (率居奴婢)사는 곳: 주인집 안이나 바로 옆에 함께 살았습니다.
하는 일: 집안일(가사 노동), 농사일 등 주인이 시키는 온갖 잡일을 했습니다.
생활: 주인에게 의식주를 모두 의존했으며, 개인 재산을 거의 가지지 못했습니다.
2. 외거노비 (外居奴婢)사는 곳: 주인집과 따로 떨어져 살면서 독립된 가정을 꾸렸습니다.
하는 일: 자신의 농사를 지으면서 일정 몫을 주인에게 바쳤습니다.
생활: 자기 재산을 모을 수 있었고, 주인에게 바치는 몫을 빼고는 자유로운 생활이 가능하여 양인과 비슷한 삶을 살기도 했습니다.
사노비의 신분과 권리
세습: 부모 중 한쪽만 노비여도 자식은 노비가 되었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어머니가 양인이면 자식도 양인이 되는 제도로 바뀌어 해방의 기회가 늘어났습니다.
매매와 가격: 조선 시대 법전인 『경국대전』에 따르면 장년 노비의 값은 말 한 필과 비슷하게 비싸게 거래되기도 했습니다.
신분 상승: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거나, 국가에 곡식을 바치는 등(납속)의 방법으로 양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즉 남자는 돌쇠, 마당쇠 등 하인을 말합니다.
여자는 삼월이, 사월이 등 하녀를 말합니다.
이쁘면 첩으로 삼는건 덤입니다.(첩이 아니라도 개인 소유이기에 자기 맘대로 함)
<관노비 - 구글AI>
관노비는 국가와 왕실에 소속되어 중앙이나 지방 관아에서 허드렛일과 노역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매매와 상속의 대상이었지만, 세종대왕 시절 관비에게 130일의 출산휴가를 주고 남편에게도 30일의 휴가를 주는 등 복지 혜택을 받기도 했습니다.
관노비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소속과 역할: 나라의 기관인 관청에 속한 사람입니다.
남자(노)와 여자(비)로 나뉘며, 관청 청소, 공사 현장 노동, 수공업 등 다양한 일을 했습니다.
특수 관노비: 지방 관청 소속 중에는 예술을 담당하던 관기(기생)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세종대왕의 출산 휴가: 세종은 아이를 낳는 여자 관노비에게 출산 전후로 130일의 파격적인 휴가를 주었습니다. 또한 아내를 돌보라고 남편에게도 30일의 휴가를 주어 오늘날의 배우자 출산 휴가와 같은 제도를 시행했습니다.
차별과 인권 문제: 국가의 소유라는 이유로 부당한 노동이나 심지어 성착취에 노출되기도 하는 등 매우 비참한 대우를 받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해방: 1801년(순조 1년)에 나라의 결정으로 모든 공노비가 해방되었습니다 .
관노비도 노예 신분인 만큼 사노비처럼 비참하기는 매 한가지입니다.
그나마 조선 초에 태종, 세종의 親천민 정책과 양녕, 효령의 노력 등으로 많이 개선된 걸로 보입니다.
근데 천민 신분이었던 사람들이 먹고는 살아야 하기에 본래 하던 직업은 대대로 계속 했으니, 그것이 곧 칠반계층의 직업입니다.
즉 (조선시대에) 법적으로 천민은 아니지만 천민처럼 차별대우를 받았던 겁니다.
<칠반계층 - 구글AI>
이 계층에 속했던 대표적인 7가지 직업은 다음과 같습니다.
- 조례(皂隷): 관아에서 심부름과 잡일을 하던 아전
- 나장(羅將): 죄인을 잡아오거나 곤벌을 집행하던 형사
- 일수(日守): 성을 지키거나 궁궐을 순찰하던 군인
- 조군(漕軍): 세금으로 걷은 곡식을 배로 운반하던 수군
- 수군(水軍): 바다를 지키고 방어하던 군인
- 봉군(烽軍): 횃불을 올리며 나라의 위급 상황을 알리던 봉화대 근무자
- 역졸(驛卒): 역참(역)에서 마패를 관리하고 통신과 여행객을 돕던 심부름꾼
이들은 세습제로 직업을 물려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회적 대우가 낮아 승진의 기회가 적거나 거주 이전에 제한을 받는 등 일반 백성보다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여기에 천방지축마골피의 직업은 덤입니다.
이는 성씨가 아닌 직업을 말함입니다.
<천방지축마골피 - 구글AI>
천(天·무당), 방(方·목수), 지(地·지관), 축(丑·소백정), 마(馬·말백정), 골(骨·뼈백정), 피(皮·가죽백정) 등 특수 직업을 가진 천민들의 성씨라는 낭설입니다.
그럼 구한말까지 이 칠반계층과 천방지축마골피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아낙네들이 ㅈ가슴을 드러내놓고 다녔다고 보면 됩니다.(= 위 사진)
그나마 구한말, 즉 조선시대는 목화를 재배해 면을 생산하기에 양민들이 입는 옷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면옷을 입었습니다.
위 사진 속 아낙네들이 입은 옷이 면옷으로 보입니다.
<면 - 구글AI>
면(면섬유)은 목화에서 얻는 대표적인 천연 소재입니다. 부드러운 촉감과 뛰어난 땀 흡수력으로 일상복부터 속옷까지 가장 널리 사용되는 옷감입니다.
하지만 金신라와 고려시대는 전국적으로 수많은 향·소·부곡에서 천민들이 삼베옷을 입은 걸로 추정됩니다.
여름: 100% 삼베옷을 입음. 이, 벼룩, 특히 좀벌레가 득실거렸을 걸로 추정
겨울: 삼베옷 안에 보온재로 귀족들이 쓰다버린 헌 비단, 소량의 솜 등을 넣은 걸로 추정
즉 이는 뭘 말해주냐?
움집에 살고 삼베옷을 입었던 金신라와 고려시대는 ㅈ가슴보다 더 민망한 부위도 가리지않았음을 말해줍니다.
→ 金신라와 고려시대의 천민들 성의식
| 金신라 | 불교, 귀족층 향유 | 향·소·부곡 거주지 이전 불가 |
천민, 움집 생활 (모계 중심, 근친) |
가죽옷+삼베옷 | 천민, 개·돼지만도 못한 삶 | ㅈ가슴 + α 드러냄 |
| 고려 | 불교 대중화 | 향·소·부곡 거주지 이전 불가 |
천민, 움집 생활 (모계 중심, 근친) |
삼베옷 | 천민, 개·돼지만도 못한 삶 | ㅈ가슴 + α 드러냄 |
| 조선 | 유학, 양반층 향유 | 향·소·부곡 철폐 거주지 이전 불가 |
서민, 초가집 생활 | 삼베옷+면옷 | 양민이지만 여전히 천민처럼 차별 | ㅈ가슴 드러냄 |
| 구한말 | 유교 대중화 | 향·소·부곡 철폐 거주지 이전 불가 |
서민, 초가집 생활 | 면옷 | 양민이지만 여전히 천민처럼 차별 | ㅈ가슴 드러냄 |
구한말에 ㅈ가슴을 드러내놓는 아낙네로 유추할 수 있는 내용
즉 조선 이후는 그나마 유학·유교때문에 이렇게 변신합니다.
ㅈ가슴 + α 드러냄 → ㅈ가슴 드러냄
결국 백제 유민의 삶이 얼마나 막장이었을지 생각하면 (과장섞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ㅠㅠ
이건 여기까지 하고, 여기서 망이 형제와 만적의 글이 자못 논리정연하고 한 문장 하기에 옮겨봅니다.
<농민과 천민의 봉기 - 우리역사넷>
망이⋅망소이의 난
망이 등이 흥경원을 불태우고 그 곳에 있던 승려 10여 명을 죽인 다음, 주지승을 협박하여 ★편지를 가지고 서울로 가게 하니,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우리 고을을 승격하여 현으로 만들고 또 수령을 두어 무마시키더니, 다시 군사를 동원하여 와서 치고 우리 어머니와 처를 붙잡아 가두니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차라리 창칼 아래 죽을지언정 끝내 항복하여 포로가 되지는 않을 것이며, 반드시 서울에 이른 연후에 그만둘 것이다.” ‘고려사’
아니 승려들이 얼마나 착취했으면 이들한테 죽임을 당한 걸까요?
★ ← 혹시 망이가 직접 쓴 편지일까요?
만약 망이의 친필이라면 위보다 훨씬 장문이자 또한 명문이었을 걸로 추정됩니다.(← 임금한테 쓴 친필서)
여기서 망이의 동생인 망소이는 과연 남자였을까요?
이름으로 보아 망소이는 여동생이고, 10여 명의 승려한테 성착취를 당한 걸로 보입니다.
즉 망소이는 절간에서 일한 관노비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그리고 선녀에 가까운 미모였을 걸로 추정됩니다.
망이는 글을 잘 알고 끝까지 잡히지않고 항거한 걸로 보아, 조자룡 쌈싸먹는 무예실력을 갖춘 것으로 보입니다.(→ 문무겸비)
관군이 어머니와 처를 붙잡아 마지못해 항복한거죠.
결국 망이는 참수되고, 망소이는 다시 온갖 능욕을 당합니다.
이때 망소이의 행로는 2가지밖에 없습니다.
① 온갖 능욕을 못 이겨 자결
② 머리에 꽃 꽂은 여자로 변신
설마 이들이 백제의 얼마 안 남은 왕족의 후손은 아니겠죠?
1176년, 중방에서 오간 대화를 엿들어 보겠습니다.
정중부: 대체 저 천한 것이 어찌 글을 아는 것이오? (우리도 모르는데)
대장군들: 망할 것이 옛 백제 왕족의 후손이라 하더이다.
정중부: 허허! 미친.. 언제적 망한 나라의 왕족 후손이야, 모두 참수하라!
모두 참수하라 했지만, 실은 남자들만 참수되고 여자들은 노비가 됩니다.
혹시 망이·망소이의 진짜 이름은 優이·優소이 아니었을까요? (← 비류의 후손)
→ 비류의 후손, 우씨 멸족
우이·우소이는 이때 망이·망소이로 역사에 기록됩니다.
망이·망소이(亡伊·亡所伊) = 죽어서도 망해라 해서 亡을 붙임
만적의 난
만적 등 6인이 북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공⋅사노비를 불러모아 모의하기를 “국가에서 경계년(무신정변) 이래로 천한 무리에서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경우가 많이 일어났으니, 장군과 재상이 어찌 종자가 따로 있으랴?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우리는 고달프게 일하면서 채찍 아래 곤욕을 당할 수 있느냐?”하니 모든 노비가 그렇게 여겼다. …… 약속한 날이 되어 모두 모였으나 무리가 수백에 지나지 않으므로,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다시 보제사에 모이기로 약속하고 명령하기를 “일을 비밀히 하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니 삼가여 누설치 말라.” 하였다. 율학 박사 한충유의 집안 노비인 순정이 이를 주인에게 밀고하니 한충유가 최충헌에게 고하였고, 최충헌은 만적 등 100여 명을 잡아 강에 던졌다. ‘고려사’
특히 만적이 한 말이 장군과 재상이 어찌 종자가 따로 있으랴?
이건 秦 말기 농민 봉기를 일으킨 진승이 한 유명한 말인데, 그가 사마천 사기라도 읽은 걸까요?
왕후장상에 어찌 씨가 따로 있으랴
王侯將相 寧有種乎
왕과 제후는 고귀한 신분이라 제외하고, 장상에 어찌 씨가 따로 있냐고 한 분별력도 있음은 덤입니다.
이 분별력은 망이도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오늘날 똥인지 된장인지 찍먹해야 하는 이들이 많은 걸 보면, 망이와 만적의 분별력은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들은 단순한 노예와 천민이 아닌, 백제 왕족 내지 귀족의 후손으로서 비록 노예와 천민이지만 글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충헌의 가문이 백제 왕족의 후손을 돌보아 줬던 가문이라 한다면, 만적은 그 후손의 자식입니다.
즉 대대로 최씨 가문의 노예인 겁니다.(家奴)
최충헌도 불x친구인 만적을 형제처럼 대했겠지요.
그래서 만적이 글을 알고 사기도 읽었던 겁니다.
수백·수천의 노예들이 만적을 중심으로 모임을 갖는다는 것도 이를 뒷받침해 줍니다.
만적(萬積): 글을 알고 책을 다독해 박학다식하고 분별력 있음
백제 왕족의 후손으로 진짜 이름은 해적(解積).(← 온조의 후손)
이하 편의상 해적.
그리고 최충헌의 봉사 10조는 실은 해적이 지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봉사 10조>
1. 왕이 머물던 별궁 수준인 수창궁 대신에 정궁인 연경궁으로 환궁할 것.
2. 필요 이상으로 늘어난 관리들의 수를 줄일 것.
3. 불법적으로 탈취된 토지를 원래 주인에게 환원할 것.
4. 불법적으로 세금을 함부로 징수하거나 세율 인상을 하지 않도록 할 것.
5. 왕실에 대한 지방 관리들의 무분별한 특산물 진상을 하지 않도록 할 것.
6. 승려의 정치 참여와 왕실의 고리대금업을 금지할 것.
7. 지방관들의 향리들에 대한 관리를 강화할 것.
8. 중앙 관료들의 사치를 금하고 근검, 절약을 장려토록 할 것.
9. 너무 많이 세워진 사찰들의 숫자를 대폭 줄이도록 할 것.
10. 언론 기관인 대관의 역할을 강화하고 인물을 가려 등용하도록 할 것.
처음과 마지막만 제외하고, 전부 노예·천민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정책들입니다.
즉 1과 10만 최충헌이 지은 것이고 나머지는 해적이 지은 겁니다.
1, 10 = 조정을 더욱 장악하기 위한 최충헌의 꼼수
2 ~ 9 = 노예·천민의 직접적인 언급을 피한 노예·천민 정책
<최충헌 - 나무위키>
1196년 5월에 아우인 최충수와 함께 <봉사 10조> 개혁안을 국왕인 명종에게 정식으로 건의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최충헌의 묘지명에는 최충헌이 '봉사 10조'를 올렸다는 기록이 없다. 겉으로는 그럴싸 했지만, 실은 자신의 집권을 합리화하려는 것이었다.
봉사 10조의 대부분을 해적이 지었으니 쪽팔려 묘지명에 기록을 못 새긴거라 봅니다.
그러다 때를 보아 해적이 일을 저지른 걸까요?
기회는 찬스다!
하지만 결국 이들은 배신자로 인해 모두 사로잡혀 강물에 수장됩니다.
저 하나 살겠다고 배신 때린 자 = 순정(順定)
마찬가지로 남자들은 수장시키고, 여자들은 머리에 꽃 꽂음.
→ 온조의 후손, 해씨 멸족
이때 최충헌과 해적의 관계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래 내용입니다. ↓
<최충헌 - 나무위키>
1198년 5월 최충헌의 가노(家奴)인 만적과 다른 노비들 수천여 명이 반란을 모의했는데 반란 모의에 참여했던 노비 순정이 자신의 주인이었던 율학박사 한충유에게 이를 밀고했다. 한충유는 최충헌에게 이 사실을 말했고 최충헌은 그들 중 100여 명을 체포하여 강에 던져 죽인다. 만적과 100여 명의 사람들은 인류봉건사회의 신분 질서를 뒤흔드는 엄청난 반역을 했기에 최충헌을 비롯한 지배층들로부터 극도의 분노를 사 끔찍한 방식의 고문과 처형과, 이후 시신전시를 당할 수도 있었는데 그래도 고문은 당하지 않았고, 처형방식도 능지처참이나 서양의 십자가형이나 화형에 비하면 나름 너그러웠다. 게다가 그들의 가족,친척들도 죽이지 않았다.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다 처형할 수 없어 불문에 붙였다. 이후 한충유를 합문지후에 제수하고, 순정은 노비에서 면하여 양민으로 삼았다.
최충헌은 해적과 100여 명을 피를 보지않고 강물에 수장합니다.
- 고문 없음
- 피 보지않음
- 연좌제 없음
- 나머지 불문에 붙임
이는 뭘 말해주는가?
최충헌이 해적의 마지막 부탁(유언)을 들어준 겁니다.
최충헌: 이놈 해적아, 뭐가 그리 급해서 반란을 도모했느냐!
조금만 기다리면 내 너와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었거늘!
해적: 마님, 아무리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든들 천지가 개벽하지 않고선 안되옵니다.
백x의 불x대x의 원수 예x을 모두 x여 한x의 한을 풀지xx선 xxx니다!
(↑ 뭔가 중요한 말인듯 보이나 판독불가)
최충헌: 해적아, 네 백제 왕족의 후손으로 억울한 심정은 충분히 알겠다.
니가 한 짓은 만번 죽어도 시원찮다만, 마지막으로 하고싶은 말이 있느냐.
그래도 나와 불x친구니 무엇이든 들어주겠다.
해적: 마님, 이제 모든걸 포기한 소인이 달리 무슨 말이 있겠습니까.
하오나 소인을 믿고 따라준 동지들을 그저 고통없이 보내주시고..ㅠㅠ
그 가족들은 죄가 없으니 불문에 붙여주십시오.
이제 소인은 가오니 부디 노비와 천민을 보살펴주시옵소서~! ㅠㅠ
최충헌: 그래..내 그리 하마.ㅠㅠ
그렇게 해적은 최충헌에게 마지막 하직인사로 큰 절을 올립니다.
풍덩!
이후로 최씨 정권에서 정적들을 똑같이 수장시킵니다.
근데 강물에 100여 명을 한꺼번에 수장시키니 얼마 후 부작용이 생깁니다.
돌에 묶여 가라앉은 시체들이 하나둘씩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겁니다.(시체가 부패하면 가스가 차오름)
강물에서 빨래하고, 목욕하고, 물을 떠 먹던 사람들은 이때 역병에 걸렸을까요?
그후 최씨 정권은 정적들을 강물이 아닌 바닷물에 수장시킵니다.
그리고 해적은 이때 만적으로 역사에 기록됩니다.
만적(萬積) = 만번 죽어도 시원찮다 해서 萬을 붙임
한반도 2천년 역사 제일의 지모(智謀), 해적 죽음
해적: 1149(?)~1198년, 향년 49세(?)
최충헌: 1149~1219년, 향년 70세
이후 최충헌은 해적의 마지막 유언을 받아들여 노예·천민을 위한 정책을 시행합니다.
평소에도 해적의 조언을 받았음은 물론입니다.
이것의 결과로써,
최씨 정권 60여 년: 노예·천민 반란 없음(있어도 중앙의 공권력이 미치지않는 남부지방)
최충헌: 親천민 정책 시행
집권기간: 1196 ~ 1219년, 23년 재임
애첩: 창기 출신 자운선(← 당시 고려 최고의 한왜 선녀 1)
교정도감: 사병(노예·천민)
해적의 불x친구
고려실록: 최충헌의 업적 삭제
최우: 親천민 정책 시행
집권기간: 1219 ~ 1249년, 30년 재임
애첩: 창기 출신 서련방(← 당시 고려 최고의 한왜 선녀 2)
정방·서방 설치
삼별초: 사병+관군(노예·천민)
한반도 2천년 역사 최고의 정치가
고려실록: 최우의 업적 삭제
최항: 親천민 정책 시행
집권기간: 1249 ~ 1257년, 8년 재임
애첩: 연화(蓮花)(← 최우의 또다른 애첩, 당시 고려 최고의 한왜 선녀 3)
친모: 서련방, 즉 최항은 서출
초명: 만전(萬全), 친동생 만종(萬宗) ← 최우가 만적을 추종해 萬을 따 이름지음
삼별초: 사병+관군(노예·천민)
고려실록: 최항의 업적 삭제
최의: 親천민 정책 시행
집권기간: 1257 ~ 1258년, 1년 재임
애첩: 심경(心鏡)(← 최항의 또다른 애첩, 당시 고려 최고의 한왜 선녀 4)
아버지 만전이 매형의 여종과 관계해 낳은 서자, 즉 최의는 천출
삼별초: 사병+관군(노예·천민)
마지막 최씨 정권: (천민 출신 부하) 김준 등에게 살해 당함
여·몽 항쟁 약 30년: 최씨 정권 아래 만백성(노예·천민) 존버
여·몽 연합군에 대항: 삼별초의 궤멸로 역사가 다시 후퇴 (천민 중심의 고려 → 귀족 중심의 고려)
결론: 최씨 정권, 재평가 해야 함
또 누가 있나요?
영남의 김사미·효심의 난이 있죠.
역시 이들도 백제 왕족의 후손으로 성은 眞, 이름은 불명.
金신라에 의해 멸문지화를 당한 후로 노예·천민이 되고, 당시 김사미와 효심은 절간의 관노비로 추정됩니다.
(이름에서 어째 또 여자라는 간지가..?)
아니 절간에서 대체 무슨 일들이 일어나길래..?
- 깊은 산 속
옹달샘절간 - 어젯밤
파티는너무도 외로웠지 - 모두 잠든 후에
- 아무도 모르게
- 사랑할거야
- 고요 속의 외침
- 무한궤도
누구 씨인지 모르는 아기 대량 출생
결국 韓, 辰, 백제로부터의 고귀한 성골 眞씨의 후손인 이들도 이때 멸족됩니다.
→ 영남의 眞씨 멸족
그나마 이들은 절간 출신들이라 그대로 기록합니다.
당시 권세를 쥔 이의민의 입김이겠죠.(이의민을 계림의 임금으로 추대)
얼마나 힘들었으면 문맹 이의민 따위를 임금으로..?
이 백제 유민들의 이루 말할 수 없던 인생을 잘 표현한 영화와 주제곡이 있습니다.
잘 모르는 분들은 한번 듣고 가실까요?
Rocky I ost - Going To Distance
이 록키 1의 엔딩곡은 아마 아는 사람만 아는 숨은 명곡일 겁니다.(엔딩곡이기에)
잔잔히 흐르는 멜로디는 백제 유민들이 끝까지 참고 견디는 걸 말해줍니다.
서서히 고조되는 부분과 절정이 바로 무신정권기에 터진 난을 말해줍니다.
록키 = 백제 유민 남자들 (망이, 만적, 김사미 등)
애드리안 = 백제 유민 여자들 (망이의 처, 만적의 연인, 효심 등)
아폴로 = 고려 관군
유튜브 ↓
(3) Rocky I ost Going To Distance. 영화 록키 주제곡 -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CwTyvTvTRgs
세계 챔피온 아폴로를 상대로 록키는 마지막 15 라운드까지 버팁니다.
혹자 曰 인생은 이기는 것이 아닌 끝까지 버티는 거다.ㅠㅠ
참고로 록키 2에선 아폴로와 절친이 됩니다.
이는 조선 초에 향·소·부곡이 철폐되는 것과 매칭됩니다.
철폐되는 이유는 글 맨 끝부분에 나옵니다.(→ ★)
이 농민·천민의 난은 노예·천민의 난 또는 백제 유민의 난으로 명칭을 바꿔야 한다고 봅니다.
농민이 곧 천민이고, 서민이 곧 천민인 시대입니다.
고대 & 중세 = 농민 = 서민 = 천민
서민은, 귀족이 천민과의 사이에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은 서민이 됩니다.(→ 서출)
귀족이 서민과의 사이에 자식을 낳아도 그 자식은 서민이겠죠.
이는 노예·천민의 후손과 더불어 한반도 인구 다수를 차지하는 계층으로 추정됩니다.
한편 서민이 천민과의 사이에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은 천민이 됩니다.(→ 천출)
만약 왕족이 서민과 혼인하면, 그 왕족은 서민으로 강등되고 서민은 사형이겠죠.
만약 왕족이 천민과 혼인하면, 그 왕족과 천민은 둘다 사형입니다.
즉 고려와 조선의 국법은 노예·천민과 아예 혼인하지 말라는 얘깁니다.

다시 돌아와, 백제 유민의 후손은 노예·천민으로 전락해 일부는 노예, 일부는 향·소·부곡민이 됩니다.
노예야 말할 거 없고, 향·소·부곡민의 3가지 특징을 다시 나열하겠습니다.
<향·소·부곡민의 3가지 특징>
- 일반 군현보다 세금이 무거움, 즉 하는 일이 많고 노동이 고됨
- 거주지 이전 불가, 즉 평생 한곳에서만 살아야 함
- 과거 시험 불가, 즉 신분상승 원천봉쇄함
과거 시험이 불가하니 이들은 점점 글과 멀어져 무지렁이가 됩니다.(→ 문맹 = 글을 모름 = 까막눈)
즉 통일신라 이후 고려, 조선을 거쳐 구한말까지 이들은 대를 이어 노예·천민으로서 문맹이었던 겁니다.
한반도 천하를 호령했던 백제 왕족의 후손은, 구한말까지 살아남았더라도 문맹입니다.
조부모, 부모를 통해 우린 백제 왕족이었다라고 그때도 자식들에게 전해줬을까요?
그럼 이들의 혈통이 본래 (왕족 포함) 백제 유민의 후손들이니, 한반도에서 일어난 흑역사를 보면 이렇습니다. ↓
백제 지배층 = 예맥 (고대 한어 사용자 → 고대 일어 사용자로 변신)
백제 피지배층 = 한왜 (고대 일어 사용자)
백제 멸망 후, 이들은 세월이 흐르며 예맥어 사용자로 변신하게 됩니다.
예맥어 = 고려어 = 조선어 = 한국어
백제 유민의 후손 = 노예·천민
<한반도에서 일어난 흑역사> ※ 전공을 세우면 노예·천민의 관적에서 풀려남
① 고려 말, 아지발도 외 왜구·왜군 vs *고려군에 편입되어 이들과 싸움
*고려군 = 다수의 노예·천민으로 구성
아지발도의 정체에 대해선 사상 최초로 밝히는 한반도 중·남부 원주민의 실체 참고
→ 보상 없음
고려군(노예·천민) 전사자 = 최소 3만 추정
② 임진왜란, 일본군 vs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싸움
*의병 = 다수의 노예·천민으로 구성
→ 보상 없음
의병(노예·천민) 전사자 = 최소 5만 추정
③ 구한말, *10만 동학농민군 vs 관군+일본군
*농민군 = 다수의 노예·천민 포함 가능성 높음
→ 보상 없음
농민군(노예·천민) 전사자 = 10만 추정

일본군의 중기관총으로 전멸
④ 일제시대, 만주 *독립군 vs 100만 일본 관동군과 게릴라전
*독립군 = 마님을 따라 만주로 이주, 독립군에 가담
→ 보상 없음
독립군(노예·천민) 전사자 = 다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보셨나요?
거기서 형제끼리 싸우는거랑, 같은 조상을 공유하는 두 나라가 이렇게 떼거지로 싸우는거랑 뭐가 다른가?
즉 백제 멸망 시, 수십만의 이산가족이 발생해 하나는 반도에 남고, 다른 하나는 열도로 건너갔을지 누가 아냐?
그러다 정말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납니다.
⑤ 이승만 정권, *30만 보도연맹 → 30만 양민 학살 당함
*이 글의 본론, 백제인 후손 30만 大학살
→ 보상 없음
⑥ 한국전쟁, *이등병 → 이름 모르는 수십만 쫄병 전사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굶어죽지않기 위해 군 입대
→ 보상 없음?
국군(노예·천민) 전사자 = 아래 내용 (6.25 전쟁 - 나무위키)
137,899명 사망
24,495명 실종
당시 국군 포로와 실종자 수 82,318명
• 민간인 사망 244,663명
• 피학살 128,936명
• 행방불명 393,212명
⑦ 한국전쟁, 북한 인민군 → 최소 십만 조선족, 인민군으로 투입
기차에서 내려, 여기는 조선땅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조선인민군이다.
→ 보상 없음?
인민군(노예·천민) 전사자 = 2십만~4십만 추정 (6.25 전쟁 - 나무위키)
④와 ⑦은 제외하더라도 ①에서 ⑥의 사망자 수 = 3만 + 5만 + 10만 + 30만 + 약 50만 = 약 98만
즉 100만 명입니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 100만은 미군과 싸우다 전사라도 했지, 이게~ 뭡니까~
(중일전선 제외 일본군 총 1,485,397명 전사 및 실종, 태평양 전쟁 - 나무위키)
*모두 지금까지 위에 쓴 노예·천민과 그 후손들입니다.
이들의 공통점 = 문맹
또한 이들은 구한말, 먹고 살기 위해 해외로 이주합니다.
재외동포 수 = 약 700만 명 (재외동포 - 나무위키)

재외동포가 제일 많은 미·중·일만 놓고 보면 이렇습니다.
미국 = 대규모 농장·철도 등의 개발 때문에 간 것으로 추정
중국 = 중국 내 조선족의 인구가 약 170만 명, 한국 포함 전 세계 조선족은 약 210만 명 추산
일본 = 일제시대에 역시 먹고 살기 위해 간 것으로 추정
여기서 백제의 유민은 100년 전, 미국과 일본으로 먹고 살기 위해 간 사람들입니다.
몇 마지기 논밭이 있는 예맥의 후손은 먹고 살만 해서 가지않음은 물론입니다.
이때 미국으로 간 사람들 후손 = 교포 3세나 4세로, 한국말과 한국의 혼은 잊지않고 사시길..
이때 일본으로 간 사람들 후손 = 교포 3세나 4세로, 제2의 백제 도래인, 무슨 말을 하리..ㅠㅠ
그럼 어떻게 해서 ⑤가 백제인 후손 30만 大학살이냐?
사실 이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보도연맹에 대한 글을 쓰리라곤 꿈에도 생각치 못했습니다.
<보도연맹 학살 사건 - 나무위키>
40명 중에서 거의 반수를 골라내어 호 앞에 세웠다. 줄지어 선 사형인에게 마지막 할 말이 있는가 하고 물었다. 어부나 농민 차림의 청년들은 우리들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러냐고 하며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한 늙은이는 "영명하신 성주님 살려달라"고 소리쳐 울었다. 그러나 도시(부산)에서 끌려온 젊은이들은 "뭣 때문에 죽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죽는다고 했고, 이왕 죽는 몸이니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고 죽겠다고 했다. 이 말이 떨어지자 총은 일제히 불을 뿜었다. 마구 쏘는 총성 속에 거꾸러지며 발악하는 아우성소리, 대한민국 만세 소리가 처절히 들려왔다. 붉은 피를 쏟는 시체는 아직도 꿈틀거린 채 호 속에 던져져 가고 그 위에 흙이 덮어져 갔다.
당시 보도연맹원 학살의 한 현장 묘사
6.25 전쟁 발발 직후 북한군에게 함락된 지역에서 일부 보도연맹원들이 이적 행위(군경과 그들의 가족에 대한 밀고 및 체포, 살해 등)를 하자 여순사건의 영향을 받은 이승만 정부가 보도연맹원들의 이적 행위에 대한 '처리'를 명령했는데 이 과정에서 전국의 보도연맹원들이 육군본부 정보국 CIC, 헌병, 경찰, 해군정보참모실, 공군정보처 소속 군인, 특히 우익청년단원 이하 서북청년회 등에 의해 소집, 연행, 구금된 후 집단 학살됐다. 연구 자료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당시 전국적으로 민간인 최소 6만 명 최대 30만 명이 학살되었다고 추정한다. 20세기 한국사에서 지워질 수 없는 비극적 사건이다.
이 사건은 민간인들이 보도연맹이라는 단체에 소속되었다는 이유로 이승만 정부에 살해당한, 6.25 전쟁 당시 발생한 끔찍한 대량학살이자 명백한 전쟁범죄였다. 당시 공무원들은 보도연맹 가입 실적을 올리려고 공산주의자 출신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까지 무리하게 보도연맹에 가입시켰기에 실제 보도연맹 구성원들은 개인의 이념 이력과는 무관한 경우가 많았으며 심지어 보도연맹에 이름을 올리지도 않았던 평범한 주민들까지도 학살 과정에 휘말려 숱하게 죽임을 당하였고, 공산당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우익 청년단 단원이 경찰이 마을 당산나무를 베어 파는 것을 막았다가 미움을 샀다는 이유만으로 보도연맹 학살 와중에 잡혀가서 살해된 일까지 있었다.
↑ 이거 실화야?
<보도연맹 학살 사건 주 15 - 나무위키>
[15] 당시에는 '보도연맹 명단에 이름을 올리면 쌀을 준다', '밀가루를 준다'고 홍보하면서 공무원들이 열심히 할당치를 채웠고, 훗날 그렇게 이름을 올렸던 평범한 사람들이 대부분 학살을 당하게 되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해당 상황이 잘 묘사되었다.
↑ 피눈물 나는 실화입니다.

보도연맹증
당시 한글은 알아도 한자를 모르는 수많은 문맹들이 이유도 모른 채 떼죽음 당하였습니다.
그럼 이때 백제 왕족의 후손도 떼죽음 당하였을까요?
고려시대에 멸족된 백제 왕족의 후손은 이렇다 했습니다. ↓
眞(=眞牟)씨의 후손: 김사미·효심 → 영남의 眞씨 멸족
비류의 후손: 우이·우소이(優伊 ·優所伊) → 우씨 멸족
온조의 후손: 해적(解積) → 해씨 멸족
호남의 眞씨는?
백제 미마나 60만 명과 함께 대부분 열도로 건너갔다고 봅니다.(사상 최초로 밝히는 백제 미마나 60만人 구출 대작전)
그럼 구(仇)씨는?
나무위키에 이렇게 나옵니다.(구태는 초고다 1)
<구(성씨) 2. 具(←仇) - 나무위키>
창원 구씨(昌原 具氏)는 경상남도 창원시를 본관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성씨이다. 원래는 仇씨였는데, 정조 15년(1791) 임금의 명으로 具씨로 바뀌었다.
나머지 여(餘)씨는?
아빠와 엄마가 보도연맹에 가입해 쌀 2되를 얻어옵니다.
나중에 부모가 끌려가면 애들이 고아가 됨은 물론입니다.
형과 누나가 보도연맹에 가입해 쌀 2되를 얻습니다.
그걸 보고 온가족이 보도연맹에 가입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온가족은 이유도 모른채 끌려갑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함은 덤입니다.
이때까지 살아남은 백제 왕족의 후손인 여씨들은 쌀을 얻기위해 보도연맹에 가입합니다.
⑤ 이승만 정권, *30만 보도연맹 → 30만 양민 학살 당함
*이 글의 본론, 백제인 후손 30만 大학살
살아남은 고아들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생사를 알 수 없습니다.
즉 대부분 멸족된 걸로 보입니다.
호남의 眞씨: 백제 멸망 후, 대부분 열도로 건너감
구(仇)씨: 具씨로 변신
여(餘)씨: 30만 보도연맹 大학살, 멸족
이제 보도연맹증에 있는 강령을 보겠습니다.
위 자료를 보시는 바대로, 국한문 혼용이지만 한자가 더 많아 보입니다.
<강령> 보도연맹 학살 사건 - 나무위키
- 우리는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하자.
- 우리는 망국적 북한 괴뢰 정권을 절대 반대하자.
- 우리는 인류의 자유와 민족성을 무시하는 공산주의 사상을 배격하자.
- 우리는 이론 무장을 강화하여 남북로동당의 멸족 정책을 분쇄하자.
- 우리는 민족 진영의 각 정당, 사회 단체와 보조를 일치하여 대한 기상을 발휘하자.
강령의 내용대로 라면, 빨갱이 때려잡자 입니다.
근데 왜?
이유는 둘째치고, 그들은 조상 대대로 노예·천민으로 살아온 노예·천민의 후손들이었습니다.
그 노예·천민은 바로 통일신라 때부터의 노예·천민입니다.
즉 백제의 유민들인 겁니다.
<백제 유민>
| 金신라 → | 고려 → | 조선 |
| 노예·천민 → | 노예·천민 → | 노예·양민(천민과 다를 바 없음) |
노예·천민이기에 글을 못 배우고, 노예·천민의 후손이기에 역시 글을 못 배웁니다.
그중엔 백제의 왕족·귀족이 없다란 보장도 없을 겁니다.
근데 정작 백제는 예맥의 유민을 받아준 나라였습니다.
조선 유민 받아줌 (사로국 정착)
비류·온조 집단 받아줌 (우휴모탁국·백제국)
남옥저 구파해 집단 받아줌 (辰)
그리고 말갈 김알지도 받아줬던가요?
<탈해>
~중략~
그리고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자라나자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났으니, 그의 이름을 알지(閼智)라고 하였다. 금빛이 나는 궤짝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金)씨라고 하였다. 시림을 고쳐 계림(雞林)이라 부르고, 이를 나라 이름으로 하였다.
사실 여부를 떠나, 사로국의 탈해가 김알지를 받아주지 않았다면..?
이런 백제를 멸망시킨 金신라는 그 왕족 이하 유민들을 노예·천민화 했습니다.
이쯤에서 생각해보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에 고려사가 그 역사의 진실을 조금도 전하지않습니다.
즉 오늘날 고려시대의 노예·천민의 난은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백제가 멸망하고 일어난 노예·천민의 난은 단순한 노예·천민의 난이 아닙니다.
그건 백제 유민의 난이었던 겁니다!
끝으로, 수많은 향·소·부곡이 사료에 있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한반도 남부에 집중돼 있는걸 알 수 있은즉, 그곳엔 백제의 유민들이 거주했던 곳입니다.
★조선 초에 대부분이 혁파되었다니 양녕대군의 힘과 노력이 컸던거 같습니다.ㅠㅠ
하지만 대부분 혁파되었다는 것이 아래 자료의 향·소·부곡입니다.
즉 혁파되기 전에는 얼마나 많은 향·소·부곡이 있었던 걸까요?
★통일신라에서 고려 말까지는 아래 자료보다 훨씬 많은 향·소·부곡이 있었던 겁니다.
동국여지승람 = 조선 성종 12년(1481)에 간행된 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 = 중종 26년(1530) 증보해 새롭게 간행
즉 삼국사기 지리에 나온 주·군·현을 제외한 대부분의 영역이 향·소·부곡이라 보면 됩니다.
이 말인즉슨, 소수의 지배층을 제외한 인구 대다수가 노예·천민이라는 얘깁니다.(← 金신라와 고려)
<참고 자료> 향·소·부곡 - 위키백과
향·소·부곡들의 이름은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기타 단편적인 자료들로부터 부분적으로 추적할 수 있다. 그런데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열거된 향·소·부곡은 대개 일치하거나 표기만 달라져 있으나 일부 변천이 있었던 것도 보인다. ★이들은 조선 초까지 거의 혁파되었으므로 오늘날에는 상세를 알 수 없는 것이 많다. 아래 목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적(古跡)으로서 나와 있는 향·소·부곡(장·처 포함)들로, 행정 구역은 조선시대 당시 기준이다.
경기도
여주목: 방근곡처(防斤谷處), 신제처(新堤處), 신잉이소(新仍伊所), 등신장(登神莊).
양근군: 속현인 미원현(迷原縣)은 공민왕 5년에 현으로 승격되기 전에는 장(莊)이었다고 한다.
음죽현: 잘아촌처(迲村處).
양지현: 고안부곡(高安部曲), 대곡부곡(大谷部曲), 목악부곡(木岳部曲), 제촌부곡(蹄村部曲). 양지현은 과거 수주(水州)의 양량부곡(陽良部曲)이었는데 조선 정종 대에 현으로 승격한 것이다. 또 태종 13년 현치를 광주(廣州) 추계향(秋溪鄕)으로 옮기고 땅이 좁아 전술한 4개 부곡을 광주에서 떼어 붙였다.
수원도호부: 포내미부곡(浦內彌部曲), 육내미부곡(陸內彌部曲), 쟁홀부곡(爭忽部曲), 제촌부곡(堤村部曲), 청구부곡(靑丘部曲), 사량부곡(沙梁部曲), 공촌부곡(公村部曲), 주석향(柱石鄕), 분촌향(盆村鄕), 공이향(工二鄕), 사정처(奢井處), 금음촌처(今音村處), 양간처(楊干處), 삼봉처(三峯處), 고등촌처(高等村處), 심곡처(深谷處), 유제처(楡梯處), 오타장(五朶莊), 종덕장(宗德莊), 신영장(新永莊). 또 폐지된 고려시대의 정송현(貞松縣)에는 본래 송산부곡(松山)이 있었다고 한다.
부평도호부: 황어향(黃魚鄕).
남양도호부: 분황부곡(奔黃部曲), 양등간처(陽等干處).
인천도호부: 이포부곡(梨浦部曲).
안성군: 감미탄부곡(甘彌呑部曲), 마전부곡(麻田部曲). 또 공민왕이 군으로 승격시킬 때 수주(水州)에 떼어준 4개 부곡으로 감미탄, 마전, 양량(陽良), 신곡(薪谷)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중 양량부곡은 조선 정종 대에 양지현으로 분리되었다.
진위현: 송장부곡(松莊部曲), 천장부곡(川場部曲), 또 현 자체가 과거 연달부곡(淵達)이었다고 전한다.
양천현: 강향(薑鄕).
용인현: 1413년(태종 13년) 용구현과 처인현을 합쳐 용인현을 만들었는데, 처인현은 과거 처인부곡(處仁)이다.
양주목: 해촌처(海村處), 송산처(松山處).
고양군: 황조향(荒調鄕), 장사향(長史鄕), 율악부곡(栗岳部曲), 파을곶소(巴乙串所), 건자산소(巾子山所). 또 조선시대 고양군으로 합쳐지며 폐현이 된 부원현(富原縣)은 과거 용산처(龍山處)였다고 한다.
영평현: 유석향(乳石鄕), 용곡소(龍谷所).
포천현: 수암소(垂巖所).
적성현: 적암향(赤巖鄕).
교하현: 석천향(石淺鄕).
가평현: 개탄소(皆呑所), 지양소(紙壤所).
강화도호부: 해령향(海寧鄕).
충청도
충주목: 단월부곡(丹月部曲), 광반석부곡(廣反石部曲), 탄촌부곡(炭村部曲), 이차탄부곡(伊次呑部曲), 감물내미부곡(甘勿內彌部曲), 소잉림부곡(所仍林部曲), 덕산향(德山鄕), 하맥곡처(下麥谷處), 상맥곡처(上麥谷處), 연탄처(淵呑處), 대조곡처(大鳥谷處). 또한 당시 이미 폐현이 된 익안현(翼安縣)은 본래 다인철소(多仁鐵所)였으나 주민들이 몽골군을 막아낸 공로로 고려 고종 대에 현으로 승격된 바 있다.
청풍군: 목촌소(木村所), 전산소(箭山所), 결매소(結買所).
단양군: 금의곡소(金衣谷所).
괴산군: 세우처(世于處), 사량저처(沙良渚處), 모갑소(毛𡊠所), 주을장이소(主乙長伊所).
음성현: 금촌부곡(金村部曲), 파천부곡(巴川部曲).
영춘현: 입석부곡(立石部曲), 답곡부곡(沓谷部曲), 소치곡부곡(所耻谷部曲), 택평소(澤坪所).
제천현: 원림부곡(員林部曲), 양성부곡(陽城部曲), 소당부곡(小堂部曲), 산척처(山尺處), 공재소(空梓所).
청주목: 오근부곡(吳根部曲), 석곡부곡(錫谷部曲), 배음소(拜音所), 추자소(楸子所), 덕평향(德平鄕), 조풍부곡(調豐部曲), 신은소(新銀所), 한신부곡(閒身部曲).
천안군: 모산부곡(毛山部曲), 신종부곡(新宗部曲), 덕흥부곡(德興部曲), 돈의향(頓義鄕).
옥천군: 관성향(管城鄕), 산집암향(酸汁巖鄕), 초집기소(酢汁器所), 어모소(於毛所), 적현부곡(赤垷部曲).
문의현: 자인부곡(慈仁部曲).
직산현: 구실향(救實鄕).
청안현: 정안부곡(靜安部曲), 곡은곡소(谷銀谷所), 염곡소(念谷所), 유통소(游筒所), 난곡소(薍谷所).
진천현: 금천향(金泉鄕), 향림부곡(香林部曲), 협탄소(脇呑所).
보은현: 임언부곡(林堰部曲).
영동현: 풍곡부곡(楓谷部曲), 앙암부곡(仰巖部曲), 율곡소(栗谷所).
황간현: 금화부곡(金化部曲).
청산현: 주성부곡(酒城部曲), 계은천소(界銀川所), 거이소(居尒所).
공주목: 명학소(鳴鶴所), 청류부곡(淸流部曲), 양화부곡(良化部曲), 완부부곡(薍釜部曲), 이인부곡(里仁部曲), 미화부곡(美化部曲), 귀지부곡(貴智部曲), 금단소(今丹所), 갑촌소(甲村所), 촌개소(村介所), 복수소(福水所), 박산소(撲山所), 금생소(金生所).
임천군: 안량부곡(安良部曲), 고다지소(古多只所), 소라소(召羅所), 금암소(今巖所), 금물촌처(今勿村處).
한산군: 안보향(安保鄕), 안곡소(鷃谷所).
전의현: 대부향(大部鄕), 가을정처(加乙井處).
은진현: 채운향(彩雲鄕).
회덕현: 서봉부곡(西峯部曲), 흥인부곡(興仁部曲), 침이소(針伊所).
연산현: 광소부곡(廣炤部曲).
이산현: 저정소(猪井所), 등수소(登水所).
부여현: 석전부곡(石田部曲), 풍지소(楓枝所).
연기현: 토흥부곡(土興部曲), 연천소(鷰川所).
홍주목: 용천부곡(龍泉部曲), 대산부곡(大山部曲), 궁경부곡(躬耕部曲), 화성부곡(化城部曲), 운천향(雲川鄕), 정성향(政聲鄕), 용화향(用和鄕), 흥고향(興古鄕), 옥사금소(玉賜金所), 상전소(上田所), 고이산소(高伊山所), 명해소(明海所), 오사소(烏史所), 마여소(馬餘所). 또 조선시대 이미 폐현이 된 합덕현(合德縣)은 본래 합덕부곡(合德部曲)이었으나 이곳 출신의 환관 황석량(黃石良)이 원나라에서 권세를 얻어 현으로 승격되었다.
서천군: 문조향(文照鄕), 임술소(林述所)
서산군: 인정부곡(仁政部曲), 정소부곡(井所部曲), 정소부곡(井所部曲), 조립부곡(助立部曲), 광지향(廣地鄕), 안면소(安眠所), 화변소(禾邊所), 위포소(葦浦所).
태안군: 오산소(吳山所), 양골소(梁骨所), 복평향(福平鄕).
면천군: 도촌소(桃村所), 온월부곡(溫月部曲), 가리저부곡(加里渚部曲).
온양군: 개흥부곡(開興部曲), 상곡부곡(上谷部曲), 목촌부곡(木村部曲), 박산부곡(朴山部曲), 독촌부곡(禿村部曲), 묘산부곡(卯山部曲).
평택현: 백랑부곡(白浪部曲).
홍산현: 비도소(非刀所), 오합소(吾合所).
덕산현: 내박소(乃朴所), 신곡소(薪谷所).
청양현: 영수부곡(永壽部曲), 예본부곡(乂本部曲), 횡천소(橫川所).
대흥현: 거변소(居邊所).
비인현: 옥전향(沃田鄕).
결성현: 안흥부곡(安興部曲).
보령현: 현하부곡(懸河部曲), 보원부곡(寶院部曲), 금신부곡(金神部曲), 건자산소(巾子山所).
아산현: 황촌부곡(黃村部曲), 덕천향(德泉鄕).
예산현: 입석소(立石所), 화물장(化物莊).
해미현: 염솔부곡(廉率部曲), 소당부곡(炤堂部曲), 염정부곡(鹽貞部曲), 몽웅향(夢熊鄕), 사곡소(寺谷所).
경상도
경주부: 구사부곡(仇史部曲), 죽장부곡(竹長部曲), 북안곡부곡(北安谷部曲), 성법이부곡(省法伊部曲), 팔조부곡(八助部曲), 대포부곡(大庖部曲), 대창부곡(大昌部曲), 남안곡부곡(南安谷部曲), 근곡부곡(根谷部曲), 도계부곡(桃界部曲), 호명부곡(虎鳴部曲), 호촌부곡(虎村部曲).
울산군: 범서부곡(凡西部曲).
양산군: 와곡부곡(瓦谷部曲), 범어부곡(凡魚部曲), 원포부곡(源浦部曲), 범곡부곡(凡谷部曲), 어곡소(於谷所).
동래현: 고지도부곡(古知道部曲), 조정부곡(調井部曲), 형변부곡(兄邊部曲), 부산부곡(富山部曲), 생천향(生川鄕).
청하현: 북아부곡(北阿部曲), 등정부곡(等汀部曲), 김해부곡(金海部曲), 모등곡부곡(毛等谷部曲), 신지부곡(新池部曲), 우천부곡(于川部曲), 남계부곡(南界部曲).
영일현: 도지부곡(都只部曲).
장기현: 신촌부곡(新村部曲), 팔오곡부곡(八於谷部曲), 허오리부곡(許於里部曲).
기장현: 고촌부곡(古村部曲), 결미부곡(結㫆部曲), 사량촌부곡(沙良村部曲), 사야부곡(沙也部曲).
안동대도호부: 개단부곡(皆丹部曲), 소천부곡(小川部曲), 요촌부곡(蓼村部曲), 하양부곡(河壤部曲), 신양부곡(新陽部曲), 소라부곡(召羅部曲), 토곡부곡(吐谷部曲). 또한 속현 중 길안현(吉安縣)은 길안부곡(吉安部曲)을 충혜왕 때 승격시킨 것이고, 내성현(奈城縣)은 퇴곶부곡(退串部曲)을 충혜왕 때 승격시킨 것이고, 춘양현(春陽縣)은 가야향(加也鄕)을 충렬왕 때 승격시킨 것이고, 재산현(才山縣)은 덕산부곡(德山部曲)을 충선왕 때 승격시킨 것이다.
영해도호부: 석보부곡(石保部曲), 수비부곡(首比部曲), 백석부곡(白石部曲), 창숙부곡(倉稤部曲), 묘곡부곡(畝谷部曲), 주곡부곡(主谷部曲), 창석부곡(唱石部曲), 가하부곡(賈下部曲), 가서향(加西鄕). 또한 속현인 청기현(靑杞縣)은 본래 청부현(靑鳧縣)의 대청부곡(大靑部曲)과 영양현(英陽縣)의 소청부곡(小靑部曲)이었는데 충렬왕이 대·소청부곡을 합하여 청기현으로 삼았다.
예천군: 고림부곡(高林部曲), 효천부곡(孝川部曲), 보진부곡(寶進部曲), 동로평소(冬老坪所). 이외에 성씨 조에 지명으로 선천(善川), 연천(連川), 웅천(熊川), 금천(金川), 우니곡(亏尒谷)이 써있으나 어디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영천군: 벌지부곡(伐只部曲), 마구부곡(馬駒部曲), 용산부곡(龍山部曲), 임지도부곡(林只刀部曲), 성을량부곡(省乙良部曲), 오등부곡(烏等部曲), 유수부곡(楡水部曲), 답곡부곡(沓谷部曲), 이곡부곡(泥谷部曲), 내소리부곡(奈小里部曲).
풍기군: 감곡부곡(甘谷部曲), 대룡산부곡(大龍山部曲), 임곡소(林谷所).
의성현: 피촌향(皮村鄕), 신촌부곡(新村部曲), 굴어곡부곡(屈於谷部曲), 우곡부곡(牛谷部曲), 골라소(骨羅所).
영덕현: 오보부곡(烏保部曲), 이이아부곡(伊已牙部曲), 지품부곡(知品部曲).
봉화현: 물야부곡(勿也部曲), 양곡부곡(良谷部曲), 매토부곡(買吐部曲).
진보현: 천숙부곡(泉宿部曲), 춘감부곡(春甘部曲), 파질부곡(巴叱部曲), 고을마부곡(古乙亇部曲), 성부부곡(省夫部曲).
군위현: 소소보부곡(召召保部曲), 잉미곡부곡(仍未谷部曲).
비안현: 퇴곡부곡(退谷部曲), 신평부곡(新平部曲), 하필점이부곡(下筆坫伊部曲), 물실부곡(勿失部曲).
예안현: 조선시대 이미 폐현이 된 의인현(宜仁縣)은 본래 안덕현(安德縣)의 지도보부곡(知道保部曲)이었으나 공민왕이 현으로 승격시켰고 공양왕이 예안현에 붙였다.
용궁현: 양정부곡(陽井部曲), 풍양부곡(豐壤部曲), 하남부곡(河南部曲), 무송부곡(茂松部曲), 평구부곡(平丘部曲), 곡계부곡(曲溪部曲).
대구도호부: 자이소(資已所).
밀양도호부: 두야보부곡(豆也保), 이동음부곡(伊冬音), 금음물부곡(金音勿), 내진향(來進鄕), 운막향(雲幕鄕), 신포향(薪浦鄕), 저대부곡(楮代), 오정부곡(烏丁), 평릉부곡(平陵), 음곡소(陰谷所), 고매부곡(古買), 곡량촌부곡(谷良村), 파서방부곡(破西防), 근개부곡(近皆), 양량부곡(陽良). 또한 고려 충렬왕 원년에 이곳 밀성군 백성들이 진도 삼별초에 호응하여 군수를 죽이고 모반하자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 강등했다가 다시 높였다. 또 속현인 수산현(守山縣)은 본래 천산부곡(穿山部曲)인데 고려 때 현으로 승격시켰다.
청도군: 매전부곡(買田部曲), 북곡부곡(北谷部曲), 부곡부곡(釜谷部曲).
하양현: 양량촌부곡(陽良村部曲), 이지부곡(貍只部曲), 안심소(安心所). 또한 조선시대 이미 폐현이 된 이지현(梨旨縣)은 본래 영주(永州)의 이지은소(梨旨銀所)였다.
인동현: 저항부곡(猪項部曲).
현풍현: 구지산부곡(仇知山部曲).
의흥현: 피토부곡(皮土部曲), 고로곡부곡(古老谷部曲). 또한 고적조에 조선시대 취락 니화촌(尼火村)이 함께 써 있다.
신녕현: 신촌부곡(新村部曲).
영산현: 마천부곡(馬川部曲), 왕기음부곡(王岐音部曲), 길곡부곡(吉谷部曲), 오가이향(烏加伊鄕), 퇴곡소(退谷所), 수다이소(水多伊所).
창녕현: 신문부곡(薪文部曲).
상주목: 장천부곡(長川部曲), 무림부곡(茂林部曲), 연산부곡(連山部曲), 백원부곡(白原部曲), 양녕부곡(壤寧部曲), 하해부곡(河海部曲), 양보부곡(陽寶部曲), 관제부곡(寬濟部曲), 가량부곡(加良部曲), 보량부곡(保良部曲), 평안부곡(平安部曲), 평산부곡(平山部曲), 주선부곡(主善部曲), 단곡부곡(丹谷部曲), 생물부곡(生物部曲), 선은소(鐥銀所), 해상이소(海上伊所). 또한 폐현이 된 공성현(功城縣)은 본래 신라의 대병부곡(大幷部曲)이었고, 폐현이 된 영순현(永順縣)은 본주 북면(北面)의 임하촌(林下村)이었다고 한다.
성주목: 신곡부곡(薪谷部曲), 위곡부곡(葦谷部曲), 선남부곡(船南部曲).
선산도호부: 비산부곡(緋山部曲), 가덕부곡(加德部曲), 칠창부곡(漆倉部曲), 예능부곡(藝能部曲), 도개부곡(道開部曲), 보미부곡(寶㫆部曲), 고아부곡(高牙部曲), 웅곡부곡(熊谷部曲), 안곡부곡(安谷部曲), 질곡부곡(秩谷部曲).
김산군: 굴곡부곡(屈谷部曲), 신가량부곡(新加良部曲), 조마부곡(助馬部曲), 어미곡부곡(於未曲部曲), 영명향(迎命鄕), 황금소(黃金所), 수다곡소(水多谷所), 파매처(巴買處).
개령현: 달오촌부곡(達烏村部曲), 무차곡부곡(茂佽谷部曲), 다질촌부곡(多叱村部曲), 하활곡부곡(下活谷部曲), 상오지부곡(上烏知部曲), 금물도부곡(今勿刀部曲).
지례현: 월이곡부곡(月伊谷部曲), 사등량부곡(沙等良部曲), 두의곡부곡(頭衣谷部曲).
문경현: 벌천부곡(伐川部曲), 고곡부곡(高谷部曲), 견천부곡(絹川部曲), 소산천부곡(小山川部曲), 마량부곡(馬良部曲), 잉을항소(仍乙項所). 이외에 성씨 조에 지명으로 병곡(柄谷), 적촌(赤村) 등이 써 있으나 어디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함창현: 이안부곡(利安部曲), 덕봉부곡(德峯部曲), 금천소(金川所).
진주목: 살천부곡(薩川部曲), 화개부곡(花開部曲), 가차례부곡(加次禮部曲), 어아부곡(於牙部曲), 침곡부곡(針谷部曲), 율곡부곡(栗谷部曲), 부곡부곡(釜谷部曲), 인담부곡(鱗潭部曲), 송자부곡(松慈部曲), 월아부곡(月牙部曲), 대야천부곡(大也川部曲), 송곡향(松谷鄕), 복산향(福山鄕), 벌대소(伐大所), 수곡소(水曲所), 화곡소(火谷所), 대곡소(大谷所), 수대곡소(水大谷所), 갈곡소(葛谷所), 명진부곡(溟珍部曲), 진성부곡(晉城部曲). 또한 폐현이 된 흥선현(興善縣)은 본래 유질부곡(有疾部曲)이었다.
합천군: 좌이부곡(坐伊部曲), 말곡향(末谷鄕), 박산소(樸山所).
초계군: 대여곡소(代如谷所).
함양군: 공안부곡(功安部曲), 마천소(馬川所), 의탄소(義呑所).
곤양군: 유실부곡(有實部曲), 금양부곡(金陽部曲), 다음향(多音鄕), 포곡소(蒲谷所), 반룡소(盤龍所).
남해현: 우산소(于山所).
사천현: 관해곡소(觀解谷所).
삼가현: 면현소(緜峴所), 토촌소(吐村所).
의령현: 정골부곡(正骨部曲), 우물곡부곡(于勿谷部曲), 지산향(砥山鄕), 장곡향(藏谷鄕), 저지소(楮旨所), 부곡소(釜谷所), 동곡소(桐谷所), 궁곡소(弓谷所).
산음현: 개품부곡(皆品部曲), 송곡소(松谷所).
안음현: 가을산소(加乙山所). 또한 고읍인 감음(感陰)은 본래 신라 남내현(南內縣) 또는 경덕왕이 개칭하여 여선현(餘善縣)인데, 의종 15년에 현 사람 자화(子和)가 임금에 관한 무고를 하여 부곡으로 강등시켰다가 공민왕 때 감무를 되돌리고 이안현을 내속시켰다.
단성현: 송계부곡(松界部曲), 문을부곡(文乙部曲).
김해도호부: 태산부곡(太山部曲), 수다부곡(水多部曲), 제을미향(齊乙彌鄕), 성화례향(省火禮鄕), 달음포향(達音浦鄕), 감물야향(甘勿也鄕).
창원도호부: 우북지부곡(于北只部曲), 차의상향(車衣上鄕), 신소향(新所鄕), 동천향(銅泉鄕), 내포향(內浦鄕), 안성소(安城所).
함안군: 본산부곡(本山部曲), 감물곡부곡(甘勿谷部曲), 간곡소(杆曲所), 지곡소(知谷所), 추자곡소(楸子谷所), 비사곡소(比史谷所), 손촌소(損村所). 또한 폐현이 된 현무현(玄武縣)은 본래 신라의 소삼현(召彡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가 나중에 소삼부곡(召彡部曲)으로 강등되었다.
거제현: 하청부곡(河淸部曲), 고정부곡(古丁部曲), 죽토부곡(竹吐部曲), 말근향(末斤鄕), 덕해향(德海鄕), 연정장(鍊汀莊).
고성현: 곤의부곡(坤義部曲), 해빈부곡(海濱部曲), 도선부곡(道善部曲), 진여부곡(珍餘部曲), 구허부곡(丘墟部曲), 죽림부곡(竹林部曲), 박달부곡(博達部曲), 활촌부곡(活村部曲), 궤촌부곡(跪村部曲), 발산부곡(鉢山部曲), 곡산향(曲山鄕), 녹명향(鹿鳴鄕), 어례향(魚禮鄕), 보령향(保寧鄕), 적진향(積珍鄕), 의선향(義善鄕).
칠원현: 부곡부곡(釜谷部曲), 우질포향(亏叱浦鄕). 또한 속현인 귀산현(龜山縣)은 본래 성법부곡(省法部曲)이었다.
진해현: 부산향(富山鄕).
웅천현: 사법부곡(寺法部曲), 천읍부곡(川邑部曲). 또한 폐현이 된 완포현(莞浦縣)은 본래 합포현(合浦縣)의 완포향(莞浦鄕)인데 고려 때 현으로 승격되었다.
전라도
전주부: 경명향(景明鄕), 양량소(陽良所), 두모촌소(豆毛村所), 또한 전주부는 고려시대 공민왕 4년에 원나라 사신을 가둔 일로 부곡으로 강등하였으나 1년만에 되돌렸다.
익산군: 흑석부곡(黑石部曲).
김제군: 제견향(堤見鄕), 마천소(馬川所), 재남소(才南所).
고부군: 모조부곡(毛助部曲), 우일부곡(雨日部曲), 부안향(富安鄕), 황조향(荒調鄕), 수금향(水金鄕), 음성향(音聲鄕), 독변소(禿邊所), 덕림소(德林所).
금산군: 대곡소(大谷所), 안성소(安城所), 횡천소(橫川所).
진산군: 원산향(猿山鄕), 금악소(金岳所), 동계소(銅界所), 횡정소(橫程所).
여산군: 피제부곡(皮堤部曲), 공촌부곡(公村部曲).
만경현: 이파산소(泥波山所).
금구현: 종정부곡(從政部曲), 대율부곡(大栗部曲).
정읍현: 답곡부곡(畓谷部曲), 수곡부곡(水谷部曲).
흥덕현: 좌향(坐鄕), 남조향(南調鄕), 북조향(北調鄕).
부안현: 고촌향(鼓村鄕), 신덕소(申德所).
용안현: 창산소(倉山所).
함열현: 도평부곡(桃坪部曲), 대위향(大位鄕).
태안현: 대곡부곡(大谷部曲), 개문부곡(開門部曲), 도전부곡(桃田部曲), 능향(綾鄕), 나향(羅鄕).
나주목: 평구부곡(平丘部曲), 금마부곡(金磨部曲), 거평부곡(居平部曲), 군산부곡(群山部曲), 극포부곡(極浦部曲), 임성부곡(任城部曲), 종남향(從南鄕), 손리향(孫利鄕), 수다소(水多所).
광산현: 양고부곡(良苽部曲), 경지부곡(慶旨部曲), 벽진부곡(碧津部曲).
영암군: 회의부곡(懷義部曲), 심정부곡(深井部曲), 귀인부곡(貴仁部曲), 송정부곡(松井部曲), 진남향(鎭南鄕), 동백소(冬柏所).
영광군: 진개부곡(陳介部曲), 녹사부곡(綠沙部曲), 홍농부곡(弘農部曲), 망운부곡(望雲部曲), 공아부곡(貢牙部曲), 조지부곡(造紙部曲), 육창향(陸昌鄕), 대안향(大安鄕).
함평현: 다경부곡(多慶部曲), 영풍향(永豐鄕).
고창현: 대량평부곡(大良坪部曲), 도성부곡(陶成部曲), 덕암소(德巖所).
진원현: 마량부곡(馬良部曲).
무장현: 약수향(藥水鄕), 궁산처(弓山處).
남평현: 도민부곡(道民部曲), 율촌부곡(栗村部曲), 운곡소(雲谷所).
장흥도호부: 유치향(有恥鄕), 안양향(安壤鄕), 어산향(語山鄕), 도내산향(徒內山鄕), 아서향(阿西鄕), 요랑소(䭜狼所), 수태소(守太所), 칠백유소(七百乳所), 정산소(井山所), 운고소(雲膏所), 정화소(丁火所), 창거소(昌居所), 웅점소(熊岾所), 가좌소(加佐所), 거개소(居開所), 가을평소(加乙坪所), 향여소(香餘所).
강진현: 운수부곡(雲水部曲), 영가부곡(永可部曲), 송계부곡(松溪部曲), 미포부곡(彌浦部曲), 좌곡부곡(佐谷部曲), 평덕향(平德鄕), 대구소(大口所), 대곡소(大谷所), 칠양소(七陽所), 산계소(山計所), 산심소(山深所), 종옥소(種玉所), 구계소(舊溪所), 부원소(富元所).
해남현: 송지부곡(松旨部曲), 팔마부곡(八馬部曲), 신갈부곡(神葛部曲), 북평향(北平鄕), 마봉소(馬峯所). 또한 폐현이 된 옥천현(玉川縣)은 본래 영암군 냉천부곡(冷泉部曲)이었고 폐현이 된 옥산현(玉山縣)은 본래 사라향(沙羅鄕)이었다.
남원도호부: 금안부곡(金岸部曲), 원천부곡(源川部曲), 산동부곡(山東部曲), 고정부곡(古丁部曲), 덕성향(德城鄕), 도지향(道知鄕), 수도향(守道鄕), 남안향(南安鄕), 경도향(京徒鄕), 보유향(寶有鄕), 거리향(居利鄕), 백파향(白波鄕), 아인향(牙仁鄕), 미아향(未牙鄕), 성화점소(省火帖所), 두가소(豆加所), 웅음소(熊陰所), 용봉소(龍鳳所), 신내동소(申內洞所), 기오천소(岐於淺所), 양천소(陽川所), 금성소(金城所).
담양도호부: 정석부곡(貞石部曲).
순창군: 치등소(置等所), 고도암소(高刀嵓所), 유등소(柳等所), 감물토소(甘勿吐所).
용담현: 동향소(銅鄕所).
창평현: 장평부곡(長平部曲), 갑향(甲鄕).
임실현: 취인부곡(醉仁部曲).
곡성현: 율곡부곡(栗谷部曲).
진안현: 강주소(剛珠所).
옥과현: 금산부곡(金山部曲), 흥복향(興福鄕), 이인향(利仁鄕), 안곡소(鷃谷所).
운봉현: 아요곡부곡(阿要谷部曲).
장수현: 양악소(陽岳所), 이방소(梨方所), 천잠소(天蠶所), 복흥소(福興所).
순천도호부: 송림부곡(松林部曲), 하이사부곡(下伊沙部曲), 이촌부곡(梨村部曲), 죽청부곡(竹靑部曲), 적량부곡(赤良部曲), 율촌부곡(栗村部曲), 별량부곡(別良部曲), 가음부곡(嘉音部曲), 진례부곡(進禮部曲), 소라부곡(召羅部曲), 삼일포향(三日浦鄕), 정방향(正方鄕), 상이사소(上伊沙所), 두잉지소(豆仍只所), 월곡소(月谷所), 두평소(豆坪所), 조해소(調海所), 조수소(調水所).
낙안군: 군지부곡(軍知部曲), 가용소(加用所), 품어소(品魚所), 초천소(草川所), 개령소(開寧所).
보성군: 야촌부곡(也村部曲), 사오향(沙於鄕), 가연향(加淵鄕), 적촌향(狄村鄕), 미력소(㫆力所), 포곡소(蒲谷所), 금곡소(金谷所).
능성현: 품평소(品平所).
광양현: 아마대부곡(阿磨代部曲), 사오곡부곡(沙於谷部曲), 율곡부곡(栗谷部曲), 본정향(本井鄕), 골약리부곡(骨若里部曲), 대곡소(大谷所), 옥곡소(玉谷所), 공촌소(孔村所), 다사천소(多沙川所), 문현소(蚊峴所), 공을도소(孔乙道所), 차의포소(車衣浦所), 구량포소(仇良浦所).
구례현: 사등촌부곡(沙等村部曲), 유곡부곡(楡谷部曲), 남전소(南田所), 방광소(放光所), 토지처(吐旨處). 또한 연산군 5년에 현 사람 배목인(裵目仁), 문빈(文彬) 등이 모반하였다 하여 부곡으로 강등하고 남원에 내속시켰다가 중종 2년에 다시 되돌렸다.
흥양현: 고다산부곡(古多山部曲), 서천부곡(舒川部曲), 총곡부곡(蔥谷部曲), 가을평향(加乙坪鄕), 신통소(神筒所), 작도소(酢桃所). 또 폐현이 된 풍안현(豐安縣)은 본래 보성군 식촌부곡(食村部曲)이고, 폐현이 된 도화현(道化縣)은 본래 보성군 타주부곡(他州部曲)이고, 폐현이 된 도양현(道陽縣)은 본래 장흥부 도량도부곡(道良道部曲)이고, 폐현이 된 고흥현(高興縣)은 본래 장흥부 고이부곡(高伊部曲)인데 고려 충렬왕 11년에 이곳 사람 류청신이 원나라와 외교할 때 공을 세웠다 하여 이름을 고흥으로 고치고 현으로 승격하였다.
동복현: 와촌소(瓦村所).
황해도
서흥도호부: 초리소(酢梨所).
봉산군: 관혜향(觀惠鄕).
안악군: 홍모처(紅毛處).
재령군: 광천소(廣淺所).
수안군: 이마곡소(尒磨谷所).
곡산군: 적곡소(赤谷所).
신천군: 내석향(內石鄕).
우봉현: 우현소(牛峴所).
장련현: 폐현이 된 연풍현(連豐縣)은 본래 연풍장(連豐莊)이었다.
해주목: 마산처(馬山處), 백석처(白石處), 청산소(靑山所), 장봉소(長峯所), 황암소(黃菴所).
풍천도호부: 벽달향(碧達鄕), 용산향(龍山鄕), 풍장향(楓長鄕), 당관향(唐館鄕), 지촌향(池村鄕), 고립소(古立所).
강음현: 식척처(食尺處).
강령현: 광천소(廣川所).
강원도
강릉대도호부: 사동부곡(史冬部曲), 오홀부곡(烏忽部曲), 조대산부곡(助大山部曲), 소점부곡(蘇漸部曲), 반곡소(般谷所), 죽원소(竹原所). 또한 대동지지에 사각부곡(史各部曲)과 선명소(船名所)가 써 있다.
원주목: 소탄소(所呑所), 금마곡소(金亇谷所), 사림소(射林所), 도곡부곡(刀谷部曲), 도내부곡(刀乃部曲).
춘천도호부: 유곡부곡(楡谷部曲), 사탄향(史呑鄕), 지내촌소(枝內村所).
정선군: 별오곡부곡(別於谷部曲), 개야항소(皆也項所), 입탄소(立呑所), 북평소(北坪所).
영월군: 직곡부곡(直谷部曲), 매내향(買乃鄕), 마이탄향(亇伊呑鄕), 양등소(楊等所), 이목소(梨木所), 이달소(耳達所), 성며탄소(省旀呑所), 주문이소(注文伊所), 거탄소(居呑所).
평창군: 사서량부곡(沙西良部曲), 답곡소(沓谷所), 고림소(古林所), 신림소(新林所), 석을항소(石乙項所), 양탄소(梁呑所), 내화석소(乃火石所).
인제현: 이포소(伊布所).
횡성현: 저촌소(猪村所), 양등촌처(楊等村處), 협촌처(脇村處).
홍천현: 사이암장(寺伊巖莊).
회양도호부: 웅림소(熊林所), 북척소(北尺所).
철원도호부: 신제처(新堤處).
금성현: 소수이소(小水伊所).
양구현: 해안소(亥安所).
평강현: 신촌소(新村所), 사정소(史丁所), 묵곡소(墨谷所), 유림소(楡林所).
금화현: 탄항소(炭項所), 마현소(馬峴所).
평안도
삼화현: 금당부곡(金堂部曲), 호산부곡(呼山部曲), 칠정부곡(漆井部曲).
순안현: 추자도부곡(楸子島部曲).
강서현: 이악향(梨岳鄕), 대구향(大垢鄕), 갑악향(甲岳鄕), 각묘향(角墓鄕).
삼등현: 고려시대에 성주(成州)에 속한 신성부곡(新城部曲), 나평부곡(蘿坪部曲), 구아부곡(狗牙部曲)을 합하여 삼등현을 만들었다.
강동현: 잉을사향(仍乙舍鄕), 기천향(岐淺鄕). 또한 고려시대 잉을사향, 기천향, 반석촌(班石村), 박달관촌(朴達串村), 마탄촌(馬灘村)을 합하여 강동현을 만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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