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대왕 7(사상 최초로 밝히는 웅·완·무주)

2025. 12. 20. 15:01백제, 신라, 가야, 왜

 
 
고이대왕(재위 234 ~ 286년)
 
전 글에 이어 진행하기 전에 이쯤에서 백제의 지명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행히 신라가 9주 5소경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고, 이는 삼국사기에 고스란히 기록돼 있습니다.
 
<삼국사기 제36권 잡지 제5 지리 3>
웅주 = 웅천주 = 충남(공주)
전주 = 완산주 = 전북(전주)
무주 = 무진주 = 전남(광주)

 

원본 지도 출처: 9주 5소경 - 나무위키


또한 여기에도 간략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삼국사기 제37권 잡지 제6 지리 4>
백제
 
당연히 한반도 내의 고구려와 신라 전토의 지명도 기록돼 있습니다.
여기선 먼저 백제의 지명에 대해 분석·탐구해 보겠습니다.
 
660년 백제가 멸망한 후, 당나라는 백제의 고토에 5도독부를 설치합니다.
이는 백제의 5방 37군 체제를 그대로 계승한 것으로 보입니다.
 
<백제 오도독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60년(의자왕 20) 7월 18일에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항복하자, 당나라는 백제 지역을 장악하고 고구려 원정을 준비하기 위하여 지방 통치 기구를 설치하고자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와 『구당서(舊唐書)』 고종본기 및 「대당평백제비(大唐平百濟碑)」 비문 등에 의하면, 당나라는 백제 고지에 5 도독부(都督府) 37주(州) 250현(縣)의 지방 행정 구역을 설정하였다고 하였다.
백제 영토를 5구역으로 나누어 상위 통치기구인 도독부를 두고 하위의 주와 현을 관할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백제 고지에 설치하려고 했던 5도독부는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마한도독부(馬韓都督府), 동명도독부(東明都督府), 금련도독부(金漣都督府), 덕안도독부(德安都督府)이다. 이 가운데 웅진도독부는 의자왕이 마지막까지 농성하였던 웅진성(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 지역)에 설치되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나머지 4도독부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당나라가 설치하였다는 5도독부 37주 250현이라는 지방 행정 단위가 원래 백제의 지방 행정 단위였던 5방(方) 37군(郡) 200성(城)과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백제의 행정 단위를 그대로 당나라의 지방 통치 기구로 전환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5도독부는 백제의 5방을 계승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5방 가운데 동방의 치소가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군 은진면 일대인 득안성(得安城)인데, 5도독부 중 덕안도독부와 음이 유사하여 같은 위치라고 추정된다. 나머지 3도독부 역시 3방의 치소성에 설치하려 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3방의 위치를 정확히 비정할 수 없기에, 3도독부의 위치 역시 확인하기 어렵다.
 
이 백제의 5방 37군의 위치가 어디냐?
 
곧 백제부흥군이 일어나 5도독부는 얼마 안가 폐지되고, 대신 1개 웅진도독부 체제 하에 여러 속현들이 재편됩니다.
이는 백제부흥군을 진압하기 위해 체계적인 명령을 내릴 필요에 의한 것이라고 봅니다.
 
5방 37군 → 5부 37군 → 5도독부 37주 → 웅진도독부 7주 → 웅주, 완주, 무주

백제
5방 37군 5도독부 37주
5부 37군 웅진도독부 7주

 
그리고 최종적으로 신라 웅주, 완주, 무주로 개편됩니다.
 
근데 살펴본 바, ☎웅진도독부 7개 주의 학계의 지명은 대부분 맞지 않습니다.
대방주의 죽군현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웅진도독부 - 나무위키>
熊津都督府.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후 백제의 고토를 당나라 체제하에서 통치하고자 만든 행정 조직이다.
 
현재의 지명에 비정하는 것은 거의 전부 추측이다.
● 7주: 백제의 지방 지역을 나누기 위해 설치

○ 동명주(東明州) - 오늘날의 공주시와 대전광역시, 세종특별자치시 일대.
■  웅진현(熊津縣): 본래 웅진촌(熊津村)이다. 충남 공주시.
■  노신현(鹵辛縣): 본래 아로곡(阿老谷)이다.
■  구지현(久遲縣): 본래 구지(仇知)이다.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  부림현(富林縣): 본래 벌음촌(伐音村)이다.

~중략~

○  대방주(帶方州) - 본래 죽군성(竹軍城)이었다. 오늘날의 나주시 일대
■  지류현(至留縣): 본래 지류(知留)이다.
■  군나현(軍那縣): 본래 굴나(屈奈)이다.
■  도산현(徒山縣): 본래 압산(押山)이다.
■  반나현(半那縣): 본래 반나부리(半奈夫里)이다.
■  죽군현(竹軍縣): 본래 두힐(豆肹)이다.
■  포현현(布賢縣): 본래 파로미(巴老彌)이다.

● 도독부 직속의 13현: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 구역을 위주로 분할하여 설치
○ 우이현(隅夷縣) - 도독부 소재지이자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
신구현(神丘縣) - 부여군 인근.
윤성현(尹城縣) - 본래 웅천주(熊川州) 열이현(悅已縣)이다. 충남 청양군 정산면.
인덕현(麟德縣) - 본래 웅천주 고량부리현(古良夫里縣)이다. 충남 청양군 청양읍.
산곤현(散昆縣) - 본래 웅천주 신촌현(新村縣)이다. 충남 보령시 주포면.

~중략~

득안현(得安縣) - 본래 덕근지(德近支)이다. 논산시 시내동, 강경읍, 연무읍 일대
용산현(龍山縣) - 본래 고마산(古麻山)이다. 서천군에 복속된 한산군의 옛 명칭이 마산현(馬山縣)임을 근거로 그 근방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방주의 죽군현은 본래 백제에서는 두힐이라고 삼국사기에서 밝힙니다. ↓
근데 학계에서는 이곳이 나주시 일대라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미상 및 기타 - 삼국사기 제37권 잡지 제6 미상 및 기타>
원래 죽군성(竹軍城)이었던 대방주(帶方州)의 6개 현: 원래 지류(知留)였던 지류현(至留縣), 원래 굴나(屈奈)였던 군나현(軍那縣), 원래 추산(抽山)이었던 도산현(徒山縣), 원래 반나부리(半奈夫里)였던 반나현(半那縣), 원래 두힐(豆肹)이었던 죽군현(竹軍縣), 원래 파로미(巴老彌)였던 포현현(布賢縣)

신라 무주 편에 보면 두힐은 두원현으로 나옵니다. ↓
왕조가 바뀜에 따라 지명이 바뀌는데, 아래 두힐현을 예로 들면 이렇습니다.

백제 통일신라 고려
두힐현 강원현 두원현

 
<무주 - 삼국사기 제36권 잡지 제5 신라 무주>
분령현(分嶺郡)은 원래 백제의 분차군(分嵯郡)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낙안군(樂安郡)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넷이다. 충렬현(忠烈縣)은 원래 백제의 조조례현(助助禮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남양현(南陽縣)이다. 조양현(兆陽縣)은 원래 백제의 동로현(冬老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강원현(薑原縣)은 원래 백제의 두힐현(豆肹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두원현(荳原縣)이다. 백주현(栢舟縣)은 원래 백제의 비사현(比史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태강현(泰江縣)이다.

근데 두원현을 구글링하면 이곳은 전남 고흥입니다.
즉 고흥의 옛 지명입니다.
 
<두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라남도 고흥 지역의 옛 지명.
본래 백제의 두힐현(豆肸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강원(薑原)으로 고쳐 분령군(分嶺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940년(태조 23) 두원으로 고쳤고, 1018년(현종 9) 보성군에 소속시켰다. 1143년(인종 21)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뒤에 장흥부(長興府)에 예속시켰다. 조선 세종 때 흥양현(興陽縣)에 이속시키면서 폐현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고흥군이 되어 두원면이 되었다.

<고흥군 - 나무위키>
마한의 땅이었던 고흥은 삼국시대에 백제에 속하게 된 이후 조조례현(助助禮縣, 남양면), 두힐현(豆肹縣, 두원면), 비사현(比史縣, 동강면)의 세 현이 설치되었다.
 
그러니까 두힐현 = 죽군현 = 강원현 = 두원현 = 고흥군인 겁니다.

백제 통일신라 고려 조선
두힐현 죽군현 강원현 두원현 고흥군

 
이에 따르면 웅진도독부 대방주의 죽군성은 (고흥군에 있던) 죽군현의 치소입니다.
즉 대방주는 나주시 일대가 아니라 고흥, 보성, 순천, 여수를 아우르는 전남의 동남부입니다.
 
왜 이곳을 대방주라고 했냐?
그건 당나라의 초대 웅진도독 왕문도한테 물어보면 됩니다.
근데 이분도 갑자기 죽습니다.
 
<왕문도 - 위키백과>
왕문도(王文度, ? ~ 660년)는 당나라의 무장이다. 서돌궐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황제의 명령을 거짓으로 꾸민 탓에 제명당했다. 복귀한 후 초대 웅진도독이 되었으나 곧 병사하였다.
 
<왕문도 - 나무위키>
왕문도는 태종 무열왕과 삼년산성에서 만났고 9월 28일에 삼년산성에 이르러 조서를 전달하려고 했다가 갑자기 사망했다.
 
<태종 무열>
7년(660년) 9월, 당나라 황제가 좌위중랑장(左衛中郞將) 왕문도(王文度)를 보내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았다.
28일, 왕문도가 삼년산성(三年山城)에 이르러 조서를 전달하였다. 문도는 동쪽을 향하여 서고 대왕은 서쪽을 향하여 섰다. 칙명을 전한 후 문도가 임금에게 당 황제의 예물을 주려고 하다가 갑자기 병이 나서 곧바로 죽어버렸기에, 왕문도의 시종이 대신하여 조서를 전달하는 의식을 마쳤다.
 
이에 따르면 왕문도와 김춘추는 양쪽에 선 상태에서 황제의 칙명을 전했습니다.
그후 문도가 황제의 예물을 주려다가 갑자기 쓰러졌다는 겁니다.
 
즉 전 글에서 설명한 심혈관 질환이 의심스럽습니다.
(정말 물어보고 싶었는데..)
 
당나라 13만 대군으로 막 백제를 멸망시켜서 감히 초대 웅진도독을 독살하진 않았을 겁니다.
그럼 복상사의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김춘추가 신라나 백제의 선녀들을 바친 걸까요?
이때 춘약은 덤입니다.

<문무>
8년(서기 668) 봄, 황제가 칙명을 내려 이후로는 여인을 바치는 것을 금하도록 하였다.

八年春 有勅此後禁獻女人

 

아니나 다를까 저의 추측이 맞았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여인은 평범한 여인네가 아닙니다.

저는 전글서부터 선녀라고 표현했지만, 원래는 미녀라고 해야 맞습니다.

 

<사실>

  1. 김춘추가 왕문도에게 미녀를 바침 (춘약은 덤)
  2. 왕문도, 춘약 먹고 미녀와 놂 (술은 덤)
  3. 며칠 지남(?)
  4. 갑자기 쓰러짐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니까 황제가 사후 조사반을 꾸렸나 봅니다.

그래서 칙명으로 여인 바치는 걸 금하게 된 겁니다.

 

이제 백제의 지명들을 본격적으로 밝혀 보겠습니다.
이걸 알아야 다음 글에서 진행할 좌장 진충의 대군이 사로국의 어디를 어떻게 진격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이>
7년(서기 240), 병사를 보내 신라를 침범하였다.
여름 4월, 진충(眞忠)을 좌장(左將)으로 삼아 중앙과 지방의 병마의 임무를 맡겼다.
 
옛 지명을 밝히는 특성상 참고할 자료가 많으니 좀 복잡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전 글 '한군현의 위치'를 밝히는 것과 더불어 사상 최초임을 밝혀둡니다.
 
<백제 - 삼국사기 제37권 잡지 제6 백제>
당 현경(顯慶) 5년(서기 660)은 바로 의자왕 20년이었는데 이때 신라 유신이 당의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쳐서 평정하였다. 옛날 백제에는 5부가 있어서 37개 군, 2백 개 성, 76만 호를 나누어 통솔했었다. 그 후 당은 그 지역에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등 다섯 개의 도독부를 설치하고 그곳 추장들을 도독부자사(都督府刺史)로 삼았으나, 얼마 되지 않아 신라가 그 지역을 모두 차지하여 웅주(熊州), 전주(全州), 무주(武州)의 3주와 여러 군현을 설치하였으니, 신라는 백제의 이 땅과 고구려의 남쪽 지역 그리고 신라의 본토를 합하여 9주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의 원래 5부는 5방이라고 합니다.
 
<백제 오방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백제는 사비(泗沘: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에 도읍한 뒤 관제를 정비, 지방을 5개의 방(方)으로 편제하였다. 방위에 따라 동방 득안성(得安城), 서방 도선성(刀先城, 혹은 力光城), 남방 구지하성(久知下城 혹은 卞城), 북방 웅진성(熊津城), 중방 고사성(古沙城)이다. 5방의 치소는 북방 웅진성은 지금의 공주(公州)를 말하며, 동방 득안성은 논산 근처로 추정되고, 중방은 고부로 비정된다. ▲서방 · 남방의 위치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실정이다.
 
즉 동방, 서방, 남방, 북방, 중방입니다.
위에 언급했듯 이를 토대로 당나라에서 5도독부를 설치한 겁니다.
근데 학자마다 견해가 달라 그 위치가 불명입니다.
 
<백제 오도독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60년(의자왕 20) 7월 18일에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항복하자, 당나라는 백제 지역을 장악하고 고구려 원정을 준비하기 위하여 지방 통치 기구를 설치하고자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와 『구당서(舊唐書)』 고종본기 및 「대당평백제비(大唐平百濟碑)」 비문 등에 의하면, 당나라는 백제 고지에 5 도독부(都督府) 37주(州) 250현(縣)의 지방 행정 구역을 설정하였다고 하였다.
백제 영토를 5구역으로 나누어 상위 통치기구인 도독부를 두고 하위의 주와 현을 관할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백제 고지에 설치하려고 했던 5도독부는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마한도독부(馬韓都督府), 동명도독부(東明都督府), 금련도독부(金漣都督府), 덕안도독부(德安都督府)이다. 이 가운데 웅진도독부는 의자왕이 마지막까지 농성하였던 웅진성(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 지역)에 설치되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나머지 4도독부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당나라가 설치하였다는 5도독부 37주 250현이라는 지방 행정 단위가 원래 백제의 지방 행정 단위였던 5방(方) 37군(郡) 200성(城)과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백제의 행정 단위를 그대로 당나라의 지방 통치 기구로 전환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5도독부는 백제의 5방을 계승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5방 가운데 동방의 치소가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군 은진면 일대인 득안성(得安城)인데, 5도독부 중 덕안도독부와 음이 유사하여 같은 위치라고 추정된다. 나머지 3도독부 역시 3방의 치소성에 설치하려 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3방의 위치를 정확히 비정할 수 없기에, 3도독부의 위치 역시 확인하기 어렵다.
 
즉 위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동방 덕안도독부
서방 ?
남방 ?
북방 웅진도독부
중방 ?

 
그럼 하나씩 추리해 보겠습니다.
먼저 고대에 덕안의 덕(德)은 득(得)과 통하기에 득안성이 맞다고 봅니다.(덕안도독부 = 득안성)
(유가에서 德은 인의예지를 수양해서 얻어지는 것이므로 得과 통하는 글자임)
 
근데 위 웅진도독부 직속 13현 중에 득안현이 있습니다.
득안현(得安縣) - 본래 덕근지(德近支)이다.
 
이에 따르면 득안은 덕근이라는 얘깁니다.
 
5부가 있어서 37개 군, 2백 개 성, 76만 호를 나누어 통솔했었다.
 
삼국사기에 백제의 37개 군에 덕근군이 있습니다.
 
<백제 - 삼국사기 제37권 잡지 제6 백제>
덕근군(德近郡) 가지나현(加知奈縣)[가을내(加乙乃)라고도 한다.] 지량초현(只良肖縣) 공벌공현(共伐共縣)
 
<전주 - 삼국사기 제36권 잡지 제5 신라 전주>
덕은군(德殷郡)은 원래 백제의 덕근군(德近郡)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덕은군(德恩郡)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시진현(市津縣)은 원래 백제의 가지나현(加知奈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여량현(礪良縣)은 원래 백제의 지량초현(只良肖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운제현(雲梯縣)은 원래 백제의 지벌지현(只伐只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즉 득안현이 덕근군이라는 얘깁니다.
득안현 = 덕근군?
과연 그럴까요? 
 
구글링한 바, 덕은이란 지명은 덕은 이씨의 관향이라고 합니다.
(비미호의 관가가 비미국이듯)
 
<덕은 이씨 - 위키백과>
덕은 이씨(德恩 李氏)는 충청남도 논산시를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고려조(高麗朝) 대대로 태사(太師)를 엮임하였던 고려의 정치 교육 명문가의 직계후손 가문이다.
덕은(德恩)은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의 옛 지명으로, 본래 백제에는 덕근군(德近郡)이었는데 신라 경덕왕이 덕은군(德恩郡)으로 개명하였다.
 
즉 덕은 이씨는 충남 논산을 관향으로 하는 명문가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 결국 덕근군은 논산이라는 겁니다.
 
근데 덕근군에는 3개의 속현이 있습니다.
 

  1. 시진현 - 본래 백제의 가지나현(加知奈縣)[가을내(加乙乃)라고도 한다.] 
  2. 여량현 - 본래 백제의 지량초현(只良肖縣)
  3. 운제현 - 본래 백제의 지벌지현(只伐只縣) = 지부지현(只夫只縣) = 공벌공현(共伐共縣)

 
구글링한 바, 각 현들은 현재의 지명이 이렇다 합니다.

<구글 AI>
'전북 시진현'은 역사 속 지명인 시진현(市津縣)을 가리키며, 이는 현재의 전주시 일대에 해당했던 옛 지명입니다. 고려 초 완산주에 통합되며 폐지되었고, '시진현'은 '가지나현(加知奈縣)' 또는 '가을내', '신포'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지명에 津과 신포가 들어가는 걸로 보아 전주가 옛날에는 포구였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전 글들에서 전주항, 비미국을 누차 언급)
<구글 AI>
전북의 '여량현(礪良縣)'은 현재의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일대의 옛 지명으로, 백제 시대 지량초현(只良肖縣)에서 신라 경덕왕 때 여량현으로 바뀌었고, 고려 시대까지 이어지다 1404년(태종 4)에 인근 낭산현(朗山縣)과 합쳐져 '여산현(礪山縣)'이 되면서 오늘날 '여산'이라는 지명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여량현이 여산현이라고 비교적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글 AI>
전북 운제현(雲梯縣)은 현재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화산면과 운주면 일대에 위치했던 백제, 신라 시대의 옛 지명으로, 백제 때는 '지벌지현(只伐只縣)'으로 불렸고 신라 경덕왕 때 '운제'로 개칭되어 덕은군에 속했으며, 조선 초기에 고산현에 통합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역 행정구역입니다.
즉 운제현은 현재의 화산면, 운주면 일대라고 합니다.
 
이를 토대로 지도를 작성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지도·사진 크기 - 데스크탑 모니터에 최적화)

원본 지도 출처: 구글맵

 
이것들은 다 무얼 의미하냐?
덕근군이 전주의 이북, 즉 전북의 북부에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근데 덕은 이씨의 관향은 충남 논산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이걸 짜맞추면 이렇게 됩니다. ↓
 

  • 원래 백제의 덕근군은 전북의 북부에 위치함
  • 웅진도독부 직속 13현의 득안현은 충남 논산에 위치함

 
이를 토대로 다시 지도를 작성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원본 지도 출처: 구글맵

 
웅진도독부 직속의 득안현은 나중에 새로 설치한 현이라는 얘깁니다.
이를 입증하는 것이 이겁니다. ↓
 
백제 멸망 후, 당나라는 그곳에 5도독부를 설치합니다.
5도독부는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마한도독부(馬韓都督府), 동명도독부(東明都督府), 금련도독부(金漣都督府), 덕안도독부(德安都督府)이다.
 
하지만 처음에 언급했듯 백제부흥군이 일어나 5도독부는 얼마 안가 폐지되고, 대신 웅진도독이 다스리는 1개 도독부 체제 하에 여러 속현들이 재편됩니다.(→ 통폐합)
이는 백제부흥군을 진압하려면 한곳에서 명령을 내릴 필요에 의한 것이라고 위에 언급했습니다.
그것이 위에 썼던 ☎웅진도독부 7개 주입니다.
그후 신라에 의해 이 웅진도독부 7개 주는 웅주, 완주, 무주로 개편됩니다.(→ 9주5소경)
 
그럼 여기서 알 수 있는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원래 백제의 덕근군은 전북에 위치했는데, 훗날 득안현은 웅진도독부 7개 주를 재편하면서 신설한 겁니다.
여기서 덕근과 득안을 동일시 하여 학계에서 헷갈려 하고 지명을 명확히 설명 못 하는 겁니다.
 
그 증거가 이겁니다.
득안현(得安縣) - 본래 덕근(德近)이다.
支라는 한자 뜻을 보아 덕근으로 가는 쪽으로 해석됩니다.
이는 당시의 도성이었던 사비성(부여군)에서 덕근군으로 가는 길목이 바로 논산시 은진면이라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위 지도 참조)
즉 당시 백제인들이 사비성에서 덕근군으로 가는 길목을 덕근지라고 불렀던 겁니다.
 
그리고 득안현은 정작 덕근군의 3개 현에 들어있지도 않을 뿐더러, 방향·위치도 모두 위 설명에 부합됩니다.(덕근지)
또한 덕근군은 대부분이 산지라 덕안도독부, 즉 도독이 다스리는 득안성이 있을 만한 장소와 인구가 마땅치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논산이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정확히는 논산시 남쪽 일대 = 은진면)
 
모든 정황으로 보아 덕근군과 득안현은 동일한 지명이 아니란 결론에 도달합니다.
단지 덕근지라는 지명을 빌려 그곳에 득안현이라고 한 것입니다.
덕근 → 덕안 → 득안
 
다시 말해 이 웅진도독부의 득안현은 백제의 덕근군이 아닙니다.
 
그럼 남방은 어디냐?

동방 덕안도독부 득안성 충남 논산시 은진면
서방 ? 역광성 ?
남방 ? 변성 ?
북방 웅진도독부 웅진성 충남 공주시
중방 ? 고사성 전북 정읍시 고사부리성

 
<백제 오방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주서(周書)』와 『한원(翰苑)』에 인용된 『괄지지(括地志)』에 의하면, 왕성(王城)인 사비성의 크기가 방 1리 반(方一里半)이며, 1만여 가가 된다고 하였다. 중방 고사성은 사비 남쪽 260리에 있으며, 크기는 방 150보(方百五十步)로 1,200명의 병력이 있었다. 고사성은 고사부리(古沙夫里)에 비정되는데 고사부리는 『고려사(高麗史)』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고부(古阜)의 백제시대 명칭으로 나온다. 고사부리는 영역 확장과정에서 일찍부터 백제의 세력이 미친 지역으로 온조왕(溫祚王) 36년에는 성을 쌓는 등 중요한 거점으로 파악된다. 최근 발굴 조사된 고부 구읍성 출토유물 등을 검토해볼 때, 중방 고사성을 전북 고부(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로 보는 견해가 있다.
동방 득안성은 사비 동남쪽 1백리에 위치하며, 크기는 방 1리이다. 지금의 충청남도 은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남방 변성은 사비 남쪽 360리에 있으며, 크기는 방 130보이다. 구지하성이라는 지명이 지리지나 사서 중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전북 금구(金溝 : 현,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나 전남의 구례, 광주 또는 남원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 서방 역광성은 사비 서쪽 350리에 있으며, 크기는 방 200보이다. 서방에 대해서는 서산 · 당진 방면 또는 예산 · 대흥 방면으로 비정하거나 나주와 영암 또는 보령 지역에 비정하는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 북방 웅진성은 사비 동북 60리에 위치, 크기는 방 1리반이다.
 
위에 따라 지도를 작성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원본 지도 출처: 구글맵

 
중방 고사성이 방향과 거리, 이름을 볼 때 고사부리성이 맞아 보입니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남방 구지하성의 위치를 추정해 보면 이렇습니다.
사비성에서 남 260리 = 고사부리성(고사성)
사비성에서 남 360리 = 구지하성(변성)
즉 고사부리성에서 남쪽으로 100리를 더 가면 뭔가 있어야 합니다.

원본 지도 출처: 구글맵

 
아니나 다를까 고사부리성에서 남쪽 100리 지점엔 고창군 뿐입니다.
이 고창군은 당시 완주가 아닌 무주에 속해 있었습니다.
완주 = 완산주 = 전북(전주)
무주 = 무진주 = 전남(광주)
 
<고창군 - 나무위키>
마한 모로비리국이었다(고 비정된다).
백제에 병합되어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이 되었고, 신라 경덕왕의 전국 지명 한화정책 때 지금까지 사용되는 고창현(高敞縣)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전라북도지만 이 당시에 9주 5소경 중에서 지금의 전주시인 완산주가 아닌 지금의 광주광역시인 무진주에 속하였다. 곧 전라남도 쪽이었다.
1896년에 13도가 시행되며 전라도가 남북으로 나뉠 당시에도 전라남도 산하였다가 1907년 흥덕군, 무장군 두 고을과 함께 전라북도에 편입되었다. 이후 1914년 고창군, 무장군, 흥덕군 세 개 군을 통합하여 오늘날의 고창군이 형성되었다.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은 新彌多離에 속한 일개 소국입니다.
新彌多離 = 신운신국 + 비미국 + 많은 리로 끝나는 소국들
 
<무주 - 삼국사기 제36권 잡지 제5 신라 무주>
무령군(武靈郡)은 원래 백제의 무시이군(武尸伊郡)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영광군(靈光郡)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장사현(長沙縣)은 원래 백제의 상로현(上老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고창현(高敞縣)은 원래 백제의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무송현(茂松縣)은 원래 백제의 송미지현(松彌知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모로비리국 = 모량부리현 = 고창현

따라서 남방 구지하성은 모량부리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모량부리현 내에 있는 치소가 구지하성인 겁니다.
(사료에 구지하성 = 변성)

동방 덕안도독부 득안성 충남 논산시 은진면
서방 ? 역광성 ?
남방 ? 변성 전북 고창군
북방 웅진도독부 웅진성 충남 공주시
중방 ? 고사성 전북 정읍시 고사부리성

 
그럼 마지막 서방은 어디냐?
서방 역광성은 사비 서쪽 350리

원본 지도 출처: 구글맵

 
글자 그대로 서쪽 350리쯤 가면 바다 건너 섬인 외연도가 나옵니다.
산과 바다가 끼여있어 정확하게 350리는 아닙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곳에 봉화산(279m)이 있고, 봉수대에서 외적의 침입을 알렸다고 합니다.
 
<외연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략~
이러한 외연도의 위치적 특성으로 인해 과거에는 봉수대에서 연기와 횃불로 외적의 침입을 한양에 알리기도 하였다.
외연도는 백제 때에는 신촌현(新村縣), 신라 때에는 신읍현(新邑縣),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보령현, 조선 말기에는 오천군 하서면에 속하였다.
 
<웅주 - 삼국사기 제36권 잡지 제5 신라 웅주>
결성군(潔城郡)은 원래 백제의 결이군(結已郡)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신읍현(新邑縣)은 원래 백제의 신촌현(新村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보령현(保寧縣)이다. 신량현(新良縣)은 원래 백제의 사시량현(沙尸良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여양현(黎陽縣)이다.

이 백제의 신촌현은 충남 보령시입니다.

즉 이곳에서 외연도의 봉화를 보고 외적의 침입을 도성에 알린 겁니다.

 

이 중요한 군사요충지는 웅진도독부의 직속 13현에 속해 있습니다.

산곤현(散昆縣) - 본래 웅천주 신촌현(新村縣)이다.
 
당나라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대군을 외연도의 봉화가 알렸을까요?
혹시 이때 봉화를 알리지 못해 백제가 멸망한 걸까요?
하지만 삼국사기 의자왕 조에 보면 당나라 대군이 오는 걸 백제 조정은 알고 있었습니다.
 
<의자>
당나라 고종이 조서를 내려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아 좌위장군(左衛將軍) 유백영(劉伯英),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풍사귀(馮士貴)와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방효공(龐孝公) 등과 함께 병사 1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였다. 아울러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자기 나라 병사를 거느리고 당나라 병사와 합세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병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나라의 서쪽 덕물도(德物島)에 이르자, 신라왕은 장군 김유신을 보내 정예병 5만 명을 거느리고 당나라 병사와 합세하게 하였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군신들을 모아 싸우는 것과 지키는 것 중 어느 것이 마땅한 지를 물었다. 좌평 의직(義直)이 나서서 말하였다.
“당나라 병사는 멀리 바다를 건너 왔습니다. 물에 익숙하지 못한 자들이 배를 탄 탓에 분명 피곤해 있을 것이므로, 그들이 상륙하여 사기가 미처 회복되지 못했을 때 급습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신라 사람들은 큰 나라의 원조를 믿기 때문에 우리를 경시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니, 만약 당나라 병사가 불리해지는 것을 보면 반드시 두려워서 감히 날쌔게 진격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당의 병사와 결전을 하는 것이 옳습니다.”
~후략~

동방 덕안도독부 득안성 충남 논산시 은진면
서방 ? 역광성 서해 외연도
남방 ? 변성 전북 고창군
북방 웅진도독부 웅진성 충남 공주시
중방 ? 고사성 전북 정읍시 고사부리성

 
참고로 여기 나오는 덕물도는 덕적도라고 합니다.
 
<덕적도 - 위키백과>
덕적도(德積島)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에 속하는 섬이다.
660년 백제를 정벌하기 위한 신라의 요청에 부응하여 당나라의 소정방이 대군을 이끌고 들어온 덕물도(德物島, 德勿島)가 바로 덕적도이다.

원본 지도 출처: 구글맵

 
덕물도로 오든 외연도로 오든 결국 봉화는 올리게 되어 있습니다.
 
① 백제 5부 37군 200성 → 백제멸망 → ② 당 5도독부 37주 250현 → 백제부흥군 → ③ 당 웅진도독부 7주 51현 → 나당 전쟁 → ④ 신라 2소경 38군 103현
 
근데 동명주 4현에 신촌현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이유가 ②에서 ③으로 갈 때이므로 당시 신촌현은 백제부흥군에 속해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게 첫 번째 이유이고, 두 번째 이유는 이렇습니다.
 
<웅진도독부 - 위키백과>
1. 동명주東明州-웅진(熊津, 공주)을 중심으로 4현을 관할했다.
● 웅진현熊津縣-공주시
● 노신현鹵辛縣-원래 아로곡(阿老谷)인데 위치는 미상, 아로곡은 반남군 노안현 안로현 이름과 같지만 거리상 불가능하다.
● 구지현仇知縣-신라시대 금지현(金池縣), 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 부림현富林縣-원래 벌음지현(伐音支縣), 신라시대에 청음현(淸音縣)으로 개명한 공주시 신풍면
 
백제 반나부리군에 아로곡현이 있는데, 이곳은 전남 나주시의 면입니다.
 
<무주 - 삼국사기 제36권 잡지 제5 신라 무주>
반남군(潘南郡)은 원래 백제의 반나부리(半奈夫里)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야로현(野老縣)은 원래 백제의 아로곡현(阿老谷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안로현(安老縣)이다. 곤미현(昆湄縣)은 원래 백제의 고미현(古彌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潘南郡 本百濟半奈夫里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 野老縣 本百濟阿老谷縣 景德王改名 今安老縣 昆湄縣 本百濟古彌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반남 - 나무위키>
반남면(潘南面)은 나주시의 면이다. 마한 시대 유적인 반남 고분군으로 유명하며, 반남 박씨의 본관이 되는 지역이다.
 
<나주 반남 고분군 - 위키백과>
나주 반남 고분군(羅州 潘南 古墳群)은 대한민국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에 있는 삼국시대의 고분군이다. 2011년 7월 28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513호로 지정되었다.
 
즉 이 모든 건 무얼 말하느냐?
사람 손에 의한 실수인 겁니다.
 

  • 웅진도독부 동명주의 노신현은 아로곡이 아님
  • 삼국사기 신라 무주의 반나부리현은 반나부리군으로 표기돼야 함
  • 웅진도독부 위키백과의 설명에서 반남군 노안현이 아니라 안로현임

 
<정리>
동명주 4현에 신촌현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이유
 

  1. ②에서 ③으로 갈 때이므로 당시 신촌현은 백제부흥군에 속해 있을 가능성 있음
  2. 사관이 기록할 때의 실수로 본래 동명주에 속해 있어야 함

 
결국 둘 중 하나가 답이 되겠습니다.
 
나머지 물음표도 채워넣어 보겠습니다.
 
서방이 사비성에서 서쪽 350리에 있는 외연도라는 추정에 따라, 이 지역의 관할 현은 백제 결이군 신촌현 소속입니다.
(현 충남 보령시)
 
그럼 웅진도독부 7주 당시의 결이군의 관할 주는 동명주로 보입니다.
서방은 동명도독부란 얘깁니다.

동방 덕안도독부 득안성 충남 논산시 은진면
서방 동명도독부 역광성 서해 외연도
남방 ? 변성 전북 고창군
북방 웅진도독부 웅진성 충남 공주시
중방 ? 고사성 전북 정읍시 고사부리성

 
그럼 이제 남방을 보겠습니다.
 
위에 구지하성(= 변성)의 위치를 전북 고창이라 했습니다.
 
남방 구지하성(久知下城 혹은 卞城)
 
고창의 위치가 전북과 전남의 사이에 있어 이곳에 마한도독부를 두었다고 봅니다.
 
그럼 마지막 중방 고사성은 나머지 금련도독부가 됩니다.
금련이란 이름이 명확한 뜻이 없어 가장 애매했지만, 마지막 남은 것이 금련이기에 결국 중방입니다.

동방 덕안도독부 득안성 충남 논산시 은진면
서방 동명도독부 역광성 서해 외연도
남방 마한도독부 변성 전북 고창군
북방 웅진도독부 웅진성 충남 공주시
중방 금련도독부 고사성 전북 정읍시 고사부리성

 
5도독부는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마한도독부(馬韓都督府), 동명도독부(東明都督府), 금련도독부(金漣都督府), 덕안도독부(德安都督府)이다.

원본 지도 출처: 구글맵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 백제의 5방이 도성인 사비성을 중심으로 포진해 있다는 겁니다.
즉 수도방위군의 개념으로 보면 될 거 같습니다.
 
위 지도처럼 백제의 영역이 웅주와 완주란 얘기도 됩니다.
 
웅주 = 웅천주 = 충남(공주)
전주 = 완산주 = 전북(전주)
무주 = 무진주 = 전남(광주)
 
이는 일부에서 무주가 독립적인 마한이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됩니다.
하지만 삼국사기가 이곳은 원래 백제의 땅이라고 밝힙니다. ↓
 
<무주 - 삼국사기 제36권 잡지 제5 신라 무주>
무주(武州)는 원래 백제의 땅인데 신문왕 6년(서기 686)에 무진주(武珍州)로 만들었고 경덕왕이 무주로 개칭한 것으로써 지금의 광주(光州)이다.
 
삼국사기가 이곳이 원래 백제의 땅이라고 하는데 누가 토를 답니까?
결국 마냥 독립국이 아니라 전 글들에서 누차 언급했듯 이곳은 백제령 자치국으로 봄이 타당합니다.
 
新彌多離 = 미마나(彌摩那) → 백제령 자치국
 
그럼 이곳이 백제 땅이라면, 왜 당나라 13만 대군이 쳐들어왔을 때 원군이 없었냐?
그건 워낙 불시에 쳐들어온 상태에서 원군요청의 전령을 보냈지만, 원군이 오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백제 전군 동원령)
 

  1. 원군요청 전령 보냄 (백제 전군 동원령)
  2. 전령이 가는 시간
  3. 원군 집결하는데 시간
  4. 원군 오는데 시간

 
참고로 여기도 읽어보시면 좋습니다.
[백제 마지막 전쟁의 진실] ⑧백제군의 주력부대는 당진·예산방면으로 투입되었다. < 문화 < 뉴스플러스 < 기사본문 - 굿모닝충청

 

[백제 마지막 전쟁의 진실] ⑧백제군의 주력부대는 당진·예산방면으로 투입되었다.

[굿모닝충청 이재준 청운대 남당학연구소 연구교수] 앞서 검토한 결과 백제는 660년 6월 11일경 나당연합군의 침공사실을 알고 전국에 동원령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동원에 응한 

www.goodmorningcc.com

 
그리고 하나 더 덧붙이자면, 북방 말갈계가 빨리빨리 하는 성격이지 남방 韓인은 좀 느긋한 성격인 것도 한몫 합니다.
 
다시 돌아와, 맨 위에서 썼듯이 이렇다고 했습니다.
백제 5부 37군 200성 → 당 5도독부 37주 250현  → 당 웅진도독부 7주 51현
 
보시는 바대로 백제의 200성에서 250현으로 증가했습니다.
이 50개 현의 숫자가 만만치 않은데요, 이게 후에 웅진도독부 1개의 도독부로 통폐합될 때 51현으로 대폭 감소합니다.
 
<웅천주 - 위키백과>
웅천주(熊川州) 또는 웅주(熊州)는 신라의 행정구역인 9주 5소경의 한 주(州)이다. 주치(州治)는 지금의 공주시이고 1개 소경 13개 군 29개 현이 소속되어 있으며 직접 관할하는 현은 2개이다. 영역은 지금의 충청남도 대부분 및 충청북도 일부이다.
 
<완산주 - 위키백과>
완산주(完山州) 또는 전주(全州)는 신라의 광역 행정구역인 9주 5소경의 한 주(州)이다. 주치(州治)는 지금의 전주시이고 1개 소경 10개 군 31개 현이 소속되어 있으며 직접 관할하는 현은 3개이다. 영역은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일대와 충청남도의 남부 일부지역이다.
 
<무진주 - 위키백과>
무진주(武珍州) 또는 무주(武州)는 신라의 광역 행정구역인 9주 5소경의 한 주(州)이다. 주치(州治)는 지금의 광주광역시이고 15개 군 43개 현이 소속되어 있으며 직접 관할하는 현은 3개이다.
 
그리고 훗날 통일신라 때 2개 소경, 38개 군, 103개 현으로 통폐합됩니다.
 
① 백제 5부 37군 200성 → 백제멸망 ② 당 5도독부 37주 250현 → 백제부흥군 ③ 당 웅진도독부 7주 51현 → 나당 전쟁 ④ 신라 2소경 38군 103현
 
①에서 ②로 갈 때는 어찌된 영문인지 50현이나 증가합니다.
②에서 ③으로 갈 땐 백제부흥군의 영역 때문인지 51현으로 대폭 감소합니다.
③에서 ④로 갈 땐 최종적으로 200성에서 103현으로 변합니다.
 
그럼 약 100여 개의 현이 어디로 다 사라진 거냐?
혹시 ①에서 ④로 갈 때까지 인구가 그만큼 감소해서 100여 개의 현들을 폐지한 거냐?
예..
 
②에서 ③으로 갈 땐 그나마 백제부흥군의 영역 때문으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100여 개의 현들이 사라졌다?
이건 전쟁 때문에 그곳에 살던 거주민들이 죽거나 이동해서 인구가 감소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백제는 원래 200개 성이 있었습니다.
 
근데 백제 멸망 후, 당 5도독부 산하 250현으로 불어납니다.
왜지?
 
그 이유가 삼국사기에 나옵니다.
백제 멸망 당시, 인구는 76만 호입니다.
 
<백제 - 삼국사기 제37권 잡지 제6 백제>
당 현경(顯慶) 5년(서기 660)은 바로 의자왕 20년이었는데 이때 신라 유신이 당의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쳐서 평정하였다. 옛날 백제에는 5부가 있어서 37개 군, 2백 개 성, 76만 호를 나누어 통솔했었다. 그 후 당은 그 지역에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등 다섯 개의 도독부를 설치하고 그곳 추장들을 도독부자사(都督府刺史)로 삼았으나, 얼마 되지 않아 신라가 그 지역을 모두 차지하여 웅주(熊州), 전주(全州), 무주(武州)의 3주와 여러 군현을 설치하였으니, 신라는 백제의 이 땅과 고구려의 남쪽 지역 그리고 신라의 본토를 합하여 9주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움막집 하나에 아빠, 엄마, 형, 누나, 나, 남동생, 여동생, 즉 평균 일곱 식구가 산다고 하면, 
76만 × 7 = 532만 명입니다.
 
<삼국지 한전>
초옥(草屋)에 토실(土室)을 지어 사는데 그 모양이 마치 무덤과 같으며 문은 위에 있다. 온 식구가 그 속에서 함께 살며 장유(長幼), 남녀(男女)의 분별이 없다.

출처: 움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특히 도성인 사비성과 그 주위 5부에 인구가 몰려 있었을 걸로 추정되고, 이를 각지에 분산시키니 50현이 신설됐던 겁니다.
 
<백제 오방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주서(周書)』와 『한원(翰苑)』에 인용된 『괄지지(括地志)』에 의하면, 왕성(王城)인 사비성의 크기가 방 1리 반(方一里半)이며, 1만여 가가 된다고 하였다. 
 
사비성 1만여 가 × 일곱 식구 = 7만여 명

출처: 사비성 - 나무위키

백제의 웅장함과 화려함은 어디로 갔어?
지금 조선시대가 아니지 않니?

 
<현령 - 위키백과>
중국에서는 진 · 한 시대에 군현제를 정비하면서 현의 우두머리를 현이 관장하는 호수에 따라 현령과 현장으로 나누었다. 현령은 1만 호 이상의 현에 설치되었고, 그 미만의 현에는 현장(縣長)을 두었다.
 
1현 1만 호는 중국 기준이고, 한반도는 3천 호로 잡으면, 
3천 × 7 = 2만1천 명
즉 한반도 내 1현의 인구는 약 2만 명이 됩니다.
 
하지만 한반도 내 1현의 인구 약 2만 명은 당시 기준으로 너무 많다고 봅니다.
뭔가 정밀한 계산이 필요합니다.
 
그럼 당시의 인구 계산이 나오냐?
삼국지 한전을 근거로 추정 가능합니다.
 
<삼국지 한전>
큰 나라는 만여 가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가로서 총 10여만 호이다.
 
<마한 - 위키백과>
마한(馬韓)은 고대 한반도 남부에 있던 54개 부족국가 연맹체로, 삼한(三韓)의 하나이다.
 
여기서 1개 소국은, 전 글에서 군의 태수가 국왕과 같다는 것을 근거로 1군과 비슷한 행정단위라고 보면 됩니다.
(漢나라 군국제: 郡 = 國)
 
근데 54개의 마한 소국들은 신라 한주를 포함합니다.

출처: 한산주 - 나무위키

 
<한산주 - 나무위키>
28개 군, 49개 현, 5소경 중 중원경(충주)을 관할하였다.
 
그럼 사비시대의 백제 37군 + 한주 28군 = 합 65개 군입니다.
 
근데 여기서 위 한주 지도를 보면 황해도와 평안남도까지도 포함입니다.
 
따라서 백제의 영역에 평남은 미포함이므로 약 10여 개의 군을 빼면,
65 - 10 = 55개 군
즉 마한 54개 국과 거의 일치하는 숫자입니다.
시대는 흘렀어도 행정구역의 변화가 거의 없다는 얘깁니다.
 
그럼 다시 삼국지 한전을 보면, 
<삼국지 한전>
큰 나라는 만여 가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가로서 총 10여만 호이다.
 
1개 소국, 즉 1개 군은 만여 가에서 수천 가라고 했으니 평균 5천 호로 잡으면,
1군 = 5천 호 = (위 일곱 식구 계산에 따라) 약 3만5천 명입니다.
 
그럼 37개 군이라고 했으니 이걸 다시 곱하면,
37 × 3만5천 = 129만5천 명입니다.(당시 백제의 인구 추산 합계)
 
이걸 200개 성으로 나누면,
129만5천 ÷ 200 = 6475 명입니다.
즉 1현에 약 6500 명이 거주한다는 얘깁니다. 
 
① 백제 5부 37군 200성 → 백제멸망 → ② 당 5도독부 37주 250현 → 백제부흥군 → ③ 당 웅진도독부 7주 51현 → 나당 전쟁 → ④ 신라 2소경 38군 103현
 
①에서 ②로 갈 때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50현 × 6500 = 3만2천5백 명
즉 사비성과 그 주위 5부의 인구 중 약 3만3천 명을 각지에 분산시킨 겁니다.
그래서 50현이 증가한 걸로 보여집니다.
 
근데 신라의 삼한일통 후, 백제의 옛 땅에 웅주 · 완주 · 무주를 설치합니다.
이 3개 주의 속현은 103개 현 밖에 안됩니다.
즉 ① 백제 37군 200성 → ④ 신라 38군 103현
 
결국 삼한일통 전쟁으로 인해 약 100개 현의 인구가 감소한 겁니다.(이유 막론)
방금 위에 1현의 인구가 한반도 기준 약 6500 명이라고 했으니,
6500 × 100 = 65만 명
즉 65만 명의 인구가 사라진 겁니다.
 
여기서 5만 명은 전사, 질병 등으로 사망했다고 하면, 나머지 백제인 60만 명이 열도로 건너간 걸까요?
 
백제 멸망 후, 제명 여왕이 열도 왜의 수만 대군을 이끌고 오려다 도중에 노환(?)으로 죽습니다.(향년 67세)
아니 게임은 이미 끝났는데 무엇 때문에 대군을 이끌고 굳이 바다 건너 오려 했나요?
(중형 군선인 돛단배로 오사카에서 북큐슈 후쿠오카로 오는 데만 3개월이 걸림)
 
<고교쿠 천황 - 나무위키>
661년 2월 사이메이 덴노는 현재의 나라현에 해당하는 혼슈의 야마토국(大和国)의 수도에서 육·수군을 이끌고 출발하여 세토내해를 가로질러 현재의 에히메현에 해당하는 시코쿠의 이요국(伊予国) 니키타진(熟田津)의 임시 행궁인 이와유노카리미야(石湯行宮)에 정박했다가 5월에 현재의 후쿠오카현에 해당하는 규슈의 츠쿠시국(筑紫国)의 임시 행궁인 아사쿠라노타치바나노히로니와노미야(朝倉橘広庭宮)에 도달했다. 황태자인 나카노오에 황자와 문무백관들도 같이 따라왔다는 것으로 보아 거의 천도 레벨이었다. 당시 사이메이 덴노의 나이는 68세의 고령이었고, 천황은 성공을 비는 의식도 행했다고 전해진다.
661년 8월 사이메이 덴노가 아사쿠라노타치바나노히로니와노미야에서 붕어했다.
 
참고로 양력이냐 음력이냐에 따라 달수와 나이 차가 납니다.
 
<제명 - 일본서기>
(제명 7년) 661년 1월 6일
7년 봄 정월 정유삭 임인(6일)에 천황이 탄 배가 서쪽을 정벌하기 위해 비로소 바닷길로 나섰다.
(제명 7년) 661년 7월 24일
가을 7월 갑오삭 정사(24일)에 천황이 조창궁에서 죽었다(崩).
 
혹시 미마나(彌摩那)가 야마토의 관가이기 때문에 오려 한 건가요?

원본 지도 출처: 고인돌 - 위키백과

 
이곳을 외적으로부터 지키려고?
 
아니면 제명 여왕이 60만 명을 데려가려고 대군을 일으킨 걸까요?
정확히 말하자면, 나카노오에와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의 치밀한 계획인 걸까요?
미마나(彌摩那) - 60만 명
 
그렇다면 열도 왜의 수만 대군이 나당 연합군과 맞붙을 무렵, 남쪽에선 60만 명의 백제인이 열도로 건너가고 있었던 겁니다!
(→ 007 뺨치는 양동작전)
 
이것이 제명 여왕이 오려고 한 역사의 진실인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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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 아카데미

삼한시대와 삼국 초중기 역사를 심층 분석, 탐구합니다. 삼국은 백제, 신라, 가야 입니다. 왜는 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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