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7. 04:16ㆍ백제, 신라, 가야, 왜

고이대왕(재위 234 ~ 286년)
전 글에서 공손씨의 대방군을 접수하려고 주변 나라들이 사방에서 달려드는 상황을 끝으로 글을 마쳤습니다.

근데 한가지를 깜박 잊고 글을 진행했는데요, 바로 이겁니다.
사마의의 전략 1, 2, 3 → 고이대왕 3에 나옴
<사마의의 전략 3>
辰에 사신을 보내 대방군을 공략케 한다.
만약 진이 대방군을 접수하면, 유흔 1만 군이 공격하여 대방군을 접수한다.
사마의가 진에 대방군 공략 원군을 요청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고구려에 사신을 보낸 것처럼 가능성은 있습니다.
만약 사신이 왔다면, 고이대왕은 사마의의 요청을 수락해야 합니다.
또한 수락하면 원군을 보내 신의를 보여야 합니다.
만약 원군 요청을 거부하거나 수락했는데도 원군을 보내지 않으면, 사마의의 분노를 사게 됩니다.
원군 요청을 거부한다는 건, 조위와 척을 지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수락을 했는데도 원군을 보내지 않으면,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신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 화하족과 이민족 간의 신의가 중요한 이유는 동탁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동탁 - 위키백과>
젊어서부터 강족 지역을 유랑하며 유력자와 친분을 맺었다. 돌아와서는 농사를 지었는데 친했던 강족 무리가 찾아오자 밭 갈던 소를 잡아 연회를 베풀고 같이 즐겼다. 그러자 강족들이 감격하여 말과 소를 제외한 가축 1,000여 마리를 선물로 주었다.
이 강족이 훗날의 이각과 곽사일 수도 있습니다.
화하족과 이민족이 서로 잘 대해줘 주거니 받거니 합니다.(give and take)
그럼으로써 신뢰가 쌓이고 친분이 생깁니다.
이건 마치 황제에게 조공을 하면 그에 대한 답례로 후한 선물을 받는 것과 같은 겁니다.
따라서 동탁의 젊은 시절 행보로 보아 5호16국 시대가 늦게 온 것이 보통 조조의 업적이라 하지만, 후한 말기 서북이 평화로웠던 건 이 동탁의 공이라 보여집니다.
<고이>
13년(서기 246) 가을 8월, 위(魏)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삭방태수(朔方太守) 왕준(王遵)과 함께 고구려를 쳤다. 임금이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보내 낙랑 변경을 습격하여 백성을 잡아왔다. 유무가 소식을 듣고 분노하니, 임금이 침범 당할까 두려워 백성들을 돌려보냈다.
고작 낙랑태수의 분노가 두려웠다면, 사마의의 분노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사마의의 직책 = 삼공 중 하나인 태위)
사마의는 양평성을 접수한 후 많은 사람들을 죽인 바, 용서가 없는 사람임을 우린 이미 압니다.(고이대왕 3)
또한 사마의가 어떤 사람인지 이걸 봐도 알 수 있습니다. ↓
사마의가 공손연 부자를 참수하고 양평성을 정리한 것이 겨울입니다.
<사마의/일생 - 나무위키>
이 무렵 병사들 중에 추위에 떠는 자가 있어 저고리를 청했으나 사마의는 주지 않았다. 어떤 이가 말했다.
다행히 헌 저고리가 많이 있으니 줄 수 있습니다.
사마의가 말했다.
▣저고리는 관청의 소유인 물품이니 신하된 몸으로 사사로이 베풀 수 없다.
그리고는 상주하여 군인 중에 나이 60세 이상 천여 명의 군역을 파하여 되돌려 보내고, 군관 중 종군하다 사망한 자는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되돌아왔다. 천자는 사자를 보내 유주 광양군 계현에서 군의 노고를 위로하고 봉읍을 늘려 예주 영천군 곤양을 수여하니 예전과 합쳐 2개 현이 되었다.
헌 저고리를 내어줄 수 있음에도 사마의는 저리 말합니다.
그리곤 쏟아질 병사들의 원성을 피하려고 노인은 돌려보내고 사망한 자들의 장례를 치뤄줍니다.
이는 사마의가 잘못한 처사라기 보다는 그 인물됨이 철저하다는 걸 알게 해줍니다.(용서 없고 철저함)소위 말하는 냉혈인간입니다.
하지만 이건 병사들보다 (혹 있을지 모를) 자신의 정치적 안위를 더욱 중요시했다는 걸 말해줍니다.
즉 사마의의 ▣말에서 알 수 있듯 법을 어겨 정적들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한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위 명제 조예는 사마의에게 사자를 수차례 보내 빨리 돌아오라고 재촉합니다.
백옥에 이르렀을 때 사마의를 소환하는 조서가 내렸는데 사흘 동안에 조서가 다섯 번 도착했다. 임금이 손수 쓴 조서에서 말했다.
그간 두렵고 불안해하며 그대가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으니, 도착하거든 곧바로 협문을 밀치고 들어와 나를 만나도록 하라.
☆장안으로 가라는 조서, 낙양으로 오라는 조서 두 가지 다른 조서가 내려지니 사마의가 크게 두려워하고 낙양으로 출발한다. 이에 빠른 거마를 타고 밤낮으로 쉴 시간이나 쉬지 않을 시간이나 가리지 않고 계속 일하여 백옥에서부터 4백여 리 되는 길을 하룻밤을 묵은 뒤에 도착했다. 가복전 침실 안으로 인도되어 임금의 침상에 올랐다.
◆사마의가 눈물을 흘리며 천자의 병세에 관해 물으니 천자가 사마의의 손을 잡고 제왕(조방)을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뒷일을 맡기오. 죽으려는 것을 겨우 견뎠으니 내가 차마 죽지 못한 것은 그대를 기다린 것인데 이제 서로 만났으니 아무 여한이 없소이다.
대장군 조상과 함께 임금의 유언을 받아 어린 주인을 보좌했다.양군 계현에서 군의 노고를 위로하고 봉읍을 늘려 예주 영천군 곤양을 수여하니 예전과 합쳐 2개 현이 되었다.
☆저기 장안으로 가라는 조서는 뭔가요?
이건 사마의가 처신을 올바르고 철저하게 했음에도 역시 정적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정적이 있기에 철저하게 처신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역설적으로)
그 정적이 꼬투리를 잡아 사마의를 곤란에 처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사마의의 정적은 이렇습니다. ↓
<고평릉 사변 - 나무위키>
249년, 위나라의 사마의가 정변을 일으켜 당시 정권을 잡고 있었던 대장군 조상과 그 형제, 일파를 몰살한 사건이다. 이로써 위나라의 세력 판도는 조씨 가문 중심에서 사마씨 가문 중심으로 바뀌게 되며, 이는 이후 서진이 건국되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사실상 실질적인 삼국지 시대의 종말이라고 할 수 있다.
금수저인 조상과 그 형제가 온실 속의 화초라 비록 사람들이 순해도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모사(謨士), 책사들이 그들입니다.
이들은 사마의를 경계하고 조심하라고 누차에 걸쳐 조언합니다.(제 할일 했음)
하지만 그들의 조언을 무시하여 결국 고평릉 사변이 일어납니다.
이때 조상 일파를 죽이지 않고 귀향 보내는 등, 살릴 수 있는 방안이 있음에도 모두 죽입니다.(구족 몰살)
정확히 말하자면 사마의의 두 아들인 사마사, 사마소가 죽였다고 봅니다.(사마소 = 晉 초대황제 사마염의 아버지)조조라면 인재가 아까워서라도 일단은 살렸다고 봅니다.
<구족 - 나무위키>
연좌제의 하나로 고조부, 증조부, 조부, 아버지, 자신, 아들, 손자, 증손, 현손까지의 9대를 말한다.
흔히 역모죄를 저지르면 구족을 멸한다고 하듯이 구족을 멸하는 것은 곧 가문의 멸족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중에는 구족을 멸하는 것이 너무 잔혹한데다 집행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해서 연좌 범위를 좁혀 대신 삼족을 멸하는 것으로 대체되기도 했다.
한국사에는 비담의 난을 진압한 김유신이 비담의 구족을 멸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사마의 본인은 지병도 있고 나이가 많아 은퇴해 편하게 살다 죽을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고평릉 사변 = 죽기 2년 전)
그러나 당시 41세의 장남 사마사의 설득에 마지못해 사변을 일으켰다고 봅니다.
우리가 먼저 치지 않으면 저들에 의해 모두 죽습니다!
즉 주체가 사마의가 아닌 사마사라고 봅니다.
- 사마의(司馬懿, 179 ~ 251년) - 당시 70세의 고령으로 지병 있음, 고유 등 노신들이 사마씨 편에 섦. 즉 사마의를 믿고 따름.
- 사마사(司馬師, 208 ~ 255년) -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비밀리에 사병 3천 양성, 사마의 죽고난 후 대숙청 감행.
- 사마소(司馬昭, 211 ~ 265년) - 고평릉 사변 직전까지 계획 모름, 실행 이틀 전에야 앎, 백전백승의 명장.
그 증거가 이겁니다.
사마사의 첫번째 정부인입니다.
<하후휘 - 위키백과>
하후휘(夏侯徽, 211년 ~ 234년)는 삼국시대 위나라 사람이다. 사마사의 아내이자 사마의의 며느리로, 하후상의 딸이며 하후현의 누이이기도 하다. 자는 원용(媛容), 시호는 경회황후(景懷皇后)이다.
그녀는 고아하고 박식하여 도량이 있어 ★사마사가 무슨 일을 하려할 때 반드시 미리 계책을 세웠다. 위나라 명제 때 사마의가 상장의 무거운 직책에 있었는데 사마의의 아들들은 모두 웅장한 재주와 커다란 모략이 있었다. 그녀는 남편 사마사가 절대 위나라의 충신이 아님을 알았고 사마사도 그녀가 위나라의 충신 하후상의 자식이자 하후씨 가문의 후손이어서 사마사는 심히 그녀를 꺼렸다.
청룡 2년(234년) 마침내 그녀는 독약을 마시고 죽었는데 《진서》 후비전에서는 당시 정황이 사마사에 의한 독살일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당시 나이가 24세였고 준평릉(峻平陵)에 장사지냈다. 사마사의 조카인 사마염이 황제가 된 후, 처음에는 그녀를 추존하지 않았으나 사마사의 두 번째 아내인 경헌황후가 매번 이 일에 대해 설득하니 태시 2년(266년) 비로소 경회황후(景懷皇后)의 시호를 내렸다.
하후휘는 남편 사마사와의 사이에 딸만 5명을 낳았으나 딸들의 이름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 이거 실환가요?
이분도 제갈량 와이프처럼 비범하다는 걸 알 수 있지만, 젊은 나이에 남편에 의해 독살됩니다.
★이 정도 비범함이면 독약인줄 알고도 남편을 위해 죽은 걸까요?
사마사는 조씨, 하후씨를 몰락시킬 생각을 가졌는데, 그녀가 그걸 알아챈 겁니다.
사마의가 죽고 사마사 형제의 세상이 되자 이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대숙청을 합니다.
즉 이때도 사마사가 주도합니다.
이미 사마사의 권력은 아버지 사마의가 가졌던 것보다 더 큽니다.
사마사가 내부의 정적들을 처리하고 죽은 후, 사마소는 외부의 적들을 백전백승으로 처리합니다.
(외부의 적 = 관구검, 문흠, 촉한, 손오 등)
<사마의를 위한 변명>
조조가 그랬듯이 사마의는 조위에 끝까지 충성하려고 했던 사람이라고 봅니다.(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공을 세울수록 정적의 타겟이 됩니다.
공손연 토벌 때도 조예(황제)의 부름에 의해 요동으로 갔습니다.
양평성 함락 후, 수천의 사람들을 본의 아니게 죽였습니다.
그들을 죽이지 않으면 정적에게 꼬투리가 잡힙니다.
그는 이때 통곡을 하고, 밥을 먹어고 맛있지 않고 잠을 자도 잘 수가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조예의 생명이 위급해 서둘러 회군합니다.(당시 한겨울, 59세)
즉 평생 조신하며 옳고 철저하게 산 사람이라고 봅니다.
◆이제 사마의가 조예를 만납니다.
중국 역사에서, 죽을 때 신하에게 ★저렇게까지 말하는 황제가 과연 몇이나 될까요?유비가 죽을 때 제갈량한테 말한 걸 그대로 카피한 듯?
구구절절 조예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사마의를 얼마나 믿고 중히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젊은 황제의 늙은 신하에 대한 깊은 신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정도의 깊이는 마치 사랑하는 연인이 죽을 때, 얼굴 마주 보고 눈물 흘리며 하는 말과 같은 겁니다.
★뒷일을 맡길게. 죽으려는 걸 겨우 견뎠어.. 내가 차마 죽지 못한 건 널 기다린 건데.. 이제 서로 만났으니 아무 여한이 없네.
결국 사마의는 요동에 온 김에 한반도를 정벌하고 싶어도 황제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이라 낙양으로 돌아갔던 겁니다.조예가 한반도를 살렸습니다.
즉 공손씨가 멸망해 낙랑·대방군은 주인없는 땅이 되고 맙니다.
이 호기를 고구려와 辰(백제)이 놓칠 수 없습니다.
고구려는 낙랑군을, 진은 대방군을 차지하고자 공략합니다.
※삼국사기에는 이렇게 한반도 내의 한군현을 공격하는 기록을 모두 삭제했습니다.
반대로 한군현이 고구려, 백제를 공격하는 기록 역시 삭제했습니다.
아마도 한반도 내에 한군현이 있었다는 사실을 후세에 전하고 싶지 않았던 듯 보입니다.(고려 사관이)
하지만 삼국시대 초중기 수백년 동안 한군현과의 피말리는 수많은 전쟁이 한반도 북부에 있었습니다.
즉 한반도 내에 고구려·백제·신라·가야만 있었던 게 아니란 얘깁니다.
오히려 삼국시대 초중기 역사의 주인공은 이 한군현과 고구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반도 북부에서 그만큼 그 둘의 존재와 비중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돌아와, 설령 선우사·유흔의 군대가 낙랑·대방군을 접수했어도 이곳을 지키려면 목숨 내놓고 지켜야 합니다.
동: 고구려가 있음
서: 바다를 다시 건너가야 함
남: 辰이 있음
북: 고구려가 서안평을 접수하면 요동으로 갈 곳이 막힘
만약 패해서 돌아가도 그 책임을 면치 못할 겁니다.
가족이 낙양에 있어 항복도 못 합니다.
결국 이들이 믿고있는 건 사마의와 그 대군입니다.
근데 사마의가 급히 돌아간 것과 그 이유를 이들이 들어 알고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황제의 수명이 다급한 상황을 이용해 이들은 패전을 했어도 승전했다고 보고를 올렸을 겁니다.(다급한 상황 = 혼란한 정국)
혹은 이들이 항복했어도 조위 측은 조위의 군대가 이민족에게 항복했다고 기록하는 걸 싫어합니다.(← 중국 전통적인 기록양식)
그래서 중국 사료도 100% 믿을 순 없습니다.
하지만 위에 언급했듯 사마의가 고이대왕에게 사신을 보냈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사마의가 고구려·辰에 사신을 보내 원군 요청함
- 고구려·진은 이에 응답해 원군을 각각 낙랑·대방군에 보냄
- 서로 필요에 의해 각자의 ★이익이 있음 (win·win)
<삼국지 한전>
경초(景初 : 위 명제의 연호. 237-239) 연간에 명제(明帝)가 몰래 대방태수 유흔(劉昕)과 낙랑태수 선우사(鮮于嗣)를 보내 바다를 건너 두 군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한국의 신지에게는 ★읍군의 인수(印綬)를 더해 주고 그 다음 사람에게는 읍장(邑長)을 주었다.
근데 전 글에서 이렇다 했습니다. ↓
<삼국지 한전>
관직으로는 위솔선(魏率善), 읍군(邑君), 귀의후(歸義侯), 중랑장(中郞將), 도위(都尉), 백(伯), 장(長)이 있다.
- 위솔선 - 조위 조정에서 감찰을 위해 보낸 사람 또는 관직
- 읍군 - 마한의 신지
- 귀의후 - 조위 조정에서 봉작을 받은 사람
근데 알고보니 여기에 충격적인 역사적 진실이 있습니다.
한·위·진 시대에 한반도 북부의 중국 군현에게 인수를 받은 고고학 증거들입니다.(인수 = 인장 = 도장)
참고로 여기서 감찰은 한마디로 '뭔일 있으면 보고하라'는 뜻입니다.

위솔선한백장(魏率善韓伯長) ↑
조위의 감찰관, 韓의 아무개에게 수백 명의 군사 지휘권을 줌.

진솔선예백장(晉率善濊伯長) ↑
晉의 감찰관, 예의 아무개에게 수백 명의 군사 지휘권을 줌.

진고구려귀의후(晉高句驪歸義侯) ↑
晉이 고구려 아무개에게 봉작을 줌.
진고구려솔선읍장(晉高句麗率善邑長)
晉이 고구려 아무개에게 감찰과 읍장을 줌.
진고구려솔선백장(晉高句麗率善佰長)
晉이 고구려 아무개에게 감찰과 수백 명의 군사 지휘권을 줌.
진고구려솔선천장(晉高句麗率善仟長)
晉이 고구려 아무개에게 감찰과 수천 명의 군사 지휘권을 줌.
진부여솔선백장(晉夫餘率善佰長)
晉이 부여 아무개에게 감찰과 수백 명의 군사 지휘권을 줌.
진솔선한백장(晉率善韓佰長)
晉의 감찰관, 韓의 아무개에게 수백 명의 군사 지휘권을 줌.
진솔선맥백장(晉率善貊佰長)
晉의 감찰관, 맥의 아무개에게 수백 명의 군사 지휘권을 줌.
<삼국지 한전>
풍속은 의책(衣幘) 입기를 좋아한다. 하호(下戶)들도 군에 인사드리려고 갈 때에 모두 의책을 빌려 입는다. 자신의 인수(印綬)를 차고 의책을 착용하는 사람이 천여 명이나 된다.
당시 중국이 한반도 국가들의 아무개에게 100명의 군사 지휘권을 대량으로 줬다는 건, 그들이 중국의 관직을 받은 것이나 다를 바 없으며 서로 간의 감시와 견제, 세력 축소 등의 對이민족 전략으로 보입니다.
이는 흉노, 선비, 오환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대 동북아가 황제를 중심으로 중원의 질서 속에 돌아가는 건, 이미 진 시황 때 시작되어 한 무제 때에 완료되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후한 광무제 때 한번 더 각인시켜 줍니다.
- 진 시황 - 군현제 시작
- 한 무제 - (전)한군현 설치
- 후한 광무제 - (후)한군현 설치
그래서 고이대왕 역시 어쩔 수 없이 유흔의 군대와 합세하여 공손씨 대방군을 공격해 들어갑니다.
근데 이때 대방국이라는 변수가 있습니다.
앞서 전 글에서 대방국은 황해도의 서남부에 위치해 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서남부에는 군현이 없기 때문입니다.(→ 공백지)

한 무제가 한반도 북부에 군현을 설치한 이유 중 하나가 거주민에게 세금을 받기 위함입니다.(→ 로마제국과 같음)
인구에 따라 남는 장사가 아니면 군현을 이동·폐지할 수도 있습니다.
즉 군현에 그만한 인구가 거주해야 현을 설치할 수 있습니다.
<현령 - 나무위키>
한나라 때에는 호구 수를 1만 호를 기준으로 하여 그 이상이면 현령을 두고, 이하면 현장(縣長)을 두었다. 품질은 현령이 6백~1천 석이었고, 현장이 3백~5백 석으로, 현의 규모에 따라 차등이 있었다. 현령(현장)의 휘하에는 현승(縣丞), 현위(縣尉) 관직을 설치했는데, 현승은 현령, 현장을 보조하는 이방, 현위는 병방같은 경무, 군무관이다. 한나라 당시 중국 전역을 통틀어 100여개의 군이 있었고, 한 군마다 10여개의 현이 있었으므로 현의 갯수는 1,000개 이상이였을 것이다. 참고로 현재 중국의 현 숫자는 1,600개가 넘는다.
중국 삼국시대에는 녹봉 비 1천 석이다.
여기까지 보면 현령이 현대 한국의 면사무소장 읍사무소장 동사무소장 정도 말석의 벼슬아치 정도로 생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1만호 이상이 현령인데 당대 전통사회에서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더 높아서 대가족 사회인 1호에 5명만 있고 1만호를 다스린다고 해도 5만명을 다스리는 벼슬이다. 한사군 낙랑군의 경우 그 인구를 약 62000호에 40만명 가량으로 기록하고 있다. 비록 한사군 지역이지만 어쨌건 당시 한 호에 6~7명 정도는 됐단 얘기고, 여기에 노비, 이민족과 같은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1만호 이상인 현령은 족히 10만명 이상은 다스린다는 얘기다. 단, 행정력이나 경제력 등은 당연히 현대의 면장 읍장 동장 등이 비교도 안 되긴 할 것이다. 현령은 목민관으로써 백성들을 최일선에서 접촉 통치하여 민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정책을 시험하며 관원의 정치, 행정적 능력을 인증하여 중앙관직으로 나아가던 나름 중요한 관료였다.
불과 100년도 안된 시대까지만 해도 평균 7명의 자식을 낳던 농경사회가 우리네였습니다.
질병이나 영양소 결핍, 아사, 전쟁 등으로 자식을 잃는다 해도 결국 점점 인구가 불어납니다.
(일제시대부터 근대식 위생 시설, 의료 혜택 등으로 인구가 증가함)
<삼국지 한전>
초옥(草屋)에 토실(土室)을 지어 사는데 그 모양이 마치 무덤과 같으며 문은 위에 있다. 온 식구가 그 속에서 함께 살며 장유(長幼), 남녀(男女)의 분별이 없다.

애를 많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는 구조입니다. ↑
고대로 갈수록 사람들은 잘 씻지를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많이 낳았습니다.
참고로 우리는 80년대까지도 특히 시험 볼 때 머리 감거나 손톱 자르면 복 나간다고 안 씻었던 미신이 있었습니다.옆에 나라는 불과 10년 전만 해도 안 씻었습니다.(이유 막론하고)
이런 시대, 이런 환경에서 한문 책을 가지고 공부를 한다?
더구나 종이가 아주 없거나 있어도 귀한 시대이니, 그것도 목간으로?
<종이 - 나무위키>
현재 쓰고 있는 종이는 고대 중국에서 처음 발명되었다. 고대 중국에서는 부피가 큰 간독이나 비싼 비단에다가 주로 글을 썼는데, 비단을 징수하는 것이 행정, 재정적으로 큰 부담이 되자 당시 황실 재정을 담당하던 후한의 환관 채륜이 그걸 보다 못해 비단을 대신할 물건을 찾게 되었다.
이에 따라 채륜이 전국에서 수많은 장인과 기술을 동원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채후지(蔡侯紙)라는 물건이다. 기원후 105년경에 당시 중국에 있던 제지 기술을 개량, 체계화하고 공정 방식을 표준화하여 만든 채후지를 현대 종이의 직계로 본다.
한반도에 종이는 4세기~7세기경에 유입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지는 기존의 종이와 비교했을 때 놀라울 정도로 내구성이 강해서 기존의 일반 종이에 비해 수십배는 오래 보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질겨서 쉽게 훼손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만큼 일반 종이에 비해 두껍고 무거운 편이라는 단점이 있다. 일본엔 고구려의 담징에 의해 제지법이 전해지고 이후 화지로 발달한다.
움막집을 보면 알 수 있듯 공부는 커녕 문자를 알 수도 없는 환경입니다.(문자 = 漢字)
훗날 초가집이라고 더 나아진 건 아닙니다.(쪼끔 나아짐)
즉 2천년 동안 백성들은 문맹의 악순환과 되물림만 있을 뿐이었습니다.(노동력 착취 → 노예)
그 증거가, 조선시대에 국법으론 평민도 과거를 볼 수 있게 됐지만, 과거에 급제해 벼슬한 인물이 있나요?
만약 한 명도 없으면, 이는 삼국시대에 노예였으면 그 후손은 조선시대도 노예란 얘깁니다.(노예 = 귀족·양반 빼고 모두)
잘 돼야 노예에서 평민이라지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평민도 노예랑 별 차이 없습니다.(지주의 반대 = 노예)
왜냐?
지주가 마음만 먹으면 평민을 노예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평민 = 문맹 = 노예)
그것이 고대로 갈수록 더 쉬운 것이고, 근대로 올수록 국법이 마련돼 있기에 어려운 것의 차이 뿐입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해서 일절 다른 게 없습니다.(동서막론)
참고로 단 2가지만 보면 조상이 노예였는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하지만 이 노예에 대해서 파면 팔수록 너무 충격적이라 여기선 생략하겠습니다.
암튼 이왕 현령까지 온 김에 태수도 보겠습니다.
<태수 - 위키백과>
처음 전국시대에 봉건제를 대신하여 군을 설치하면서 군의 장관으로 군수를 두고 중앙 정부에서 직접 임명하였다. 예를 들면 진나라가 촉나라를 멸하고 세운 촉군에 장약(張若)을 군수로 두었다. 전한 경제 중2년(기원전 149년)에 태수로 이름을 고쳤다. 왕망은 부임자의 작위에 맞추어 목(牧)·졸정(卒正)·연솔(連率)·속령(屬令)·속장(屬長)·윤(尹)으로 고치고, 또 조수·후수·우수·기수·좌수·전수에는 대부(大夫)를 두었으나, 후한에서는 모두 태수로 되돌렸다. 똑같이 임명되어도 일반인이 임명되면 군(郡), 한실종친이 임명되면 국(國)이라 했으며 군에 임명되면 태수, 국에 임명되면 왕(王)이라 했다. 태수는 자신의 군을 직접 다스렸으나 왕은 자신의 국을 직접 다스리지 않고 휘하에 국상(國相)을 둬서 국상이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내각제로 다스렸다. 후한에서 태수의 관등은 질(秩) 2천 석이었으며, 수도에 속한 군에는 태수 대신 윤(尹)을 두었다. 원래 주에 속한 군을 감독하는 자사는 태수보다 관등이 낮았으나, 후한 영제 시대에 주목이 부활한 이래로 태수는 주목 · 주자사의 아래에 놓였다.
즉 태수만 하더라도 일국의 왕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다시 돌아와, 이곳에 군현이 없다? (이곳 = 황해도 서남부)
이는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 원래 황무지임
- 거주민이 조금 있지만 인구가 적음
- 군현 설치불가
근데 그건 그곳이 황무지일 때의 얘기이고, 지금은 해수면 하강 후라서 유민들이 속속 모여들어 인구가 많아졌습니다.
(지금 = 공손강의 대방군 설치 후)
그래서 이곳에 독립적인 대방국이 세워진 거라 봅니다.(→ 가능성이 있다는 뜻)
<공손강 - 위키백과>
건안(建安 : 후한 헌제의 연호, 196-220) 연간에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屯有縣) 이남 황무지를 나누어 대방군(帶方郡)으로 만들었다. 공손모(公孫模), 장창(張敞) 등을 파견하여 한의 유민을 모아 군대를 일으키고 한과 예를 정벌하니 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왔다.
이때 공손모가 대방군의 초대 태수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훗날 그와의 불화로 장창은 따르는 무리와 함께 자취를 감춥니다.(서남쪽으로?)
이 장창의 후손이 대방국의 왕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훗날 장무이 묘가 발견되면서 장무이가 장창의 후손이 아닐까 했지만..
장무이는 어양군 출신이라고 장무이 묘에서 발견된 문자벽돌이 말해줍니다.(어양군 = 북경 부근)
▩ 이에 대해선 아래 해명합니다.(한참 아래쪽에)
<장무이 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장무이묘(張撫夷墓)는 황해북도 봉산군에 있는 대방군 태수 장무이의 벽돌방무덤이다. 봉산군에서 문자벽돌이 채집되면서 주민들 사이에서 도총이라고 불리던 무덤에 대하여 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1911년 최초로 조사를 실시하었다. 부장 유물은 이미 도굴되어 거의 남지 않았는데, 문자벽돌이 발견되어 무덤의 주인이 장무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학계는 대방국이 대방군이라 하는 게 통설입니다.
저는 공손강이 설치한 대방군과 그 서남쪽의 대방국은 따로 존재했다는 견해입니다.
<대방국 - 나무위키>
원삼국시대의 국가로 3세기 후반 한반도 북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국가. 국내 기록에서 등장한다.
대방국에 대해서는 대방군에 소속된 소국이었다는 견해와 낙랑군 남부의 호족인 장씨(張氏)가 세웠다는 견해, 백제가 대방태수를 예우 차원에서 왕으로 불렀다는 견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견해 등이 있다.
어느 학자 분인지 모르지만 대방국을 장씨가 세웠다고 합니다. ↑
저와 견해가 같기에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대방군 - 나무위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기록된 ◈대방왕을 대방태수로 보기도 한다.
조위 시기(238년~265년)
유흔(劉昕): 238년 위나라의 요동 공손씨 정벌 당시 파견되어 낙랑태수 선우사와 함께 대방군을 평정했다.
유하(劉夏): 비미호의 사신단과 교류.
궁준(弓遵): 생몰년도는 ? ~ 246년. 245년 낙랑태수 유무와 함께 동예를 정벌했으며 이듬해 기리영 전투에서 전사했다.
왕기(王頎): 태수가 되어 247년에 임지에 도착했다.
◈대방왕이 대방태수가 아닌 이유는 다음 2가지로 알 수 있습니다.
- 태수는 임기가 끝나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함
- 칭왕하면 낙양에 친족들이 있어 역모죄로 구족 몰살됨
즉 군의 태수는 임기가 있는데, 그 딸을 이민족의 임금에게 시집보낼 리가 없습니다.
보통 3년 임기 아닐까 합니다.
근데 희박하지만 태수가 칭왕하는 가능성은 이렇습니다. ↓
<서진 - 위키백과>
서진(西晉) 또는 사마진(司馬晉)은 266년부터 316년까지 존속했던 중국의 왕조이며, 혼란했던 난세인 삼국시대를 끝낸 국가이다. 권신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이 조씨의 위나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여 건국하였다.
즉 사마씨가 조위의 황위를 찬탈하고 낙양에 있는 친족들도 처형된 경우, 이판사판 독립해 칭왕합니다.
이게 삼국사기 책계 조에 대방국이 나오는 시기랑 묘하게 들어맞습니다.(286년 이전 시기)
근데 왕기 이후로 대방태수가 누군지 기록에 없습니다.
즉 왕기 이후로 대방군이 없어지고 대방국이 세워진 게 아닐까 합니다.
그 시기도 묘하게 이어지고, 그 과정은 기록에 없지만 이게 고이대왕의 재위 기간과 겹칩니다.
<대방국 시나리오>
- 원래 황무지임
- 거주민이 조금 있지만 인구가 적음
- 군현 설치불가
- 장창, 대방태수 공손모와 불화
- 장창, 따르는 무리와 서남쪽으로 피신
- 유민들 모이며 세력 커짐
- 고이대왕과 화친동맹
- 왕기 이후로 대방태수 없음
- 장씨, 대방군 통일함
- 대방국 세우고 칭왕
- 백제와 혼인동맹(책계 + 보과)
- 낙랑태수, 대방국 공격했으나 백제가 보낸 원군에 실패
- 낙랑태수, 고구려와 연합해 대방국 공격, 멸망시킴
- 책계대왕 전사
고이와 책계의 2대에 걸친 한편의 대하드라마입니다. ↑
이 대방국의 유일한 사료가 삼국사기 백제본기 책계 조에 나옵니다.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쳐서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대방왕의 딸 보과(寶菓)를 부인으로 삼았기에, 임금이 이르기를 “대방은 장인의 나라이니 그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드디어 병사를 내어 구원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임금은 고구려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아차성(阿旦城)과 사성(蛇城)을 수리하여 대비하였다.
책계대왕은 12년 통치 기록이 전부 통삭제됐습니다.(재위 286 ~ 298년)
근데 이상하지 않나요?
이때 고구려가 대방국을 친다?
그리고 대방국을 구원하니 앙숙인 백제를 원망했다?
이건 무얼 의미하느냐?
고구려가 대방을 치면 그 위치와 방향상 낙랑군은 고구려의 영토라는 얘깁니다.
하지만 이때 낙랑은 고구려의 영토가 아닌 진(晉)의 군현입니다.(이때 = 286년)
안정된 통일왕조의 군현을 공격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봅니다.(= 자살행위)
이것이 삼국시대 초중기 수백년 동안 한군현이 살아남은 이유입니다.
그럼 언제 고구려는 낙랑·대방군을 접수하냐?
<미천>
14년(서기 313) 겨울 10월, 낙랑군을 침범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15년(서기 314) 가을 9월, 남쪽으로 대방군(帶方郡)을 침공하였다.
16년(서기 315) 봄 2월, 현도성을 침공하여 깨뜨렸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보시는 바, 거진 30여 년 후에 접수합니다.
그럼 이때 중국은 어떤 상황이었냐?
팔왕의 난, 영가의 난이 일어나면서 5호16국이 도래하는 전무후무한 개막장의 시대입니다.
<서진 - 위키백과>
서진(西晉) 또는 사마진(司馬晉)은 266년부터 316년까지 존속했던 중국의 왕조이며, 혼란했던 난세인 삼국시대를 끝낸 국가이다. 권신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이 조씨의 위나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여 건국하였다.
조조가 알면 무덤 속에서 뛰쳐나올 개막장 시대 시작. ↓
<팔왕의 난 - 위키백과>
팔왕의 난(八王-亂)은 291년부터 306년까지 이어진 중국 서진의 내란으로, 서진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황실 내부의 권력 투쟁으로 발생하였으며, 팔왕의 난이라는 이름은 내란을 주동한 주요 황족 제후왕이 8명인 데서 유래하였다. 팔왕의 난이 초래한 계속된 혼란으로 인해 서진의 통치 기반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영가의 난으로 수도인 낙양이 이민족에게 함락되면서 서진이 멸망하였다.
결국 중원의 힘이 쇠약해진 틈을 타 북방 이민족들이 침공합니다.
<영가의 난 - 위키백과>
영가의 난(永嘉之亂)은 중국 서진 말기 회제의 영가 연간(307년 ~ 312년)에 이민족에 의해 일어난 반란이다.
<영가의 난 - 나무위키>
중국 서진 말기, 북방의 이민족들인 오호에 의해 일어난 대침공을 지칭한다. 중국 한족 역사상 정강의 변, 토목의 변과 함께 3대 굴욕으로 손꼽히며,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역사적 여파를 미쳤다. 영가의 난이라는 것은 이 난이 회제 사마치의 연호였던 영가(永嘉) 연간인 307년~312년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장 135년 동안 중원은 이민족들이 장악합니다.(중원 = 종이호랑이)
이때 고구려 미천왕이 낙랑·대방군을 접수한 겁니다.
<5호16국 시대 - 위키백과>
오호십육국시대(五胡十六國時代, 304~439)는 중국 역사의 한 시기로서, 한족이 건국한 서진(西晉)이 여러 요인들로 인해 멸망한 뒤 이전 몇 세기에 걸쳐 중국 북부와 서부에 정착한 다섯 이민족(五胡)에 의해 화북 및 회수 지역에서 일련의 비(非)한족 왕조들이 난립하던 혼란기를 일컫는 용어이다.
즉 286년은 중원이 종이호랑이 전이기에 고구려를 낙랑으로 바꿔야 합니다.
고구려 → 서진의 낙랑군
◈고구려가 낙랑이 대방(帶方)을 쳐서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대방왕의 딸 보과(寶菓)를 부인으로 삼았기에, 임금이 이르기를 “대방은 장인의 나라이니 그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드디어 병사를 내어 구원하니 고구려가 낙랑이 원망하였다. 임금은 고구려의 낙랑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아차성(阿旦城)과 사성(蛇城)을 수리하여 대비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는 처음부터 앙숙지간으로, 원망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습니다.(비류·온조 ↔ 유리명왕)
고구려는 어떻게 해서든 남하하여 백제를 멸망시키려 하고, 백제는 그런 고구려를 저지하는 것이 수백년 동안 나라가 망할 때까지의 숙명입니다.
그럼 누가 왜 이렇게 낙랑을 지우고 고구려라고 한 것이냐? (누가 감히 사서에 손을 대?!)
고려 초, 쿠데타 세력 아래의 사관입니다.
당시 어느 누군가 대놓고 낙랑을 지우고 고구려라고 기록하게 한 겁니다.
그건 편년체 역사서에 날짜기록 없이 달랑 ◈저리 쓴 것이 그 증거입니다.
편년체 역사서에 날짜기록이 없다? (삼국사기는 본기가 편년체임)
그럼 후세의 날조라 보면 대부분 맞습니다.(날조 = 가필 = 첨삭 = 수정)
삼국의 건국시조 설화가 좋은 예입니다.(날짜 없음)
대체 왜 그렇게까지 기록을 날조했냐?
※위에서 언급했듯 한반도에 한군현의 세력를 지우기 위함입니다.
존재까지는 아주 지우진 못 해도 세력·판도는 지울 수 있습니다.
누가?
고려를 건국한 쿠데타 세력이.
그럼 고려를 건국한 세력이 왜 한반도 북부 한군현의 세력·판도를 지웠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고려 - 위키백과>
고려(高麗)는 918년부터 1392년까지 존재했던 한반도의 통일 왕조국가이다.
<5대10국시대 - 나무위키>
당(唐)(618년 ~ 907년) 왕조가 멸망한 10세기 초엽부터 송(宋)(960년 ~ 1279년) 왕조가 개창된 10세기 중엽까지 53년, 약 반세기 동안 이어진 시대를 구분하는 용어. 이 시기는 혼란기로, 한국사에선 후삼국시대에서 고려 광종 치세까지 겹치는 시기다. 이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여 혼란의 시대를 끝낸 나라가 송나라다.
↓ 920년 경을 보면 요서와 요동은 거란이 차지합니다.
이때만 하더라도 거란의 힘은 그리 쎄지 않았습니다.

920년경 오대십국 전반기의 형세
근데 930년 경이 되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
926년 발해가 거란에 멸망하면서 거란은 대제국이 됩니다.(거란 → 요나라)
<거란 - 나무위키>
거란(契丹)은 요하와 시라무렌강 유역을 중심으로 분포했던 준몽골어족 동호계 유목민 또는 반유목민 집단이다.

930년경 오대십국 중반기의 형세
낙랑군을 고려가 차지한 상태입니다.
만약 거란이 낙랑군의 옛 주인 없음을 생트집 잡아 침략하면 큰일입니다.(낙랑군의 옛 주인 = 한·위·진)
소손녕과 서희의 담판 내용에 낙랑군 얘기가 없다는 건, 거란 측에서 그에 관해 자세히 몰랐다는 뜻입니다.
알면 생트집 잡았을 겁니다.
<제1차 고려-거란 전쟁 - 위키백과>
소손녕은 서희와의 담판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는 우리 소유인데도 너희들이 침략하여 차지했다. 그리고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음에도 바다를 건너 송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오늘의 출병이 있게 된 것이다. 만약 땅을 분할해 바치고 조빙을 잘 한다면 무사할 것이다.
그러자 서희는 이에 대해 소손녕의 말을 반박하였다.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이다. 그 때문에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한 것이다. 국경 문제를 두고 말한다면, 요나라의 동경도 모조리 우리 땅에 있어야 하는데 어찌 우리가 침략해 차지했다고 하는가? 게다가 압록강 안팎은 우리 땅인데, 지금 여진이 그 땅을 훔쳐 살면서 완약하고 교활하게 거짓말로 길을 막고 있으니 요나라로 가는 것은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어렵다. 조빙이 통하지 않는 것은 여진 때문이니, 만약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영토를 돌려주어 성과 보루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해준다면 어찌 감히 조빙을 잘 하지 않겠는가?
이 1차 거란 침공은 993년에 일어났습니다.
926년 발해를 멸망시켜 고구려를 자기들 소유라고 주장하는데 하물며 낙랑군이겠습니까?
혹시 땅을 분할하라는 것이 낙랑군을 말하는 걸까요?
모르긴 몰라도 고구려(또는 고려)가 낙랑군을 무력·병합한 걸 가지고 생트집 잡을 수 있습니다.
온갖 생트집 잡으며 낙랑군을 내놓으라 할 기세입니다.
그래서 고려는 훗날에 있을지 모를 거란의 침공에 대비해 먼저 사료의 기록을 편집합니다.(편집 = 날조)
즉 구삼국사의 편집을 이 무렵 했다는 얘깁니다.(이 무렵 = 왕건의 치세)
왕건 - 943년 죽음, 향년 66세
고구려가 낙랑군을 어떻게 접수했는지 자세히 나왔을 기록을 통삭제한 겁니다.
그 기록을 거란이 보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로써 951년 경까지 거란과 고려의 세력 변화는 없습니다. ↓
즉 고려는 살을 도려내는 아픔으로 사료 편집을 한 겁니다.
이왕 하는 거 말갈에 관련해서도 편집한 건 덤입니다.
- 정리 -
- 거란의 침공에 대비한 대대적인 사서·사료 정비
- 낙랑군·대방군을 고려 영토로 굳히기 위함
- 동시에 고구려·말갈에 대한 전반적인 편집

951년경 오대십국 후반기의 형세
훗날 거란의 2차 침공 때 개경은 함락됩니다.(1010년)
이때 많은 사료가 불탔겠지만, 만약 거란이 편집되지 않은 원본 사료를 봤다면 낙랑군에 대해 생트집 잡아 3차 침공 때 고려로서는 후환거리가 됐을 겁니다.
결국 그러한 역사적인 이유로 인해 구삼국사는 편집된 겁니다.
1차: 통일신라 때
2차: 고려 초기 때
또 다른 증거가 책계대왕이 어떻게 죽었는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책계>
13년(서기 298) 가을 9월, 한(漢)나라가 맥인(貊人)들과 합세하여 침범하였다. 임금이 나가서 막다가 적병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여기서 漢은 이미 망해서 晉입니다.(정확히는 서진)
이것도 역사를 모르는 작자가 대놓고 漢이라고 기록하게 한 증거입니다.
즉 낙랑태수가 대방국을 구원한 책계대왕을 원망해서 고구려를 끌여들여 같이 공격한 겁니다.(군사력이 부족해서)
→ 이이제이(以夷制夷)
이때 책계대왕은 전사합니다.
여기서 맥인이라 한 것도, 고려 사관이 고구려나 말갈이라 함을 피해서 맥인이라 쓴 겁니다.
이런 날조와 함께 구삼국사의 방대한 기록은 통삭제되어 오늘날 우리가 보는 날씬한(?) 삼국사기가 됐습니다.
그럼 대방국 시나리오와 실제 발생한 사건을 대조해 보겠습니다.
<대방국 시나리오>
- 원래 황무지임
- 거주민이 조금 있지만 인구가 적음
- 군현 설치불가
- 장창, 대방태수 공손모와 불화
- 장창, 따르는 무리와 서남쪽으로 피신
- 유민들 모이며 세력 커짐
- 고이대왕과 화친동맹
- 왕기 이후로 대방태수 없음
- 장씨, 대방군 통일함
- 대방국 세우고 칭왕
- 백제와 혼인동맹(책계 + 보과)
- 낙랑태수, 대방국 공격했으나 백제가 보낸 원군에 실패
- 낙랑태수, 고구려와 연합해 대방국 공격, 멸망시킴
- 책계대왕 전사
<조위의 역대 대방군 태수>
유흔(劉昕): 238년 위나라의 요동 공손씨 정벌 당시 파견되어 낙랑태수 선우사와 함께 대방군을 평정했다.
유하(劉夏): 비미호의 사신단과 교류.
왕준(王遵): 생몰년도는 ? ~ 246년. 245년 낙랑태수 유무와 함께 동예를 정벌했으며 이듬해 기리영 전투에서 전사했다.
왕기(王頎): 태수가 되어 247년에 임지에 도착했다.
<실제 발생한 사건 = 굵은 글씨>
238년, 사마의가 보낸 유흔의 5천 군대가 공손씨 대방군 대방현 평정.(둔유, 대방, 열구)
장씨 집단, 함자 접수.(황남 통일 직전)
辰, 장잠 이하 제해 접수.(장잠, 해명, 남신, 제해)
→ 대방군 삼국시대
동년, 비미호 사신 도착
240년, 辰 대군 사열
대방군에 다시 전쟁 일어남, 조위 낙랑·대방군의 군세와 辰·장씨 집단 연합군과의 전쟁으로 추정.
대방태수 유하 전사?
새 대방태수 왕준 부임(삼국지 왜전)
242년, 고구려, 서안평 공격
조위 낙랑군, 고구려와 대결하느라 대방군에 신경 쓸 여력 없음.
244년, 조위 vs 촉한, 흥세 전투(낙곡대전)
즉 조위 조정은 촉한과의 전쟁 때문에 낙랑·대방군에 신경 쓸 여력 없음.
246년, 조위 낙랑·대방군 vs 辰·장씨 집단, 기리영 전투
대방태수 왕준 전사, 韓 멸망시켰다고 거짓보고함.(왕준 = 궁준)태수가 전사했는데 어떻게 한이 멸망해? 쪽 팔려서 성을 궁으로 바꿔 기록함.(화살 맞고 전사?)
247년, 대방태수 왕기, 임지에 도착
조위 조정, 이를 만회하기 위해 왕준의 친족을 보냄.(원한 갚으라고)
동년, 비미호 사신 도착
249년, 고평릉 사변
조위 조정, 낙랑·대방군에 신경 쓸 여력 없음.
왕기를 끝으로 대방태수 없음, 즉 대방군 폐지.(왕기가 노력했지만 끝내 폐지 결정)
장씨 집단, 대방군 통일함.
251년, 사마의 죽음 (향년 72세)
사마사 형제, 낙랑·대방군에 관심 없음.
장씨, 대방국 세우고 칭왕.
~세월은 흘러~
286년 이전, 백제+대방국, 혼인동맹 (책계+보과)
286년 이후, 서진 낙랑태수, 대방국 공격했으나 백제가 보낸 원군에 실패
~이 사이 기록 통삭제~
298년, 서진 낙랑태수, 고구려와 연합, 대방국 공격·멸망시킴
이때 책계대왕 전사
~이후~
서진, 의도적으로 대방국왕 장씨와 같은 성씨인 어양군 출신 장무이를 대방에 파견, 대방군 재설치.
▩ 이것이 묘가 발견된, 우리가 아는 장무이 묘임.(의도적으로 어양군 출신임을 밝힌 문자벽돌)
~세월은 흘러~
팔왕의 난, 영가의 난, 5호16국 시대 도래함
314년, 고구려 미천왕, 낙랑·대방군 접수
이렇게 아다리가 딱 맞아 떨어집니다.
<동천>
16년(서기 242), 임금이 장수를 보내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하여 깨뜨렸다.
이때 고구려가 서안평을 공격한 이유가,
- 요동에서 낙랑군으로 가는 보급을 끊고 낙랑군을 토벌하기 위함
- 군사요충지인 이곳을 선점해야 조위에 대한 공격·방어가 유리함
이렇게 2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을 겁니다.
근데 한가지 특기할 만한 기록이 보입니다.
<고이>
16년(서기 249) 봄 정월, 갑오일에 태백이 달을 침범하였다.
<고평릉 사변 - 나무위키>
정시 10년(249년) 정월 갑오일, 환범이 예전에 형제 중 한 명은 남겨두라고 조언한 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상이 황제 조방을 모시고 세 아우 조희, 조훈, 조언과 심복 하안, 어림군 등을 거느리고 조예의 무덤인 고평릉으로 참배를 가자 사마의는 아들 사마사, 사마소와 함께 심복 장수들, 사마사가 비밀리에 양성한 사병 3,000여 명을 동원해 수도 낙양에서 정변을 일으켰다.
고평릉 사변이 고이 16년 조에 저렇게 기록돼 있는데, 고구려·신라 본기에는 없는 기록입니다.
즉 구삼국사에는 고평릉 사변에 대한 기록과 함께 장씨 집단이 대방군을 통일하는 과정도 상세히 나왔을 걸로 추정합니다.
| 원인 | 고평릉 사변 |
| 결과 | 장씨 집단의 대방군 통일 과정 |
이제 비미호의 사신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여기 고대 한중 미스터리에서 생각치도 않은 비미호가 나오다니, 이 무렵 한반도는 다사다난(多事多難)했습니다.
(이 무렵 = 238년 공손연의 독립전쟁 ~ 249년 고평릉 사변까지의 10여 년)
전 글에서 비미호의 나이는 이렇다 했습니다.(삼국은 왜의 속국인가)
173년에 20세라 하면, 247 - 153 = 94세에 죽었습니다.
근데 고대에 20세면 남자 기준으로 성인이니, 여자 기준으로 다시 잡겠습니다.
즉 15세입니다.
<관례 - 위키백과>
관례(冠禮), 또는 원복(元服)은 동아시아의 유교 문화권 국가(중국, 한국, 베트남 및 일본)에서 이루어지던 관혼상제의 하나로서, 원시 사회에서 미성년자를 한 사람의 성인(成人)으로서 인정하던 성인식에서 유래하였으며, 주로 20세가 되는 남자(여자의 경우는 15세)에게 거행되었다. 미혼(未婚)이더라도 관례를 치르고 나면 성인으로서 대우받았다.
10세 - 너무 어려 인지력 없음
20세 - 남자 나이로 성인
15세 - 여자 나이로 성인
20세의 남자를 성인이라고 한 건, 변성기가 지나고 키가 다 큰 상태이기 때문이라 봅니다.
15세의 여자를 성인이라고 한 건, 초경을 해서 임신할 수 있기 때문이라 봅니다.
그럼 173년에 15세라 하면, 247 - 158 = 89세 전후에 죽은 게 됩니다.
이제 비미호는 158년생 전후로 하겠습니다.
<삼국지 왜전>
그 사람들의 수명이 길어 혹은 백년 혹은 8-90년이다.
其人壽考或百年或八九十年
열도 왜인들의 긴 수명은 당시 중국에서도 유명했나 봅니다.
아마도 해산물과 생선이 주식이라 장수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그럼 238년에 80세 전후의 비미호가 어째서 조위 조정에 사신을 보낸 걸까?
당시 정황을 보면 답이 나옵니다.
<아달라>
20년(서기 173) 여름 5월, 왜(倭)의 여왕 비미호(卑彌乎)가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전 글에서 비미호(卑彌呼)는 173년 무렵에 辰의 초고대왕이 보낸 비미국(卑彌國)의 왕족이라 했습니다.(초고대왕 2)
위 계산에 의해 이때 비미호는 15세 전후의 나이로 추정됩니다.
<삼국지 한전>
그중에서 12國은 辰王에게 臣屬되어 있다.
辰王은 (그 12국의 왕을) 항상 馬韓사람으로 王을 삼아 대대로 世襲하였으며, 辰王이 (그들을) 자립해서 王이 되지 못하게 하였다.
魏略: 그들은 옮겨온 사람들이 분명하기 때문에 馬韓의 제재를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 글에서 구수 다음의 고이가 초고의 후손이 아닌 비류의 후손이라 했습니다.(고이대왕 1)
그것이 역성쿠데타든 선위든 상관없이 바다 건너 야마토왕 비미호는 심기가 불편합니다.
고이가 초고대왕의 후손이 아니다?
담로제는 이때의 경우를 대비한 것이기도 하여, 비미호는 당장 야마토의 대군을 일으켜 구수의 후손으로 대를 잇게 하고 싶습니다.
이는 마치 백제멸망 시, 제명 여왕이 노구를 이끌고 야마토의 수만 대군을 일으킨 것과 같은 겁니다.(제명 = 사이메이, 당시 67세)
하지만 이때 비미호는 80세 전후의 훨씬 고령이고, 구노국과 전쟁 중으로 보입니다.(이때 = 238년)
즉 辰의 대왕이 초고의 후손이 아닌 고이가 대를 이은 정황을 이용, 구노국(狗奴國)의 왕 비미궁호(卑彌弓呼)는 나름 야마토를 접수하려고 한 겁니다.(비미호와 친족임에도 불구하고)
그럼 여기서 비미호가 할 수 있는 최선책은 무엇이냐?
바로 조위 황제의 권위로 구노국을, 또 그 군사력으로 고이를 압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낙랑·대방군은 공손연의 영토이기에 때를 기다린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238년, 사마의가 대군을 일으킨 소식을 접한 비미호는 공손연 세력이 멸망한 때에 맞춰 사신을 보냅니다.
비미호는 사마의의 대군이 십중팔구 이길 거라 내다본 겁니다.
<삼국지 왜전>
경초 2년(238년) 6월, 왜 여왕이 대부 난승미(難升米) 등을 보내 군(郡)에 이르러 천자에 조헌(朝獻)할 것을 청하니, 태수 유하(劉夏)가 관원과 장수를 보내 (왜의 사신을) 경도(京都)까지 호송하게 했다.
<고이>
5년(서기 238) 여름 4월, 궁궐 문 기둥에 벼락이 치더니 그 문에서 황룡이 날아 나왔다.
고이대왕이 대군을 이끌기 위해 궁궐 문을 나선 때가 그해 4월이니, 6월에 이미 대방군 공략은 완료된 겁니다.
근데 이때의 대방태수는 유흔이어야 하는데 유하로 바꼈습니다.
삼국지 한전 → 유흔
삼국지 왜전 → 유하
이는 둘 중에 하나가 기록상 착오가 아닐까 합니다.
한자명이 다른 걸로 보아 같은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건 어떤 것이 맞는지 추정 가능합니다.
삼국지 왜전의 내용이 자세하기에 초대 대방태수는 유하입니다.
난승미 일행이 지나간 경로 추정
한반도의 중간 도착지점: 구야한국(김해) → 신운신국(나주·광주) → 비미국(전주) → 비리국(천안) → 대방군 대방현

이때는 이미 해수면 하강 후라서 포구여야 할 각 도착지점들이 육지가 되어 있습니다.
비록 그렇다 해도 알아서 잘 갔으니까 마침내 대방태수를 만났다고 봅니다.
삼국지 왜전에 보면 그후로도 대방군에서 열도 왜로 서로 오고가고 합니다.
즉 이는 중간 도착지점들의 포구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단 얘깁니다.
이들은 비미호가 보낸 공식 사신단으로 단순히 조공하러 보낸 게 아닙니다.
- 대방군이 조위의 영토가 되자마자 때에 맞춰 조공 사신단을 보냄
- 이왕 사신이 가는 김에 상인들도 합류함
- 고이가 구수의 후손이 아님을 알려 이를 명분 삼아 압박함
- 조위 황제의 권위로 구노국을 압박함
조위의 초대 대방태수 유하로서는 처음 맞는 대규모의 외국 사신이기에 접대를 소홀히 하진 않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바다 멀리 섬나라에 사는 사신단이 조공을 받치러 온 것을 문제없이 잘 마무리하면 자신의 공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문제가 생기면 최소 황제의 질타를 받아야 합니다.(문제가 크면 태수 자리에서 물러나야 함)
비미호의 대규모 사신단 - 정사 난승미, 차사 도시우리, 노비 10명, 상인단, 호위병 약 백명
→ 중형 돛단배 군선 최소 3척 추정
- 선두 - 도시우리 + 호위병 50명
- 본선 - 난승미 + 노비 10명 + 호위병 50명
- 후미 - 상인단 + 자체 무장병(사병·용병)
근데 삼국지 왜전을 보면 황제 조예가 이들의 조공을 받고 아주 흡족해 하는 장문의 답신을 씁니다.
대체 조공의 내용이 뭐길래 그런 걸까요?
<삼국지 왜전>
그해 12월, 왜 여왕에게 조서를 내려 말했다.
친위왜왕 비미호에게 제조한다. 대방태수 유하가 관리를 보내 너희 대부 난승미와 차사 도시우리를 호송하게 했고 너희들이 받친 남자노비 4명, 여자노비 6명, 반포 2필 2장이 도착했다.
너는 아주 멀리 있으면서도 사자를 보내 조공하니 이것이 너의 충효로구나. 갸륵하도다. 이제 너를 친위왜왕으로 임명하고 금인, 자수를 내리고 장봉하여 대방태수에게 보내 네게 하사토록 한다.
~후략~
설마 반포 2필 2장을 받고 조예가 흡족한 건 아닐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비미호는 조예에게 사람들을 받칩니다.이게 인신공양, 인신매매와 뭐가 다를까 합니다.
만약 조예가 반포 2필 2장만 받았다면, 황제를 모독했다고 하여 사신을 처형했을 겁니다.
하지만 조예는 조공을 받고 비미호에게 친위왜왕을 내리고 난승미에게 솔선중랑장, 도시우리에게 솔선교위를 내립니다.
즉 이는 반포 2필 2장을 받아서 조예가 해피한게 아니라 남녀 노비들을 받아 해피한 겁니다.(해피 = happy)
<노비 - 위키백과>
노비(奴婢)는 한국의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 다른 사람이나 기관에 예속된 특수한 천민 계급을 가리킨다. 흔히 종이라고도 불렀으며, 노(奴)는 남자 종을, 비(婢)는 여자 종을 가리켰다. 남의 집이나 나라에 몸이 매여 대대로 천역에 종사하던 사람으로서, 관가에 예속된 이를 공노비(公奴婢), 개인에 예속된 이를 사노비(私奴婢)라고 했다. 주인집에 같이 사는 솔거노비(率居奴婢)와 주인집과 따로 사는 외거노비(外居奴婢)로 나눌 수 있는데, 외거노비는 주인과 따로 살면서 타 지역 또는 멀리 있는 주인의 땅을 관리하고 곡식과 쌀을 바쳤다.
이 남자노비 4명, 여자노비 6명은 단순히 청소, 빨래시키러 보낸 게 아닙니다.
이들은 어릴 때부터 전문적으로 교육받은 기쁨조인 겁니다.(악기와 가무에 능통)
이들의 나이는 대략 15 ~ 20세 전후로 추정됩니다.
남자노비는 20세 전후.
여자노비는 15세 전후.
10세 - 너무 어려 인지력 없음
20세 - 남자 나이로 성인
15세 - 여자 나이로 성인

<야요이 시대 - 나무위키>
야요이 시대(弥生時代やよいじだい)는 초기 일류어족 집단이 정치적 중심이 되었던 기원전 300년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의 시기를 의미한다. 이 시기 청동기와 철기가 동시에 유입되었다. 즉 일본의 청동기 시대이자 철기 시대이다.
전 글에서 일본의 청동기·철기가 동시에 유입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백제대왕, 금동관을 하사하다)
즉 辰(백제)에서 받은 종합선물셋트 때문입니다.
기원후 3세기면 서기 200년대이니 238년은 야요이 시대입니다.
또한 야마토 시대이기도 합니다.
↑ 이런 시대의 조몬인 남녀 15 ~ 20세 전후의 전문적으로 교육받은 기쁨조입니다.
238년 6월에 이들이 대방군에 도착하고, 그해 12월에 조예가 해피한 답신을 합니다.
즉 조예는 이때까지 건강했던 겁니다.
근데 그 다음 해인 239년 1월에 갑자기 죽습니다.(향년 35세)
<복상사 - 나무위키>
복상사(腹上死)는 직역하면 '배 위에서의 죽음'이라는 뜻으로, 성관계를 하다가 상대의 배 위에서 급사하는 것을 말한다. 주로 남성의 입장에서 사용하는 표현이긴 하지만 실제로 여성도 복상사 사례가 있으며 이 경우는 '복하사'라고도 불린다. 속어(俗語)로 쾌락사(快樂死), 극락사(極樂死), 애정사(愛情死), 방사사(房事死)로 부르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색풍(色風)'이라고 하여 섹스 중에 사망한 경우를 '상마풍(上馬風)', 성교 후 사망을 '하마풍(下馬風)'이라고 불렀다.
주로 남성이 많으나 여성의 사례가 없는 건 아니고, 사인은 심장마비, 뇌출혈이 대부분이다. 계절별로는 심혈관에 부담을 주는 겨울철에 가장 많이 일어나며, 전 연령대에서 복상사가 일어나지만 보통 발생하는 연령대는 약 50대다.
꼭 복상사가 아니라도 심혈관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사마의/일생 - 나무위키>
사마의가 눈물을 흘리며 천자의 병세에 관해 물으니 천자가 사마의의 손을 잡고 제왕(조방)을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뒷일을 맡기오. 죽으려는 것을 겨우 견뎠으니 내가 차마 죽지 못한 것은 그대를 기다린 것인데 이제 서로 만났으니 아무 여한이 없소이다.
이때 조예는 병상에 누워 겨우 말을 했으리라 봅니다.
즉 풍이 온 겁니다.
<중풍 - 위키백과>
중풍(中風, palsy)은 다양한 유형의 마비를 가리키는 의학 용어이며 뇌의 혈관이 막히거나 혈관이 터지는 질환이다. 흔히 한쪽 팔다리가 마비되거나 발음이 힘들거나, 의식 변화가 오지만 전부 그런 것은 아니다.
혈관이 막힌 것은 뇌경색, 터진 것은 뇌출혈이다.
선남선녀라고 했던가요?
비미호는 당시 열도 제일의 선남선녀, 즉 미남자 4명, 미녀 6명을 선발하여 조예에게 받칩니다.
조몬의 선남선녀를 자랑(?)할 겸 의도는 좋았습니다.
238년 당시 나이
비미호 - 80세 전후
조예 - 34세
선남들 4명 - 20세 전후
선녀들 6명 - 15세 전후
이 조몬의 선남선녀가 지금 기준으로 어느 정도인지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선남은 SMAP 정도 되겠고, 선녀는 아이돌 그룹 생각하면 됩니다.
남자애들은 잘 생긴거 같은데, 여자애들은 이쁘다기 보단 청순하다는 게 맞는거 같습니다.
(일본여자 하면 청순미 = 개구리상)
즉 일본인의 여자 얼굴 보는 관점은, 서양의 美보다는 동양의 청순미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좋게 말하면 청순미, 달리 말하면 백치미)
<백치미 - 나무위키>
지성미와는 반대되는 단어로 지능이 낮아 보이고 단순함을 지닌 사람이 풍기는 매력을 뜻한다. 주로 어딘가 세상에서 동떨어진 듯하고, 매우 느긋하며 한편으로는 바보스러울 정도로 천진난만한 인물을 표현할 때 자주 쓰인다.
즉 (선녀와는 관계없이) 동양의 백치미로서 일본 여자 연예인을 한 명 꼽으라면..?
제가 이 분을 모르지만 들었던 바에 따라, 이시하라 사토미 되겠습니다.
<이시하라 사토미 - 나무위키>
예명인 이시하라 사토미(石原いしはらさとみ)는 원석(原石)을 앞뒤로 바꾼 이시하라(石原いしはら)와 총명하고 아름답고 싶다는 소망을 담은 사토미(聡さと美み)를 합쳐서 만든 이름이라고 한다.
생긴 얼굴은 백치미 그 자체인데 총명하기까지 하면 매력녀 아닐까 합니다.
암튼 다시 돌아와, 조예가 이들 선남선녀를 보고 한눈에 반한 거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들을 만나고 한달 후에 죽다니요?
근데 조예가 죽은 후로도 그 증명은 계속 됩니다. ↓
물론 사마의가 얘기를 들어 이들의 존재를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죄가 없다는 것 또한 압니다.
사마의는 정확한 사람이라서 풀어줍니다.
풀어준다 해도 이들은 이미 황실의 소유라서 궁궐 밖으로 못 나갑니다.(황실의 소유 = 황제의 노비)
<조방 - 위키백과>
위 전폐제 조방(魏 前廢帝 曹芳, 232년 ~ 274년)은 중국 삼국시대 조위의 제3대 황제로, 자는 난경(蘭卿)이다. 소황제(少皇帝) 혹은 폐황제(廢皇帝)라고도 불리며, 폐위된 뒤에 제왕으로 강등당했고, 서진 건국 후 소릉공(邵陵公)으로 더욱 낮추어졌으며, 사후 시호는 여(厲)이다.
이때 조예의 다음 황제인 조방은 나이가 어려 이들과는 얼굴만 아는 사이입니다.
즉 이들은 조예 때 잠깐 화려하게 피었다가 지금은 청소, 빨래하는 신세로 전락한 겁니다.
10여년 후, 249년 고평릉 사변으로 사마사가 전권을 틀어쥡니다.
아버지 사마의가 노환으로 죽고 이제 사마사 세상이 온 겁니다.
사마사가 선남선녀를 가만 놔둘 리가 있나요?혹 사마사가 이들을 얻으려고 거병한 걸까요?
- 조예 - 204년생, 239년 겨울 죽음, 향년 35세
- 사마의 - 179년생, 251년 여름 죽음, 향년 72세
- 사마사 - 208년생, 255년 겨울 죽음, 향년 47세
고평릉 사변 2년 후, 사마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72세로 별세합니다.
그때가 여름 8월이니 노환으로 자연사한 듯 싶습니다.
(중달, 열심히 사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사마사는 아버지 있을 땐 숨죽이며 살다 이제 대숙청 합니다.
그리고 이들을 다시 불러들입니다.기회는 찬스다!
사마의가 죽은 251년
사마사 - 43세
선녀들 - 28세 전후
이때 선남들은 나이가 많아 은퇴시키고 선녀들만 부르는데, 28세 전후의 한창 나이입니다.선남은 사마사의 취향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마사 - 위키백과>
~전략~
정원 2년(255년), 진동대장군 관구검이 양주자사 문흠 등과 더불어, 황제 폐위에 대한 죄를 묻고자 태후의 명령을 칭하고 군사를 일으켰다. 사마사는 직접 출병하였다가 자신의 왼쪽 눈에 갑자기 큰 통증이 생겼고, 문흠을 추격하기 위해 파견한 자신의 군대를, 문흠의 아들인 문앙 혼자서 거의 전멸에 가깝게 격파하자 눈 위의 혹이 악화되어, 얼마 뒤 진중에서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나무위키에는 좀더 자세히 나옵니다.
<사마사 - 나무위키>
~전략~
1월 관구검과 문흠이 병사 6만을 이끌고 회수를 건너자 다른 이들은 여러 장수들을 보내 이를 격파하자고 하였으나 부하와 왕숙은 사마사에게 직접 출병하기를 건의하였다. 이즈음 사마사는 왼쪽 눈 위에 큰 혹이 생겨서 요양 중이었는데, 통증에도 불구하고 직접 보병과 기병 10만여 명을 이끌고 출병하여 계속 전장에서 지휘하였고 문흠을 추격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자신의 군대를 문흠의 아들인 문앙이 혼자서 거의 전멸에 가깝게 격파했다는 소식에 놀라 눈 위의 혹이 악화되었다. 이때 사마사는 도포(또는 이불)를 입에 물고 고통을 참으면서 지휘했는데 도포는 이빨 때문에 헤져 있었고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문앙의 활약으로 문흠군은 항성으로 퇴각하였고, 문흠이 패퇴했다는 것을 안 관구검이 회남으로 달아났으나 안풍진의 도위가 그를 추격하여 목을 베고 그 머리를 보냈다. 문흠은 오나라로 퇴각하였으며 이로써 회남에서의 반란이 진압되었다.
일설에는 관구검의 난을 진압하기 전에 혹을 도려내는 수술을 했는데 그 후 문앙의 공격에 놀라 눈이 튀어나왔다고 한다. 결국 사마사는 얼마 뒤 진중에서 허창으로 돌아와 윤달 1월 29일(위서 삼소제기), 혹은 윤달 1월 28일(자치통감, 경제기)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준평릉에 안장되었다.
이 사마사의 죽음도 역사의 진실을 숨기고 날조한 경우입니다.
즉 쿠데타 세력이 그 수장의 떳떳치 못한 죽음을 날조한 겁니다.
<날조>
문앙의 공격에 놀라 눈이 튀어나왔다
그래서 죽었다
<진실>
(조조처럼) 진중에 여자들을 데리고 다니다가 복상사로 죽었다
즉 이때도 조예의 경우처럼 겨울에 심혈관 문제로 죽은 겁니다.
심혈관 문제 + 선녀들 6명 = 급사
위에 언급했듯 복상사가 아니라도 춘약, 미약이라는 걸 먹고 심장사 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춘약 - 나무위키>
춘약(春藥, aphrodisiac) 또는 미약(媚藥), 음약(淫藥), 최음제(催淫劑)는 음란함을 재촉하거나 성욕을 일으킨다고 알려진 약물이다. 그 기전에 따라서는 마약의 범주에 속하기도 한다.
고대부터 별별 약이 사용되고, 과다복용으로 정신적인 문제가 생기거나 죽은 사례도 심심찮게 있는 걸로 봐서 인간의 성욕이 끝없음을 입증하고 있다.
과거 한약재인 음양곽(삼지구엽초)은 춘약 내지는 정력제로서 사용됐고 현대에도 그런 용도로 쓰인다.
<춘약 - 위키백과>
역사적으로 고대 이집트, 그리스, 로마, 중국, 인도 등 전 세계의 많은 문화권에서 성적 욕망이나 정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다양한 천연 물질을 사용해왔다.
이 춘약을 과다복용하고 복상사로 죽은 한나라 성제가 유명합니다.
<성제(전한) - 나무위키>
~전략~
결국 성제는 합덕의 침실에서 옷을 갈아입다 쓰러져 붕어하게 된다. 평소 건강하고 질병도 없었으므로 그의 죽음을 놓고 말이 많았다. 조합덕이 준 미약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전한 성제 - 위키백과>
~전략~
그런데 어느 날 성제가 조합덕의 침상에서 급사하였고, 성제의 죽음에 많은 의문이 있었는데 의심이 조씨 자매를 향하였다. 성제가 급사한지 얼마 되지않아 조합덕은 자살하였다.
<효성황후 조씨 - 나무위키>
성제는 조씨 자매에게 빠져 매일 같이 즐겼는데 결국 마흔이라는 빠른 나이에 코와 입이 비뚤어지고 백약이 무효할 정도로 몸이 망가지지만 죽기 직전까지 춘약을 동원해 합덕과 동침했다. 이후 합덕의 침실에서 옷을 갈아입다 쓰러져 붕어하게 된다. 성제는 생전 몸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음에도 매일같이 조합덕과 동침했으니 몸이 축나는 것도 당연한 것.
참고로 아틸라도 역시 복상사 했고, 진중에 여자들을 데리고 다니는 건 동서고금 막론하고 같습니다.
전시에 진중에서 생활하는 기간이 길기 때문입니다.(진중 = 군막)
그럼 사마소는?
<사마소 - 위키백과>
후에 후계자로 형에게 입양시킨 아들 사마유(司馬攸)를 자신을 이을 정권자로 지명하려고 했으나 가충의 반대로 사마염을 후계자로 지명하게 되는데, 사마염을 후계자로 지명할 땐 벌써 중풍을 맞고 쓰러져 겨우 손가락질을 할 수 있는 정도였다. 이에 사마소는 얼마 가지 못해 죽게 된다.
언제나 그렇듯 나무위키와는 자세함의 정도가 약간 다릅니다.
<사마소 - 나무위키>
~전략~
그런데 갑자기 265년 가을 8월 신묘일에 중풍으로 쓰러져 노침에서 죽으니, 당시 나이가 54세였다.
사마소도 중풍으로 죽었지만 팔복더위에 죽었고, 265년은 선녀들의 나이가 이미 마흔이 넘었습니다.(42세 전후)
그리고 사마소는 그 형 사마사와는 다른 인물이니 자연사한 경우라고 봅니다.
설마 사마소도 선녀들하고 놀다가 죽은 걸까요?
사마소 역시 쿠데타 세력의 수장이니 복상사를 중풍이라 둘러댄 걸까요?
265년 8월
사마소 - 중풍 복상사로 죽음, 향년 54세
선녀들 - 42세 전후
이쯤 되면 선녀님들이라고 해야 합니다.
이 역사적 흐름을, 고이대왕은 중원의 지배자들이 하나같이 비미호가 보낸 선녀님들하고 놀다 급사한 걸 듣습니다.
뭐지?
이때 고이는 왜 조예, 사마사, 사마소가 차례로 급사했는지 의아해 할듯 합니다.
참고로 이 복상사는 중국 역대 황제들이 명을 재촉하게 되는 주된 이유가 됩니다.(→ 그럴 때마다 역사가 바뀜)
이민족이 중원을 차지한 5호16국 시대, 5대10국 시대를 보면 특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냥 급사했다고만 나오지 사실여부는 기록에 적지 않습니다.(적는다 해도 둘러서 기록)
한 예로, 사실여부와는 관계없이 그냥 예입니다.
구한말 고종이 일제에 의해 독살 의혹이 있는데, 실은 복상사일 수도 있습니다.
일제가 준 춘약을 먹고 복상사로 죽은 걸 수도 있단 얘깁니다.
구한말 민감한 격동기에 일제가 고종을 독살하면 조선이 가만 있나요?
들고 일어나지 가만 있지 않습니다.
총책임자인 조선총독이 바보가 아닌 이상 말입니다.
즉 춘약 + 미인계를 쓰면 썼지 대놓고 독살이 아닌 겁니다.
서양엔 이런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세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서양은 이런 말이라도 있지만 동양은 그저 쉬쉬 합니다.
https://www.youtube.com/channel/UCXUNWHzvqruUqV0D_jw5c1A
삼국사 아카데미
삼한시대와 삼국 초중기 역사를 심층 분석, 탐구합니다. 삼국은 백제, 신라, 가야 입니다. 왜는 덤입니다.
www.youtub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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