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1. 23. 05:24ㆍ백제, 신라, 가야, 왜

고이대왕(재위 234 ~ 286년)
공손연 부자가 수백 기를 거느리고 포위망을 돌파, 동남쪽에 있는 평양성을 향해 말을 달립니다.
하지만 사마의가 심어놓은 복병에 걸려 붙잡혀 참수됩니다.
이때 수백 기만을 거느린 공손연 부자를 빨리 잡으려고 일부러 동남쪽의 포위를 풀어줍니다.
즉 포위군을 허술하게 보이게 한 겁니다.
사마의가 동남쪽 도주로에 복병을 둠은 물론입니다.
이는 관우의 번성 포위망과 비슷한 경우라 보면 됩니다.
이렇게 공손씨 요동 정권은 3대 50년 만에 멸망합니다.
전 글에서 사마의의 전략 1이 아래였다고 했습니다.
<사마의의 전략 1>
먼저 7만 대군에서 2만을 떼어 동래군을 접수한다.
선우사와 유흔에게 각기 군사를 나눠 낙랑군, 대방군을 바다 건너 공격케 한다.
선우사 - 1만 보병
유흔 - 1만 보병
여기서 사마의의 전략을 마저 보겠습니다.
<사마의의 전략 2>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낙랑군을 공략케 한다.
만약 고구려가 낙랑군을 접수하면, 선우사 1만 군이 공격하여 낙랑군을 접수한다.
<사마의의 전략 3>
辰에 사신을 보내 대방군을 공략케 한다.
만약 진이 대방군을 접수하면, 유흔 1만 군이 공격하여 대방군을 접수한다.

근데 동래군의 1만 수비군의 저항이 거세어 군사를 반 잃었다 했습니다.
지휘관들의 무능함도 한몫 했을 겁니다.
결국 동래군을 접수, 군선을 나눠 타고 각기 낙랑군과 대방군으로 향합니다.
선우사 - 낙랑 공격군 5천 (중형 돛단배 100척)
유흔 - 대방 공격군 5천 (중형 돛단배 100척)
이때 사마의에게 명 받은 기일에 맞출려면 일정이 빠듯했을 겁니다.
낙랑·대방 공격군 1만의 군사를 군선에 나눠 태워 동래군에서 낙랑·대방군까지 배 타고 갑니다.
산동반도 주변에 있는 모든 군선을 끌어모아 200여 척을 준비하는 데 시일이 걸립니다.
하지만 일단 황해를 도해하면 낙랑·대방군까지 약 5일이면 갑니다.(바람만 도와주면)
이는 옛부터 동래군에서 낙랑군으로의 바닷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한 무제의 조선 공략
- 후한 광무제의 낙랑 공략
- 상인들의 바닷길 등
근데 조위 조정에서 보내는 낙랑태수가 선우(鮮于)씨 입니다.
<삼국지 한전>
경초(景初 : 위 명제의 연호. 237-239) 연간에 명제(明帝) 사마의가 몰래 대방태수 유흔(劉昕)과 낙랑태수 선우사(鮮于嗣)를 보내 바다를 건너 두 군을 평정하였다.
<선우 (성씨) - 위키백과>
본관은 기자의 출신지인 태원(太原)이다. 태원은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산둥성 산서성 타이위안이다.
1930년 국세조사 당시 선우씨의 80%는 평안북도와 평안남도에 분포하고 있었으며 대규모의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태원의 자료를 찾다 멋진 사진이 있어 모셔와 봅니다.

사진에 보이는 성벽의 벽돌과 시멘트(역청)는 원나라 때 수입되어 명·청 시대에 본격적으로 축성한 재료입니다.
즉 벽돌은 본래 동양문화가 아닙니다.
위·진 시대에는 판축토성을 생각하면 됩니다.(판축토성 = 풍납토성과 같은 판축공법으로 만든 토성)
고대 중국 성이래 봤자 별거 없습니다.
<사상 최초로 밝히는 고대중국의 성(城)>
수·당 시대까지는 전부 판축토성으로 만든 성들이고, 석성은 고구려에서 나온 겁니다.
당 태종이 와서 고구려의 웅대한 석성을 보고 문화충격 받고 그렇게 탐이 나 계속 쳐들어 온 겁니다.(← 쳐들어온 이유 중 하나)
그렇기에 수 양제는 100만 대군이 와도 고구려 공략을 못하고, 당 태종도 수십만 대군이 여러 차례 쳐들어와도 공략 못했던 겁니다.(고구려는 내분으로 망함)
그와 같은 이유는 문헌자료엔 없으므로 여러 정황으로 추정해야 합니다.
그 하나의 증거가 윗 사진에서 보이는, 고구려의 고유 축성법인 치입니다.
즉 고구려 멸망 시, 고구려 장인들에게서 가져간 축성법인 겁니다.
수·당 시대까지 중국은 전부 판축토성이고, 고구려 장인들에게 전수받아 5대10국 시대부터 석성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보면 됩니다.
이는 백제의 건축술과 더불어 고대중국 Top 4 황제들이 한반도를 쳐들어온 주된 이유입니다.
고대중국 Top 5 황제들: 진 시황제, 한 무제, 후한 광무제, 수 양제, 당 태종
진 시황이 한반도에 관심없던 이유: 광대한 중국을 통일하여 너무 정신없어서.(← 귀엽죠?)
또한 고대에 황하는 홍수가 자주 범람합니다.
그걸 겨우 치수한 것이 순임금의 신하 우입니다.
치수를 못한 아버지 곤은 처벌받고, 그 아들인 우가 치수에 성공해 그 공적으로 임금에 올라 하나라를 창업합니다.
즉 풍부한 진흙을 가지고 중국은 고대부터 석성이 발달한 게 아니라 토성이 발달하고, 전부 판축토성인 것입니다.
반면 한반도는 화강암 지대라 돌이 많고 산이 많습니다.
그래서 석성이 발달하고 산성이 많은 이유입니다.(산성 = 석성)
즉 석성은 한반도의 고유 축성법인 것입니다.
시작부터 어마무시한 걸 까발렸나요?
<벽돌 - 나무위키>
중국에서는 화북 지역 건축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황하를 따라 쓸려온 막대한 양의 고운 흙이 풍부해 벽돌을 만들 재료가 풍족했지만 반대로 단단한 석재자원은 상대적으로 구하기 어려웠던 게 이유. 중국은 아프리카와 달리 불에 구워서 완성시켰다. 명나라 때 보수한 만리장성도 벽돌로 쌓은 것이다. 원래 만리장성은 흙을 단단하게 다져서 쌓아올린 판축토성이었다.
답 나오죠? 굵은 글씨. ↑
중국은 성(城)하면 만리장성인데, 이게 원래 판축토성이었다고 하면 다른 것들도 전부 판축토성인 겁니다.

출처: 태원고현성-한국어판
이게 원래 고구려가 안 망하고 존재했으면 그 모습이 고구려 성이나 마찬가지인 겁니다. ↑
건축물은 백제의 것이네요.
즉 성벽은 고구려, 건축물은 백제의 것이란 얘깁니다.
물론 시대가 시대인지라 건축미는 감안하고 봐야 합니다.
따라서 당시 양평성도 아래 사진 속의 벽돌성이 아닌 석성이어야 합니다.(→ 고증 오류)

다시 돌아와, 선우씨의 80%가 평안도에 분포하고 있다는 건, 그들이 조선의 왕검성 주변에 살았었다는 걸 의미합니다.(왕검성 = 평양성)
<기자의 후손>
기(箕), 한(韓), 선우(鮮于) 씨
그럼 조위 조정에서 보내는 낙랑태수 선우사가 漢인이 아닌 낙랑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토착 호족을 태수 자리에 준 겁니다.(토착민의 저항이 극심하기 때문)
한편 황해도를 대방군으로 만든 이는 공손강입니다.
<공손강 - 위키백과>
204년(건안 9년) 아버지가 죽어서 그 지위를 물려받았다.
날로 강성해지는 한과 예에 대항하여 낙랑군의 둔유현(屯有縣) 이남을 갈라 대방군을 신설하고 공손모(公孫模)와 장창(張敞)으로 하여금 한과 예를 쳐서 흩어졌던 유민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207년 원희, 원상 형제가 요서에서 조조에게 완전히 패하고 수천 명만 이끌고 의탁하러 왔다.
204 ~ 207년은 초고대왕의 재위 말년입니다.(재위 166 ~ 214년)
날로 강성해지는 한예란 곧 辰을 말함이고, 초고대왕의 시기입니다.
이때 공손강은 낙랑군 남쪽을 떼어 대방군을 신설합니다.
그 이유는?
낙랑군의 동북에 고구려가, 남쪽엔 진이 있어서 동북의 고구려는 낙랑군이, 남쪽의 진은 새로 대방군을 만들어 견제하려고 한 까닭인 겁니다.
또한 황무지였던 황해도가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이 된 시기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삼국지 한전>
(후한) 환제(桓帝), 영제(靈帝) 말기에는 한과 예과 강성하여 군, 현에서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다. 많은 백성들이 한국으로 유입되었다. 건안(建安 : 후한 헌제의 연호, 196-220) 연간에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屯有縣) 이남 황무지를 나누어 대방군(帶方郡)으로 만들었다. 공손모(公孫模), 장창(張敞) 등을 파견하여 한의 유민을 모아 군대를 일으키고 한과 예를 정벌하니 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왔다.
즉 이때 공손씨가 황해도를 개척했다는 얘깁니다.
그럼 공손씨가 망한 지금, 누가 먼저 대방군을 차지하느냐가 관건이 됐습니다.
<사마의의 전략 2>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낙랑군을 공략케 한다.
만약 고구려가 낙랑군을 접수하면, 선우사 1만 군이 공격하여 낙랑군을 접수한다.
<사마의의 전략 3>
辰에 사신을 보내 대방군을 공략케 한다.
만약 진이 대방군을 접수하면, 유흔 1만 군이 공격하여 대방군을 접수한다.
중국사료에서는 결국 낙랑·대방군이 이들에게 평정됐다고 나옵니다.
과연 그럴까요?
사마의가 대군을 이끌고 1년 안에 공손연을 토벌하겠다고 호언 합니다.
<사마의/일생 - 나무위키>
위 명제: 갔다가 돌아오는데 얼마나 걸리겠소?
사마의: 가는데 백일, 돌아오는데 백일, 공격하는데 백일이 걸리며 휴식하는데 60일을 잡으면 1년이면 족합니다.
양평성 함락이 8월이니 춘3월에 출군한 게 됩니다.(사마의 말에 의하면)
이때 고이대왕은 뭘 하고 있던 걸까요?
<고이>
5년(서기 238) 봄 정월, 하늘과 땅에 제사 지내는데 북과 피리를 사용하였다.
2월, 임금이 부산(釜山)에서 사냥하고 50일 만에 돌아왔다.
여름 4월, 궁궐 문 기둥에 벼락이 치더니 그 문에서 황룡이 날아 나왔다.
사마의가 대군을 일으켜 금년 중에 공손씨를 토벌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모양입니다.
봄 정월, 하늘과 땅에 제사 지내는데 북과 피리를 사용하였다.
1월에 날씨도 추운데 대방군을 잘 접수할 수 있게 천지에 제사 지냅니다.
사마의의 통수를 때리면 그 대군을 상대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2월, 임금이 부산(釜山)에서 사냥하고 50일 만에 돌아왔다.
2월엔 수만 대군의 군사훈련을 위해 사냥하고 50일 만에 돌아옵니다.
그래서 3월은 돌아온 달이라 기록이 없고 휴식합니다.
이 부산은 경기도 화성 부근입니다.
대방군을 접수하기 전에 한성 남쪽에 있는 부산으로 가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한 것입니다.
<신라 한주 - 삼국사기>
당은군(唐恩郡)은 원래 고구려의 당성군(唐城郡)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은 옛 이름으로 회복되었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거성현(車城縣)은 원래 고구려의 상[거(車)로도 쓴다.]홀현(上忽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용성현(龍城縣)이다. 진위현(振威縣)은 원래 고구려의 부산현(釜山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당은군 = 남양 = 경기도 화성
여름 4월, 궁궐 문 기둥에 벼락이 치더니 그 문에서 황룡이 날아 나왔다.
이제 4월에 친히 수만 대군을 이끌고 대방군을 접수하러 궁궐 문을 나섭니다.
그래서 고이대왕의 장대한 친정을 황룡으로 표현해 기록합니다.
여기서 용은 비가 내려야 나오니 벼락이 치는 건 당연한 겁니다.
그리고선 기록이 없습니다.
아마 5월 중에 공격해 대방군을 접수하지 않았을까 추정해 봅니다.
이때 선우사와 유흔은 동래군을 막 접수할 무렵입니다.
辰: 최소 3만 대군
대방군: 1만 수비군

<사상 최초로 밝히는 대방군과 그 속현들의 위치>
대방군은 낙랑군의 25현 중 동쪽은 동부도위 7개 현, 남쪽은 남부도위 7개 현, 나머지가 그대로 낙랑군 소속으로 11개 현입니다.
이에 대한 건 이미 전 글에서 밝혔습니다.(사상 최초로 밝히는 한군현의 위치)
11 + 7 + 7 = 합 25현
근데 학계에서는 이 대방군의 위치를 황해도로 추정만 할 뿐이지 근거를 대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위키백과에서는 대방군의 위치는 아예 나오지 않습니다. ↓
<대방군 - 위키백과>
대방은 원래 기원전 108년에 설치된 진번군의 현(縣)이었다. 진번군에는 15개 현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토착민들의 저항으로 인해 기원전 82년에 진번군이 폐지되면서 소속 15개 현 가운데 7개 현만 편입되고 나머지 8개 현은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낙랑군은 편입된 진번군 지역을 관할하기 위해 남부도위(南部都尉)를 설치하여 7개 현을 관할하게 하였다. 7개 현 가운데 하나가 대방현으로 남부도위의 중심지였다.
나무위키에서는 전북 남원으로 비정한 것을 다시 황해도 일대로 추정만 할 뿐입니다. ↓
(전북 남원으로 비정한 거 실화야?)
<대방군 - 나무위키>
대방군을 황해도 유역에 비정하는 행위는 조선역사편수회에서 만든 지도를 재탕하는 것이기 때문에 식민 사학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사실은 고려 ~ 조선 전기 때 대방군의 위치를 전북 남원으로 비정했다.
《삼국유사》등이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내용을 참고할 때 한(韓)의 기록에 적힌 내용이므로 둔유현(屯有縣)을 마한으로 인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사실 둔유현은 낙랑군에 속한 지역을 말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둔유현 이남에 존재했던 황무지의 위치는 낙랑의 남쪽, 즉 황해도 일대로 추정되어진다.
따라서 황해도 일대 = 대방군의 위치 비정은 식민 사학에 세뇌당한 사례이기보다는 오히려 잘못된 역사 인식을 극복한 사례로 추정된다.
이에 제가 대방군의 위치가 어디인지 밝히고, 그 7개 속현들의 위치도 밝혀 보겠습니다.(사상 최초)
<낙랑군 - 위키백과>
낙랑군의 소속 현은 시대에 따라 계속 변화하여 일정하지 않다. 《한서》에는 25개 현, 《후한서》에는 18개 현이 소속된 것으로 나타나며, 《진서》에는 낙랑군 소속으로 6개 현, 대방군 소속으로 7개 현이 기록되어 있다.
소속 현의 숫자는 시대와 사료마다 조금씩 변하지만, 토착민과의 먹고 먹히는 전쟁에서 그건 당연한 것으로 별로 중요치 않다고 봅니다. ↑
다만 대방군이 설치되면서 소명현에서 남신현으로 바뀝니다. ↓
즉 대방군이 설치되기 전에는 소명현이 있었지만, 설치되면서 소명현은 보이지 않고 남신현이 나타납니다.
<진번(眞番) - 나무위키>
명칭은《사기》(史記) <조선전>(朝鮮傳) 등에 보이는 진번국에서 유래했다.
치소는 잡현(霅縣)이었고 15개 현이 있었다. 하지만 낙랑군에 흡수된 이후 낙랑군 남부도위가 관리한 현이 소명(昭明)·대방(帶方)·함자(含資)·열구(列口)·장잠(長岑)·제해(提奚)·해명(海冥) 7개뿐이었던 것을 보면, 잡현을 포함한 나머지 8현은 귀속을 알 수 없지만 폐지된 걸로 보인다.
<진번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진번군은 한 무제의 군현 설치 이후 25년 만인 서기전 82년 낙랑군에 통합되었다. 서기전 75년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낙랑군에 통합되었던 진번군의 옛 땅 일부에 새로 낙랑군 남부도위(樂浪郡南部都尉)를 설치하고 소명(昭明) · 대방(帶方) · 함자(含資) · 열구(列口) · 장잠(長岑) · 제해(提奚) · 해명(海冥)의 7현을 관할하게 하는 동시에 소명현을 남부도위의 치소로 삼았다.
이렇게 소명현이 빠지고 대신 남신현이 들어섭니다. ↓
<대방군 - 나무위키>
대방군은 낙랑군 남부도위의 소관이었던 대방현, 열구현, 남신현, 장잠현, 제해현, 함자현, 해명현의 7현을 관할하였고 치소는 대방현에 두었다. 현 황해 봉산군 문정면에 있는 당토성이 대방군의 치소로 추정된다.
<대방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방 · 열구(列口) · 남신(南新) · 장잠(長岑) · 제해(提奚) · 함자(含資) · 해명(海冥)
그 치소를 소명현에 있다고 하거나 대방현에 있다고 하며 견해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
암튼 소명현과 남신현에 대한 건, 토착민의 저항으로 인해 군현의 영역에 변동이 생긴 결과라고 봅니다.
즉 토착민이 소명현을 빼앗아 영토로 삼은 대신 중국 측에선 남신현으로 새로 설치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소명현이 마한의 신분고국이 아닐까 추정해 봅니다.(아래 설명)
그럼 대방군의 위치는?
황해도 입니다.

원본 출처: 황해도에 대해 알아보자.araboja - 유머/움짤/이슈 - 에펨코리아
황해도는 황주와 해주가 합쳐진 명칭입니다.
<황해도 - 위키백과>
황해도 (黃海道) : 조선시대의 8도 중 하나로서, 황주(黃州)와 해주(海州)의 두자(頭字)를 따서 만든 도칭(道稱). 바다 이름인 황해와 한자가 같으며 실제로 황해를 끼고 있지만, 도의 명칭과는 무관하다. 이는 조선시대와 대한제국, 국권피탈기에도 그 이름이 유지되었다.
그럼 황주와 해주가 원래부터 인구가 많은 읍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대방군의 7개 현 중 2개가 바로 황주와 해주란 뜻입니다.
나머지 5개 현은 어디일까요?
이를 알기 위해선 삼한 시대의 해수면이 높았을 때의 지도와 삼국사기 제35권 잡지 제4 지리 2 신라 한주(한산주)편을 참조해야 합니다.
즉 삼국사기에 그 답이 다 나와 있습니다.
하나씩 풀어보겠습니다.
참고로 한주는 통일신라의 9주 5소경에 보이는 행정구역 중 하나입니다. ↓

<신라 한주 - 삼국사기>
①토산군(兎山郡)은 원래 고구려의 오사함달현(烏斯含達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안협현(安峽縣)은 원래 고구려의 아진압현(阿珍押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삭읍현(朔邑縣)은 원래 고구려의 소읍두현(所邑豆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삭녕현(朔寧縣)이다. 이천현(伊川縣)은 원래 고구려의 이진매현(伊珍買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토산군 = 토산읍
②우봉군(牛峯郡)은 원래 고구려의 우잠군(牛岑郡)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임강현(臨江縣)은 원래 고구려의 장항현(獐項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장단현(長湍縣)은 원래 고구려의 장천성현(長淺城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임단현(臨端縣)은 원래 고구려의 마전천현(麻田淺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마전현(麻田縣)이다.
우봉군 = 금천군
③개성군(開城郡)은 원래 고구려의 동비홀(冬比忽)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하였다. 지금의 개성부(開城府)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덕수현(德水縣)은 원래 고구려의 덕물현(德勿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제11대 문종(文宗)시대에 그곳에 흥왕사(興王寺)라는 절을 세우고, 현의 소재지를 남쪽으로 옮겼다. 임진현(臨津縣)은 원래 고구려의 진림성(津臨城)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개성군 = 개성
영풍군(永豊郡)은 원래 고구려의 대곡군(大谷郡)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④평주(平州)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단계현(檀溪縣)은 원래 고구려의 수곡성현(水谷城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협계현(俠溪縣)이다. 진단현(鎭湍縣)은 원래 고구려의 십곡성현(十谷城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⑤곡주(谷州)이다.
평주= 평산
곡주 = 곡산
해고군(海臯郡)은 원래 고구려의 동삼[음(音)으로도 쓴다.]홀군(冬彡忽郡)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염주(鹽州)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구택현(雊澤縣) 하나이다. 구택현은 원래 고구려의 도랍현(刀臘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⑥백주(白州)이다.
염주 = 연안 = 연백 = 백주
폭지군(瀑池郡)은 원래 고구려의 내미홀군(內米忽郡)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⑦해주(海州)이다.
서암군(栖嵒郡)은 원래 고구려의 휴암군(鵂嵒郡)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⑧봉주(鳳州)이다.
봉주 = 봉산
오관군(五關郡)은 원래 고구려의 오곡군(五谷郡)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⑨동주(洞州)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장새현 하나이다. 장새현(獐塞縣)은 원래 고구려의 현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를 따랐다. 지금의 수안군(遂安郡)이다.
동주 = 서흥
취성군(取城郡)은 원래 고구려의 동홀(冬忽)로써 헌덕왕(憲德王)이 개칭하였다. 지금의 ⑩황주(黃州)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토산현(土山縣)은 원래 고구려의 식달(息達)로써 헌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당악현(唐嶽縣)은 원래 고구려의 가화압(加火押)으로써 헌덕왕이 현을 설치하고 개칭하였다. 지금의 중화현(中和縣)이다. 송현현(松峴縣)은 원래 고구려의 부사파의현(夫斯波衣縣)으로써 헌덕왕이 개칭하였다. 지금은 중화현에 속한다.
우봉이 금천이고, 백주가 연백, 동주가 서흥이란 건, 구글링하면 다 나옵니다.
예: '우봉 지명' 검색, '백주 지명' 검색

그럼 이 10개의 지명 중에서 어디가 대방군의 속현인지 보겠습니다.
그전에 위 지도를 보면 이상한 게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오늘날 평양과 개성을 잇는 고속도로에 6개의 읍이 줄지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개성시 포함)
우연의 일치인가요?

우연이 아니라면 이건 무얼 뜻하느냐?
낙랑군 남부도위 설치 당시의 개척순서를 알 수가 있는 겁니다.
낙랑군 남부도위 = 대방군 설치 전의 행정체제, 즉 대방군의 전신
원래 대방군은 황무지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이는 한국측 사료와 중국측 사료 모두에서 확인됩니다.
<온조>
37년(서기 19) 여름 4월, 가뭄이 들었는데, 6월이 되어서야 비가 왔다. 한수의 동북 마을에 흉년이 들어 민가 1천여 호가 고구려로 도망가니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사이가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삼국지 한전>
(후한) 환제(桓帝), 영제(靈帝) 말기에는 한과 예과 강성하여 군, 현에서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다. 많은 백성들이 한국으로 유입되었다. 건안(建安 : 후한 헌제의 연호, 196-220) 연간에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屯有縣) 이남 황무지를 나누어 대방군(帶方郡)으로 만들었다. 공손모(公孫模), 장창(張敞) 등을 파견하여 한의 유민을 모아 군대를 일으키고 한과 예를 정벌하니 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왔다.
즉 바닷물의 소금끼가 땅 속에 남아있는 늪지대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불모지란 얘깁니다.
이것이 약 200년이 지나면서 기후가 변하고 해수면이 낮아진, 후한 건안 연간에 비로소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됩니다.
그럼 평양에서 개성까지 개척한 순서는 아래 지도와 같습니다. ( ↓ 표시)

즉 낙랑군 남부도위의 속현들이 대부분 여기에 모여 있다는 뜻입니다.
근데 일제시대에 대방은 ⑧봉산으로 확인됐다 합니다. ↓
<봉산군 - 나무위키>
1911~12년 조사 당시 이곳의 당시 문정면 태봉리에서 대방태수 장무이(張撫夷)의 묘가 확인되었고 따라서 장무이의 묘에서 4km 남쪽 지탑리에 위치한 토성인 '당토성(唐土城)'이 대방군의 치소었던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낙랑군 25개 현 전체가 나오는 건 한서 뿐입니다.(한서 = 전한서)
즉 원래 북에서 남으로의 기록순서가 바로 한서에 열거되어 있는 기록인 겁니다.(당시 오리지날 기록순서)
<낙랑군 - 위키백과>
낙랑군의 소속 현은 시대에 따라 계속 변화하여 일정하지 않다. 《한서》에는 25개 현, 《후한서》에는 18개 현이 소속된 것으로 나타나며, 《진서》에는 낙랑군 소속으로 6개 현, 대방군 소속으로 7개 현이 기록되어 있다.
한서에 있는 열거 순서: 둔유, 대방, 열구, 장잠, 해명, 소명, 제해, 함자
위에 삼국지 한전에서 둔유현 이남의 황무지를 나누어 대방군을 설치했다고 했습니다.
그럼 둔유현은 황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 다시 그 속현들의 순서를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즉 위에서 순서대로 짜맞추면 아래처럼 됩니다.

- 설명 -
제일 중요한 대방(帶方)은, 대방태수 장무이의 묘가 이미 발견됐으니 봉산이 대방입니다.
그 다음의 열구(列口)는, 줄지은 읍들로 들어가는 입구이니 열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장잠(長岑)은, 평산과 곡산이 모두 한 군(영풍군)에 속한 현으로 큰 산이 붙어있고, 명칭부터가 모두 산이니 이곳이 장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 봉우리 잠(岑)
해명(海冥)은, 예성강을 통해 바다로 들어가니 바다 해(海)를 붙인 것으로 보입니다. ↓
<금천군 - 나무위키>
군의 서부 중앙을 례성강이 배천군과 개성시 개풍구역 앞바다로 흘러 뱃길운항도 가능하다.
소명(昭明)은, 개성(開城)의 열다, 즉 (상업적으로) 辰과의 관계를 여는 관문, 그래서 밝은 곳이란 명칭을 붙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제해(提奚)는 연안입니다.(연안 = 연백)
<연백군 - 나무위키>
황해도 동남부에 있던 군(郡). 면적은 약 935.6㎢. 광복 당시 1읍 19면으로 되어 있었으며, 군청은 연안읍 연성리에 있었다. 1944년 당시 인구가 20만 명이 넘을 정도로 큰 군이었다.
한국 3대 평야 중 하나인 연백평야가 이 군뿐만 아니라 이웃 벽성군의 동쪽까지 펼쳐져 있다. 따라서 이 지방의 특산물로는 쌀이 있으며, 바다에서는 조기·새우, 땅에서는 토탄(土炭)이 있다.
마지막 함자(含資)는 해주로 추정됩니다.
그 이유는 함자현이 항구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삼국지 한전>
~전략~
착은 호래를 데리고 출발하여 함자현(含資縣)으로 갔다. 함자현에서 (낙랑)군에 연락하니, 군에서 착을 통역으로 삼아 금중(芩中)으로부터 큰 배를 타고 진한에 들어가 호래 등을 데려갔다.
~후략~
<해주시 - 나무위키>
남쪽으로 황해에 맞닿아 용당반도가 돌출해 있어 부동항인 해주항을 이루며, 옹진반도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수백 미터 떨어져 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⑩ 황주 = 둔유
⑧ 봉산 = 대방
⑨ 서흥 = 열구
④ 평산 = 장잠
② 금천 = 해명
③ 개성 = 소명
⑦ 연안 = 제해
⑥ 해주 = 함자
이렇게 한서의 열거 기록순서와 아다리가 딱 맞아 들어갑니다.
근데 왜 이렇게 줄지어 놓은 걸까요?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요?
그건 당시 중국에서 혼란기일 때마다 중국인들이 한반도로 대거 흘러들어 온 것과 관련있습니다.(→ 유민들)
즉 낙랑군 북부가 인구 포화상태이니 그 남쪽 황무지를 개발시키려고 이주시킨 것입니다. ↓
낙랑군 북부 = 평안도
낙랑군 남부 = 황해도

그럼 함자는 왜 동떨어져 있나?
이쪽 지역에 항구의 입지조건이 좋은 만이 있어 현을 설치한 겁니다. ↓
(이쪽 지역 = 낙랑군 최남부 = 대방현 남쪽 = 현 황해남도)

그럼 제해는 뭐냐?
제해도 해수면 하강 전에는 얕은 바다로 항구였지만 큰 배는 드나들 수 없습니다.(좌초의 우려때문에)
마침 해수면 하강으로 인해 드넓은 평야가 됐습니다.(김해평야처럼)
그래서 항구일 땐 해산물이 풍부했고, 평야일 땐 개척해서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이 된 겁니다. ↓
(약 200년의 기간)

즉 당시 '황해도에 대한 지도'가 있기에 이렇게 행정구역을 설치할 수 있던 겁니다.(당시 = 한 무제 때 최초의 한사군 설치)
그 말인즉슨 종이가 나오기 전에 이미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도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럼 대방군을 설치할 때 소명은 없고 남신이 있는 이유는 뭐냐?
여기엔 아주 역동적인 역사가 전개된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원래 낙랑 남부도위가 설치될 때까지도 개성은 소명임을, 중국사료를 통해 확인하고 위에 이미 입증했습니다.(한서)
즉 전한의 한 무제(재위 기원전 141 ~ 기원전 87년)가 한반도 북부를 침략해 한사군을 처음 설치합니다.
그후 韓의 토착세력이 저항, 접수합니다.(세력이름 불명)
이때가 기원전 2세기 초입니다.(기원전 108년 위만조선 멸망)
그후 후한 광무제(재위 25 ~ 57년)가 44년에 다시 공격, 접수합니다.
그후 辰의 토착세력이 다시 접수, 신분고국을 설치 합니다.
이때가 1세기 중반입니다.
이걸 2세기 후반에 공손강(162년생 전후)이 이곳을 접수하고 대방군을 설치합니다.
이때 소명이 없어지고 새로 남신이 설치됩니다.
그리고 공손연이 망할 때 이걸 다시 辰이 공격, 접수합니다.
이때가 3세기 초중 무렵의 고이대왕 때입니다.(238년)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이자 제일 관심사인 부분입니다.
고이대왕이 남신을 접수할 무렵, 사마의가 보낸 유흔은 대방현을 공격, 접수합니다.
그후 신분고국이 기리영 공격, 대방태수 궁준 전사, 낙랑태수 유무가 신분고국 공격, 접수합니다.
이후 4세기에 이걸 고구려가 최종 접수하게 됨은 삼국사기를 통해 확인됩니다.
그럼 공손강이 소명을 남신으로 바꾼 이유는?
다시 '삼국사기 한주'편을 보면 개성군의 설명 바로 위에 송악군이 있습니다.
송악군(松岳郡)은 원래 고구려의 부소갑(扶蘇岬)으로써 효소왕(孝照王) 3년(서기 694)에 성을 쌓았고, 경덕왕이 송악군으로 개칭하였다. 우리 태조가 나라를 창건하자 왕도의 기내 지역이 되었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여비현(如羆縣)은 원래 고구려의 약두치현(若豆恥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송림현(松林縣)이다. 제4대 광종(光宗)이 그 곳에 불일사(佛日寺)라는 절을 창건하고 그 현의 소재지를 동북쪽으로 옮겼다. 강음현(江陰縣)은 원래 고구려의 굴압현(屈押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즉 송악과 개성이 따로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개성은 우리가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는데, 그럼 송악은 대체 어디냐?

위 고려시대 궁궐의 서북쪽에 송악산이 있습니다.
즉 개성의 서북쪽에 있는 곳이 송악인 겁니다.

이곳이 공손강이 새로 설치한 남신(南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구글 지도에서 보면 이곳은 현재의 황해도 개풍군입니다.
그럼 소명이 없어지고 지척에 새로 남신을 설치한 것은, 소명이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됐다는 뜻입니다.

이곳을 238년 4월에 고이대왕은 수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갔던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channel/UCXUNWHzvqruUqV0D_jw5c1A
삼국사 아카데미
삼한시대와 삼국 초중기 역사를 심층 분석, 탐구합니다. 삼국은 백제, 신라, 가야 입니다. 왜는 덤입니다.
www.youtub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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