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초로 밝히는 한반도 중·남부 원주민의 실체

2026. 4. 26. 15:53백제, 신라, 가야, 왜

 

 

전 글에서 당시 야마토의 실권자인 나카노오에가 신라에 특사를 보냈다 했습니다.(사상 최초로 밝히는 백제 미마나 60만人 구출 대작전)
특사를 보낸 이유는, 신라의 배 100척을 빌려 백제의 미마나 백성 60만 명을 데려오기 위함입니다.
즉 이들을 열도로 데려올 수송선단에 보태기 위함입니다.

야마토의 배 백제의 배 신라의 배 탐라의 배
약 1000척 약 100척 + α 약 100척 약 50척

 
총합 1250척의 배로 미마나 60만 명을 수송한다는 설명은 전 글을 참고하세요.(사상 최초로 밝히는 백제 미마나 60만人 구출 대작전)
 
662년 당시 신라의 임금은 김춘추의 장남인 김법민입니다.
김춘추 = 태종 무열왕
김법민 = 문무대왕
 
<태종 무열왕 - 위키백과>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 603년 ~ 661년 음력 6월)은 신라(新羅)의 제29대 임금(재위: 654년 음력 3월 ~ 661년 음력 6월)이다. 무열왕(武烈王)으로 불리기도 한다.
 
<문무왕 - 나무위키>
신라의 제30대 임금이자 통일신라의 첫 군주. 부친은 제29대 태종 무열왕이고 모친은 김유신의 여동생인 문명왕후였다. 남동생으로 김인문이 있었고, 여동생 지소부인은 김유신의 부인이었다. 왕비는 자의왕후였다. 또 다른 여동생 김고타소는 김품석의 부인인데, 대야성 전투로 인해 일찍 죽었다.
여동생이 유신의 부인이라는거 실화야?
 
여기서 이 신라 배 100척은 최소한의 숫자임은 물론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야마토가 신라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조건이라 해도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가 100척의 배를 빌려줄 리 만무합니다.
이에 김법민을 설득시킬 특사의 임무가 막중하게 되었습니다.
잘되면 미마나 백성 60만 명을 살릴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고, 잘못되면 일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입니다.
 
이때 과연 누가 김법민을 설득시킬 특사로 신라에 갔을까요?
떠오르는 인물이 한 명 있습니다.
바로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입니다.
 
미마나 백성 60만 명을 데려오기 위한 계획 입안자: 나카토미노 카마타리
신라로 가 김법민을 설득시킬 특사를 자처한 자: 나카토미노 카마타리
(편의상 이하 카마타리)
 
이 카마타리가 김법민을 설득했기에 백제 유민들이 무사히 열도로 건너갔던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구야국 앞바다에서 신라 군선들에 공격받아 모두 물고기 밥이 됐을 겁니다.(→ 60만 명 大수장)
 
근데 카마타리가 신라에 간 것 자체가 역사적인 일이지만, 무엇보다 더 역사적인 사건은 그가 유신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즉 김법민을 설득한다기 보다 사실상의 권력자인 유신을 설득하러 간 게 맞다고 봅니다.
 
고대일본 사상 최고의 文臣: 카마타리
고대한국 사상 최고의 武臣: 유신
 
참고로, 유신의 성은 원래 김씨가 아닙니다.(원래 구씨임)
마찬가지로 구야국 수로왕의 성도 본래 김씨가 아닙니다.
 
유신의 할아버지 = 금관가야 구형왕
금관가야 = 구야국 = 남가라
구야국 시조 = 수로왕
 
金신라에서 나중에 金씨를 하사합니다.(→ 사성 받음)
유신에게 金씨 하사 → 시조 수로왕도 金씨 하사
여기서는 편의상 유신이라 하겠습니다.
 
<662년 당시 두 인물의 나이>
카마타리: 48세
유신: 67세
 
카마타리 - 생몰 614~669년, 향년 55세
유신 - 생몰 595~673년, 향년 78세
 
참고로, 당시 양국 임금의 나이는 이렇습니다.
나카노오에: 36세 (→ 덴지 천황)
김법민: 36세 (→ 문무대왕)
 
나카노오에 - 생몰 626~672년, 향년 46세
김법민 - 생몰 626~681년, 향년 55세
 
67세의 백전노장 유신이 48세의 꽃중년 카마타리를 대면합니다.
 
<나카토미노 카마타리 - 위키백과>
나라 시대(奈良時代)인 덴표호지(天平寶字) 4년(760년)에 성립했다는 후지와라 씨 전승인 《도지 가전(藤氏家傳)》에는 「생김새가 걸출하고 우아하였으며 풍채가 특히 뛰어났다(偉雅, 風姿特秀)」라고 기술되어 있다.
 
유신: 바쁠긴데 여긴 뭐하러 왔노?
카마타리: いつも尊敬していた将軍を見に来ました。(평소 존경하던 장군을 뵈러 왔습니다.)

이렇게 입을 연 카마타리는 미마나 백성 60만 명을 데려가기 위함과 이를 위한 수송선을 빌려줄 것을 요청합니다.
이런 저런 얘길 나눈 끝에 유신은 아들뻘인 카마타리의 박학다식과 총명함이 맘에 듭니다.
(유신이 19살에 카마타리는 한국나이 1살)
 
카마타리는 본래 유신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던 터이고, 유신도 첩자를 통해 카마타리의 활약을 알고 있습니다.
옆에서 김법민이 말합니다.
 
김법민: 삼촌, 그럼 인질이 있어야 배를 돌려받지 않겠습니꺼?
카마타리: 臣が喜んで人質でここにいます。(신이 기꺼이 인질로 여기 있겠습니다.)
유신: 됐다 마, 내는 저 머스마 믿는데이.
 
자신을 믿어주는 유신의 통큰 헤아림에 크게 감복한 카마타리는 이때 뭐라 했을까요?
 
必ず大業を成し遂げ、両国に大きな恩恵になるようにします! (반드시 대업을 성사시켜 양국에 큰 보탬이 되게 할 것이옵니다!)
 
눈물을 글썽이며 꿇어 엎드려 절하는 카마타리.(절하는 대상: 유신)
 
백제 미마나 60만 명의 도래: 662 ~ 663년
 
여기서 다시 김연자의 흐르는 강물처럼 듣고 가겠습니다.ㅡㅡ;
저번 때는 초고대왕 2에서 소개했었습니다.
 
#흐르는강물처럼 #한글가사 자막 #김연자 #川の流れのように #キムヨンジャ 일본 #NHK #美空ひばり #미소라히바리 추모방송중에서 엔카의여왕 김연자의 무대
(↑ 유튜브)
 
이 노래는 당시 도래인들을 잘 표현한 멜로디에, 절묘한 가사, 그리고 이를 열창한 김연자의 가창력이 3박자가 맞아떨어져 그야말로 심금을 울립니다.
누가 작사한 건지 찾아보니, 일본 연예계의 전설적인 분이셨군요!
아키모토 야스시(秋元 康)
↑ 나무위키 참고
 
그로부터 약 5년 후, 카마타리는 이때의 보답으로 당시 야마토에서 제일 웅장·화려한 대형 군선 한 척을 유신에게 선물합니다.
(당시 야마토에서 제일 웅장·화려한 대형 군선 = 당시 세계에서 제일 웅장·화려한 대형 군선)
 
<나카토미노 카마타리 - 나무위키 & 일본서기 덴지 7년조>
덴지 7년(668년) 9월 26일, 당시 왜에 와 있던 신라의 사신 급찬(級湌) 김동엄(金東嚴) 등을 통해 신라의 대각간(大角干) 김유신(庾信)에게 배 한 척을 선물하고, 사흘 뒤에는 문무왕(文武王)에게도 수어조선(輸御調船) 한 척을 선물하였다.
 
백제의 기술로 백제 기술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음은 물론입니다.
이 배의 모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자료를 모셔와 봅니다. ↓

출처: 안택선 - 나무위키

약 천년 후의 대형 군선, 근간은 백제 기술이다.

 
참 사흘 뒤, 김법민이 생각나 그에게도 한 척 보내주는 건 덤입니다.(삐질까봐)
 
<나카토미노 카마타리 - 나무위키>
제일 의문스러운 점은 663년 백강 전투 때 카츠라기 황자(덴지 천황)가 인생 최대의 정치적 수세에 몰렸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기록에서 아주 사라져 버리고, 난이 다 끝난 뒤에야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 당시 카마타리가 자청해 신라에 인질로 가 있었다는 정황입니다.
미마나 백성 60만 명을 살리는 길이라면 자기 한 목숨 희생해도 좋다는 생각이었던 겁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카마타리는 실로 위대한 인물입니다.
NHK야 이런걸 대하드라마로 만들어야지 뭐하고 있니?
 
<덴지 원년 662년(是歲) 미상 주 001 - 일본서기, 동북아역사넷>
★ 왜국이 백제부흥운동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왜국이 조공국인 백제를 구원하여 제국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출병했다는 고대 제국주의설과 일본열도에 대한 당의 위협을 사전에 저지하고자 파병하였다는 설이 일본학계에서 제기되었다. 그 후 백제로부터 선진문물을 지속적으로 수용하기 위해 파병했다는 설, 왜왕권의 내부모순과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참전했다는 설, 신라를 정복하기 위해 참전했다는 설, 백제왕족 외교의 성과라고 보는 설 등이 있다.
 
↑ 보다시피 의 이유에 대해 백제 미마나 백성을 데려오기 위한 학계의 설은 1도 없습니다.
즉 이건 제가 사상 최초로 주장하는 설입니다.
지금껏 설명했듯 여러 사료 정황상의 견해인 겁니다.
 
앞서 카마타리와 유신의 만남에서 보았듯 한반도 고대사의 진실은, 숨겨진 드라마틱한 전개가 이렇듯 흥미롭습니다.
① 사상 유례없는 파란만장한 고대 한일사: 백제대왕이 다스린 삼한 70여 국과 열도 100여 국의 역사, 즉 백제와 조몬 간의 전쟁
② 사상 유례없는 파란만장한 고대 한중사: 졸본부여가 구려국에서 시작해 고구려로 커가는 역사, 즉 말갈과 중국 군현 간의 전쟁
② 사상 유례없는 파란만장한 고대 한중사: 여러 말갈 부족이 하나로 통합해 고구려를 세운 역사, 그후 大말갈과 중국 군현 간의 전쟁
③ 사상 유례없는 파란만장한 고대 한국사: 백제와 고구려 간의 전쟁, 金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두 나라를 멸망시키고 삼한일통
 
하지만 우린 ①에 대한 백제의 사서, ②에 대한 고구려의 사서는 물론 신라의 사서도 잃어버렸습니다.
신라가 고려에 항복했으면 사서는 남아있어야 정상 아닌가요?
신라만이라도 사서가 남아있으면 그걸 토대로 고구려, 백제의 ③에 대한 역사를 복원할 길이 생겼을 겁니다.
아니 신라의 역사서는 도대체 왜 없어진 거냐?
고려에서 이 金신라를 말살해버린 충격적인 이유는 나중에 파헤쳐 보겠습니다.
 
그 충격적인 이유는 이것과 깊은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
 
- 사상 최초로 밝히는 말갈의 정체에서 발췌 -

화랑세기에 나오는 대원신통(大元神統)의 정체가 곧 이들로 추정된다. 즉,
① 옛부터 내려오는 무술·무당의 딸 = 색공지신(色供之臣)
② 소국을 정복해서 얻어진 왕족(여자) = 색공지신(色供之臣)
③ 다른 나라에서 정략혼인·인질로 온 왕족(여자) = 색공지신(色供之臣)
④ 이들에게서 낳은 딸들 = 아들 세대의 색공지신(色供之臣)

 

색공지신(色供之臣): 굳이 설명이 필요한가요?

옛 말에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가 괜히 있는게 아니었던 겁니다.
 
↑ 위는 내용상의 이유로 사상 최초로 밝히는 백제 미마나 60만人 구출 대작전으로 편집할 수 있습니다.
 
<사상 최초로 밝히는 한반도 중·남부 원주민의 실체>
 
韓의 지방행정 체제: 왕의 친족 또는 삼한의 부족장이 통치 ← 추정
한반도 중·남부 = 삼한 (마한·진한·변한)
 
추정이라곤 하지만 삼한을 한왕의 친족이나 삼한의 부족장이 통치했을 걸로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럼 조선왕 기준이 내려가 韓왕이라 칭하고 성을 韓씨로 했다는 건 무얼 의미하느냐?
(이하 기준 = 준왕)
 
이건 준왕이 새로이 나라이름을 韓이라 정하고, 또 새로이 나라를 창업했으니 성도 나라이름으로 정한 겁니다.
위만이 조선을 찬탈했으니 다시 조선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고, 남조선이라 하면 정통성에서 조선에 밀리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아싸리 나라이름을 새로이 정한 것이라 봐야 합니다.
 
준왕이 내려가 보니 이건 뭐 신석기 시대나 다름 없는 미개발 별천지입니다.(BC 193?)
가지고 간 병력으로 동네 한바퀴 돌듯 평정하고 크게 3개의 한으로 지역을 나눕니다.
 
<韓의 성립>
BC 206~202, 초한시기 조선후 기준, 부왕(否王)을 이어 즉위 (칭왕)
BC 194, 한나라 여후 때 연왕 노관 흉노로 망명, 위만 집단 기씨조선 찬탈, 준왕 집단 남하(조선유민 1차 남하)
BC 193(?), 준왕 집단 韓땅 접수, 한왕 칭왕
- 3대 후 -
BC 108, 한무제 때 위씨조선 1차 공격했으나 실패(육 5만+수 7천 軍), 2차 공격 성공(내분), 위씨조선 멸망(86년 만에), 조선유민 2차 남하
 
또한 일본어로 韓을 나라란 뜻의 가라라고 불렀다는 건 무얼 의미하냐?
이곳이 원래 조몬인의 땅이라는 걸 말해줍니다.
즉 한반도 중·남부의 원주민 = 반도 조몬인(고아시아인)
 
BC 194, 기씨조선 유민 예족의 1차 남하
BC 108, 위씨조선 유민 예족의 2차 남하


이들과 혼혈한 것이 바로 馬韓인입니다.
한반도 중부 토착 조몬인 다수 + 조선유민 예족 소수 = 마한인
 
한편 동해를 따라 남하한 북방 말갈의 일파와 일부 예족은 연변 → 함경도 → 강원도 → 경북의 경로로 진입합니다.
연변과 함경도는 조선의 영역이니 논외로 치고, 강원도와 경북을 韓 조정에서 辰韓이라 칭합니다.
즉 이들의 정체성이 곧 辰입니다.
辰은 金과 더불어 말갈의 정체성입니다.
辰 = 金 = 말갈 = 부여 = 고구려 ← 고대 한국어를 씀
 
또한 1·2차의 조선유민 예족과 말갈의 일파에 밀려 남하한 일부 조몬인은 전라남북, 충남, 경남의 조몬 토착집단과 세를 합쳐 라는 정체성을 유지합니다.(중국 漢에서 이들을 왜라고 칭함 - 삼국지 한전)

원본 지도 출처: 해수면 상승 시뮬레이션 - 옐로우의 세계

 
그후 韓 조정에서 모종의 역사적 사건으로 경남을 정벌, 변한(弁韓)이라 칭합니다.
훗날 辰 조정에서 다시 정벌해 변진(弁辰)이라 칭합니다.(개루대왕 - 변한을 정벌해 변진으로 만들다)
 
근데 이들 왜의 토착세력은 계속하여 북방에서 남하한 말갈에 밀려 점차 열도로 건너갑니다.
이로써 한반도 남부는 삼한을 완성합니다.(삼한 70여 국)
한반도 중·남부 = 삼한 (마한·진한·변한)
 
즉 삼한 70여 국은 한번에 동시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 북에서 남으로 순차적으로 만들어진 겁니다.
왜냐?
하남 한성이 있는 월지국에서 정벌군을 남으로 보내기 때문입니다.(= 남벌)
 
그리고 열도로 건너간 이들이 곧 한반도 도래인이라고 하는, 반도 왜인이자 야요이인입니다.
韓의 피지배층 삼한인 = 한반도 남부 토착 조몬인 = 한반도 남부 원주민 = 고아시아인 = 반도 조몬인 = 반도 왜인 = 야요이인 = 한반도 도래인 ← 고대 일본어를 씀
 
여기서 조몬과 야요이라는 용어를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조몬부터 보면 이렇습니다. ↓
 
<조몬 시대 - 위키백과>
조몬 시대(일본어: 縄文時代)는 일본의 신석기시대 중 기원전 1만 4800년부터 기원전 300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조몬’은 줄무늬를 뜻하는데, 줄무늬 토기가 그 시대의 유물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조몬 시대는 토기가 출현하고 수혈주거(땅을 파고 그 위에 움집을 짓는 양식)이 보급, 패총이 형성되었다.
 
<조몬 시대 - 나무위키>
조몬 시대(縄文時代じょうもんじだい)는 일본의 신석기 시대로서 기원전 14000년 ~ 기원전 300년에 해당 한다.
조몬 시대의 '조몬'은 조몬 시대의 토기를 장식한 새끼줄 문양인 '승문'(일본말로 조몬)에서 나온 말인데 한국의 빗살무늬 토기와 매치되는 유물들로, 조몬 토기의 경우 한반도 후기 신석기 토기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일본 각지의 신석기 유적에는 이러한 승문 문양의 토기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
 
즉 조몬 시대는 일본 신석기 시대로, 이 시대의 빗살무늬 토기를 일본어로 조몬 토기라 합니다.
줄무늬 = 조몬(縄文)
줄무늬 토기 = 빗살무늬 토기
 
이제 야요이가 뭔지 보겠습니다. ↓
 
<야요이 시대 - 위키백과>
조몬인들의 조몬시대 후에 이어지며, 고훈시대로 이어지는 기원후 3세기 중반까지에 해당하는 시대의 명칭이다.
야요이(弥生)라는 명칭은 1884년 발견지인 도쿄시 분쿄 구 야요이 쵸(弥生町)의 패총에서 발견된 토기를 야요이식 토기로 부른 것에서 유래한다.
 
<야요이 시대 - 나무위키>
야요이 시대(弥生時代やよいじだい)는 초기 일류어족 집단이 정치적 중심이 되었던 기원전 300년 부터 기원후 3세기 까지의 시기를 의미한다. 이 시기 청동기와 철기가 동시에 유입되었다. 즉 일본의 청동기 시대이자 철기 시대이다.
1884년에 이 시대를 대표하는 토기가 도쿄도 분쿄구 야요이초에서 처음 발굴되었다. 때문에 이 토기를 연구한 도쿄대학 인류학과에서 야요이 토기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몬시대와 마찬가지로 토기에 따라 시대를 구분한 셈. 한반도처럼 이 시기의 야요이 토기는 민무늬 토기가 보편적이다.
 
즉 야요이 시대는 일본 청동기·철기 시대로, 민무늬 토기가 보편적입니다.
민무늬 토기는 북방에서 한반도, 열도로 전파된 토기 유형으로 보입니다.(고조선 → 삼한 → 열도)
 
<민무늬 토기 - 나무위키>
민무늬 토기 또는 무문토기(無文土器), 민패토기는 청동기 시대에 한반도와 랴오닝성 일대에서 등장한 토기이다. 시대적으로 빗살무늬 토기의 뒤를 잇는 유물이다. 민무늬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토기 표면에 아무런 무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이를 토대로 다시 보면, 한반도 남부 토착 조몬인과 반도 조몬인이라는 용어는 어폐가 있습니다.
韓의 피지배층 삼한인 = 한반도 남부 토착 조몬인 = 한반도 남부 원주민 = 고아시아인 = 반도 조몬인 = 반도 왜인 = 야요이인 = 한반도 도래인 ← 고대 일본어를 씀
 
즉 이는 조몬을 야요이로 수정해서 한반도 남부 토착인과 (반도) 야요이인으로 해야 맞습니다.
한반도 남부 토착 조몬인 → 한반도 남부 토착인
반도 조몬인 → (반도) 야요이인
 
<수정본>
韓의 피지배층 삼한인 = 한반도 남부 토착인 = 한반도 남부 원주민 = 고아시아인 = (반도) 야요이인 = 반도 왜인 = 한반도 도래인 ← 고대 일본어를 씀

 

학계에서는 시대 구분으로서 조몬과 야요이라 했으니 엄밀히 따지면 조몬과 야요이라는 용어를 쓴 이상, 수정본이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고대 일본어를 쓰던 사람들을 통틀어 조몬인이라 한즉,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이 블로그에서 써온 조몬인이란 용어를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럼 이들 야요이인이 어떻게 고대 일본어의 화자냐?
즉 준왕이 조선에서 내려와 韓왕이라 칭할 때, 한반도 중·남부에 살던 사람들(원주민)의 정체성이 과연 무엇이냐?
그 답은 위에 언급한 빗살무늬 토기로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빗살무늬 토기를 쓰는 지역과 사람들이 한반도 중·남부와 열도이니 같은 정체성을 공유하는 다 같은 사람들입니다.
즉 조몬 시대, 한반도 중·남부와 열도는 고대 일본어를 쓰는 같은 정체성을 공유하는 사람들입니다.(→ 원주민)
 
전 글 가즈아! 백제삼서 찾으러!의 타임머신 타고 당시 한반도 남부의 어느 강변에 슬며시 가봅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어자 발음이 없고 받침이 없는 발음을 하면 고대 일본어가 맞는거죠?

출처: 조몬 시대 - 나무위키

 
이들의 생김새는 키가 작고 둥그스름한 얼굴형에 원숭이상으로, 이것이 전형적인 조몬인의 상입니다.
조몬인의 대표자: 히데요시 (노부나가가 히데요시를 사루(猿: 원숭이)라고 불렀음)
노부나가: 사루~!
히데요시: 하핫~!
 
근데 준왕이 조선에서 내려와 韓왕이라 칭할 때는 야요이 시대입니다.(야요이 시대의 시작?)
시대 명칭만 야요이로 바뀐 것일 뿐, 원래 살던 사람들은 조몬 시대의 그 원주민들입니다.
앞서 썼듯이 이들은 1·2차 조선유민 예족과 혼혈합니다.
한반도 중·남부 토착인 다수 + 조선유민 예족 소수 = 마한인
 
즉 야요이 시대의 한반도 중·남부에 살던 사람들은 고대 일본어를 썼다는 걸 알 수 있는 겁니다.
야요이 시대 = 삼한 시대
 
이들이 열도로 건너가 그곳의 토착 조몬인을 잠시 지배하는 세력이 됩니다.(← 고대사회의 약육강식)
혹은 그곳의 토착 세력들과 합세, 흡수, 융합합니다.
여기까지가 韓의 시대입니다.(온조대왕 직전의 眞牟씨 韓 왕조)
 
그후 辰에서 정벌군을 보내 이들을 지배하는 최상위 지배층이 됩니다.(← 야마토 왕권)
辰의 정벌군 = 열도 주둔군 = 열도 최상위 지배층
 
<야마토의 지배층>
최상위 지배층 = 辰(백제)의 왕족, 귀족, 장군, 예: 비미호, 大君(오오키미), 소가씨 등
상위 지배층 = 야요이인이 토착화한 세력, 예: 모노노베씨, 나카토미씨 등
중간 지배층 = 기존 열도의 토착 세력, 열도 조몬인
피지배층 = 열도의 토착 조몬인, 최상위 지배층을 神으로 떠받듦 (마치 천황처럼)

이 역사를 지금까지 밝힌 것이 바로 아래입니다.
 
다루대왕 - (반도) 왜를 정벌하고 남부를 설치하다
기루대왕 - 新彌多離를 정벌하다
개루대왕 - 변한을 정벌해 변진으로 만들다
초고대왕 - 大王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열도 정벌)
 
辰의 지방행정 체제: 辰 대왕의 친족 또는 진왕이 보낸 마한 소국의 귀족이 통치
한반도 중·남부 = 삼한 70여 국
열도 = 야마토국을 포함한 20여 국 (나머지 80여 국은 열도 조몬의 토착세력, 당시 辰이 열도 정벌 중)
 
그후 고이대왕이 辰을 이어 백제를 창업합니다.
 
백제 초·중기의 지방행정 체제
한반도 중·남부 = 5라 (쿠다라, 미마나, 하세라, 사라, 가라) ← 백제 대왕이 통치: 대왕(大王) = 황제와 같은 권위
열도 = 5라 (나라(오사카 일대), 가마쿠라(도쿄 일대), ??라(큐슈), ??라(츄고쿠), ??라(시코쿠)) ← 백제 대군이 통치: 대군(大君) = 백제 대왕의 아들 또는 동생, 즉 왕족
 
탐모라 = 훗날 복속

원본 지도 출처: 해수면 상승 시뮬레이션 - 옐로우의 세계

백제 10라


이를 토대로 지배층을 분석해 시대별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韓 이전의 한반도 중·남부 지배층: (반도) 조몬인 토착 세력 (언어 = 고대 일본어)
韓 이전의 한반도 중·남부 피지배층: (반도) 조몬인 (언어 = 고대 일본어)

韓의 지배층: 조선유민 예족 (언어 = 고대 한국어?)
韓의 피지배층: (반도) 야요이인 (언어 = 고대 일본어)
 
辰의 지배층: 졸본말갈의 일파 (언어 = 고대 한국어)
辰의 피지배층: (반도) 야요이인 (언어 = 고대 일본어)
 
백제의 지배층: 졸본말갈의 일파 + 예족 = 혼혈화된 예맥 (언어 = 고대 한국어)
백제의 피지배층: (반도) 야요이인 다수 + 예맥 소수 = 혼혈화된 한왜 (언어 = 고대 일본어)
 
가라의 지배층: 반도 토착세력 다수 + 예맥 소수 = 혼혈화된 한왜 (언어 = 고대 일본어)
가라의 피지배층: (반도) 야요이인 (언어 = 고대 일본어)
 
新彌多離의 지배층: 반도 토착세력 (언어 = 고대 일본어)
新彌多離의 피지배층: (반도) 야요이인 (언어 = 고대 일본어)
 
사로국의 지배층: 반도 토착세력 다수 + 예맥 소수 = 혼혈화된 한왜 (언어 = 고대 일본어)
사로국의 피지배층: (반도) 야요이인 (언어 = 고대 일본어)
 
고구려의 지배층: 예맥 다수 & 한왜 소수 (언어 = 고대 한국어)
고구려의 피지배층: 예맥 다수 한왜 소수 (언어 = 고대 한국어)
 
金신라의 지배층: 예맥 다수 & 한왜 소수 (언어 = 고대 한국어)
金신라의 피지배층: 예맥 다수 한왜 소수 (언어 = 고대 한국어)
 
통일신라의 지배층: 예맥 다수 & 한왜 소수(언어 = 고대 한국어)
통일신라의 피지배층: 예맥 다수 & 한왜 소수 (언어 = 고대 한국어)
 
고구려 역사서가 말살된 이유: 말갈임을 숨기기 위해 金신라에서 말살
백제 역사서가 말살된 이유: 반도 왜인임을 숨기기 위해 金신라에서 말살
신라 역사서가 말살된 이유: 어떤 충격적인 이유로 고려에서 말살
 
한편 열도의 지배층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야마토 전의 지배층: 열도 토착세력 & 야요이인(토착화 진행중)
야마토 전의 피지배층: 열도 토착인
 
야마토의 최상위 지배층: 백제의 지배층, 즉 예맥
야마토의 상위 지배층: 토착화된 야요이인 세력
야마토의 중간 지배층: 기존 열도 토착세력
야마토의 피지배층: 열도 토착인
 
일본 건국 직후의 지배층: 토착화된 야요이인 다수 & 백제·고구려 지배층 유민 소수
일본 건국 직후의 중간 지배층: 기존 열도 토착세력
일본 건국 직후의 피지배층: 열도 토착인

열도로 쫒겨난 원주민인 (반도) 야요이인들은 한반도 중·남부가 조상의 땅이라는 걸 아들·손자들에게 대대로 전해줬을 겁니다.
할아버지·아버지에게 전해듣고 한번만이라도 조상 땅을 밟고 싶어하는 건 인지상정으로 충분히 이해가 가는 바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고려 말까지 끊임없이 쳐들어온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우린 이들을 노략질하는 왜구로 알고 있지만, 실은 조상 땅에서 죽으려고 온 분노에 찬 무리들입니다.
단순히 노략질하려고 온 수십·수백 단위의 왜구가 아닌 대군을 조직해 조상 땅을 점령, 제 딴에는 다시 탈환하려고 온 듯 합니다.
수천에서 수만 단위의 대군을 이끌고, 특히 충남 부여(홍산대첩), 전북 군산(진포대첩), 전북 남원(황산대첩) 등에 침투합니다.
 
아니 열도에서 남해를 거쳐 수만 대군이 충남 부여까지 왔다?
부여가 어디입니까?
바로 백제 말기의 도성인 사비성입니다.
 
진포대첩에서는 군선 500척이 왔다고 하니 이를 병력으로 추산하면 이렇습니다.
으레 그렇듯 한척에 병사 50명이 승선했다고 하면,
500 × 50 = 2만5천 대군이고,

 

만약 병사 60명이 승선했으면, 

500 x 60 = 3만 대군입니다!
 
이건 무얼 의미하느냐?
바로 위에 설명한 대로, 할아버지·아버지에게 전해듣고 조상 땅을 되찾기 위해 대군이 침략해 왔다고 밖에는 설명이 안됩니다.
그런 이유를 고려 조정에서 그대로 기록할까요?
 
이때 이성계가 물리친 아지발도(아기바톨)는 당시 나이가 10대 중후반에 불과합니다.(15~16세)
좋은 갑옷과 무장을 갖춘 그에게 제장들이 모여들어 무릅 꿇고 예를 표했다 합니다.
이는 아지발도가 단순한 위치의 신분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이상 자세한 내용은 아지발도 검색하세요.(위키백과, 나무위키)
 
할아버지·아버지에게 전해듣고 백제가 조상 땅임을 아는 아지발도.
즉 아지발도는 백제 왕족의 혈통이 있는 높은 신분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친족은 전쟁에 패하면 북조의 무리들에게 멸족 당합니다.
 
당시 일본은 남북조 전쟁이 한창인 시대입니다.(1336년~1392년)
일본 남북조 시대는 북조에서 지지하는 천황파와 남조에서 지지하는 천황파가 싸워 북조가 승리합니다.
하지만 두개의 파로 나눠진 근본적인 이유가 뭐냐?

지도 출처: 남북조 시대 (일본) - 위키백과

남조의 요시노와 북조의 교토 수도 위치

위 지도를 보면 남조의 수도 요시노가 있는 곳이 야마토국입니다.
즉 당시로부터 천년 전부터 내려오던 그 야마토 왕권의 야마토국입니다.
반면 교토는 새로 만든 수도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교토는 야마토 시대의 대솔이 있던 곳입니다.

즉 비미호가 있던 야마토국의 바로 북쪽이 교토입니다.

<삼국지 왜전>
조부(세금)를 거두고 거각(저장창고)이 있다. 나라마다 시장이 있어 교역하는데 대왜(大倭)가 이를 감독한다.
收租賦有邸閤國國有市交易有無使大倭監之
여왕국의 북쪽에는 특별히 대솔 한명을 두어 여러 나라들을 검찰하게 하니 그 나라들이 이를 두려워 한다. 항상 이도국을 다스렸다.
自女王國以北特置一大率檢察諸國諸國畏憚之常治伊都國

 

대왜 = 야마토국
대솔 = 大君을 도와 여러 나라를 검찰하는 최고위직 (훗날 쇼군과 같은 직책)

 

백제 멸망 후, 이 대솔의 집안이 천황가(天皇家)로 변신했다고 전 글에서 밝혔습니다.(사상 최초로 밝히는 야마토의 마지막 오오키미(大君))
그 작업을 나카노오에와 카마타리가 시작하고 오오아마가 완성합니다.

나카노오에 = 덴지(天智) 천황
카마타리 = 나카토미노 카마타리 (후지와라씨의 시조)
오오아마 = 덴무(天武) 천황

 

다시 돌아와, 이는 남조가 정통성이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하지만 북조를 지지하는 천황파에게 패합니다.
패한 이유가, 무로마치 막부를 창건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북조 편을 들어서 입니다.

<남북조시대(일본) - 나무위키>
그러다가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한 무가 실력자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다이카쿠지통의 고다이고 천황을 내쫓고 지묘인통의 고묘 천황을 옹립했다. 초기에는 합법적인 즉위 절차를 거친 데다 삼종의 신기를 가지고 요시노로 망명한 고다이고 천황의 남조 쪽이 정통성에서 앞서는 것으로 보였다.
 
남조의 나머지 무리는 아지발도를 주축으로 모여듭니다.
그리고 훗날 북조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백제와의 관련 문서를 모두 없앴음은 물론입니다.
그후 왜구가 사라집니다.

 

아래는 백제 왕족의 직계 혈통과 왜구와의 관련 요약입니다.

또한 이것이 사상 최초로 밝히는 왜구가 사라진 이유입니다.

 
<사상 최초로 밝히는 왜구가 사라진 이유>

  1. 백제 멸망 후, 일본에서 대대로 왕족 혈통 유지
  2. 세월이 흐름
  3. 1을 지지하는 파에 의해 천황 옹립
  4. 반대파와 56년 간 전쟁, 수십만 대군 격돌(혼슈 본토)
  5. 큐슈에서 마지막 전쟁 패배, 10만 이상의 대군 격돌(큐슈)
  6. 이 과정에서 왜구 발생, 중국 남해안과 고려로 침탈
  7. 전쟁에 패한 남조 측은 멸족, 마지막 혈통이 아지발도
  8. 아지발도를 위시한 남은 무리들 + 왜구 = 수만 대군, 고려로 진격
  9. 백제 왕족의 마지막 직계 혈통, 아지발도 죽음(1364~1380, 향년 16세)

 
이왕 여기서 죽느니 백제의 땅에서 죽을 것이다.
제군들은 나를 따르겠는가?!
 
에이 에이, 오~~~!!!
 
최소 2만5천 대군이 군선 5백척에 나눠타고 남해를 거쳐 충남 부여까지 옵니다.
그리고 결국 백제의 마지막 혈통은 이성계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이들은 백제의 고토를 돌아다니며 천지신명에 제사지내고, 신라의 고토를 초토화하며 옛 백제의 복수를 하는 듯한 양상을 보입니다.
 
<아지발도 - 위키백과>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고려 우왕 6년(1380년5백여 척 군세를 갖춘 왜구 선단은 진포(鎭浦, 충청남도 서천 및 전라북도 군산 앞바다)에 상륙하여 인근 지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타고 온 배는 진포에서 나세(羅世), 최무선(崔茂宣) 등이 이끄는 고려 수군의 화포(火砲) 공격에 모두 격침되었는데(진포 해전), 이때 살아남은 왜구는 옥주(沃州)로 달아나 이미 상륙했던 자들과 합세하였으며, 왜구는 이후 이산(利山) · 영동(永同)에 이어 황간(黃澗) · 어모(禦侮)를 공격해 불태우고 또한 중모(中牟) · 화령(化寧) · 공성(功城) · 청리(靑利) 등 고을을 침략, 상주(尙州)를 불태우고 이레를 머물면서 술판을 벌이고 다시 선주(善州)를 쳐서 불태우고 경산부(京山府)를 치며 남하해 갔다.
 
<아기발도(4. 정체에 대한 추정) - 나무위키>
그리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제단을 쌓고 여자아이를 잡아 인신공양을 하며 악기를 연주하기도 했다.

아지발도: 백제의 백성들은 헤치지마라!
제장들: 하핫~!
 
아지발도는 백마를 타고 창으로 싸웠다는 걸로 보아, 16세 치고는 키가 컸을 겁니다.(왕족이니 잘 먹어서?)
근데 16살짜리가 키가 커봤자이고, 성인이 아니기에 다 자란 키가 아니니 많이 잡아 1미터 70이지 않을까 합니다.
 
문제는 이 아지발도가 백마를 타고 창을 휘두르니 고려군이 감히 싸우지 못했다 합니다.(오히려 도망감)
 
<아기발도 - 나무위키>
적장 하나가 있어 나이가 겨우 열대여섯인데, 골격과 용모가 단정하고 고우며 사납고 날램이 비길 데가 없었다. 흰 말을 타고 창을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달려 부딪치니, 그가 가는 곳마다 피미하여 감히 맞서는 이가 없었다. 우리 군이 그를 아기발도(阿其拔都)라 일컬으며 다투어 그를 피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 1권 총서 66번째 기사
 
이건 무얼 의미하느냐?
고려군이 그가 백제 왕족의 마지막 혈통임을 알았다는 반증입니다.
그래서 피하고 맞서지 않았던 겁니다.
 
아니 고려군이 활이 없나요, 화살이 없나요?
 
우리는 신분이 낮으니 임금님이 와서 저 분을 상대하란 말이야~~!!
 
사실 우왕이 직접 와서 상대해야 하지만, 이성계를 보낸 걸로 보아 고려 조정의 의도가 뭔지 뻔합니다.
역사가 제대로 흘러갔다면 백제 대왕이었을 지도 모를 아지발도.
백제 대왕이 누굽니까.

원본 지도 출처: 해수면 상승 시뮬레이션 - 옐로우의 세계

백제의 영토

 
결국 아지발도는 이성계가 투구를 화살로 쏘아 떨구고, 이지란이 쏜 화살이 얼굴을 명중해 즉사한 것으로 기록됩니다.
하지만 이는 조선을 창업한 이성계의 무용담을 부풀린 것으로 봐야 합니다.(조정에 또한 이지란을 소개하며 전공을 부풀림)
즉 각각 수만 대군을 지휘하는 수장이 직접 만나, 한 명은 화살로 투구를 맞추고 다른 한 명은 얼굴을 명중했다는 얘기는 거짓입니다.
이들이 전장에서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황산대첩 - 위키백과>
왜구는 경상도 일대를 노략질한 후 ★사근내역(沙斤乃驛) 등의 험지(險地)를 거쳐 ▲황산으로 모였다. 이성계는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남원에서 배극렴(裵克廉) 등과 합류하였지만 적의 동태를 살피면서 공격을 지체한 이성계에게 식량공급을 하지 않겠다고 위협까지 해서 이성계는 어쩔 수 없이 부서를 재정비한 다음 운봉을 넘어 황산 서북쪽에 이르러 적과 충돌하게 되었다. 그러나 왜구는 산에 진을 치고 싸우므로 이성계는 여러 번 어려움을 겪었고, 고전 끝에 승리하였다.
고려의 왜구토벌사에서 최대의 전과로 꼽히는 지리산의 황산대첩은 변안렬전에 수록되어 있다. 우왕은 황산전투에서 크게 전공을 세운 변안렬과 이성계에게 금 50량씩, 왕복명 이하 여러 장수들에게는 은 50량씩을 주었으나, ③모두 다 사퇴하면서 말하기를 "☎장수가 적을 격멸하는 것은 그 직책인데 우리가 어찌 그것을 받겠는가?"라고 하였다.
 
경남 함양군
전북 남원시 부근 황산
개소리 이는 마음이 찝찝해서 받지 않은 거임

원본 지도 출처: 구글 맵

 
그럼 운봉과 황산의 서북쪽이 어디인지 확대해 보겠습니다. ↓

원본 지도 출처: 구글 맵

 
이를 토대로 황산 정상에서 바라본 아영면,인월면 모습은 이렇습니다. ↓

원본 사진 출처: 남원_황산 : 네이버 블로그

 
아영면에서 인월면까지 아지발도군이 가득 들어차 있었고, 고려군은 사진에서 보이지 않는 반대쪽 운봉읍에 진을 친 겁니다.
 
즉 황산에서 본 운봉읍에는 이성계군이 진을 칩니다. ↓

사진 출처: 남원_황산 : 네이버 블로그

 
양측은 운봉을 넘어 황산 서북의 정산봉(鼎山峰)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적들이 험지에 자리잡고 버티자 죽음을 각오한 이성계가 산 위로 올라가 적을 맞아 싸웠다. 그러자 모든 군사가 총공격을 하여 일대격전을 벌여 아지발도(阿只拔都)를 두목으로 한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
이때 전사한 왜구의 피로 강이 물들어 6, 7일간이나 물을 먹을 수 없었다고 하며, 포획한 말이 1,600여 필이고 병기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④적군이 아군보다 10배나 많았으나 겨우 70여 명만이 살아남아 지리산으로 도망하였다.
 
이에 따르면 고려군의 작전은 이렇습니다. ↓
 
① 이성계와 이지란의 선봉군이 황산을 공격
② 좌·우로 우회한 고려군이 아지발도군 본진을 포위
③ 후미에 있던 본진 병력이 총공격

원본 지도 출처: 구글 맵

 
반면 아지발도군의 작전은 기마 1600기가 있었지만, 어떤 이유로 인해 기마 운용이 쉽지 않았던 듯 보입니다.
즉 비 때문에 평지가 뻘이 되어 말이 달리기 수월치 않았다든가, 주변에 산이 많아도 숲이 없어 매복이 안됐다든가, 고려군이 생각보다 강했다든가 등의 이유입니다.
 
만약 기마 운용이 잘 되어 1600기가 고려군을 포위·공격했다면, 황산 우측의 평지에서 타격을 받고 후퇴하는 고려군을 황산 좌측에 있는 운봉읍에서 전멸에 가까운 대승을 거뒀을 겁니다.(기마 공격이기에)
 
적이 10배나 많고 ②고전 끝에 승리하고 결국엔 임금이 주는 포상금을 모두 사양했다?
 
이건 고려군도 그에 못지않게 죽었다는 걸 말해줍니다.
만약 이때 고려군이 대패해 아지발도군이 개경까지 진격했다면..?
 
암튼 자국의 지리적 잇점을 살려 포위·공격한 고려군은 결국 아지발도를 생포했다고 봄이 맞습니다.
이성계는 그의 용맹함을 아껴 일단 살리려 했지만, 옆에서 이지란이 옛 백제의 왕통을 자처하는 자를 살려두면 화가 되니 죽이라 합니다.
이는 조조가 여포를 죽이는 장면을 생각하면 됩니다.
조조역 = 이성계
유비역 = 이지란
여포역 = 아지발도
 
참수된 날, 그를 따르던 군사들은 통곡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때 하늘도 슬퍼서 비를 내렸을까요?

이성계: 마지막으로 하고싶은 말이 있음둥?
아지발도: 私は百済の最後の残りの子孫として、百済の土地を踏んだので、余暇はありません。
この地にこの体をおさめていただくと、死んでも感謝します。そして、部下たちと兵士たちを生かして百済の地で生きてください。
(내 백제의 마지막 남은 후손으로서 백제 땅을 밟았으니 여한이 없습니다.
이 땅에 이 몸을 거두어 주시면 죽어서도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부하들과 병사들은 살려줘 백제 땅에서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금수저 이성계가 그렇게 모진 인물이 아닙니다.(당시 45세)
그래서 아지발도의 청을 모두 들어줬을 겁니다.
조정에는 이성계가 알아서 보고하면 됩니다.(그만한 위치가 되니까)
 
아지발도의 묘는 황산대첩비가 있는 자리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역사의 숨겨진 진실입니다.
일본(무로마치 막부)은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백제와의 관련을 없애고, 고려는 이걸 사실대로 기록 안했음은 물론입니다.
설령 고려실록은 그가 백제 왕족의 마지막 직계 혈통임을 사실대로 기록했어도, 조선 초기에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삭제했다고 봅니다.(이게 일본서기랑 뭐가 달라?)
 
즉 이 사건은 고려 말까지 백제와 관련된 역사의 연장선인 겁니다.
 
이들이 침략한 이유가, 구글링하면 몇몇 설들이 보이지만 전부 틀렸습니다.(주로 일본측 학설)
 
또 이걸 아는지 모르는지 히데요시는 하필 큐슈 출신의 병력으로 조선에 침공합니다.(큐슈 출신 20만 대군 = 야요이인)
마치 너네 조상 땅이니 더욱 분발해 싸워라 라는 뜻에서 큐슈 병력을 뽑은 걸까요?
더 나아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휴전 시기에 한반도 남부 곳곳에 장기 통치를 위한 왜성들을 쌓은 건 우리가 이미 아는 바입니다.
 
또한 삼국시대의 보물을 자기들 국보로 지정하는 게 일본입니다.
 
이는 다 무얼 의미하느냐?
바로 위에 설명한 대로, 할아버지·아버지에게 한반도 중·남부가 자기들 조상 땅이라는 걸 대대로 전해들은 겁니다.
모르긴 몰라도 이들이 자기들이 사는 열도 못지않게 사랑(?)하는 땅이 한반도 중·남부라는 얘깁니다.
즉 이들은 한국인을 미워하되 한반도 중·남부는 사랑한다고 보여집니다.
 
아니 그럼 우린?
그렇게 따지면 우리의 조상 땅은 그럼 어디냐?

원본 지도 출처: 삼한 - 위키백과

동그라미 친 곳

 
영국인의 조상인 바이킹이 북유럽에서 왔듯이 말갈의 본거지인 부여가 바로 그곳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곳입니다.(연변 연길부터)

안중근 의사가 히로부미를 저격한 곳이 부여의 중심지라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요, 의미심장한 사건입니다.
 
다시 돌아와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辰의 지방 통치 수장
臣xx국(國) - 신지(臣智) ← 토착 부족장?
xx국(國) - 읍군 ← 토착 부족장
진한, 변진, 열도의 xx국(國) - 진왕이 친족 또는 마한의 귀족을 보내 임명, 세습제
 
백제 말기의 지방 통치 수장: 군현제로 개편
군(郡) - 태수
현(縣) - 현령
 
백제 멸망 후의 통치 수장
주(州) - 당: 도독, 신라: 군주
군(郡) - 태수
현(縣) - 현령
 
<정리>
저는 이 블로그 처음부터 우리의 반쪽 조상은 말갈이고, 다른 반쪽은 반도 왜인이라 누차에 걸쳐 주장하였습니다.
정확히 따지자면, 북방 말갈(맥)과 조선의 예를 합친 예맥이 그 첫째입니다.
조선 유민의 1·2차 남하로 예족과 원주민(반도 조몬인)이 합쳐져 韓이 된 게 그 둘째입니다.
韓은 남방의 왜와 더불어 한왜라 일컬어집니다.
 
예 + 맥 = 예맥 (고대 한국어 사용)
한 + 왜 = 한왜 (고대 일본어 사용)
 
- 삼한시대 -
한반도의 지배층 = 예맥
한반도의 피지배층 = 한왜
 
- 삼국시대 -
한반도의 지배층 = 예맥
한반도의 피지배층 = 한왜
 
동시대 열도의 지배층 = 한왜 (야요이인) + 소수의 예맥
동시대 열도의 피지배층 = 열도 조몬인
 
-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 -
한반도의 지배층 = 예맥
한반도의 피지배층 = 예맥의 양민(농민)과 한왜(노예, 천민)
 
보다시피 삼한시대부터 구한말까지 한왜는 한번도 한반도의 지배층이 된 적이 없습니다.
한반도의 한왜는 약 2천년 동안 노예와 천민으로 살다가 일제시대에 동족과도 같은 일본에 의해 해방됩니다.
 
고려시대에 만적을 위시한 수백·수천의 노예들은 한왜일 가능성이 큽니다.
조선시대의 장인·백정·기생 등과 더불어 천방지축마골피도 한왜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들은 모두 지배층인 예맥인을 위해 존재한 노예·천민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부정할 수 없는 이런 한반도의 역사가 있기에 우린 예맥과 한왜를 모두 조상으로 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말갈을 부정해서 말살해버린 고구려사와, 반도 왜를 부정해서 말살해버린 백제와 가야사를 교훈삼아 더 이상 말살의 역사가 있어선 안됩니다.

 

외국에선 이미 반도 일본어설을 알렉산더 보빈이 주장한 것이 유명합니다.

그럼 시간이 갈수록 외국에선 그의 주장을 연구하는 후학들이 생겨날 겁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어차피 고대사의 진실은 밝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옥스퍼드대 등의 초일류대학에서 백인 학자들이 한일 고대사의 진실을 밝혀내지 못할까요?

그들 중에 일빠가 있어 일본 고대사를 연구하다가 한일 고대사의 문제까지 발견하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눈가리고 아웅하는 건 국내에서 족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우리의 반쪽 조상은 예맥이고, 다른 반쪽은 한왜라고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전 세계에 광고(?)해야 합니다.
그것이 위로는 중국이 한국을 깔보지 못하고, 아래로는 일본과 화해하는 길인 겁니다.

(개인적으로 중국인들을 겪은 바, 사람들이 순하고 좋습니다.👍️)


옛부터 이웃나라와 잘 지내야 하는건 동서고금의 진리입니다.
중국 포함 전 세계에 수많은 일빠가 있는 상태에, 우린 한일 고대사를 밝혀 일본과 뿌리 깊고 해묵은 국민감정을 풀고, 또한 역사적 진실을 규명해 서로 윈윈하는 관계로 발전해 나가야 합니다.
 
도쿄와 오사카의 광역시에 각각 3천만 명이 살고, 애니가 특히 발전해 애니로 먹고사는 특이한 나라에 세계人 누구라도 그런 나라에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克日하려면 한일 고대사의 진실규명과 화해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야 일본에서도 임나일본부니, 독도는 일본땅이니 하는 말들이 나오지 않을 겁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고대사와 연관돼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이 (뜬금없지만) 양녕·효령·충녕의 애민정신을 밝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양녕은 세자 때 궁궐 밖에 나가 천민들의 생활상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마치 석가가 궁궐 밖에 나가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고 충격받은 것처럼)
아버지한테 천민을 위한 정치를 하라고 건의해 보지만, 이가 누굽니까?
피도 눈물도 없는 이방원은 이제 막 조선을 창업했는데 왠 천민을 위한 정치냐며 나무랍니다.
이 간나, 미친거 아님메?

 

참고로 이방원은 고려 우왕 9년, 과거에 급제하고 약 5년 동안 고려 조정에서 문관으로 일했습니다.

 

<태종(조선/생애) - 나무위키>

혼인 1년 뒤 17세의 나이로 첫 아이를 가졌고 더불어 과거에 응시하여 병과 7등의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하였다.(1383년)

~중략~

1388년, 22세의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가 일으킨 위화도 회군 당시 전리정랑(典理正郞) 직위를 맡아 개경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후략~

 

하지만 양녕·효령·충녕 대군은 궁궐에서 세자 교육(제왕학)을 받으며 자랐으니, 아버지와는 백성을 보는 시각이 달랐던 겁니다.(특히 천민)

즉 이방원의 눈에는 천민은 천민일 뿐이지만, 대군들의 눈에는 천민도 임금이 이끌어야 할 백성들인 겁니다.

여기서 부자 간에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이방원: 제(禔)야, 니 나중에 아바이보다 잘 할 수 있지비?

양녕: 신은 천민도 백성으로 알고 모두가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 것이옵니다.

이방원: 이 간나, 미친거 아님메?

 

비록 가장 사랑하는 장자지만, 이방원은 훗날 양녕이 나라를 잘 이끌지 못할 것을 염려합니다.

 

양녕은 부왕의 눈 밖에 났으니 아우들에게 세자 자리를 양보하며 당부의 말을 합니다.


내 궁궐 밖에 나가보니 사람들이 사는 걸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것이 어찌 사람이 산다고 할 수 있겠느냐?
선숙이나 원정이 부왕을 이으면 부디 그들을 위한 선정을 베풀어 성군이 되어라.
(선숙: 효령의 자, 원정: 충녕의 자)

 
맏형의 간절한 당부를 받은 이들은 마음 속에 깊이 새겨 듣고, 당시 조선 최고의 명필, 양녕은 결국 폐위됩니다.


하지만 효령은 충녕에게 양보하고, 대신 승려가 되어 천민을 위한 헌신의 길을 걷습니다.
형의 당부를 실행에 옮기고자 한 나름의 삶을 선택한 겁니다.
 
충녕은 왕위를 잇고 천민을 위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 끝에, 그들의 문맹을 없애기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합니다.
신숙주를 일본에 보내 한왜와 일본인의 발음을 연구토록 한 겁니다.(← 신숙주가 일본에 간 이유)
결국 훈민정음을 완성하고, 아들에게도 당부하지만 문종은 2년 만에 죽습니다.
 
그후 단종에 이어 수양대군은 죽은 부왕과 살아있는 백부님들의 뜻을 이어 천민을 위한 법전을 만듭니다.
이 법전은 그 손자인 성종의 대에 완성되니 이것이 경국대전입니다.(시발점: 민생을 위한 법전)

참고로 수양대군의 두 아들은 일찍 죽습니다.(→ 덕종, 예종)
 
<경국대전 - 나무위키>
~중략~ 고려의 법은 사흘만 지나면 흐지부지된다는 뜻의 "고려공사삼일"이라는 말이 유행했고 같은 사안에서도 재판관의 기호에 따라 다른 판단이 내려지거나 법령의 개폐가 빈번했고 법의 적용에도 일정한 기준이 없었다.
그러다가 조선이 건국된 후 신진사대부들은 이전까지 존재했던 국법 제도는 명확한 준칙조차 없는 관습법이라 권문세족과 관료들의 농단에 백성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지 못했고 단지 유력자의 이익만 옹호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후략~
 
이것이 양녕이 세자에서 폐위된 이유이며, 효령이 승려가 된 이유이고, 충녕이 한글을 만든 이유입니다.
즉 조선은 이 분들이 있었기에 민생이 안정되고, 결국 유학이 꽃피웠던 겁니다.
이 분들의 애민정신을 이어 우리의 반쪽은 한왜였다라고 역사에 떳떳히 밝혀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