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대왕 8(사상 최초로 밝히는 웅·완·무주)

2026. 5. 25. 02:48백제, 신라, 가야, 왜

 

 

고이대왕(재위 234 ~ 286년)

 

 

고이대왕 전후의 시대적 배경은 이렇습니다. ↓

 

사상 최초로 밝히는 말갈의 정체에서 발췌 -

부여 = 말갈

① 한반도 북방 제민족의 통칭 = 말갈

② 韓에서 부르는 비칭·멸칭 = 말갈

 

북부여 = 북말갈

- 주몽이 북말갈에서 내려와 정착한 곳 = 졸본말갈 = 이를 훗날 졸본부여로 고쳐 씀

 

동부여 = 동말갈

- 이것이 곧 읍루 = 숙신 = 여진

 

남부여 = 말갈 부여씨가 집권한 백제

- 즉 기씨 韓 = 예족 箕씨가 창업 (시조 기자 箕子는 동이족 = 상나라 왕족)

→ 진모씨 韓 = 眞牟씨가 창업 (한반도 남부 토착 세력으로 추정)

→ 해씨 辰 = (우)비류·(해)온조가 창업 (졸본말갈의 망명 집단)

→ 구씨 辰 = 구태(초고)가 창업 (남옥저의 예족 구파해 후손으로 추정)

→ 우씨 백제 = (우)고이가 창업 (비류의 후손)

→ 부여씨 백제 = 근초고왕이 창업 (중국 사료에 부여구 扶餘句, 정치적 통합과 필요에 의해 부여씨로 변신?)

→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부여씨 백제 멸망 (즉 우씨 백제 멸망)

→ 남부여 = 부여씨가 내려와 창업

 

그럼 웅주·완주·무주를 마저 진행하겠습니다.

 

<웅주 -  삼국사기 제36권 잡지 제5 신라 웅주>

웅주(熊州)는 원래 백제의 옛 서울이었다. 당 고종(高宗)이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평정하여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었고,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그 지역을 빼앗아 차지하였으며, 신문왕(神文王)이 이를 웅천주(熊川州)로 고치고 도독(都督)을 두었으며, 경덕왕(景德王) 16년(서기 757)에 웅주(熊州)로 개칭하였는데 지금의 공주(公州)이다. 이 주에 속한 현은 둘이다. 이산현(尼山縣)은 원래 백제의 열야산현(熱也山縣)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청음현(淸音縣)은 원래 백제의 벌음지현(伐音支縣)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신풍현(新豊縣)이다.

 

위 삼국사기에 따르면 웅주가 백제의 옛 서울이라 하고, 당나라는 이곳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합니다.

 

그럼 웅주라 하기 전엔 뭐라 하였느냐?

전 글에서 저는 이곳이 마한 50여국 중에 고해국(古奚國)이라 했고, 또한 일본서기 신공 조에 나오는 고해진(古奚津)이라 이미 밝혔습니다.(사상 최초로 밝히는 한군현의 위치)

 

근데 일본서기 웅략 조에 이곳이 구마나리(久麻那利)라고 나옵니다.

 

<웅략 21년(477년) - 일본서기>

21년 봄 3월에 천황이 백제가 고구려에게 멸망하였다는 사실을 듣고 구마나리(久麻那利)를 문주왕(汶洲王)에게 주어 그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왔다. 이때 사람들이 모두 “백제국이 비록 무리들은 이미 죽거나 창고 아래에 모여 근심하였는데도 오로지 천황에 의지하여 다시 그 나라를 세웠다.”고 말하였다[문주왕은 개로왕(蓋鹵王)의 모제(母弟)이다. 일본의 구기(舊記)에서 이르기를, 구마나리를 말다왕(末多王)에게 주었다고 하였으나 아마도 잘못일 것이다. 구마나리는 임나국(任那國)의 하다호리현(下哆呼唎縣;아루시타코리노코호리).

 

곰은 한자로 이고, 일본어로 쿠마라 읽습니다.

곰 → 고마 → 쿠마, 혹은 쿠마 → 고마 → 곰

 

<웅진성 - 나무위키>

고대 한국어(백제어)로는 고마나리라고 불렀다. '고마[koma]'는 곰을 뜻하며, '나리'는 현대 한국어의 '내(시내)'와 '나루'로 이어지는 순우리말이다. 백제어에는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훈독이 존재하여 '곰 웅(熊)' 자를 적고 '고마', '내 천(川)' 또는 '나루 진(津)' 자를 적고 '나리'라고 부르는 식의 지명 조어법이 통용되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및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사서에서는 모두 '웅진'의 표기를 따르고 있는 반면, 《양서》에는 '고마(固麻)'라고 적혀 있어 그 실제 음가를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일본서기》에서는 문주왕이 천도한 백제의 수도를 '구마나리(久麻那利)'라고 기록했는데, 이는 백제어로 된 지명을 원형 그대로 싣고 있는 셈이다. 같은 문헌의 백제부흥운동 관련 기사에는 구마노리성(久麻怒利城)으로도 나온다.

 

위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웅(熊) = 고마 = 구마

진(津) = 나루 = 나리

즉 웅진이 고마나리라고 학계에서는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곰이 일어로 쿠마이니, 한국어 곰이 일본어 쿠마와 같다고 보는 건, 아기가 아카짱이라 하는 것과 같은 예입니다.

즉 한일 간 발음상 차이로 같은 의미인 겁니다.

 

여기서 아카짱의 유래를 나름 분석해 봅니다.

辰(백제)에서 왕족·귀족의 혈통을 보내 대를 잇게 한다고 전 글들에서 누차 밝혔던 바, 혁거세의 경우처럼 정복한 열도 각지에 보낸 것이 빨간색으로 주칠한 아기 보호용 나무통입니다.(眞혁거세, 탄생설화를 사실로 풀다)

 

둥그렇게 생겨서 알에서 나온 것처럼 보일 뿐, 그 안에는 고귀한 혈통의 아기가 들어있습니다.

이것을 열도 조몬인은 아카짱(赤ちゃん)이라 부르고, 한반도에서는 아기씨라고 부른 겁니다.

참고로 구글번역기로 돌려도 아기씨가 아카짱이라 나옵니다.

 

곤지 일행이 열도로 가는 도중 아기가 섬에서 출생하고, 가져간 빨간 보호 나무통에 아기를 넣습니다.

그후 야마토국에 무사히 도착, 이걸 보고 열도 조몬인들은 아카짱이라 부릅니다.

이때 아기 사마대왕에게 모두가 무릅 꿇어 머리를 땅에 대는 큰 절을 올린 건 덤입니다.

赤ちゃんです! (아기씨입니다!)

하~~핫~~~~!!!

 

이것이 바로 오오키미(大君)의 위세인 동시에 훗날 천황의 위세인 겁니다.

 

<웅략 5년(461년) - 일본서기>

6월 병술 초하루에 임신한 부인이 카스리노키시(加須利君, 개로왕)의 말처럼 츠쿠시(筑紫)의 카카라 섬(各羅島)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래서 아이 이름을 세마키시(嶋君)라 하였다. 이에 코니키시(軍君, 부여곤지)가 곧 배에 태워 ★세마키시를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이가 무령왕(武寧王)이다. 백제 사람들은 이 섬을 니리무세마(主島)라 불렀다.

이 기록에서 개로, 곤지 등을 부른 호칭에 주목해 주세요.

즉 역대 백제 대왕들의 호칭은 저렇게 따로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백제인은 고대 일어를 썼다는 간접증거이기도 합니다.(→ )

이는 지배층은 본래 예맥족이지만, 다수의 고대 일어 사용자들에 의해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도 고대 일어를 사용했다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그럼 웅략은 대체 누구냐?

전 글에서 밝혔다시피, 웅략은 대솔입니다.(사상 최초로 밝히는 야마토의 마지막 오오키미(大君))

 

<삼국지 왜전>
조부(세금)를 거두고 거각(저장창고)이 있다. 나라마다 시장이 있어 교역하는데 대왜(大倭)가 이를 감독한다.
收租賦有邸閤國國有市交易有無使大倭監之


여왕국의 북쪽에는 특별히 대솔 한명을 두어 여러 나라들을 검찰하게 하니 그 나라들이 이를 두려워 한다. 항상 이도국을 다스렸다.
自女王國以北特置一大率檢察諸國諸國畏憚之常治伊都國

 

대왜 = 야마토국

대솔 = 大君을 도와 여러 나라를 검찰하는 최고위직 (훗날 쇼군과 같은 직책)

원본 지도 출처: 구글 맵

 

백제 멸망 후, 이 대솔의 집안이 천황가(天皇家)로 변신했다고 전 글에서 밝혔습니다.(사상 최초로 밝히는 야마토의 마지막 오오키미(大君))

그 작업을 나카노오에와 카마타리가 시작하고 오오아마가 완성합니다.

 

나카노오에 = 덴지(天智) 천황
카마타리 = 나카토미노 카마타리 (후지와라씨의 시조)
오오아마 = 덴무(天武) 천황

 

본문에 ★세마키시를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이는 백제 대왕의 아기를 그대로 야마토에서 받으면 역사의 진실이 들통날까 봐 날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왜 대왕의 아기가 열도의 섬에서 태어났는지 생각해 보면 날조했음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된장인지 똥인지 먹어봐야 아나?)

지도 출처: 무령왕, 일본 섬서 출생? 한·일 모두에 소중한 백제 역사 ❘ 중앙일보

 

다시 돌아와, 여기서 우린 잘 살펴봐야 합니다.

곰이 일본어로 쿠마인건 알겠는데, 진(津)은 고대한국어로 나룻터를 뜻하는 나리라고 합니다.

즉 나루의 고대한국어가 나리라고 합니다.

한국어 아기 나루
일본어 쿠마 아카짱 나리

 

일본서기에 쓰여진 구마나리(久麻那利) 전체가 일어라면 모를까, 나리만이 고대한국어라 하니 뭔가 이상합니다.

일본서기 편자들이 양국의 말을 섞어서 일본서기를 썼다?

 

혹시 고대한국어라고 으레 짐작하는 건 아닌가?

 

이건 나리가 나루를 뜻하는 津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말해줍니다.

침미다례(忱彌多禮) = 신미다리(新彌多離) = 신운신국(臣雲國) + 비미국(卑國) + xx국들

즉 위와 같이 이건 고 + 마 + 나 + 리 라는 얘깁니다.

 

쿠마도 熊이란 한자를 몰라서 구마(久麻)라고 했냐?

즉 백제에서 熊津이라 썼으면 당연히 일본서기에 熊津으로 써야 정상입니다.

 

또 사실 여부는 둘째치고, 웅략이 문주에게 구마나리를 주었다 했습니다.

원본 지도 출처: 구글 맵

그나마 크게 잡았음

 

이 모든 건 고마나리가 단순히 웅진이 아니라는 걸 말해줍니다.

 

그럼 고마나리가 대체 뭐냐?

이건 열도 조몬인이 당시의 충남 + 전라남북을 합쳐 부른 명칭인 겁니다.

원본 지도 출처: 구글 맵

 

즉 고마나리 = ①해국 + ②한 + ③미마 + ④xx국들의 합성어입니다.

이때도 조몬인들이 합성어를 좋아했나 봅니다.

 

<해석>

① 고대에 고와 구는 음이 통하여 고해국과 구마의 첫글자인 고와 구는 같음

② 馬韓의 뜻은 일본어 마지메(真面目)에서 온 걸로 보아, 진짜 韓이란 뜻의 真韓(마가라)임

③ 미마나(彌摩那)의 那를 뜻함

④ 마한 xx리국들의 離를 뜻함

 

이에 따르면 고마나리는 크게 고마 나리로 나눠집니다.

원본 지도 출처: 구글 맵

 

이것이 고마나리의 숨겨진 뜻입니다.

아마도 일본서기 편자들이 한자의 파자놀이를 좋아하나 봅니다.

하지만 그들이 왜 그렇게 썼는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당시 백제는 이미 멸망한 상태에 웅략이 문주에게 백제를 줬다 쓸 수 없기에 그런 겁니다.

 

이는 당시 열도에서 사용한 명칭을 그대로 적은 거라 봐야 합니다.

즉 야마토 조정에선 이곳을 쿠마나리라고 불렀을테죠.

 

그럼 다시 사료를 보겠습니다.

 

웅주(熊州)는 원래 백제의 옛 서울이었다. 당 고종(高宗)이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평정하여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었고,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그 지역을 빼앗아 차지하였으며, 신문왕(神文王)이 이를 웅천주(熊川州)로 고치고 도독(都督)을 두었으며, 경덕왕(景德王) 16년(서기 757)에 웅주(熊州)로 개칭하였는데 지금의 공주(公州)이다.

 

웅진(熊津)의 지명은 웅진이기 전에 고해진(古奚津)이라 했습니다.

고해국(古奚國) → 고해진(古奚津) → 웅진(熊津)

 

그럼 어떻게 고해진이 웅진으로 변신한 거냐?

그 지역에 다음과 같은 설화가 있습니다.

 

<웅진성 - 나무위키>

과거 백제 시절, 웅진 북부 지역 연미산에 사람의 말을 하는 암컷 곰이 있었다. 이 곰은 혼자였기에 늘 외로웠고, 항상 자신과 함께 있어줄 이를 소망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곰은 남자 몇 명이 금강을 건너와 물고기를 잡고 나무를 베어 배에 싣고 있는 것을 보았다.
곰이 그들에게 다가가자 남자들은 혼비백산해 도망쳤으나, 그중 한 명은 너무 놀라 그만 기절해 버렸다.
곰은 기절한 남자를 자신의 동굴로 데려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남자가 깨어나자, 곰은 "나는 당신을 해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당신과 내가 벗이 되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했다.
남자는 곰이 사람의 말을 하는 것에 짐짓 놀라면서도 두려움 탓에 곰의 부탁을 거부하였다. 하지만 곰은 기껏 데려온 남자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곰은 한동안 남자에게 먹을 것을 주면서, 사냥을 나갈 때면 동굴 입구를 큰 바위로 막아 가두어 두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곰은 남자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 남자도 처음에는 곰을 두려워하였으나 곰의 친절에 점점 감화되었다.
결국 남자와 곰은 통정(通情)하게 되었고, 둘 사이에는 새끼가 태어났다. 새끼는 분명 남자의 자식이었으나 생김새는 영락없는 곰이었다.
곰은 둘째가 태어나고부터는 더 이상 남자를 가두지 않았다. 그와 새끼를 둘이나 가진 데다 남자가 새끼들을 끔찍이 귀여워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곰이 사냥을 하다가 강가를 바라봤는데, 하필 남자가 금강을 건너 도망치려던 것을 목격하고 말았다.
곰은 남자를 말리려다가 단념하고 황급히 동굴로 뛰어갔다.
자신이 아니라 새끼들이어야 그를 말릴 수 있으리라 믿어서였다.
"아버지! 돌아오세요! 저희를 두고 가지 마세요!"
곰이 데려온 두 새끼들은 강에 뛰어들어 첨벙거리면서 애타게 남자를 불렀다. 그러나 그는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인간은 정말 잔인한 존재로구나. 자신을 사랑해준, 자신이 사랑했던 이를, 거기에 제 새끼들까지 버리고 떠나다니!"
곰은 일갈하고 서럽게 울부짖더니, 새끼들을 껴안고 강으로 뛰어들었다. 새끼들은 살려고 허우적거렸지만, 곰은 발버둥치는 새끼들을 물속으로 짓눌렀고, 목숨 셋이 그대로 영원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곰의 원한이 금강에 남아, 그때부터 금강을 지나는 배의 태반이 갑작스러운 물살에 휩쓸려 침몰했다. 거기다가 연미산 일대에서는 해마다 흉년이 들었다.
이 소식은 백제의 왕에게 알려졌다. 왕은 인근에 작은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 곰의 혼령을 위로했다. 그러자 얼마 후 금강이 다시 잠잠해져 배가 침몰하는 일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이곳이 웅진(熊津, 곰나루)으로 불리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곰나루에서 뱃사공으로 일하던 한 남자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암곰에게 납치되어 그 곰의 굴로 끌려가 꼼짝없이 곰과 같이 살게 되었으며 곰은 먹이를 구하러 나갈 때도 굴 입구를 바위로 막아 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 보름달이 뜬 밤 강가 백사장에서 곰은 너울너울 춤을 추더니 사람으로 변했다. 어여쁜 여인으로 변한 곰은 굴로 돌아와 뱃사공에게 사연을 말한다. "나는 본래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래서 봉황산 신령에게 빌어 이렇게 사람이 되었으니 앞으로도 잘 살자"고 이야기했지만 뱃사공은 여러 차례 도망을 시도했고, 그 때마다 곰이 길목에서 귀신같이 나타나 다시 잡아오길 반복했다가 곰이 자신의 혈육을 가진 것을 알고는 도망치기를 그만두지만 곰이 출산을 하던 날 뱃사공은 마음이 변해 다시 배를 타고 강 건너로 도망을 갔다. 이 때 뒤에서 곰이 아기 둘을 양손에 안고 "가지 말라"며 애원했지만 뱃사공은 뒤돌아 보지도 않고 강 건너로 사라지자 곰은 아기들과 함께 강으로 뛰어들어 자결했다. 그 후 강을 건너는 배가 있으면 거센 풍랑이 일어 배가 뒤집히는 일이 계속 생기자 사람들이 곰의 원혼을 달래는 사당을 짓고 제를 지내자 강이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그렇게 해서 고해진이 웅진이 되었습니다.

 

근데 이 전설, 설화, 신화라는 것은, 결국 사람이 주체이고 사람이 만드는 역사입니다.

저한테 이걸 해석하라고 하면 이렇습니다. ↓

 

여기서 곰은 이름이 쿠마라고 하는 어떤 반도 왜인입니다.(← 여자)

금강을 사이에 두고 남쪽은 쿠마가 살고, 북쪽은 예맥인 남자 A가 있었습니다.

반도 왜녀 쿠마 = 고대 일어 사용자

예맥인 남자 A = 고대 한어 사용자

 

내용상으로 보아 쿠마가 A를 꼬셔 애기도 낳고 한동안 잘 삽니다.

하지만 A는 북쪽에 두고 온 원래 가족 생각에 자꾸 도망가려 합니다.

 

결국 어느 날, 금강을 건너 도망가는 A를 쿠마는 (고대 일어로) 말리지만 단념하고 어린 애들을 데려옵니다.

애들이 고대 한어를 아빠한테 배워 말할 수 있기 때문인거죠.

"아빠! 돌아와! 우리를 두고 가지 마!"

 

하지만 A는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지자, 쿠마는 위에 나온대로 애들을 껴안고 강물 속으로 풍덩!

 

이후 강은 풍랑이 일고 흉년이 들어 백제대왕이 쿠마의 혼령을 위해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냅니다.

그리고 그곳을 쿠마의 이름을 따 웅진(熊津)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즉 고해를 버리고 熊을 써 웅진입니다.

 

자못 슬픈 얘기인데요, 위 내용에 쿠마가 어엿쁜 여인이라 나오지만 실제로 이뻤으면 A는 도망 안가고 계속 살았을 겁니다.

즉 이쁘지 않았기 때문에 A가 도망을 간 것입니다.

전 글에서 언급했듯 이쁜 건 선녀로, 선녀가 아니면 이쁘지 않다는 건 누구나 압니다.(고이대왕 6)

쿠마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쿠마는 곰같이 생기거나 곰같이 둔한 여자로 보입니다.

 

옛말에, 여우랑은 살아도 곰이랑은 못 산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경우가 후자에 속합니다.

 

또한 A가 도망가 절망한 쿠마가 실의에 빠져 어린 자식들과 함께 강물에 풍덩한 것은, 쿠마가 성질 급한 말갈이 아닌 열도인같이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란 걸 알 수 있습니다.(← 내성적인 성격?)

 

말갈은 말타고 활 쏘는 북방 기마족으로, 대체로 성질이 사납고 급합니다.

걸어서 갈 수 있어도 말타고 가야 직성이 풀리고, 칼로 죽이기 귀찮아 활로 쏘아 죽여야 속이 시원한 성질입니다.

 

반면 반도 왜인은 강가에서 수렵·채집하며 살아가는 남방 해양족으로, 대체로 성질이 온순합니다.

이들은 소수보다 다수를 선호하며, 한땀 한땀 흘리며 구축한 것을 귀하게 여기는 족속으로 개미같이 성실합니다.

 

백제 멸망 후, 많은 반도 왜인은 열도로 떠나고 다수의 말갈이 백제 땅을 차지합니다.

남아있는 반도 왜인은 노예·천민으로 전락하고, 지배층을 뒤에서 혹은 속으로 이렇게 부릅니다.

말갈량이들 = 말갈스러운 년놈들

 

이것이 수백년이 흐르면서 이렇게 변질됩니다. ↓

 

<말괄량이 - AI 구글>

말괄량이는 행동이 활달하고 얌전하지 못하며, 마치 개구쟁이 남자아이처럼 덜렁대는 성격의 여자아이 또는 젊은 여성을 뜻합니다.

 

즉 지칭한 대상이 남녀 → 젊은 여자로 변경됩니다.

이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가며 남자는 점점 유학을 배우며 몸가짐을 바르게 했지만, 젊은 여자는 그러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수신제가(修身齊家) → 남존여비 → 남아선호사상

 

근데 노예·천민은 먹고살기 바쁜 사람들이니, 말괄량이는 분명 귀족·양반의 딸을 지칭하는 말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다 조선 중·후기 유학이 대중화 됐을 때 비로소 이들도 얌전하게 변신하게 된 케이스인 거죠.

 

다시 돌아와, 만약 쿠마가 말괄량이였다면 그래도 강물에 뛰어들었을까요?

제 대답은 아니올시다 입니다.

 

하지만 쿠마가 선녀가 아니더라도 고이대왕같이 매력이 있으면, 나름 매력녀로서 선녀보다 훨씬 매력적임은 물론입니다.

 

<고이 - 삼국사기>

3년(서기 236) 겨울 10월, 임금이 서해의 큰 섬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손수 40마리의 사슴을 맞혔다.

 

고이대왕 = 名弓

 

그럼 이 설화를 위와 같이 해석하려면, 다음 2가지 중요한 포인트를 인정해야 합니다.

① 한반도 남부는 반도 왜인이 살았음

② 반도 왜인은 고대 일어 사용자들임

 

최근에 밝힌 걸 하나 더 추가해 봅니다.(사상 최초로 밝히는 한반도 중·남부 원주민의 실체)

③ 반도 왜인 = 마한인

 

그리고 여기서 웅진이 대략적으로 어디인지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 장수왕의 대군에 멸망한 한성 백제는 웅진 백제로 나라를 재건합니다.

그렇기에 하남 한성처럼 웅진은, 말갈을 방비하기 위해 북쪽은 강으로 막히고 남쪽은 산으로 둘러쳐진 천혜의 요새입니다.

원본 지도 출처: 구글 맵

지형의 생김새가 꼭 서울 강남이다

 

일단 급한대로 난공불락의 웅진으로 천도하고, 63년 후에 사비성으로 다시 천도합니다.

즉 60여년 동안 사비성을 도성으로 계획했던 겁니다.(웅장·화려하게)

 

그리고 웅진에 도성을 짓고 구마노리성(久麻怒利城)이라 합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및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사서에서는 모두 '웅진'의 표기를 따르고 있는 반면, 《양서》에는 '고마(固麻)'라고 적혀 있어 그 실제 음가를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일본서기》에서는 문주왕이 천도한 백제의 수도를 '구마나리(久麻那利)'라고 기록했는데, 이는 백제어로 된 지명을 원형 그대로 싣고 있는 셈이다. 같은 문헌의 백제부흥운동 관련 기사에는 구마노리성(久麻怒利城)으로도 나온다.

 

<웅진에 대한 결론>

① 큰 의미로 백제를 뜻하는 고마나리(= 구마나리)임, 야마토 조정에서 부른 명칭

② 작은 의미로 웅진성(= 구마노리성)이 있는 지역임, 백제 내에서 부른 명칭

 

그럼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웅주(熊州)는 원래 백제의 옛 서울이었다. 당 고종(高宗)이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평정하여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었고,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그 지역을 빼앗아 차지하였으며, 신문왕(神文王)이 이를 웅천주(熊川州)로 고치고 도독(都督)을 두었으며, 경덕왕(景德王) 16년(서기 757)에 웅주(熊州)로 개칭하였는데 지금의 공주(公州)이다. 이 주에 속한 현은 둘이다. 이산현(尼山縣)은 원래 백제의 열야산현(熱也山縣)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청음현(淸音縣)은 원래 백제의 벌음지현(伐音支縣)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신풍현(新豊縣)이다.

 

이산현은 논산시입니다.

위키백과 검색: 이산현 → 노성군

 

<노성군 - 위키백과>

본래 백제의 열야산현(熱也山縣)으로, 신라가 차지하고 경덕왕 대에 이산현(尼山縣)으로 개칭했다. 고려 초에 공주(公州)의 속현으로 있다가 나중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 14년(1414)에 석성(石城)과 합쳐 이성현(尼城縣)을 만들었다가 곧 도로 나누었다. 정조가 즉위할 때 피휘하여 노성현(魯城縣)으로 개칭했고, 조선 말에 군(郡)으로 일원화되었다. 1914년 일제의 통폐합 때 논산군에 편입되어 사라졌다.

 

신풍현은 공주시 신풍면입니다.

 

이에 따르면, 당시 웅주에 웅진도독부가 있고 여기에 속한 현이 단 2개 현입니다.

웅진도독부(= 구마노리성) + 열야산현 + 벌음지현

 

서원경(西原京)은, 신문왕 5년(서기 685)에 처음으로 서원소경(西原小京)을 설치하였으며 경덕왕이 서원경으로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청주(淸州)이다.

 

청주는 백제의 옛 지명이 없는 걸로 보아, 마한 50여국 중 하나로 추정됩니다.

저는 전 글 다루대왕에서 신흔국으로 비정했습니다.

 

대록군(大麓郡)은 원래 백제의 대목악군(大木岳郡)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목주(木州)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순치현(馴雉縣)은 원래 백제의 감매현(甘買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풍세현(豊歲縣)이다. 금지현(金池縣)은 원래 백제의 구지현(仇知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전의현(全義縣)이다.

 

풍세현은 천안시 남쪽 풍세면입니다.

 

<풍세현 - 위키백과>

본래 백제의 감매현(甘買縣)으로, 삼국시대 신라, 백제, 고구려가 각축을 벌이다가 신라가 차지하고 경덕왕 대에 순치현(馴雉縣)으로 개칭하여 대록군(大麓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 풍세현(豊歲縣)으로 고치고 현종 때 천안부(天安府)의 속현이 되었다. 조선 초에도 천안군의 속현으로 남아있다가, 이후 폐현(廢縣)이 되었다. 오늘날의 천안시 풍세면 일대로 비정된다.

 

전의현은 세종시 북쪽 전의면입니다.

 

대목악군 + 감매현 + 구지현

 

가림군(嘉林郡)은 원래 백제의 가림군(加林郡)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가(加)를 가(嘉)로 고친 것으로써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마산현(馬山縣)은 원래 백제의 현으로써 경덕왕이 주와 군의 명칭을 고친 것인데 지금도 모두 그대로 부른다. 한산현(翰山縣)은 원래 백제의 대산현(大山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홍산현(鴻山縣)이다.

 

마산현은 서천군의 마산면입니다.

 

<마산면(서천군) - 위키백과>

마산면(馬山面)은 대한민국 충청남도 서천군의 면이다.

 

홍산현은 부여군 홍산면입니다.

 

가림군 + xx현 + 대산현

 

서림군(西林郡)은 원래 백제의 설림군(舌林郡)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남포현(藍浦縣)은 원래 백제의 사포현(寺浦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비인현(庇仁縣)은 원래 백제의 비중현(比衆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남포현은 보령시 남쪽 남포면입니다.

비인현은 서천군 북서쪽 비인면입니다.

 

설림군 + 사포현 + 비중현

 

이산군(伊山郡)은 원래 백제의 마시산군(馬尸山郡)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목우현(目牛縣)은 원래 백제의 우견현(牛見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은 위치가 분명치 않다. 금무현(今武縣)은 원래 백제의 금물현(今勿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덕풍현(德豊縣)이다.

 

여기서 마시산군(馬尸山郡)은 울산의 옛 지명인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같은 한자 구조입니다.

즉 우시산국이 백제의 행정구역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시산군 + 우견현 + 금물현


혜성군(槥城郡)은 원래 백제의 혜군(槥郡)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당진현(唐津縣)은 원래 백제의 벌수지현(伐首只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여읍현(餘邑縣)은 원래 백제의 여촌현(餘村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여미현(餘美縣)이다. 신평현(新平縣)은 원래 백제의 사평현(沙平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당진현은 당진시입니다.

여미현은 서산시 운산면 여미리입니다.

신평현은 당진시 동남쪽 신평면입니다.

 

여촌현(餘村縣)의 餘가 부여(扶餘)의 餘와 같음이 의미심장합니다.

사평현(沙平縣)의 沙는 사백개로(沙白蓋盧)와 사사노궤(沙沙奴跪)의 성과 같습니다.(초고대왕 1에 출연)

즉 이곳이 여씨와 사씨의 집성촌이었던 걸까요?

 

혜군 + 벌수지현 + 여촌현 + 사평현


부여군(扶餘郡)은 원래 백제의 소부리군(所夫里郡)인데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김유신과 함께 이를 평정하였고 문무왕 12년(서기 672)에 총관(摠管)을 두었으며, 경덕왕이 부여군으로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석산현(石山縣)은 원래 백제의 진악산현(珍惡山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석성현(石城縣)이다. 열성현(悅城縣)은 원래 백제의 열이현(悅已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정산현(定山縣)이다.

 

석성현은 부여군 석성면입니다.

정산현은 청양군 정산면입니다.

 

소부리군 + 진악산현 + 열이현

 

임성군(任城郡)은 원래 백제의 임존성(任存城)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대흥군(大興郡)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청정현(靑正縣)은 원래 백제의 고량부리현(古良夫里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청양현(靑陽縣)이다. 고산현(孤山縣)은 원래 백제의 오산현(烏山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예산현(禮山縣)이다.

 

대흥군은 예산군 대흥면입니다.

청양현은 청양군입니다.

예산현은 예산군입니다.

 

임존성 + 고량부리현 + 오산현

 

근데 학계에서 본 임존성의 위치가 잘못 되었습니다.

예당저수지를 중심으로 완전 정반대의 위치입니다.

원본 지도 출처: 구글 맵

 

보시는 바대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임존성은 대흥면 부근에 있어야 합니다.

당군 입장에선 예당저수지와 길게 뻗은 산들로 인해 공격하기가 어렵습니다.

반면 대흥면의 임존성은 방어하기 좋습니다.

당군이 뒤로 빙둘러 돌아와도 산들로 인해 공격하기 어렵고 방어하기 좋은 지형입니다.

 

황산군(黃山郡)은 원래 백제의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연산현(連山縣)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진령현(鎭嶺縣)은 원래 백제의 진현현(眞峴縣)[진(眞)을 정(貞)이라고도 한다.]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진잠현(鎭岑縣)이다. 진동현(珍洞縣)은 원래 백제의 현으로써 경덕왕이 주군의 명칭을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연산현은 논산시 연산면입니다.

진잠현은 대전광역시 유성구 진잠동입니다.(鎭岑, 한자가 같음)

진동현은 불명입니다.

 

황등야산군 + 진현현 + xx현

 

여기 나오는 황산은 계백 장군의 그 황산벌입니다.

학계는 여기선 삼국사기에 따라 논산시 연산면으로 그대로 비정하지만, 아래 지도를 보면 연산면 일대는 황산벌이 아닙니다.

 

<황산벌 - 위키백과>

황산벌(黃山伐)은 오늘날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연산시장 3거리에서 반경 500m 인근의 연산리 및 관동리 일대의 벌판이다. 신라군이 탄현(마달령)을 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백제군이 출정하는데, 탄현에서 황산벌까지는 46km로 하루평균 진군속도15.5km로 계산하면 신라군의 진군에 3일이 소요되었다, 반면, 사비성에서 황산벌까지는 32km로 백제군의 진군에 2일이 소요되었고, 백제군이 신라군보다 반나절 먼저 황산벌에 도착하여 3군영을 설치하였다.
이곳에서 신라 5만 정예군과 백제의 5천 결사대가 사비성과 대전을 잇는 교역로와 연산과 전라도를 잇는 교역로가 만나는 연산시장 3거리를 중심으로 황산벌 전투(660년 (음력 7월 9일~7월 10일)가 벌어졌다. 김유신의 신라군은 4전 4패를 하였고, 다음날에 총공격으로 완승을 거두었다. 백제의 5천 결사대는 패하였고, 백제군은 황산벌에 3군영을 설치했는데, 백제의 장군 충상과, 상영 그리고 이들을 따르던 약 1,650여 명의 백제군은 신라군에 항복하였다. 반면 계백과 그를 따르던 백제군은 황산벌 서쪽 3km지점의 수락산까지 밀리며 모두 전사하였다.

원본 지도 출처: 구글 맵

 

학계대로라면 연산면을 기준으로 그 남서쪽이 황산벌이고 논산시 전체가 격전지란 얘깁니다.

하지만 지도를 보면 3군영의 위치가 어디였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상식적으로)

과연 저 3곳의 방어선을 놔두고 백제군이 연산면 남서쪽 벌판에 3군영을 설치했을까요?

→ 1차·2차·3차 방어선

 

만약 학계의 설대로 연산면 부근이 황산벌이라면, 백제군이 도착했을 때 저 3곳의 방어선이 이미 뚫렸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리고 논산시가 일대 격전지이고, 계백은 신라군에 밀려 논산시 서쪽 산에서 전사한 게 됩니다.

나라의 운명이 걸린 막중한 때에 늦장을 부려 늦게 도착했다?

 

저의 시나리오는 이렇습니다. ↓

 

계백의 5천 결사대는 연산면을 시작으로 계룡시 쪽의 엄사면과 두마면 사이의 계곡을 집중 방어했을 겁니다.

즉 3곳의 진영을 저곳에 설치한 겁니다.

 

백제 결사대: 5천

신라 침략군: 5만

 

즉 황산은 계룡산을 말함이고, 황산벌은 진잠동 부근의 대전광역시 내에 있어야 합니다.

만약 백제군이 황산벌에서 싸웠다면 진잠동으로 나가 신라군과 일대 결전을 벌였을 겁니다.(결과는 대패)

 

이때 계백의 5천 결사대는 결코 방어진지에서 나가면 안됩니다.

그냥 지키기만 하면 됩니다.(일당백의 1차, 2차, 3차 방어선)

하지만 유신의 유인계에 분격해 마지못해 나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충격적인 유인계는 나중으로 미루겠습니다.(사상 유례없는 충격적인 유인계)

 

비풍군(比豊郡)은 원래 백제의 우술군(雨述郡)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회덕군(懷德郡)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유성현(儒城縣)은 원래 백제의 노사지현(奴斯只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적조현(赤鳥縣)은 원래 백제의 소비포현(所比浦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덕진현(德津縣)이다.

 

유성현은 대전광역시 유성구입니다.

 

<유성구 - 위키백과>

"유성"(儒城)이라는 이름은 통일신라 시기 '비풍군 유성현' 때부터 내려오는 것으로, 757년 경덕왕 때 이 지역의 이름을 '유성'으로 하였다. 고려 시대 때부터 조선 시대까지는 과거 백제가 불렀던 명칭이었던 '노사지'(奴斯只)라는 이름으로 이 지역을 불렀다.

 

덕진현은 대전광역시의 북부 대덕구로 추정됩니다.

대덕, 덕암이 모두 덕진에서 온 것으로 보입니다.

 

우술군 + 노사지현 + 소비포현


결성군(潔城郡)은 원래 백제의 결이군(結已郡)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신읍현(新邑縣)은 원래 백제의 신촌현(新村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보령현(保寧縣)이다. 신량현(新良縣)은 원래 백제의 사시량현(沙尸良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여양현(黎陽縣)이다.

 

보령현은 보령시입니다.

여양현은 홍성군 장곡면입니다.

 

<사시량현 - 구글AI>

사시량현(沙尸良縣)은 백제시대의 지명으로,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군 장곡면 지역입니다. 마한의 사로국(駟盧國)에 뿌리를 두며, 신라 경덕왕 때 신량현(新良縣)으로 개칭된 후, 고려시대에 여양현(驪陽縣)으로 바뀌어 1914년 홍성군에 통합된 지역입니다.

 

즉 홍성군 결성면에서 보령시까지가 백제의 결이군입니다.

 

결이군 + 신촌현 + 사시량현


연산군(燕山郡)은 원래 백제의 일모산군(一牟山郡)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연기현(燕岐縣)은 원래 백제의 두잉지현(豆仍只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매곡현(昧谷縣)은 원래 백제의 미곡현(未谷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회인현(懷仁縣)이다.

 

연기현은 세종시 연기면입니다.

회인현은 충북 보은군 회인면입니다.

 

일모산군 + 두잉지현 + 미곡현


부성군(富城郡)은 원래 백제의 기군(基郡)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소태현(蘇泰縣)은 원래 백제의 성대혜현(省大號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지육현(地育縣)은 원래 백제의 지륙현(知六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북곡현(北谷縣)이다.

 

기군 + 성대혜현 + 지륙현

 

탕정군(湯井郡)은 원래 백제의 군이었는데 문무왕 11년 즉, 당 함형(咸亨) 2년(서기 671)에 주를 만들어 총관을 두었다가 함형 12년(서기 681)에 주를 폐지하여 군으로 만들었으며, 경덕왕이 그 명칭대로 두었다. 지금의 온수군(溫水郡)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음봉[음잠(陰岑)이라고도 한다.]현(陰峯縣)은 원래 백제의 아술현(牙述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아주(牙州)이다. 기량현(祁梁縣)은 원래 백제의 굴직현(屈直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신창현(新昌縣)이다.

 

탕정군은 아산시 탕정면입니다.

음봉현은 아산시 음봉면입니다.

신창현은 아산시 신창면입니다.

 

탕정군 + 아술현 + 굴직현

 

여기까지가 삼국사기 제36권 잡지 제5에 나오는 웅주입니다.

보다시피 지루한 지리에 관한 것이라 전주·무주는 생략하겠습니다.

전주·무주를 살펴본 바, 웅주와 비슷하고 특이한 점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백제에서 쓰던 지명을 굳이 새로이 바꿨다는 건, 무얼 의미하냐?

①백제의 지명 → ②통일신라의 지명 → ③고려의 지명 → ④조선의 지명 → ⑤현재의 지명

 

①에서 ②로 거의 새로운 지명으로 바뀜

②에서 ③은 조금 새로운 지명으로 바뀜

③, ④, ⑤는 거의 같은 지명을 그대로 씀

 

이건 예로 들어 연해주가 원래 여진의 땅인데, 중국 → 일제 → 소련 → 러시아로 주인이 바뀐걸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라가 바뀔 때마다 그 나라 사람들에 맞게 지명이 바뀐 겁니다.

 

즉 당시 사람들이 쓰는 언어와 관계가 있습니다.

① 한왜어

② 예맥어 다수 + 한왜어 소수

③ 예맥어 (한왜는 예맥에 동화·흡수됨)

④ 예맥어

⑤ 예맥어

 

한왜어 = 고대 일본어

예맥어 = 고대 한국어

 

백제가 고대 일본어를 썼다고 우리 역사가 아닌가요?

그들은 우리의 반쪽 조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