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1. 27. 09:56ㆍ백제, 신라, 가야, 왜

고이대왕(재위 234 ~ 286년)
238년 4월, 고이대왕은 수만 대군을 이끌고 대방군을 향해 출군합니다.
이때 병력은 본군만 2만 ~ 3만 대군은 되지 않았을까 추정합니다.
이에 대해 아래 설명 쭉 이어집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대왕 조에 보면 고이를 보좌하는 대신의 이름이 나옵니다.
9년(서기 242) 여름 4월, 임금의 숙부 질(質)을 우보로 삼았다. 질의 성품이 충성하고 굳세었으며, 일을 계획하는데 실수가 없었다.
고이의 숙부라 하니 우질(優質)입니다.(→ 優씨)
우질이 도성인 하북 한성을 지켜 漢나라의 소하처럼 군량을 보급해줬던 걸까요?
아니면 제갈량처럼 軍師가 되어 대방군을 공략하는 데 계획을 짰던 걸까요?
이는 바로 위에 답이 나옵니다.
일을 계획하는데 실수가 없었다.
즉 우질은 계략가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이가 辰왕으로 즉위할 때의 공신임은 물론입니다.
지금 조위를 상대해야 하는 시점에 요동에는 사마의가 와 있습니다.
만약 사마의가 대방군으로 오면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될 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 사마의는 공이 많은 대신이라 위 명제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제갈량의 3차 ~ 5차 북벌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사마의는 235년에 이미 태위 직에 오릅니다.
235년, 태위로 올리고 봉읍을 더욱 늘려주었다.
<태위 - 나무위키>
태위는 3공(三公)의 하나로 고대 및 중세 중국에서 군사 부문을 담당한 재상이었다. 당시에는 주로 문신(文臣)이 임명되었으며 실권이 없는 명예직이었다.
삼공(三公)의 하나로 전한 시기에는 태위(太尉), 후한 시기에는 사마(司馬)라 칭해졌다. 사도(司徒), 사공(司空)과 함께 국가의 대사를 결정하는 관직으로서 주로 군사 방면을 담당했다. 녹봉은 4,200석이었다가 후한 말기에 대사마(大司馬)로 명칭이 바뀌고 나서 10,000석으로 올랐고, 실질적인 승상(丞相) 예우를 받았다. 시대가 변화하고 일반적인 관리들에게 최고 고위직을 경험하고 태위급(사도, 사공 등)으로 임명, 추승되면 후대까지 명문가로 인정받는 명예가 지속되어 관리라면 모두 꿈꾸는 명예직 위치가 되었다.
태위로 유명한 인물로는 양수의 아버지 양표가 있으며, 이각이 황제를 겁박해 대사마의 자리를 얻었다. 가후, 만총과 사마의, 등애도 태위였다.
위 설명에 '실권이 없는 명예직이었다' 하지만 사마의는 실권이 있었던 게 문제입니다.
237년, 공손연 독립 당시.
위 명제 조예: 32세
태위 사마의: 58세
<사마의/일생 - 나무위키>
요동태수 공손문의(공손연)가 모반하자 사마의를 수도로 불렀다. 천자가 말했다.
이 일은 족히 그대를 수고시킬 일이 아니나 이 사안에서 반드시 이기고자 하여 이 때문에 그대를 번거롭게 했소. 그대가 헤아리기에 그가 어떤 계책을 쓸 것 같소?
사마의가 대답했다.
성을 버리고 미리 달아나는 것이 상책입니다. 요수에 의지해 대군에 맞서는 것이 그 다음으로 좋은 계책입니다. 만약 앉아서 양평을 지키려 한다면 사로잡히게 될 뿐입니다.
그리고 1년 후 조예가 임종할 때, 사마의를 고명대신으로 삼습니다.
<고명대신 - 위키백과>
고명대신(顧命大臣)은 고명지신 [顧命之臣]이라고도 하며, 황제나 국왕의 퇴임 또는 임종시 임금의 마지막 당부 및 유언을 받드는 대신(정승, 판서, 참판 또는 그 직을 역임한 시임, 원임 대신들) 또는 고명대신을 보좌하는 승지, 대간, 낭관으로 나라의 뒷일을 부탁받는 신하이다. 따라서 고명대신은 차후 임금의 유지(遺志)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신하 중의 신하로 삼는다. 또한 이 때의 인물을 섭정승(攝政丞)이라고도 한다.
만약 조예가 더 살았다면 사마의에게 구석을 주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구석 - 위키백과>
구석(九錫)은 중국 한나라 때 천자가 공이 큰 신하나 황족에게 준 9가지 특전이다. 현재까지 소하, 왕망, 조조만이 받있을 정도로 엄청났던 것이다. 구석은 다음과 같다.
- 이동 시 두 대의 수레를 움직일 수 있다. 한 대는 제후가,한 대는 호위무사가 탄다. 검은 소 두필, 누런 말 여덟필로 수레를 이동시킨다.
- 의복, 곤룡포에 면류관을 사용한다. 붉은색 신발을 신는다.
- 조정이나 집에서 음곡이나 가무를 틀 수 있다. 천자 앞에서는 팔일무, 왕 앞에서는 육일무를 추도록 한다.
- 거처하는 집 대문과 나무기둥에 붉은색을 칠할 수 있다.(朱戶)
- 황궁내 전상에 신발을 신고 오를 수 있다.
- 300명 가량의 호위병을 데리고 다닐 수 있다.
- 도끼를 가지고 다닐 수 있다.
- 붉은 활 한벌과, 붉은 화살 백개, 그리고 검은 활 열벌과 화살 3천개를 가지고 다닐 수 있다.
- 옥으로 만든 제기로 술을 빚을 수 있다.
앞으로의 역사를 미리 본 바, 다행히 사마의는 공손연을 토벌하고 낙양으로 돌아간 듯 합니다 돌아갑니다.
대신 유주자사 관구검을 남겨 낙랑·대방군에 대한 지휘를 일임한 듯 보입니다.즉 사마의는 한반도에는 관심이 없었던 겁니다.
사마의는 황제가 죽기 직전이라 다급히 돌아갑니다.(황제 = 위 명제 조예)
만약 이때 사마의가 대군을 이끌고 한반도 내로 침입했다면?
낙랑·대방군이 조위의 영토가 되는 건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그만큼 사마의의 존재감이 대단하다는 겁니다.
전 글에서 동시대 위·촉·오의 계략가 3인방을 언급했습니다.
- 위: 사마의 (생몰 179 ~ 251년)
- 촉: 제갈량 (생몰 181 ~ 234년)
- 오: 육손 (생몰 183 ~ 245년)
사실 이들은 단순히 계략가를 넘어 대전략가들입니다.
현대의 軍에 비유하자면 참모총장 + 총사령관 급이란 얘깁니다.
전시의 예를 들자면, 2차대전 때의 유럽 전선 아이젠하워 대장, 아시아 전선 맥아더 대장, 태평양 전선 해군 니미츠 대장을 생각하면 됩니다.
그럼 이쯤에서 이런 의문이 듭니다.
고대에 이들은 어떤 책들을 보며 공부했을까?
그건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에서 진·한 시대의 여러 책들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 서책들의 목록은 한서 예문지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한서가 전한 시대의 역사이긴 하지만 후한 시대의 반고가 편찬했으니 후한 시대까지 있던 도서 목록이라고 보면 됩니다.
<한서 - 위키백과>
한서(漢書)는 반고(班固, 32년 ~ 92년)와 반고의 가문이 편찬한 전한의 역사를 서술한 역사서로, 중국 이십사사에 포함된다. 《전한서》라고도 한다. 다루는 시대는 한 고조 유방이 전한을 창건한 기원전 206년부터 왕망의 신나라가 망한 24년까지이다. 총 100편 12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진 시황이 분서갱유를 해서 모든 서책을 불살랐다고 하지만, 갱유를 보면 알 수 있듯 유가의 특정 책들만이 해당사항일 겁니다.
한서 예문지를 보면 당시 방대한 서책들이 남아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개중에는 소실돼 목록에 없는 것들도 상당수 있을 것이고, 편수가 몇 편 안되는 책은 소실되어 사라진 것들이라 추측됩니다.
가령 병서략 병권모에 오손자병법 82편이 있는데 반해, 범려 2편, 한신 3편으로 극히 적은 편수의 것은 소실된 겁니다.
왜냐하면 범려도 그렇지만 한신이 3편 밖에 없을 리가 없거든요.
참고로 오손자병법은 82편 중에 조조가 13편으로 편집했다고 합니다.(현재의 손자병법 13편)
근데 漢 조정에서 소장한 것들이 한서 예문지에 정리된 것들이지, 당시 시중에선 그외에도 온갖 잡서들이 대량 있었을 것입니다.
즉 범려 2편 외에 나머지 수십 편이 시중에 있었을 것이란 얘깁니다.
한 예로, 귀곡자(鬼谷子)가 한서 예문지 목록에 없는 점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진위 여부를 떠나 귀곡자는 위서로 취급받습니다.
참고로 귀곡자는 종횡가의 유명한 소진과 장의의 스승입니다.
또한 이건 후한 말의 대학자 채옹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채옹에 대해서는 구글링하면 자세히 나옵니다.
여기선 그의 딸 채염의 얘기입니다. ↓
<채염 - 나무위키>
채염은 둔전도위 동사와 재혼했다. 어느 날, 채염의 새 남편 동사가 법을 어기고 사형당할 위기에 처하자 채염은 남편을 구명하기 위해 조조에게 달려갔다. 조조는 당시 몰려온 손님들에게 채옹의 딸이라며 채염을 보였고, 채염이 맨발에 머리를 풀고 땅에 조아려 명석하고 비통하게 말하니 거기 사람들이 모두 숙연할 정도였다. 조조가 채염에게 딱하지만 이미 사형 집행의 문서를 보내서 어쩔 수 없다고 말했으나 채염이 조조의 기병을 언급하니 조조가 감동하여 사자를 달려보내 동사의 사형 집행을 멈추게 했다.
당시 새벽이라 추워서 조조가 채염에게 두건과 신발을 선물하며 채옹의 저술에 대해 물었다. 채염은 아버지에게 약 4000권을 받았으나 모두 잃었고 약 400편을 암송할 수 있다고 답했다. 조조는 채염에게 10명의 관인을 보내 채옹의 저술을 복원토록 했지만 채염은 남녀유별을 들어 관인들을 거절하고 종이와 붓만 받아 혼자서 채옹의 저술 약 400편을 복원해 조조에게 보냈고 400여편 중 오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아무리 채옹이 대학자이긴 하나 개인이 소장한 서책이 약 4000권이랍니다.
이때 채염이 복원한 400편은 한서 예문지에 없는 것들임은 물론입니다.
(그녀의 암기력이 놀라울 따름)
범려의 경우는 춘추시대 월나라를 일으킨 명재상인데, 그쪽 지방에는 분명 나머지 수십 편이 존재해 있었을 겁니다.(그쪽 지방 = 춘추시대 월나라 = 현 복건성)
한신의 경우는 결국 역적으로 몰려 조정에서 수집된 것이 3편이지만, 그의 고향이나 그를 추종하는 곳에선 나머지 수십 편이 존재해 있었을 겁니다.(비밀리에 간직)
참고로 정사 삼국지를 보면 개인이 쓴 책들도 보이는데, 삼국 시대에 이러한 책들도 많았다는 증거입니다.
→ 종요, 화흠, 왕랑 등의 저작들
이들은 조위의 중요한 대신들로 그 저작들은 실전되어 없습니다.
그럼 위·촉·오 대전략가 3인방은 물론 당대의 문인들은 한서 예문지에 보이는 방대한 서책들을 봤다는 얘긴가요?
- 한서 예문지에 있는 방대한 서책들: 기본으로 봐야할 목록?
- 시중에 있는 그외의 방대한 서책들: 역시 기본으로 봐야할 목록?
그건 아닐 겁니다.
아까 오손자병법만 해도 82편이고, 거기에 제손자 89편, 법가, 종횡가, 음양가, 황제, 도서비기 등 분량이 엄청납니다.
태공 237편만 하더라도 방대한 편수를 자랑합니다.
참고로 오손자 82편이 13편으로 편집되었듯이 태공 237편은 훗날 육도로 편집되었다고 봅니다.(← 한서 예문지에 없는 이유)
평생 볼 것이 아니라면 이것들을 전부 볼 수는 없고, 학문을 전수해주는 스승한테서 배우거나 집안의 서책들을 개인적으로 보며 공부했을 겁니다.
예를 들어 공평무사와 신상필벌은 제갈량의 정치철학인데, 이건 상군서와 한비자를 봤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제갈량만의 정치철학이 아닌 사마의와 육손의 정치철학이기도 합니다.
즉 이들 모두 제자략 법가에 있는 상군 29편, 한자 55편을 본 것입니다.
근데 이 漢나라 조정이 소장한 방대한 서책들은 어떻게 사라지나?
이민족이 쳐들어와 소실된 것이 아닌, 바로 동탁이 낙양에서 장안으로 천도할 때 불에 타 사라집니다.
이때 동탁은 낙양의 궁궐을 불태우고 떠납니다.
훗날 낙양에 남아있는 것이 없어서 조조는 헌제를 모시고 허창을 수도로 정합니다.
설령 이유가 한나라 서고에 있는 방대한 책들을 무사히 장안으로 옮겼더라도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이유: 동탁의 참모이자 사위.
동탁 사후, 이각·곽사의 난 때에 장안은 낙양처럼 폐허가 됩니다.
<삼보의 난 - 나무위키>
삼보의 난(三輔亂)은 흥평 연간에 있던 이각, 곽사가 싸우고 헌제가 탈출하느라 그 일대에 벌어진 난이다. 이 사건을 정사 삼국지에서는 삼보란(三輔亂, 삼보의 난)이라 지칭한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이 사건을 '이각 곽사의 난' 또는 '이곽의 난'이라고 칭하지 '삼보의 난'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아무래도 정사 삼국지에서 '삼보란(三輔亂)'이라 지칭하는 삼보에서의 난리가 여러 종류이기 때문인 것 같다.
삼보(三輔)는 전한의 수도권에 해당하는 장안 주변, 즉 관중을 일컫는 말이다. 이 지역을 삼보라고 부르게 된 것은 한무제 때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이 일대를 경조윤·우부풍·좌빙익의 세 장관이 나누어 다스리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 난으로 인해 후한 최대의 도시였던 장안이 허허벌판이 될 정도였다.
<이각 - 나무위키>
~전략~
여기까지 벌어진 일이 삼보의 난으로 당초 헌제가 관중으로 들어갔을 때, 삼보의 호구는 늘 수십만이었으나 이각, 곽사가 서로를 공격할 때부터 천자가 동쪽으로 돌아간 이후 장안성이 40여 일간 비었으며, 건강한 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나약한 자들은 서로를 잡아먹었으니, 2~3년 동안에는 관중으로의 사람의 왕래가 없었을 정도라 한다.
즉 1차로 동탁의 장안 천도 때와 2차로 이각·곽사의 난 때에 대부분의 책들이 소실되었던 겁니다.
사람 목숨이 먼저지 책이 먼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저는 이 이각·곽사의 난을 중국 역사 최고의 막장극으로 봅니다.
그리고 굶어죽을 위기에 놓인 헌제를 구한 이가 바로 조조입니다.
이때 불타고 남아있는 점술서 단편들을 모아 점을 쳐 생계유지를 한 것이 시중의 점술가들입니다.
즉 고대부터 내려오던 대부분의 원본 점술서들은 소실됐단 얘깁니다.
이 원본 점술서들의 신기방기함은 여기선 생략하겠습니다.
참고로 이 참혹한 이각·곽사의 난(195~198) 때에 고구려·백제·신라는 어느 임금 때인지 보겠습니다.
중국이 한창 개막장으로 가고있는 이때 삼국의 임금들은 과연 무얼 하고 있던 걸까요?
(황제를 도울 생각은 안하고)
고구려
고국천왕 말기: 재위 179 ~ 197년
산상왕 초기: 재위 197 ~ 227년
백제(辰)
초고대왕: 재위 166 ~ 214년
신라
벌휴 말기: 재위 184 ~ 196년
내해 초기: 재위 196 ~ 230년
역시 백제만 강성할 때이고, 고구려와 신라는 찬탈극이 벌어진 막장의 시대였습니다.
(→ 찬란한 초고대왕의 강성대국: 辰)
이각·곽사의 난이 벌어진 시점에 이들은 왕위 찬탈을 한 것입니다.
즉 후한 조정과 한군현이 무력해진 틈을 노린 겁니다.
↑ 이건 시사하는 바가 엄청 큽니다!
다시 돌아와, 漢인들은 이러한 서책들을 보며 공부했다곤 하지만, 그럼 우질은?
아마도 귀족들은 상인을 통해 중국 서적들을 입수하지 않았을까 추정해 봅니다.
고대중국은 인구가 많아서 이런 서적류는 많이 앞서 나갔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서적만큼은 세계 최대였습니다.(당시 세계 최대의 서적 보유국 = 후한)
전한 200년, 후한 200년 해서 합 400여 년 동안 漢인들은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를 바탕으로 서적문화의 꽃을 피웠습니다.
즉 위·촉·오 대전략가 3인방을 위시한 당대 내노라 하는 석학들, 대학자, 명사(名士)들이 이때 가장 많이 배출되었고, 이들이 활약했던 때가 바로 삼국시대인 겁니다.
삼국 → 위·진 → 5호 16국 → 수·당 → 5대 10국의 전무후무한 기나긴 개막장 시대들을 거치며 漢나라 때의 찬란했던 서적문화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영원히)
오랜 전란으로 인해 수많은 인재들이 죽어 학문의 맥이 끊기고, 그 방대했던 서적들이 대부분 소실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갈량은 그중 으뜸을 넘어 중국 역사상 최고의 재상이었음은 물론입니다.
이 제갈량의 숙적이 사마의란 건 주지의 사실입니다.사마의를 상대해야 하는 우질, 괜찮겠어?
그럼 고이가 재위에 오를 때의 나이는 대략 몇살이었을까요?
<고이>
구수왕(仇首王)이 재위 21년에 죽고 맏아들 사반(沙伴)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나이가 어려 정사를 돌보지 못하므로, 초고왕(肖古王)의 친동생인 고이가 왕위에 올랐다.
고이는 우씨 왕족 중에서 추대된 인물이기 때문에 나이를 어림 짐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10대 중반이라 하면 사반처럼 어리다고 할 수 있으므로 적어도 20세 전후는 되지 않았을까 추정해 봅니다.
그럼 재위에 오른 234년에 20세 전후라 하면 214년생 전후가 됩니다.
286년에 죽었으니 향년 72세 전후가 됩니다.
53년(서기 286) 봄 정월,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
겨울 11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1월까지 정사를 돌보다 그해 겨울 11월에 죽습니다.
삼국사기에 보면 겨울에 나이 많아 죽는 임금들이 꽤 많은데, 이런 경우는 노환, 지병으로 죽었다고 봐야 합니다.
근데 생물학적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좀더 오래 사니 +5년을 합니다.
234 - 25 = 209년생 전후
286 - 209 = 향년 77세 전후에 죽었습니다.
즉 고이가 234년 재위에 오를 때의 나이는 25세 전후로 추정됩니다.
여기에 ±5년은 물론입니다.
그럼 우질이 고이의 숙부이니 적어도 20세는 연상일 겁니다.
우질의 나이: 209 - 20 = 189년생 전후
따라서 고이가 234년 재위에 오를 때 우질의 나이는 45세 전후입니다.
238년 대방군 공략전 때의 나이는 49세 전후입니다.
즉 사마의보다 10살 정도 연하로 보면 됩니다.
- 대방군 공략전 -
238년 4월, 고이대왕은 우질을 군사(軍師)로 삼고 도성 주위의 대군을 출정시킵니다.
이때 고이는 사슴 40마리 맞추는 실력과 29세 전후의 한창 나이를 볼 때 몸소 친정했다고 봅니다.신하들이 말려도 출정하겠다고 우겼을 거 같습니다.
장수로는 진충(眞忠), 진물(眞勿), 우수(優壽), 진가(眞可), 우두(優豆), 고수(高壽), 곤노(昆奴), 유기(惟己) 등으로 추정됩니다.
고이는 물론, 모두가 개국공신들이라 능력은 출중하다고 봅니다.
특히 진씨들은 구수대왕의 대신들로 추정되며, 고이가 이들을 중용한 걸로 보여집니다.(眞 = 眞牟 = 辰의 성골)
언제나 그렇듯 이 진씨들은 수백년 동안 백제·신라에서 대신으로 중용됩니다.
그리고 몇년 후 백제를 세우고 16관등을 제정할 때 대부분 좌평 직을 제수받습니다.
<본군 편성> ( )는 훗날의 관직
대왕: 우고이
軍師: 우질 (右輔)
보좌비서: 우수 (내신좌평)
친위대장: 고수 (위사좌평)
1군 대장: 진충 (좌장→右輔)
2군 대장: 진물 (좌장)
3군 대장: 우두 (내법좌평)
4군 대장: 곤노 (조정좌평)
5군 대장: 유기 (병관좌평)
- 도성 -
수비·보급 대장: 진가 (내두좌평)
↑ 도성의 수비와 각 군의 보급 담당
여기서 고수는 훗날 고흥의 조상이고, 곤노는 곤지의 조상으로 추정됩니다.
고수는 그렇다 치고, 곤노가 어떻게 곤지의 조상이냐?
<곤지 - 위키백과>
곤지(昆支, ?~477년 7월)는 백제의 왕자이자 왕족, 정치인으로, 개로왕의 동생이며, 문주왕의 숙부이다.
곤지가 개로왕의 동복동생이되 아버지가 다른 이부동생 또는 의동생이라면 가능한 얘깁니다.
어차피 좌평 직에 제수되는 인물들은 대부분이 백제 왕족의 친척들입니다.
즉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추정하면, 곤노가 곤지의 조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辰의 군사체계는, 진이 크게 북부와 남부로 나눠진 걸로 보아, 북부에는 도성 주위를 방비하는 상비군이 있었을 겁니다.
대략 1만 ~ 2만의 상비군이지 않을까 합니다.
이는 고려, 조선 시대에도 있었지만, 규모와 명칭만 다를 뿐 본래는 같은 겁니다.
여기에 왕족, 귀족들의 사병과 농민군을 합하면 2만 ~ 3만까지 늘어납니다.
남부에도 역시 대략 3만의 농민군이 있었을 겁니다.
남부의 농민군은 평시엔 농사를 짓다가 전시엔 辰왕의 명으로 징집됩니다.
농민이되 전시에 병사로 징집되는 구조입니다.
반면 북부의 상비군은 둔영의 군사, 주둔군의 개념입니다.

그럼 북·남부의 총 병력은 5만 ~ 6만의 대군이지만, 이들을 전부 운용하려면 군량이 문제입니다.
이때만 하더라도 농지개발이 덜 되었기 때문입니다.
적지에 가서 약탈로 해결하기엔 모두가 辰왕의 백성이기에 약탈은 군법으로 불허합니다.
참고로 구유신이 신라 5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쳐들어갔을 땐 약탈로 군량미를 해결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구유신 = 김유신)
소정방의 당군은 두말하면 잔소리입니다.
여느 마한의 소국들처럼 新彌多離와 변진 역시 자치를 했다고 보여지며, 辰왕의 명으로 징집됨은 물론입니다.(왕 임명권만 진왕에게 있음 - 삼국지 한전)
이는 또한 열도 왜의 야마토국을 위시한 여러 소국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것이 辰(백제)의 담로제인 겁니다.
하지만 이때는 고이가 즉위한 지 얼마 되지않은 시기이기에 이들을 불러도 대부분은 오지않을 겁니다.(이때 = 238년, 재위 5년차)구수대왕의 적통이라면 또 모를까..
저번 초고대왕처럼 대군을 이끌고 한바탕 휘몰아치던가 아니면 이번 대방군 공략전에서 이겨야 그나마 움직일 겁니다.
그럼 북부군 2만 ~ 3만 사이의 2만 5천이라 하면,
25000 ÷ 6 = 4167명입니다.
이걸 계산하기 좋게 2만 4천으로 잡으면,
24000 ÷ 6 = 4000명입니다.
<본군 편성>
| 본군 | 우고이 | 4000명 |
| 1군 대장 | 진충 | 4000명 |
| 2군 대장 | 진물 | 4000명 |
| 3군 대장 | 우두 | 4000명 |
| 4군 대장 | 곤노 | 4000명 |
| 5군 대장 | 유기 | 4000명 |
그럼 여기서 2만 4천이란 숫자는 어떻게 해서 나왔나?
전 글에서 공손씨 대방군의 수비병이 1만 명은 된다 했습니다.(고이대왕 3)
지금 대방군을 공략하려는 호기인데, 전력을 다해 접수해야지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 지 알 수 없습니다.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수비군을 제외한 모든 상비군+사병+농민군으로 공격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2만 4천이라 한 겁니다.
3만 아니면 2만인데, 2만은 적은 감이 있어 총 3만 중에서 공격군 2만 4천으로 잡고 나머지 6천은 수비군으로 잡았습니다.
혹 있을 지도 모를 사마의 본군·고구려와의 전투까지 생각하면 최소 3만은 있어야 하지만, 일단 공격군 2만 4천입니다.병력이 모자르면 남부에서 공수하면 됩니다.
사실 이만한 병력도 없으면 고이는 아예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근데 전 글 초고대왕 1에서 이거 기억나세요?
<초고>
2년(서기 167) 가을 7월, 신라군이 몰래 우리 동쪽 변경의 두 성을 습격하여 남녀 1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
8월, 우리 왕이 사백개로(沙白蓋盧)에게 병사 2만을 거느리고 신라의 서쪽 여러 성을 침범하게 하고, 우리 임금도 또한 친히 정예기병 8천을 거느리고 뒤를 이어 한수(漢水)로부터 그곳에 다다랐다. 신라 임금은 크게 두려워하여 잡아갔던 남녀들을 돌려보내고 화친을 구걸하였다.
총 8천 정예기병 중에서,
구태 직속 철기: 약 4~5천
백제 기마대: 1~2천
나머지 1~2천: 그동안 키운 기병들
이중 철기 2천은 열도 왜 정벌을 위해 보냈습니다.
(→ 열도 최초 대량의 말 상륙, 전방후원분 발생원인)
그럼 남은 6천기(騎) 중에서,
철기: 2천
백제 기마대: 4천
하지만 구수대왕 시기에 말갈(고구려)과 사로국과의 전쟁에 기마병력의 손실이 났습니다.
철기: 2천 → 1천 5백
백제 기마대: 4천 → 2천 5백
근데 백제 기마대의 5백기를 철기로 업그레이드 합니다.
철기: 2천
백제 기마대: 2천
이제 1군과 2군에 철기 각 1천기를 편성합니다.(← 주력 정예부대)
또한 백제 기마대 2천을 나머지 각 군에 5백기를 넣습니다.
<본군 기마 편성>
| 본군 | 우고이 | 4000명 | 500기 |
| 1군 대장 | 진충 | 4000명 | 철기 1000기 |
| 2군 대장 | 진물 | 4000명 | 철기 1000기 |
| 3군 대장 | 우두 | 4000명 | 500기 |
| 4군 대장 | 곤노 | 4000명 | 500기 |
| 5군 대장 | 유기 | 4000명 | 500기 |
그리고 각 군의 조직은 이렇습니다. ↓
<삼국지 한전>
관직으로는 위솔선(魏率善), 읍군(邑君), 귀의후(歸義侯), 중랑장(中郞將), 도위(都尉), 백(伯), 장(長)이 있다.
- 위솔선 - 조위 조정에서 감찰을 위해 보낸 사람 또는 관직
- 읍군 - 마한의 신지
- 귀의후 - 조위 조정에서 봉작을 받은 사람
위솔선과 귀의후는 한군현과 인접한 곳에서 조위의 편에선 소국들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읍군은 그런 소국의 수장에게 인수와 함께 내린 관직입니다.(인수 = 도장)
辰의 입장에선 이들이 배신자, 매국노였던 걸로 보입니다.
즉 이들은 辰과 고구려 모두에게 적대적인 입장이었던 겁니다.
참고로 훗날 사마염이 晉을 건국 후, 위솔선은 진솔선으로 바뀝니다.(晉서)
하지만 그에 관한 더 이상의 사료가 없어 여기선 그 설명을 생략하겠습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한중 고대사의 미스터리일 것입니다. ↑
1군
대장 - 1군의 장수
부장 - 대장을 보좌, 중랑장을 지휘
중랑장 - 1000명 이하의 군사 지휘
도위 - 軍 내의 군사·치안 담당
xx백 - 100명 이하의 군사 지휘, xx는 그룹의 이름
10인장 - 10인1조의 리더
5인장 - 5인1조의 리더

졸병이 공을 세우면 5인장으로 승진합니다.
5인장이 공을 세우면 10인장으로 승진합니다.
10인장이 공을 세우면 xx백으로 승진합니다.
즉 졸병이 출세하기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3만에 가까운 2만 8천 대군이 한성 주위에 집결했고, 이제 북벌이 시작됩니다.

근데 위 지도를 보니 신분고국의 위치가 개성이 아닌 파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전 글에서 소명(개성)은 오랜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되고 대신 서북쪽의 남신(개풍군)을 신설했다 했습니다.
그럼 파주의 지도를 확대해 보겠습니다.

이것이 파주, 양주, 고양을 아우르는 신분고국(臣濆沽國)입니다.(사상 최초)
사실 황해도가 대방군이니 대방군 안에 마한의 신분고국이 있을 리가 없던 것이었습니다.분단만 아니었다면 이곳에 대도시가 들어서기에 입지조건이 딱 좋아 보입니다.
그럼 기리영(崎離營)의 위치도 자연스레 나옵니다.(사상 최초)

즉 임진강을 경계로 폐허가 된 소명(개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바로 기리영이 설치됐던 겁니다. ↑
(기리영 → 군영 = 군진 = 진영 = 둔영)
이 길목이 중요한 이유는, 소명을 지나 곧바로 해명, 즉 대방현으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위에 산들로 길이 막혀 있어 대군이 남신으로 가려면 이곳을 지나야 합니다.
하지만 후보지가 한 군데 더 있습니다.
바로 암실 마을 쪽입니다.
혹은 희박하지만 두 군데 모두에 군영이 설치돼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여기선 기리영㉠만 있는 것으로 하고 진행하겠습니다.

암튼 기리영 전투는 조금 훗날의 얘기이고, 지금은 고이대왕이 2만 8천 대군을 이끌고 대방군을 공략하려는 때입니다.
(조금 훗날 = 246년, 지금 = 238년)
우선적으로 공격해야 할 곳은 황해도 남부입니다.
즉 함자, 제해, 남신입니다.
이 3곳을 동시에 공격, 접수하는 것이 우질의 작전이었던 듯 싶습니다.
하지만 함자는 좀 멀리 떨어져 있어 3곳을 동시에 공격하는 건 무리입니다.
근데 한성 주위에 집결된 대군이 대방군으로 들어가려면 바다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으로 보입니다.
4천 기병들은 육지로 간다 해도 2만 4천 대군을 배로 옮기려면,
24000 ÷ 50 = 480척이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만한 군선이 없는 게 현실입니다.

본래 백제는 해상왕국이라 마한에서 끌어모은 군선 200척은 있었다고 하면,
200 × 50 = 10000명이니 1만 군사는 배 타고 갑니다.
즉 먼저 신분고국군 1천은 따로 20척의 배에 타고 임진강을 건너 공격합니다.
그후 본군과 5군은 협해를 건넙니다.
여기서 전 글에서 임진강이 패수라고 했습니다.(온조대왕 1)
근데 자료를 좀더 조사해보니 당시 2개의 패수가 있었습니다.
<온조>
37년(서기 19) 여름 4월, 가뭄이 들었는데, 6월이 되어서야 비가 왔다. 한수의 동북 마을에 흉년이 들어 민가 1천여 호가 고구려로 도망가니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사이가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三十七年 夏四月 旱 至六月乃雨 漢水東北部落饑荒 亡入高句麗者一千餘戶 浿帶之間 空無居人
↑ 이 패수를 임진강으로 설정하면 아래 지도와 같습니다.
참고로 대수는 한강입니다.
<한강 - 나무위키>
다른 이름으로는 '한수(漢水)', '열수(洌水)' 등이 있다.
한강은 삼국시대 초기까지는 '대수(帶水)'라 불리었고,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아리수(阿利水)'라 기록되어 있다. 백제에서는 '욱리하(郁利河)'라 불렀다.

다른 하나는 대동강입니다.
대동강으로 설정하면 이렇습니다. ↓

대동강을 패수로 설정하면 온조 시대에 저렇게 큰 영토가 되니 여기서의 패수는 대동강이 아닙니다.
즉 여기서의 패수는 임진강을 말함입니다.
그리고 고려 태조 왕건의 가문은 패서의 대표적인 호족 가문인데, 그럼 패서 지방은 어디일까요?
<패서(浿西) - 나무위키>
옛날 황해도, 평안남도, 경기도 북서부 일대를 아우르던 지명으로, 나말여초 시기의 기록으로 주로 등장한다. 패서의 패(浿)는 패강, 이른바 지금의 대동강 또는 예성강을 뜻하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나말여초와 후삼국시대를 다룰 때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는 바로 고려의 건국 세력인 패서 호족들이 바로 이곳에서 태동했기 때문이다. 이후 패서 일대는 고려 내내 수도권이자 내지(內地)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이 지역이 포함된 현대 기준으로 황해~경기 일대가 고려 초 10도 편제 시절에 관내(關內)도인 것만 봐도 명확하다.
여기에 평양이 포함되는지 안되는지를 떠나, 한마디로 패서는 패수의 서쪽이란 뜻입니다.
이건 요하(요수)의 서쪽이 요서인 것과 같은 겁니다.
만약 패수가 대동강이면 패서는 평양의 서쪽만 차지하니 대동강은 패수가 아닙니다.
만약 패수가 예성강이면 송악과 개성은 그 동쪽으로 포함이 안되니 예성강은 패수가 아닙니다.

왕건 가문이 패서의 호족이니 송악과 개성이 패서에 포함되어야 합니다.
위 지도를 보면 임진강이 패수일 때 송악과 개성은 패서에 포함입니다.
따라서 패수는 임진강입니다.
그럼 대동강이 패수라 함은 무얼 갖고 그러는 거냐?
처음 한 무제가 설치한 낙랑군 25현에 패수현(浿水縣)이 있습니다.
여기서의 패수가 바로 대동강입니다.
전 글에서 대방군과 그 속현들의 위치를 밝혔습니다.
이 낙랑군 역시 마찬가지로 현의 순서가 북에서 남으로 되어있습니다.
①조선현(朝鮮縣), ②남감현(䛁邯縣), ③증지현(增地縣), ④점제현(黏蟬縣), ⑤패수현(浿水縣), ⑥탄열현(吞列縣), ⑦사망현(駟望縣), ⑧누방현(鏤方縣), ⑨수성현(遂城縣), ⑩혼미현(渾彌縣), ⑪둔유현(屯有縣)
학계에서는 조선현이 평양이라 하는데, 이에 의하면 평양이 아닙니다.
<평안도 - 위키백과>
평안이란 평양시와 안주시의 머리글자를 합하여 만든 지명이다.
<평안도 - 나무위키>
지명인 평안도(平安道)는 조선시대 당시 관서(關西)지방의 최대도시였던 평양시(平壤市)와 안주군(安州郡)에서 한 글자씩 따와서 지었다.
최대도시였던 평양이 조선현이 아니라면, 남은 하나는 안주입니다.
이 안주는 평안남도의 제일 북단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낙랑군의 치소를 평양이 아닌 안주에 둔 이유는 2가지로 보입니다.
- 한 무제 때 조선의 왕검성이 폐허가 됐기 때문에
- 왕검성은 토착민의 저항이 심해 안보가 우려되기 때문에
요동군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치소를 둔 것입니다.
그게 조선현, 즉 안주입니다.
그럼 대략 순서대로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다 보면 평양이 패수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패수(대동강)에 인접한 큰 읍이 평양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패수현이 평양인 겁니다.
그럼 당시 패수가 평남의 대동강과 한반도 중부의 임진강이라는 건 무얼 뜻하냐?
이는 한군현의 패수 따로, 辰(백제)의 패수가 따로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패수가 2군데에 따로 있어야 사료에서 말하는 것들이 설명가능해 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위에 설명한 것들이 설명이 안됩니다.
다시 돌아와, 나머지 1만 8천은 대기합니다.
보병: 1만 4천
기병: 4천
본군과 5군이 먼저 협해를 건넌 후, 200척의 배로 다음 작전을 진행합니다.(아래 설명)
암실과 김포 사이의 협해가 좁기에 시간은 많이 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대군이 김포와 암실 사이의 협해를 건너려면 넓은 평야에 먼저 집결해야 합니다.
이때의 김포는 해수면 하강 후라 김포평야를 이루고 있어 대군이 집결하기 딱 좋습니다.
그리고 신분고국의 원군 약 1천은 기리영을 공격하기 위해 집결합니다.(지도 화살표)
기리영으로 들어가 소명을 지나 남신으로 들어가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이는 우질의 시간끌기 기만작전으로, 신분고국군이 이곳을 공격할 때 김포에 집결한 본군과 5군은 협해를 건넙니다.
참고로 해수면 하강 전의 김포평야는 이렇습니다. ↓

근데 전 글에서 주호에 반도 왜인들이 있다 했습니다.(반도 왜인 = 삼한인 = 선주민)
<삼국지 한전>
주호(州胡) 마한의 서쪽 바다 가운데 큰 섬에 있다. 그 사람들은 키가 조금 작고 말도 한(韓)과 같지 않다. 선비족처럼 머리를 삭발하고 오직 가죽옷을 입으며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옷은 위만 있고 아래는 없기 때문에 벗은 것과 같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에서 물건을 사고 판다.
전 글에서 이들은 초고대왕 때에 이미 신속되어 고이가 이곳으로 사냥도 나갔다 했습니다.(고이대왕 1)
<고이>
3년(서기 236) 겨울 10월, 임금이 서해의 큰 섬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손수 40마리의 사슴을 맞혔다.
이들의 모습이 용병으로 부리기 딱 좋아 보입니다.
여기에 이들 고유의 문신까지 하면 일당백입니다.
또한 다수의 배까지 있어 여러 모로 쓸모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전체적인 작전지도입니다. ↓

<우질의 작전>
- 신분고국군은 도강, 공격한다.
- 본군+5군은 신분고국군을 지원한다.
- 1군+3군+주호군은 제해로 나간다.
- 2군+4군은 남신을 접수, 제해로 향한다.
- 본군 이하의 군은 남신을 거쳐 제해로 향한다.
- 전군 합류 후, 함자를 접수한다.
<부대 편성>
본군 4천명 + 5백기: 대왕 우고이
1군 4천명 + 철기 1천: 대장 진충
2군 4천명 + 철기 1천 : 대장 진물
3군 4천명 + 5백기: 대장 우두
4군 4천명 + 5백기: 대장 곤노
5군 4천명 + 5백기: 대장 유기
원군 신분고국군 약 1천
용병 주호군 약 5백
우질의 작전은 최대한 빨리 최종 목표인 함자를 접수하기 위한 전격작전인 겁니다.
이때 고이가 이끄는 본군+5군은 신분고국군을 지원합니다.
이는 대왕의 안전을 위해 최대한 후방에 배치한 우질의 배려입니다.

근데 이에 대한 사료도 없는데, 당시 이런 루트로 공격할 거라는 건 어찌 아냐?
지도를 보면, 해안의 생김새와 고이의 대군과 각 현들의 위치, 지형을 보고 압니다.
북쪽엔 산들이 있어 지형이 험한데 대군을 이끌고 산 쪽으로 가겠습니까?
십중팔구 남쪽 해안선을 따라 공격해 들어갔을 겁니다.
이는 지금 공격루트를 정함에 있어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겁니다.
동서고금 막론하고 정석에 따른 정공법은 거의 정해져 있고, 다만 변수가 어디서 어떻게 생길지만 다를 뿐입니다.
워낙 다양한 변수가 있기에 여기선 생략합니다.글도 길어지지만 사료가 없는 역사를 변수까지 적용해 허구를 만들고 싶진 않기 때문입니다.
변수의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주호군을 용병으로 썼지만 대방태수의 꾀임, 계략, 뇌물, 사주, 협박 등에 넘어가 결정적일 때 통수를 칠 수 있습니다.
혹은 생각 밖의 사로군이 쳐들어올 수도 있고, 고구려군이 쳐들어올 수도 있는 겁니다.
아니면 대방군에 조운같은 장수가 있어 난공불락일 수도 있는 겁니다.(조운 = 조자룡)
암튼 그렇게 해서 일단 도강하기만 하면 4천 기병으로 쓸어버립니다.(2천 철기 + 2천 백제 기마대)
마침 기병들이 활동하기에 딱 좋은 드넓은 연백평야가 펼쳐져 있습니다. ↑
전군이 함자를 접수할 때 쯤이면 고구려 1만 정예가 조선현을 접수할 것입니다.(삼국사기에선 1천 명, 조선현 = 평남 안주)
또한 사마의가 보낸 선우사, 유흔의 1만 군이 조선현, 대방현을 접수하러 바다 건너 오고 있습니다.
이때 고구려군 1천이라 했는데, 모종의 이유로 축소기록한 듯 보입니다.
<동천>
12년(서기 238), 위나라 태위(太尉) 사마선왕(司馬宣王)이 무리를 이끌고 공손연(公孫淵)을 쳤다. 임금이 주부(主簿)와 대가(大加)를 보내 병사 천 명을 이끌고 그들을 돕게 하였다.
혹시 이 다음 기록이 이거 아닐까요?
우리 군 1만 명이 낙랑군을 쳤다.
도와주는 시늉은 해야하니 1천으로 사마의를 도우러 보내고, 본군은 낙랑군을 친 겁니다.
왜냐하면 고구려가 고작 1천 명만 보냈을 리가 없습니다.
한편 공손연의 대방군 쪽에선 3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이를 요격하든가 성에서 수비하든가 아니면 항복하는 것입니다.
함자에서 얼마 안되는 현의 수비군으로 요격할 리는 만무합니다.
요격 나오면 연백평야에서 기병 4천으로 포위·전멸시킬 겁니다.
성에서 수비해도 함락되는 건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그럼 항복했을거 같습니다.

근데 대방군의 서쪽 넓은 땅은 뭐냐?
여기가 혹시 고이의 아들인 책계대왕의 장인의 나라인가요?
<책계>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쳐서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대방왕의 딸 보과(寶菓)를 부인으로 삼았기에, 임금이 이르기를 “대방은 장인의 나라이니 그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드디어 병사를 내어 구원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임금은 고구려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아차성(阿旦城)과 사성(蛇城)을 수리하여 대비하였다.
그럼 이때 대방국 왕은 고이의 편에 섰고, 훗날 그들의 자식들을 결혼시켜 혼인동맹을 맺은 건가요?

함자를 대방국이 공격해 먹고, 고이대왕은 대방국과 화친동맹을 맺습니다.
그래서 대군을 북쪽으로 돌립니다.
이때 학계에서는 이 대방국이 대방군이라고 합니다.
그럼 대방군 태수가 공손연이 망하니 독립해 칭왕한 건가요?
아니면 아래 지도와 같은 전황일까요?

즉 고이의 대군이 해명부터 시작해 장잠, 열구를 공략하는 동안 대방국이 대방현과 둔유현을 먼저 접수한 겁니다.
이때 선우사·유흔의 1만 군이 도착해 남포로 상륙합니다.

이때 고구려 1만 이상의 군이 도착해 패수현을 공격합니다.
그리고 양측은 격전을 치릅니다.
고구려 1만 이상 공격군
선우사 5천 원군 + 패수현 수비군
아래쪽에선 대방국의 군을 격파한 유흔의 5천 군이 대방현으로 들어가 수비군과 함께 농성합니다.
辰 2만 이상 공격군
유흔 5천 원군 + 대방현 수비군
이때의 결과는 중국측 사료에는 아래와 같습니다.
<삼국지 한전>
경초(景初 : 위 명제의 연호. 237-239) 연간에 명제(明帝)가 몰래 대방태수 유흔(劉昕)과 낙랑태수 선우사(鮮于嗣)를 보내 바다를 건너 두 군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한국의 신지에게는 읍군의 인수(印綬)를 더해 주고 그 다음 사람에게는 읍장(邑長)을 주었다.
반면 삼국사기 고구려·백제 본기에는 당시의 기록이 삭제되었습니다.
하지만 4년 후인 242년에 고구려가 서안평을 공격해 조위와 전쟁한 점, 평양으로 천도한 점은 결국 고구려가 낙랑군을 접수했다는 뜻입니다.
<동천>
16년(서기 242), 임금이 장수를 보내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하여 깨뜨렸다.
246년 ~ 고구려·위 전쟁 ~
21년(서기 247) 봄 2월, 임금은 환도성이 병란을 겪어서 다시 도읍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평양성(平壤城)을 쌓아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의 집이었다. 어떤 기록에는 ‘임금이 왕검(王儉)에 도읍하였다.’라고도 한다.
한편 백제본기에는 대방을 거치지 않고 바로 낙랑군을 공격한 점, 책계가 대방국 왕의 딸과 혼인한 점은 결국 대방군이 적어도 조위의 세력권이 미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고이>
13년(서기 246) 여름, 크게 가뭄이 들어 보리를 거두지 못하였다.
가을 8월, 위(魏)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삭방태수(朔方太守) 왕준(王遵)과 함께 고구려를 쳤다. 임금이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보내 낙랑 변경을 습격하여 백성을 잡아왔다.
그렇다면 한가지, 중국측 사료인 삼국지 한전의 기록이 사실이 아니란 얘깁니다.
아니나 다를까, 조위의 명제 조예는 239년 1월에 죽습니다.
그 말인즉슨 승전하지 못했는데도 전공을 부풀려 거짓보고한 겁니다.
황제가 정치를 돌보지 않거나 병중이면 가능한 얘깁니다.
삼국사기가 비록 기록이 통삭제됐어도 남아있는 기록을 통해 당시 정황을 대략이나마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것으로 고이대왕의 대방군 공략을 마치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channel/UCXUNWHzvqruUqV0D_jw5c1A
삼국사 아카데미
삼한시대와 삼국 초중기 역사를 심층 분석, 탐구합니다. 삼국은 백제, 신라, 가야 입니다. 왜는 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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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신라, 가야, 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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