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초로 밝히는 金신라의 역사 1

2026. 10. 4. 11:48ㆍ백제, 신라, 가야, 왜



사로국의 임금들 성씨가 박·석·김.
이중에서 김씨는 나중에 보기로 하고, 먼저 박씨와 석씨를 보면 이렇습니다.

박씨의 시조인 혁거세(재위 BC 57 ~ AD 4년)는 당시 한반도 중·남부를 호령하던 韓왕의 친족으로, 韓의 담로제로서 아기 혁거세를 사로국에 보냅니다.(眞혁거세 참고+아래 설명)

<혁거세>
시조의 성은 박씨, 이름은 혁거세(赫居世)이다. 전한(前漢) 효선제(孝宣帝) 오봉(五鳳) 원년 갑자(기원전 57) 4월 병진[정월 15일 이라고도 한다.]일에 왕위에 올랐다. 왕호는 거서간(居西干)이다. 이때의 나이는 열세 살이었으며 나라의 이름은 서라벌이었다.

BC 57 + 13 = BC 70년生

이 혁거세의 아버지는 누구냐?
1년 전의 글 眞혁거세(탄생설화를 사실로 풀다)에서 못 풀었던 그 비밀을 여기서 풉니다.

이때의 韓왕은 이렇습니다. ↓ (韓왕 = 마한왕)
청주 한씨 족보에 나오는 한왕 계보입니다.

원본 자료 출처: 마한왕 - 나무위키

노란색 네모의 韓 양왕, 섭

 

韓 7대 양왕이 재위 4년(BC 70년)에 낳은 아들이 바로 혁거세인 겁니다.
혁거세의 아버지 = 한섭 = 기섭
이에 따르면 박씨는 사실 그 뿌리가 한씨란 얘깁니다.

한섭의 아들 = 한혁거세
가명 혁거세 말고 본명이 있었을 걸로 추정합니다.
→ 韓x?

삼국사기에 의하면 박씨는 1대 혁거세부터 8대 아달라까지 이어집니다.
중간에 4대 석탈해는 제외.

원본 자료 출처: [스크랩] 신라의 역대왕 연대기

참고로 유리의 재위 년도는 24~27년이 아닌 24~57년임

 

근데 석씨를 보면 김씨 못지않게 아주 묘합니다.

석씨의 시조인 탈해에서 바로 아들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손자로 이어지는데, 재위 년도를 보면 나이가 안 맞습니다.

원본 자료 출처: [스크랩] 신라의 역대왕 연대기

참고로 벌휴의 재위 년도는 194~196년이 아닌 184~196년임
참고로 내해의 재위 년도는 195~237년이 아닌 196~230년임

 

탈해(재위 57 ~ 80년)
탈해 이사금(脫解尼師今)[토해(吐解)라고도 한다.]이 왕위에 올랐다. 이때 나이가 62세였다.

80-57=23+62= 향년 85세
아들과의 나이 차를 많이 잡아 30년으로 잡아도,
85-30=55세, 즉 탈해의 아들인 구추의 나이는 서기 80년에 55세.

그리고 구추가 아들을 다시 30세에 낳으면,
55-30=25, 즉 벌휴는 서기 80년에 25세가 됩니다.
그것도 30세에 아들을 낳았다는 가정입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벌휴는 서기 184년에 재위에 오릅니다.
184-80=104+25=129, 즉 서기 184년에 벌휴는 129세란 얘깁니다.
만약 20세에 아들을 낳으면 139세가 됩니다.

벌휴(재위 184년 ~ 196년)
벌휴 이사금(伐休尼師今)[또는 발휘(發暉)라고도 한다.]이 왕위에 올랐다. 성은 석(昔)씨로 탈해왕(脫解王)의 아들인 각간 구추(仇鄒)의 아들이다.

탈해와 벌휴 하나만 봐도 사실대로 기록한 건지 의문입니다.
즉 삼국사기의 신라왕 계보는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김씨의 시조 알지는 탈해 9년(서기 65년)에 처음 등장합니다.
그리고 역대 임금들의 김씨 왕비는 5대 파사부터 등장합니다.
근데 이상하게도 파사 이전의 역대 왕비들의 성씨는 무엇인지 나오지 않습니다.

알기 쉽게 계보를 볼까요?

원본 자료 출처: [스크랩] 신라의 역대왕 연대기


<사로국 초기 임금들의 부인>
혁거세: 알영 (성씨 모름, 토착인으로 추정)
남해: 운제=아루 (성씨 모름, 토착인으로 추정 )
유리: 왕비는 일지 갈문왕(日知葛文王)의 딸이다.[혹은 왕비의 성은 박씨이며, 허루왕(許婁王)의 딸이라고도 한다.]
→ 유리의 왕비는 성씨는 물론 이름도 없음. 역시 토착인으로 추정, 즉 일지(日知)는 토착 세력.
탈해: 왕비는 아효부인(阿孝夫人). 김씨의 시조 알지 등장
→ 아효부인의 성씨 모름, 탈해가 왜인으로 보아 역시 왜인 혹은 박씨 추정.
→ 박씨라면 누구의 딸이라고 나왔을 것이니 박씨는 아님
→ 그럼 남은 하나, 탈해의 부인은 왜인 즉 토착 세력임 (= 반도 조몬인)

삼국사기를 보니 아효부인의 정체가 남해의 큰딸로 나옵니다.

<남해>
5년(서기 8) 봄 정월, 임금이 탈해(脫解)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큰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 아효부인은 남해의 큰딸로 추정.

<참고>
반도 조몬인 = 고아시아인 = 한반도 중·남부 토착 원주민 = 남방 해양족 = 고대 일어 사용자

한마디로 알영, 아루, 일지 등은 모두 토착 세력, 즉 반도 조몬인으로 추정됩니다.
즉 이건 모두 예맥인과 토착인의 결합을 뜻합니다.

그리고 ↓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김씨 부인들이 등장
파사: 왕비는 김씨 사성부인(史省夫人)으로, 갈문왕 허루(許婁)의 딸이다.
지마: 왕비는 김씨 애례부인(愛禮夫人)으로 갈문왕 마제(摩帝)의 딸이다.

근데 일성부터 아달라는 이어짐이 묘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부인들이 김씨가 아닌 박씨입니다.
즉 역성쿠데타가 있던 걸로 보입니다.

일성: 유리왕(儒理王)의 맏아들이다.[혹은 일지(日知) 갈문왕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왕비 박씨는 지소례왕(支所禮王)의 딸이다.
아달라: 일성왕(逸聖王)의 맏아들이다, 키가 일곱 자이고 콧마루가 우뚝하여 기이한 모습이었다. 왕비는 박씨 내례부인(內禮夫人)으로 지마왕(祇摩王)의 딸이다.

원본 자료 출처: [스크랩] 신라의 역대왕 연대기


그리고 갑자기 박씨 아달라에서 석씨 벌휴로 이어집니다.
역시 역성쿠데타인 걸까요?

벌휴: 어머니의 성은 김씨로 지진내례부인(只珍內禮夫人)이다. 왕비는 등장 안함
내해: 벌휴왕(伐休王)의 손자이다. 어머니는 내례부인(內禮夫人)이고 왕비 석씨는 조분왕(助賁王)의 누이 동생이다.

이런 식인데, 이건 무얼 의미하느냐?
석씨는 탈해만 빼고 전부 김씨란 얘깁니다.

원본 자료 출처: [스크랩] 신라의 역대왕 연대기


즉 이게 사실이라면 구추와 구도는 모두 알지의 후손들이란 얘깁니다.
구추 계통의 후손들이 모종의 이유로 김씨라 하지않고 탈해의 뒤를 이어 석씨라고 한 겁니다.
(↑ 훗날 金신라의 날조?)

삼국사기에 의한 계보, 사실이 아닐 수 있음


이는 6대 지마를 끝으로 박씨는 절단났고, 일성과 아달라의 역성쿠데타 혼란기를 거쳐, 알지의 후손 중 일파인 구추 계통이 그 뒤를 이은 것이 벌휴입니다.

그러다 또다른 알지의 후손 중 일파인 구도 계통이 이은 것이 13대 미추입니다.
미추에 이어 조분의 아들인 유례가 다시 잇는데, 유례는 조분이 내음의 딸을 강간해 낳은 사생아로 보입니다.

<유례>
조분왕(助賁王)의 맏아들이다. 어머니 박씨는 갈문왕 내음(奈音)의 딸인데, 일찍이 밤길을 가다가 별빛이 입 안으로 들어와 그로 인하여 임신하게 되었다. 아이가 태어나던 날 저녁에 이상한 향기가 방 안에 가득하였다.

9대 벌휴부터 16대 흘해까지 계보를 보면 순탄치 않은 흐름을 보여줍니다.
즉 같은 친족끼리 피 비린내 나는 왕권 다툼을 벌인 겁니다.(← 개막장 드라마?)

근데 이 김씨 임금들의 특징은, 그 왕비들도 같은 김씨라는 겁니다.
즉 왕족끼리 근친혼을 합니다.

알다시피 근친혼을 하다보면 정상이 아닌 삐꾸가 나올 확률이 높습니다.(← 기형아)
삐꾸는 아니라도 약간의 저능아가 나오기도 합니다.(사상 최초로 밝히는 야마토의 마지막 오오키미(大君))

원본 자료 출처: [스크랩] 신라의 역대왕 연대기

삐꾸나 저능아→정상→ 삐꾸나 저능아→정상

 

그래서 법흥이 아들이 없고, 진평 이후로 아들이 없어 선덕과 진덕이 왕위를 잇습니다.
아들이 없다는 것이, 아들이 있어도 삐꾸나 저능아라서 폐기처분한 거겠죠.
즉 위 동그라미 친 곳 사이의 법흥과 진흥이 근친혼의 절정인 겁니다.

그 말인즉슨 법흥과 진흥의 성적 문란이 극에 이르렀단 얘깁니다.

그럼 김춘추까지 라는 가정하에, 9대 벌휴부터 29대 무열까지 이들은 근친혼을 합니다.
1세기 후반 ~ 7세기 중반, 약 450년 동안 근친혼 진행

과연 이들의 성의식은 어떠했을까요?
그걸 알 수 있는 사료가 있습니다.
화랑세기가 진본이라는 가정하에, 이들의 성의식은 문란함 그 자체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화랑세기의 찐 주인공인 미실의 시대적 배경이 법흥과 진흥입니다.

여기서 역사 유튜버 청화수님의 유튜브를 듣고 가실까요?

 

신라 미실의 진짜 정체는 무엇인가? - YouTube

 

역사 유튜버 청화수님의 유튜브

 

그리고 다른 분의 블로그에도 일부 소개가 나옵니다. ↓

 

사다함 이야기 : 네이버 블로그

사다함은 구리지와 금진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구리지는 법흥왕의 후궁이었던 벽화부인(초대 화랑 풍월주 위화랑의 누이)이 비량과 간통하여 낳은 자식이다. 벽화부인과 비량은 항상 측간에서 만났는데, 측간에서 임신을 하여 구린내가 난다고 하여 구리지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이름자체가 출생의 꼬리표이자 형벌이었다. 순탄치 않은 인생이 시작됨을 이름자체가 보여주고 있다.

구리지는 잘 생기고 능력있고 총명하며 야심있는 젊은이지만, 신분의 한계와 출생의 한계와 싸워야만 했을 것이다. 구리지는 위화랑과 오도부인(오도부인은 법흥왕의 후궁이었다고 위화랑과 불륜을 저지름) 사이에서 난 딸 금진의 호위무사였다가 끈질긴 구애끝에 결혼한다. 위화랑은 구리지의 외삼촌이기 때문에 구리지에게 금진은 외사촌이 된다. 그렇지만 금진의 어머니인 오도부인은 소지왕의 딸이기 때문에 신분의 차이는 컸다.

구리지는 확실한 군공을 세워 출세하고자 전쟁터에 갔다가 젊은 나이에 전사하고 만다.

구리지가 죽고 난 후 금진은 자유롭게 살았다. 구리지가 죽자 금진은 구리지의 심복이었던 설성을 남편으로 삼았다. 그런데 설성의 어머니는 또한 구리지의 첩이었다. 금진은 설성 이하 5명의 남자를 거느렸다고 한다. 또한 진흥왕(법흥왕의 조카이자 외손자이다. 즉 법흥왕의 딸이 삼촌과 결혼해서 낳은 아들이 진흥왕이다.)의 아버지인 입종 갈문왕과도 사통하여 아들인 숙흘종을 낳았다. 숙흘종의 딸이 김유신의 어머니인 만명부인이다. 또한 진흥왕과도 사통하여 난성공주를 낳았다.

사다함은 화랑 중에서 군계일학이었다. 아버지를 닮아서 잘 생기고, 총명하고, 인간적이며, 무리를 이끄는 리더십을 갖추었다. 12세부터 당대 최고의 검객 문노에게 사사하여 무예도 뛰어나으며, 포용력이 있는 거인의 풍모가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 덕분으로 모계인 소지왕계로 연결되기 때문에 아버지와 달리 가문의 한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사다함은 젊은 나이에 신분의 한을 품고 죽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후 문란한 삶으로 인하여 가슴에 상처를 안고 살았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에게 다정다감했지만 유독 설성에게는 모질게 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설성은 사다함이 총사령관으로 지휘한 대가야 정복전에서 사다함을 대신하여 죽었다.(죽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다함에게는 또다른 상처가 되었으리라.

첫사랑의 실패는 사다함의 내면에 또다른 상처였다. 사다함의 첫사랑이 바로 미실이었다. 10대의 선남선녀였던 두 사람은 정말로 좋아했다고 한다. 10대이니 그 사랑이야 천지분간으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을 쏳았으리라. 그런데 미실은 진흥왕 어머니 지소부인이 이사부(신라장군 이사부의 그 이사부)와의 사이에서 낳은 세종과 결혼시켜 버린다.

사다함이 대가야정복전에 나가기 전 미실은 다시 사다함에게 돌아온다. 미실이 세종과 결별하고 돌아온 것은 미실과 지소태후 사이의 알력때문이었다. 지소태후가 진흥왕의 왕비인 사도왕후를 폐하고 이사부와 자소태후의 딸이자 세종의 누이인 숙명공주(진흥왕과는 씨다른 동생일텐데....이거는 좀 너무 나간거 아닌가)를 제1왕비로 삼으려했는데 정치적 야심이 있었던 미실이 이를 방해했다. 미실의 할아버지(미실은 옥진과 박영실사이에서 태어난 묘도와 미진부의 딸이다. 옥진은 사다함의 어머니인 금진과 자매사이이다. 묘도와 사다함은 이종사촌 사이이니, 미실은 사다함 조카뻘이 되네...아 이 복잡한 개족보같으니라고) 박영실은 박혁거세 계통이다. 미실은 사도왕후의 조카뻘인데. 결국 신라 정치판에서 김씨와 박씨의 정치투쟁이 벌어진 것이다.

지소태후가 미실을 내치자 미실은 사다함에게 돌아왔다. 미실은 "부귀영화는 한때고 지아비는 무릇 사다함과 같아야 한다."며 사다함에게 돌아온 이유를 들었다. 그런데 사실 미실이 사다함에게 온 것은 정치적 책략이 깔린 것이었다. 지소태후에게 미실은 정치적 신호를 보낸 것이다. 박씨 계열과 사다함으로 대표되는 신흥세력인 위화랑 계열과 가야파가 연합하여 강력한 새로운 정치세력이 형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지소태후가 이에 굴복하자 미실은 사다함을 버리고 다시 세종에게 돌아가버린다.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야당당수 부인보다는 영부인을 택한 것이다. 정치적 책략과 음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다함이 받았을 상처는 컸을 것이다.

자신을 위해서 자신이 냉대했던 설성이 죽었다. 그리고 돌아와보니 영원한 사랑일 줄 알았던 미실을 자신을 이용해먹고 다시 떠났다. 자신의 어머니의 바람기는 그칠 줄 몰랐다. 자신과 절친한 친우인 무관랑을 유혹했다.. 무관랑은 금진과 궁성 안에서 사통하다가 들켜서 성벽을 넘어 달아나다 반월성 아래 해자에 떨어져 죽었다.

무관랑이 죽은 후 7일 만에 사다함도 자결했다. 삼국사기는 친구를 위해 따라죽은 친구사이의 우의를 이야기하지만, 화랑세기에서 전하는 사다함의 이야기는 훨씬 더 복잡하다. 고결한 인격을 가진 사다함이 겪은 내면의 상처들이 얽히고 설키면서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을 것이다.

시중에 여러 출판사에서 나왔으니 직접 화랑세기 번역본을 읽는게 가장 좋을 겁니다.

위의 충격적인 내용에 대한 얘기는 잠시 미뤄 두겠습니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내용이 이제 다음 편에 나옵니다.

충격적인 내용 = 화랑세기의 내용 = 다음 편의 내용
즉 화랑세기의 충격적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선 다음 편을 봐야 합니다.
다음 편 예고: 사상 최초로 밝히는 기자(箕子)의 8조법 feat. 삼황오제 시대의 개짓

화랑세기의 내용에 대해선 다음 편 이후로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그럼 다시 돌아와 마저 진행하겠습니다.

탈해 9년, 알지가 처음 등장하는 기록에 하필 춘3월에 금짝이란 것이 하나를 떠올리게 합니다.
즉 전 글의 혁거세, 수로, 비미호와 같은 상황이란 얘깁니다.(사상 최초로 밝히는 가라의 역사 1)

<탈해>
9년(서기 65) 봄 3월, 임금이 밤에 금성 서쪽 시림(始林)의 숲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날이 샐 무렵에 호공을 보내 살펴보도록 하니, 나뭇가지에 금빛이 나는 작은 궤짝이 걸려 있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이를 아뢰자, 임금은 사람을 보내 그 궤짝을 가져오게 하였다. 열어보자 그 속에는 어린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기이하고 뛰어났다.

금빛이 나는 작은 궤짝

 

사로국의 토착 조몬 세력 = 탈해, 호공 등
辰의 예맥인 = 혁거세, 알지 ← 辰왕이 보낸 친족·귀족 (정확히 말하면 혁거세는 韓왕이 보냄)

 

즉 소년 알지도 辰의 대왕이 보낸 친족인 겁니다.

이때의 辰왕은 다루대왕 38년(서기 65년)인데, 딱 중요한 38년이 삭제됐습니다.

<다루>
37년(서기 64) 임금이 병사를 보내어 신라의 와산성(蛙山城)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병사를 옮기어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하였다. 신라가 기병 2천 명을 일으켰는데, 이를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三十七年 王遣兵攻新羅蛙山城 不克 移兵攻狗壤城 新羅發騎兵二千 逆擊走之
38년 삭제
39년(서기 66), 와산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2백 명의 병사를 두어 지키게 하였으나, 얼마 후 신라에 빼앗겼다.

근데 말입니다.(← 김상중 버전)
서기 64년은 같은 기사라도 백제와 신라의 기록을 보면 한쪽이 날조된 흔적이 있습니다.

<탈해>
8년(서기 64) 가을 8월, 백제가 병사를 보내 와산성(蛙山城)을 공격하였다.
겨울 10월, 백제가 다시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하자 임금은 기병 2천 명을 보내 공격하여 물리쳤다.
八年秋八月 百濟遣兵 攻蛙山城 冬十月 又攻狗壤城 王遣騎二千 擊走之

다루대왕이 구양성을 공격하니 탈해가 기병 2천을 일으켜 반격, 이를 다루대왕이 패주시킨 걸로 보입니다.
하지만 탈해 8년에서는 사로국이 이를 물리친 걸로 나옵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에 이건 탈해 8년이 날조된 겁니다.
이는 다른 곳에서도 확인되는 바입니다.(초고 2년 & 아달라 14년)

즉 여기엔 공격측과 수비측이 뒤바껴 있습니다.
사관의 단순한 실수라고 보기엔 삼국사기의 특성상 맞지않습니다.
백제 사관이 A 기록 ← 백제사 원본
신라 사관이 B 기록 ← 신라사 원본

이게 삼국사기로 넘어오면서 이렇게 변신합니다.(← 날조)
백제측 기록 B
신라측 기록 A

다시 말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에 탈해 8년이 날조된 겁니다.

그럼 다시 계보를 보겠습니다.

원본 자료 출처: [스크랩] 신라의 역대왕 연대기


혁거세가 모종의 이유로 ㉮韓왕의 대노를 사 사지절단형을 당하고, 남해가 잇습니다.
한왕 = 마한왕 = 한반도의 국주(國主)

원본 자료 출처: 마한왕 - 나무위키

혁거세, 서기 4년 韓의 마지막 왕에 의해 사지절단형에 처해짐
마지막 왕 = 역사에서 지워진 이름 모를 韓왕

 

㉮그걸 어찌 알 수 있냐?
혁거세의 의문사는, 저는 이렇게 봅니다. ↓
어디까지나 당시 한반도 중·남부의 주인은 한왕이란 시각에서 본 겁니다.

<혁거세>
60년(서기 3) 가을 9월, 두 마리의 용이 금성 우물에 나타나더니, 폭풍우가 심하게 불고, 성의 남문에 벼락이 떨어졌다.
六十年 秋九月 二龍見於金城井中 暴雷雨 震城南門
용 한마리는 한왕이 보낸 친족 혹은 장군인즉, 대군을 이끌고 공격합니다.
다른 용은 혁거세인즉, 군대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가 요격합니다.

61년(서기 4) 봄 3월, 거서간이 돌아가셨다. 사릉(蛇陵)에 장사 지냈으니, 담암사(曇巖寺) 북쪽에 있다.
六十一年 春三月 居西干升遐 葬蛇陵 在曇巖寺北
결국 성의 남문이 열려 혁거세는 사로잡히고 사지절단형에 처해집니다.
이때 한왕은 사로국에 다음과 같이 처리하고, 그 파장으로 다음과 같은 사건이 발생합니다.

 

  1. 혁거세와 알영, 그 아들 둘이 함께 처형
  2. 한왕이 보낸 친족 혹은 장군이 사로국 통치
  3. 얼마 안가 쿠데타, 혁거세의 서장자가 추대받아 즉위
  4. 그가 바로 남해.

 

<남해>
그는 혁거세의 큰아들로서, 몸집이 장대하고 성품이 침착하였으며 지략이 많았다. 어머니는 알영부인(閼英夫人)이며, 왕비는 운제부인(雲帝夫人)이다.

어머니가 알영이라 한건 친모가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
알영이 남해의 친모일 확률은 낮고, 서모일 확률은 높습니다.

혁거세가 귀족을 넘어 왕족이고, 일국의 시조인 이상 부인이 꼴랑 한명 뿐임은 아닐 겁니다.
더구나 알영의 외모가 훌륭하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혁거세가 첩을 여러 명 두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알영이 선녀가 아닐 확률 = 높음

그렇기에 삼국사기에 태자라고 써있지 않으니 저는 서장자라고 한 겁니다.

<혁거세가 사지절단형을 받을 때>
알영: 정부인, 참수
특: 적장자, 참수 (사료엔 없고 박씨 족보에 보임)
민: 적자, 참수 (사료엔 없고 박씨 족보에 보임)
남해: 서장자, 무당의 신분으로 사형 면함
아로공주: 장녀, 무당의 신분으로 사형 면함
그외의 가족은 사형 면함

모든 박씨 족보에 특과 민이 있다는 건 실존 인물이여서라 봄.
이들이 부모와 함께 참수되었기에 훗날 그 역사를 지우고, 남해를 장자로 기록한 것임.

이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사료가 삼국사기 온조 34년에 나옵니다.

<온조>
34년(서기 16) 겨울 10월,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 웅거하여 배반하였다. 임금이 친히 병사 5천을 거느리고 가서 치니 주근이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그 시체의 허리를 베고 그의 처자도 죽였다.

역사는 반복한다고 했습니다.
이걸 혁거세의 상황과 대입하면 이렇습니다.

원 인물 대입 가능한 인물
온조 → 韓 마지막 왕 = 10대 ?왕
주근 → 혁거세
주근의 처자 → 알영과 두 아들


7대 양왕 섭 3년, 혁거세 출생 (기원전 70년)
~중략~
9대 계왕 정, 모종의 이유로 죽음 (기원전 17년)
10대 ?왕 이음
서기 4년, 혁거세 죽음 (향년 74세)

- 韓의 7대 양왕 3년에 혁거세가 태어났으니 양왕의 아들로 추정
- 9대 계왕이 모종의 이유로 죽고, 10대 ?왕에 항거하여 혁거세 모반
- 10대 ?왕, 군대 일으켜 쳐들어감
- 서기 4년에 혁거세 죽음
- 그리고 4년 후, 비류·온조가 韓 공격 (삼국사기 온조 26년)

다만 당시 혁거세의 나이가 70대 초중반으로 많으니 사지절단형에 처해졌을지가 의문입니다.
하지만 유학이 들어오기 전이니 나이 많아서 봐준다는 건 없을 겁니다.
고대: 법이 엄준함 → 그 본보기로 사지절단형에 처함

그렇다면 삼국사기 편자들이 왜 혁거세의 죽음을 그렇게 숨겼는가?
보다시피 혁거세가 韓의 10대 ?왕에 의해 죽었으니 이 韓이라는 존재와 10대 ?왕의 존재를 역사에서 지우기 위해서라고 봅니다.(하지만 이 한과 마지막 왕의 존재는 삼국사기 온조 26년 조에 나옴)

그럼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축소, 삭제, 날조를 해야만 했느냐?
그 답은 전 글 사상 최초로 밝히는 백제와 일본에 나옵니다.

한편, 혁거세의 죽음 전후에 낙랑이 쳐들어옵니다.

<남해>
원년(서기 4) 가을 7월, 낙랑(樂浪)의 병사가 와서 금성(金城)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임금이 가까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두 분의 성인이 세상을 떠나시고 내가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나 이는 잘못된 일이다. 조심스럽고 위태롭기가 마치 냇물을 건너는 것과 같다. 지금 이웃나라가 침범해오니, 이는 나에게 덕이 없는 탓이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이 낙랑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냐?
그 답은 다음 편 사상 최초로 밝히는 낙랑의 정체에 나옵니다.

즉 본문 중에 예고했던 것은 내용상 그 다음 편으로 미뤄집니다.

다음 편 예고: 사상 최초로 밝히는 낙랑의 정체
그 다음 편 예고: 사상 최초로 밝히는 기자(箕子)의 8조법 feat. 삼황오제 시대의 개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