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1. 12. 03:27ㆍ백제, 신라, 가야, 왜

고이대왕(재위 234 ~ 286년)
전 글에서 제명 여왕이 미마나의 60만 백제인을 구하기 위해 열도 왜의 대군을 일으킨 것이라 하고 끝맺었습니다.
(이하 열도 왜 = 야마토)
그럼 제일 중요한 운송수단인 배는?
삼국사기에 당 총관 설인귀에게 보내는 문무의 답장에 왜선 1천 척이라고 나옵니다.
<문무>
용삭 3년(서기 663)에 이르러 총관 손인사(孫仁師)가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부성을 구원할 때, 신라의 병마도 역시 정벌에 참여하였다. 행군이 주류성 아래에 이르렀을 때 왜국의 수군이 와서 백제를 도우려 하였다. ★왜선 일천 척이 백강(白江)에 머물러 있었고, 백제의 정예 기병들이 강가에서 배를 지키고 있었는데, 신라의 정예 기병들이 중국 군대의 선봉이 되어 먼저 강 언덕의 진지를 쳐부수니, 주류성은 대적할 용기를 잃고 곧바로 항복하였다. 남쪽 지방이 평정되자 군대를 돌려 북쪽 지방을 정벌했는데 임존성(任存城) 한 곳이 고집스럽게 항복하지 않았다. 두 군대가 힘을 합하여 그 성을 함께 공격하였으나, 그들이 성을 굳게 지키며 강력히 저항하였기 때문에 깨뜨릴 수 없었다.
왜선이 몇척이 왔냐도 중요하지만, 야마토가 1천 척의 군선을 보유할 수 있었다는 당대인의 인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한 척에 병사 50명을 태울 수 있는 크기가 당시의 중형 돛단배입니다.
워낙 옛적이라 당시의 마땅한 돛단배 자료가 없어 고려시대의 조운선과 임진왜란 때의 일본 군선을 가져왔습니다.

조선시대 조운선도 비슷하게 생겼음

임진왜란 때의 중형 세키부네

세키부네보다 작은 소형 고바야부네
노의 수가 보다 적은 것에서 크기를 대략 알 수 있음
즉 시대가 변해도 생긴 모양은 비슷한 돛단배입니다.
다만 크기가 얼마나 크냐에 따라 승선 인원이 달라집니다.
중형 돛단배 - 병사 50명 승선
소형 돛단배 - 병사 30명 승선
바람만 순풍이면 돛을 고정한 후, 노를 저으면 빠르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방향은 후미의 키로 조정)
건축물과 더불어 당시의 최첨단 기술로 만들어졌다고 보여집니다.
<백강 전투 - 위키백과>
《일본서기》에는 왜병의 파병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제1파: 부여풍을 호위하기 위한 ☎1만여 인의 선발부대. 선박 170여 척. 661년 662년 5월 출발.
(지휘관: 아즈미노 히라후, 사이노 아치마사, 에치노 다쿠쓰)
제2파: 군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2만 7천 인. 662년 663년 3월 출발.
(지휘관: 카미츠케누노기미노 와카코, 아베노 히라후)
제3파: 이오하라기미(廬原君)가 이끄는 1만여 인. 663년 8월 출발.
이를 근거로 한 척에 몇 명이 승선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170 × 60 = 10,200 명
즉 한 척에 60 명이 승선했던 겁니다.
정말 ☎1만여 인이 맞는지 일본서기에 어떻게 돼있는지 보겠습니다.
<덴지 천황 - 일본서기>
(천지 원년) 662년 5월
5월에 대장군 대금중(大錦中) 아담련비라부련(阿曇比邏夫連)들이 수군 170척을 이끌고 풍장 등을 백제국에 보내주고, 풍장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는 칙을 선포하였다.
五月, 大將軍大錦中阿曇比邏夫連等, 率船師一百七十艘, 送豐璋等於百濟國. 宣勅, 以豐璋等使繼其位.
군선의 숫자만 있고 군사가 몇 명인지는 없습니다.
<백강 전투 주 11 - 나무위키>
주11 왜군 42,000명설은 661년 662년 백제에 파견된 왜군 5,000명 +《일본서기》 663년 3월 기사의 27,000명 + 8월 기사의 10,000명을 별개 병력으로 본 것이다.
연도를 1년 틀리게 한 건 그렇다 치고, 5천 명은 어디서 나온건가요?
만약 5천 명이라면,
170 × 30 = 5,100 명
즉 소형 돛단배 170척을 부여풍 등이 타고 백제로 돌아갔단 얘깁니다.
명색이 백제의 왕자, 大君(오오키미)인데 적어도 1만 군사를 태운 170척의 중형 돛단배가 갔을 겁니다.
(왕자 = 大君)
즉 170척 5천 명이 아닌 170척 1만 명이란 얘깁니다.
근데 자료를 조사하다 또 잘못된 정보가 있어 진행이 막히게 됐습니다.
<백강 전투 - 위키백과>
663년 8월, 권력을 장악한 귀실복신과 부여풍의 싸움이 격화되어 결국 복신이 살해당한 뒤, 부여풍은 고구려와 왜국에 사신을 보내 원병을 청했다. 곧 신라는 백제 부흥군을 진압하고자 했고, 당은 웅진도독부의 유인원의 증원요청에 따라 유인궤(劉仁軌)가 인솔하는 수군 7천 명을 파병했다. 육지에서는 당의 손인사(孫仁師)·유인원 그리고 신라의 문무대왕이 이끄는 정예군이, 바다에서는 당의 두상(杜爽)과 부여융이 이끄는 170여 척의 왜군이, 수륙협공으로 신라의 주류성으로 진격했다. 이때 육지에서는 백제의 기병이 진을 치고 신라군을 막았고, 해상에서는 왜선이 강변의 모래밭에 정박해 대기하고 있었다. 왜병 선단은 전군을 셋으로 나누어 공격했지만 전술 및 간조의 시간차로 인해 나당 연합군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네 번 모두 완패했다. 백강에 집결해 있던 ★1천 척의 함선 가운데 4백 척이 불탔으며, 신·구《당서》와 《자치통감》, 그리고 이들 사료를 참조한 《삼국사기》는 이때의 싸움을 두고 "연기와 불꽃은 하늘을 붉게 물들였고, 바닷물마저 핏빛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왜병의 장수였던 에치노 다쿠쓰는 하늘을 보며 맹서한 뒤 이를 갈며 수십 명을 죽이며 분전했지만 끝내 전사했고, 규슈의 호족이었던 치쿠시노기미 사쓰야마(筑紫君薩夜麻)도 당병에 붙들려 8년 동안이나 포로로 당에 억류되어 있다가 귀국을 허락받았다. 부여풍은 몇 사람의 측근만 거느린 채 배 한 척에 의지해 고구려로 도주하고, 백강에서 대패한 왜병은 각지에 흩어져 있던 왜병과 남부여 유민들 중 망명을 원하는 이들을 배에 싣고 당의 수군에 쫓기며 간신히 귀국했다. 육지에서도 나·당 연합군이 왜의 기병을 물리치고 주류성을 함락시킴으로써, 백제 부흥 세력은 완전히 궤멸되었다.
위 삼국사기에는 ★왜선 1천 척, 위키백과 백강 전투에도 ★1천 척이라고 나오지만, 나무위키 백강 전투의 중국측 사료에는 무려 4천 척이라고 나옵니다. ↓

설마 불탄 4백 척을 4천 척으로 뻥튀기 해서 당 황제에게 보고한 건 아니겠죠?
아니면 나무위키 편집한 분이 400을 4000으로 잘못 기재한 건가요?
실수라고 보기엔 주35 포함해 3번에 걸쳐 4천이라고 분명히 기재했습니다.
상식적으로 4천이 아닌 4백이 맞다고 봅니다만..ㅡㅡ;
여기엔 또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대패한 왜군의 숫자를 알 수 있습니다.
구글링하면 대개 왜선 1천 척 중에서 4백 척이 불타고 왜군은 전멸했다고 나옵니다.
위에 한 척에 60명이 승선했다 했습니다.
그럼 1천 척에 승선한 왜군 수를 계산하면,
1000 × 60 = 6만 명입니다.
즉 정규 승선인원이 50명인 중형 돛단배에 10명 더 채워넣어 60명입니다.(노꾼 제외)
한 척에 60명을 태운 1천 척의 군선, 즉 6만 대군이 왔던 겁니다.
일본 측은 패전했기에 사실을 축소해 기록합니다.
출전 6만 → 4만(?)으로 축소 기록 (일본서기)
왜군 전사자 기록 없음
반면 중국 측은 승전했기에 사실을 확대해 기록합니다.
4백 척 → 4천 척, 전멸시킴
당군 전사자 기록 없음
그리고 전투 중 4백 척이 불탔습니다.
즉 400 × 60 = 2만4천 명이 죽은 겁니다.
나머지 6백 척의 3만6천 패잔병의 행방은?
더 이상 볼일이 없어 열도로 귀환한 듯 싶습니다.
근데 이 2만4천이란 숫자에 노꾼이 포함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위 세키부네의 노의 수를 참조해 당시의 노꾼은 양쪽 면을 합쳐 20명으로 봅니다.
400 × 20 = 8000 명
즉 죽은 노꾼만 8천 명에 달합니다.
2만4천 + 8천 = 3만2천 명 전사
암튼 군선 1천 척 외에 백제유민의 수송을 위해 열도의 있는 배를 다 끌어 모읍니다.
탐라국에서도 출전합니다. ↓
해상왕국 탐라에서 한 100척은 공여했겠지요.
(당시 탐라는 백제의 속국임)

<양해를 구하는 글>
원래 아래에 김춘추로 썼지만 이분은 661년에 돌아가십니다.(향년 58세)
<태종 무열왕 - 위키백과>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 603년 ~ 661년 음력 6월)은 신라(新羅)의 제29대 임금(재위: 654년 음력 3월 ~ 661년 음력 6월)이다. 무열왕(武烈王)으로 불리기도 한다.
참고로 제명 여왕도 이때 돌아가십니다.
생몰 594~661년, 향년 67세
이에 춘추와 유신의 누이의 아들인 김법민으로 고쳤습니다.
김법민 = 문무대왕 (재위 661~681년)
<문무왕 - 위키백과>
《삼국사기》는 법민이 681년 음력 7월 1일에 승하했다고만 했을 뿐 언제 태어났는지, 사망 당시의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하고 있지 않은데, 《문무대왕비》에 따르면 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의 나이가 56세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이를 토대로 역산하면 문무왕의 생년은 진평왕 건복(建福) 43년(626년)에 해당한다.
그럼 662년 당시 한일 통치자의 나이는?
김법민 - 생몰 626~681년, 향년 55세
김유신 - 생몰 595~673년, 향년 78세
나카노오에 - 생몰 626~672년, 향년 46세
나카토미노 카마타리 - 생몰 614~669년, 향년 55세
<이들의 662년 당시 나이>
김법민 - 36세
김유신 - 67세
나카노오에 - 36세
나카토미노 카마타리 - 48세
다시 돌아와, 기록엔 없지만 신라에서도 100척은 빌려주지 않았을까 합니다.
전쟁 중인 적국 당사자인 신라에서 왜?
우연찮게도 김법민과 나카노오에 둘이 동갑입니다.
이심전심이라 했나요?
김춘추 김법민은 빨리 전쟁을 끝내 삼한일통하기를 원했을 겁니다.
즉 백제의 영토만 얻으면 됩니다.
근데 제명 여왕 야마토의 실권자 나카노오에가 사신을 보내 미마나의 백성 60만 명을 열도로 데려가기를 원합니다.
허락만 해주면 신라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조건인 겁니다.
실제로 야마토가 이때 신라를 공격하지 않은 게 증거라면 증거입니다.
(1년 후 모종의 이유로 통수 - 일본서기 덴지 2년(663년) 3월조)
이런 김법민의 생각을 나카노오에 나카토미노 카마타리가 모를 리 없습니다.
(나카토미노 카마타리 ← 일본 만엔 권 지폐에 있어야 할 인물 = 지금의 일본을 존재케 한 인물)
그래서 나카노오에는 극비 사신을 김법민에게 보냅니다.(극비 사신 = 특사)
극비라 사료에 기록 없음은 물론입니다.
<나카노오에가 김법민에게 보낸 극비 외교문서>
신라를 공격하지 않을테니 미마나의 백성을 수송할 신라배 100척 요구
그리고 사신을 받은 법민은 속으로 말합니다.
미마나, 그동안 지겨웠다. 앞으론 다시 보지말자.
<김법민이 나카노오에에게 보낸 극비 외교문서>
신라배 100척 빌려줄테니 야마토의 가려뽑은 선녀 10명 요구
이렇게 서로 합의 하에 도장 찍고 야마토의 선녀 10명이 신라로 가고, 신라배 100척이 수송선에 합류합니다.
이 야마토의 선녀들 중 최고가 왕문도 유인원에게 바쳐짐은 물론입니다.(Best of the Best)
왕문도는 661년에 갑자기 죽어서 이때의 웅진도독은 유인원입니다.(갑자기 죽음 = 복상사, 이때 = 662년)
나머지는 고위급 당나라 장수들이나 신라 장수들에게 나눠 보내든가 김법민이 알아서 잘 대우합니다.
<역대 웅진도독 - 나무위키>
| 이름 | 기간 | 비고 |
| 왕문도 | 660 ~ 661 | 당 장수 |
| 유인원 | 661 ~ 663 | 당 장수, 백제도호부 도호 겸직 |
| 유인궤 | 663 ~ 665 | 당 장수 |
| 부여융 | 665 ~ 682 | 백제 왕족, 전 백제 태자 |
| 부여경 | 690 ~ ? | 백제 왕족, 부여융의 손자 |
근데 김춘추가 58세에 돌아가셨는데, 일찍 죽은 이유가..?
설마 제가 생각하는 거 아니겠죠?
김춘추 - 생몰 603~661년, 향년 58세
김법민은 더 일찍 죽었는데, 설마 아니겠죠??
김법민 - 생몰 626~681년, 향년 55세
역시 김유신은 달라도 다릅니다.(존경스러운)
선녀를 멀리한 것 같습니다.
김유신 - 생몰 595~673년, 향년 78세
암튼 이때 야마토의 끌어 모은 배들은 백제의 미마나로 향합니다.
미마나 백성 60만 명을 데려오기 위해섭니다.
한 척에 병사 50~60명이 승선하던 중형 돛단배에 민간인 240명이 꽉 차게 들어갑니다.
남자는 갑판 위, 여자와 어린애, 노약자는 갑판 아래에 들어갑니다.(위 조운선 참조)

밥은 그저 끼니를 떼울 정도로만 먹고, 세수는 못합니다.
용변은 한쪽 구석에서 보고, 잠은 서로 기대거나 쪼그린 채 잡니다.
즉 극도로 최소한의 생활공간만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하면 몇 척의 배가 필요하냐?
6십만 ÷ 240 = 2500척
이 계산은 일회성으로 한번에 60만 명을 수송할 때입니다.
적어도 2번에 걸쳐 실어나르면,
2500 ÷ 2 = 1250척
그럼 신라와 탐라배 합해 200척과 백제배 100척을 빼면,
1250 - 300 = 950척
즉 2번에 걸쳐 수송할 경우, 야마토는 950척이 있어야 합니다.(중형 사이즈 기준)
근데 아까 위에서 귀환길의 6백 척의 배도 같이 이용했다고 치면,
950 - 600 = 350척
즉 350척만 더 있으면 됩니다.
이미 김법민과의 극비 외교가 있어서 그럴 일은 없겠지만, 수만의 패잔병은 그동안 미마나를 지키기 위해 하선합니다.
(그럴 일 = 통수, 하선 = 배에서 내림)
이건 하나의 예시이자 ♨역사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입니다.
아래까지 계속 읽어주세요.
전남 목포에서 북큐슈까지 도달하는 데에 3~4일이 걸린다고 했을 때, 이게 과연 불가능할까요?
나라가 망해 죽기살기로 백제유민들이 배에 올라타고 야마토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주면?
이때 아니면 언제 백제유민들이 대규모로 열도로 건너가겠습니까.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당시의 그림이 어땠을지 보여주는 떼샷이 있어 가져왔습니다. ↓
단지 참고용으로만 보시면 됩니다.

백제 미마나에서 신라 구야국을 거쳐 대마국을 지나 노국에 당도합니다.
바람만 맞춰주면 3~4일이면 도착할 겁니다.

그렇게 다시는 조상 땅을 밟지 못하는 통한을 품고, 노국에 속속 도착하는 수백 척의 돛단배들.(1차)
모든 걸 버리고 3~4일의 사지를 뚫고, 먼저 온 미마나인들의 구슬픈 환대를 받습니다.
왔소~잉 아 왔소~~잉!
미마나인에겐 통한의 환대지만, 야마토의 조몬인에겐 그저 반가울 뿐입니다.
그들 입장에서 문물이 앞선 백제의 유민들이기에 반가울 밖에요.이들을 통해 앞으로 발전할 야마토의 미래가 개밝습니다.
그래서 같이 따라 환대합니다.
와쏘~잉 와쏘~잉
그 다음 도착하는 수송선들..
조몬식으로 편하게 발음합니다.
와쑈~잉 와쑈~잉
계속 도착하는 수송선들..(2차)
이제 아예 자기들 말이 됐습니다.
와쑈이~ 와쑈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수송선.
이쯤 되면 신이 납니다.
왓쇼이! 왓쇼이!
미마나인들은 속으로,
야들 머여??
그렇게 탄생한 게 왓쇼이 마츠리입니다.(마츠리 = 축제)
<왓쇼이 마츠리 - 구글 AI>
'왓쇼이 마츠리'(わっしょい祭り)는 일본의 여러 지역 축제에서 사람들이 행진하며 외치는 구호로, 특히 기타큐슈의 '왓쇼이 백만 여름 축제'(わっしょい百万夏まつり)가 유명하며, 이는 1988년부터 시작된 지역의 대표적인 여름 축제로 150만 명이 찾는 대규모 행사로 불꽃놀이와 퍼레이드가 특징입니다. '왓쇼이(わっしょい)'는 신을 맞이하거나(「お出になっ」), 행렬을 이끌 때 외치는 구호로, 마츠리(축제)의 활기찬 분위기를 상징하는 소리입니다.
기타큐슈 = 노국
신(神) = 미마나인
또한 이곳으로 친히 마중 나온 나카노오에와 나카토미노 카마타리 역시 미마나인들을 반겨줍니다.
그리고 속으로 외칩니다.
요시! 이제 일본 야마토는 세계최고가 될 수 있어!
그후 노국(후쿠오카현)에서 야마토국(나라현)까지 장대한 행렬을 이루며 나아갑니다.(60만 명의 대행렬)
또한 각지로 나아감은 물론입니다.

후쿠오카현은 일본의 미녀들이 많이 있다.
이때의 미마나인과 관련 있는 걸까?
이때 가는 곳마다 조몬인들의 열렬한 환영은 물론이고, 흩날리는 벚꽃은 덤입니다.
왓쇼이! 왓쇼이!
왓쇼이! 왓쇼이!

수많은 미마나인의 이주를 도와준 조몬의 해맑은 선녀 소녀들
아리가또~!
애들이 너무 이뻐 보인다.
<덴지 천황 - 일본서기>
(천지 원년) 662년 4월
여름 4월에 쥐가 말의 꼬리에 새끼를 낳았다. 석도현이 “북국의 사람이 남국에 붙으려고 한다. 아마 고구려가 패하여 일본에 복속하려는 것일까?”라고 점쳤다.
덴지(天智) = 나카노오에석도현 ← 좆도 모름
쥐가 말의 꼬리에 새끼를 낳았다
원래 점괘 해석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지만 이걸 저보고 해석하라고 하면, 미마나 60만 명이 야마토로 이주가 시작했음을 암시하는 기록입니다.
쥐 = 야마토
말 = 백제
꼬리 = 미마나
새끼 = 미마나인과 조몬인의 결합
이는 쥐가 말의 꼬리에 새끼를 낳았으니 이제 야마토는 무서울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해몽이 좋다!)
즉 야마토는 야만에서 벗어나 크게 발전할 것이란 얘깁니다.
왜냐하면 미마나인과 조몬인이 결합하기에 그렇습니다.
이제 60만의 미마나인이 당장 거주해야 할 집이 문제입니다.(미마나인 = 백제유민)
서민들은 열도까지 와서 또다시 움집에서 살 수는 없습니다.(→ 새출발하는 인생)
남아도는 조몬의 인력과 풍부한 목재, 그리고 백제의 건축술로 (서민용) 목조주택을 이때 비로소 짓습니다.
당시 일본 조정의 정치력도 한몫했을 듯 싶습니다.
어차피 天智조정도 새 나라를 열었습니다.(→ 日本)
모든 걸 혁신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이참에 백성들의 집도 움집에서 목조집으로 지으라는 명을 내립니다.
알고보니 움막집이란 것도 움집과 막집으로 구분합니다.
<움집 - 나무위키>
막집과 외형적으로나 구조적으로나 매우 유사하지만 큰 차이점이 하나 있는데 움집은 바닥을 파 주변 지면보다 집 바닥이 낮지만 막집은 그냥 평지에 그대로 짓는다는 것이다. 막집은 구석기시대, 즉 농사가 발전하지 않은 시대이기 때문에 사냥과 채집을 위해 자주 이동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 결과 짓는 시간이 짧은 막집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물론 농경사회가 시작되면서 막집은 차츰 사라져갔다.
즉 지금까지 써온 움막집이란 움집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움막집 → 움집
다다미도 이때 만들어진 걸까요?

의미심장(?)한 웹사이트 이름입니다.
하지만 다다미는 귀족을 위한 겁니다.
<다다미 - 위키백과>
다다미라는 용어는 '접다' 또는 '쌓다'를 의미하는 동사 타타무(畳む)에서 파생됐다. 이는 초기의 다다미는 사용하지 않을 때 접거나, 층층이 쌓아 놓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다미는 일본의 귀족의 향유물이었다.
당시 서민들은 대나무 돗자리를 깔았을 겁니다.(대나무의 쓰임새는 다양함)
위 사진 속 창호지가 들어오기 전에는 대나무 발이 쓰입니다.
그럼 겨울에 찬바람은 어떻게 하냐?
일본 남부에서 중부까지의 겨울이 그렇게 혹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래 방법으로 추위를 이겨냅니다. ↓
<창호지 - 구글 AI>
사용 방법 (전통 방식)
가을: 찬바람을 막기 위해 창호지 전체에 풀을 발라 붙입니다.
봄: 공기 순환을 위해 창살에만 풀을 바르거나, 풀칠한 다른 종이를 덧대 붙였다 떼는 방식으로 사용합니다.
창호지에 풀을 먹이는 것처럼 대나무 발에 풀을 먹여 틈을 없앱니다.
즉 종이가 들어오기 전에는 대나무가 쓰였고, 이 정도 기술 쯤은 이 시대에 있었습니다.
집 안에 화로를 피운 건 덤입니다.
반면 북부로 갈수록 三韓화가 안된 조몬인의 땅이라 이들은 막집에서 삽니다.
이들은 농사가 아닌 수렵·채집을 하니 움집이 아닌 막집인 겁니다.
三韓화가 안된 조몬 = 에미시
三韓화가 된 조몬 = 야마토
<에조 - 나무위키>
에조(蝦夷えぞ)는 일본의 도호쿠 북부와 홋카이도에 거주했던 민족이다. 시대에 따라 '에미시(毛人)', '에비스'라고도 표기했었다.
저는 에미시라고 부릅니다.
워낙 옛적이라 당시의 기와없는 목조건물 사진이 없습니다.
(지진 나고 폭격 맞는 등 대부분 사라지고 없음)
움집에서 살다 목조집에서 살게 된 조몬인들.
뿐만 아니라 옷, 신발, 젓가락, 농기구 등 크게 의식주와 생활의 혁신을 일으킵니다.
즉 조몬의 서민들은,
옷, 신발 - 원시적인 가죽옷을 버리고 백제옷을 입게 됨
젓가락 - 그때까지 손으로 먹던 반찬을 이제 젓가락을 씀 ♨
농기구 - 농기구의 철제화, 전반적인 농업생산량 증가
♨ 부연설명이 필요해 보입니다. ↓
<젓가락 - 나무위키>
끈기가 있는 자포니카 계열의 쌀을 주식으로 삼는 동아시아의 식문화에 맞추어 만들어지고 발전해 온 도구로, 중국 상나라의 왕 주왕이 상아로 젓가락을 만들었다는 고사를 한비자가 전한다. 이후 진나라가 멸망한 뒤 한나라와 초나라가 전쟁을 치를 때에 젓가락에 관한 고사가 등장하는데, 역이기가 6국의 왕을 봉해 봉건제를 부활시키자는 제안을 하자 장량은 유방이 밥을 먹던 젓가락을 뺏어 분지르며 그 계책의 문제점을 설명했다.
즉 젓가락은 고대중국에서 왕족·귀족의 식사도구라는 건 확실합니다.
한반도에서도 최소 삼국시대부터 젓가락과 숟가락을 함께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숟가락은 고조선 시대 청동기 유물도 발굴된 반면 젓가락은 삼국 시대 이전 것은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 시대 중기까지 서민 계층에서는 숟가락 위주로 사용한 경우도 많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김홍도 등 당대 화가들이 그린 풍속화들을 보면 젓가락을 사용한 증거들도 많이 나오기 때문에 단순한 지역별, 가족별 특색이라 볼 수 있겠다. 한국은 또한 독특하게도 다른 젓가락 문화권 나라들과 달리 전통적으로 숟가락이 차지하는 비중이 좀 더 크다.
즉 삼국시대에 젓가락은 서민용이 아니었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일본-
○ 길이가 짧다. 밥을 젓가락으로 쓸어 먹거나 접시나 그릇을 들고 먹는 습관이 있어서 중국의 젓가락처럼 길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 밥을 쓸어 먹는 이유는 예전 일본에서는 쌀이 귀했다보니 여러 가지 잡곡을 섞어 밥을 지어 먹는 경우가 많았는데 잡곡밥이 끈기가 적다 보니 밥 덩어리를 집어 먹는 것이 아니라 밥그릇을 들어 입에 대고 쓸어 넣듯 먹는 습관이 생겼다고 한다. 애니메이션 같은 데를 봐도 밥그릇을 입에 대고 젓가락으로 끌어 넣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 젓가락 끝이 뾰족한데, 일본이 섬나라인 만큼 생선을 많이 먹기 때문에 생선 가시를 쉽게 발라내기 위해서이다.
○ 일본에서는 국물 요리가 있어도 건더기가 거의 없는지라 숟가락을 쓸 필요가 없다. 전통적으로 일본에서 숟가락을 쓰는 계층은 불교 승려들뿐이었다. 아침 식사를 죽으로 먹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주 작은 건더기 같은 것을 집어 먹기 위해서 젓가락이 짧아졌다.
○ 일본에서는 숟가락이 귀족적이고 젓가락이 서민적인 물품이었다. 헤이안 시대 때 귀족들이 젓가락과 함께 숟가락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더불어 이 시기까지는 일본도 한국처럼 귀족들은 그릇을 들고 먹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귀족과 서민간 문화 차이가 생기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귀족이 여유를 바탕으로 불필요할 만큼 복잡한 예절과 문화를 향유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귀족이 편하게, 서민들이 불편하게 생활하는 것이다. 이 같은 대조는 유럽사에서도 흔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귀족 문화는 쓸데없이 어렵고 복잡하게 발달해서 서민층이 향유하기 어려웠다.우리가 오늘날 '유럽 정찬 문화'라 하면 떠올리는 그 까다로운 예절들이 사실은 프랑스 귀족 문화다. 일본은 헤이안 시대 이후로 막부 정권 시대가 도래하고 전란이 지속되면서 귀족식으로 '차려 먹는 식사'가 군 진영에서 '들고 먹는 식사'에게 밀려나, 다이묘들까지 숟가락을 쓰지 않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숟가락은 젓가락 사용이 서툰 어린아이들이 사용하거나 카레 같은 몇몇 음식을 먹을 때나 사용하는 한정적인 역할로만 남았다.
즉 종합적으로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고대한국 서민들의 식사도구>
밥과 국은 숫가락 이용해 먹음 (밥을 국에 말아서 먹음)
반찬은 손으로 먹음 (주로 김치류로 추정)
→ 젓가락은 귀족용으로 보임 (중국에서 건너온 물건으로 귀족만 허용)
→ ① 오늘날 비빔밥이 괜히 있는 게 아님 (← 서민음식)
→ ② 오늘날 찌개와 전골이 괜히 있는 게 아님 (← 서민음식)
→ ③ 이 찌개와 전골은 큰 냄비에 모두가 숫가락으로 떠먹음
<고대중국 서민들의 식사도구>
밥과 반찬은 젓가락 이용해 먹음
국은 숫가락 이용함
→ 역사가 오래된 만큼 서민이라도 젓가락 사용을 일찍 시작한 걸로 보임
→ 튀김요리가 많은 만큼 젓가락이 필수
<고대일본 서민들의 식사도구>
밥은 그릇을 들고 손가락 두개를 이용해 먹음 (검지와 중지)
국은 그릇을 들고 들이마심
반찬은 손으로 먹음 (주로 생선구이, 해산물로 추정)
♨ 이제 서민들에게 젓가락이 대중화 됨
요인: 미마나인의 이주, 그들과의 결합, 일본의 건국으로 문화·제도 혁신
→ 조몬인이 밥그릇을 들고 먹게 된 이유는?
- 밥그릇은 있음 (← 조몬토기)
- 三韓에서 쌀이 들어와 퍼짐 (← 야요이 시대)
- 밥은 지었지만 이걸 어떻게 먹을까?
- 결국 밥그릇을 들고 손가락 두개로 먹음
동시에 유·불교도 대중화 됩니다.
<유교의 대중화>
충효, 예의범절의 대중 인식 시작
<불교의 대중화>
백제 불교 + 조몬 신토 = 일본식 불교
그래서 이들을 神이라고 칭송해 마지않는 조몬인들.
왓쇼이! 왓쇼이!
당시 빠르게 혼혈화가 진행됐을 걸로 보입니다.
그리고 굳이 신분을 구별하자면 이렇습니다.
- 미마나인 + 야마토인 = 일본의 新귀족 (← 훗날 신찬성씨록을 만든 이유)
- 미마나인 + 조몬인 = 일본의 중산층(?)
- 조몬인 = 기존 대다수 야마토의 서민들 (
서민 = 노비)
이때가 아스카 중기에서 후기로 추정됩니다.
즉 백제 멸망 후 대규모의 백제유민이 야마토로 이주한 무렵(662~663년)부터 아스카 시대 말(710년)까지.
일본의 건국 시대이자 일본 역사의 꽃 = 아스카 시대
(역사의 꽃 = 모두가 행복했던 시대, 즉 황금기)
조몬 → 야요이 → 고훈 → 아스카 → 나라 → 헤이안 → 가마쿠라
참고로 헤이안 시대 - 당시 지구에서 제일 낙원이었던 시대 = 지상낙원(地上樂園)
· 여성 - 겐지모노가타리가 이 시대의 소설로 여성문학가들이 많이 배출
이들이 글을 알고 문학활동을 했다는 건 여성의 지위와 자유를 그만큼 보장했다는 뜻임
· 남성 - 요바이가 이 시대의 결혼풍습으로, 실은 남성 미마나인과의 결혼을 위한 풍습임 (남성이 여성을 선택)
미마나인과의 결합을 위해 혼음도 행해짐, 누구의 자식인가는 따지지 않음 (요바이 - 나무위키)
요바이가 미마나인과의 결합을 위한 풍습임을 모르면 요바이 자체를 이해할 수 없음
→ 남성 미마나인 = 지체 높고 돈 많은 남성이면 더없이 좋은..
<아스카 시대 - 나무위키>
아스카 시대(飛鳥時代あすかじだい)는 일본의 시대 구분 중 하나이다. 기간은 아스카쿄가 세워진 592년(양력 593년)부터 헤이조쿄(나라) 천도인 710년까지이다.
위에 미마나인의 대규모 이주라는 ♨역사의 가능성과 같이 그 결과인 혼혈화도 역사의 가능성입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진실과 내막이 드러나지 않기에 역사의 가능성으로 추정한 겁니다.
근데 여기서 짚고 가야할 것이 있습니다.
나당연합군이 쳐들어와 백제가 멸망할 때 야마토의 정황입니다.
- 백제의 대군(大君), 즉 오오키미가 다스리다 나당 연합군이 백제에 쳐들어옴
- 이때의 오오키미는 부여풍, 적을 쳐부수고 백제를 다시 일으키려고 귀국
- (고모인) 제명에게 원군 요청
- 부여풍의 부흥군 대패하고 자신은 고구려로 망명, 백제의 재건국 실패
- 이때 실권자 나카노오에, 왜왕으로 등극 (大君이 아님)
- 얼마 안가 칭호를 천황으로 바꾸고 일본 건국
- 일본서기 편찬 후 모든 백제 관련 자료 없앰
- 백제의 대군 족보를 없애고, 그 자리에 자기 혈통의 천황 족보를 만듦
(자기 혈통 = 백제 대군의 방계)
뭐 대충 위와 같이 요약됩니다.
원래는 '사상 최초로 밝히는 야마토의 마지막 오오키미(大君) 2편'에서 밝힐 내용이었습니다.(2번)
내용상 알만한 분들은 아실 내용이니 미리 공개해도 괜찮을거 같습니다.
다 쓰지 않아서 그렇지 각 번호 사이마다 벌어지는 일들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집니다.뽕 받으면 언제 '사상 최초로 밝히는 야마토의 마지막 오오키미(大君)' 2편을 쓰겠습니다.
한편 1차로 미마나인들이 배 타고 이주할 무렵, 한반도 백제 땅에서는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는데..
(치열한 공방전 = 참혹한 전쟁)
여기까지 쓰고, 다시 돌아와 웅주 · 완주 · 무주를 쓰겠습니다.
삼천포로 빠져 아직 본론도 진행 안 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channel/UCXUNWHzvqruUqV0D_jw5c1A
삼국사 아카데미
삼한시대와 삼국 초중기 역사를 심층 분석, 탐구합니다. 삼국은 백제, 신라, 가야 입니다. 왜는 덤입니다.
www.youtub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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