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대왕 2(大백제를 세운 창업 여왕)

2025. 11. 9. 04:03백제, 신라, 가야, 왜

 

 

고이대왕(재위 234 ~ 286년)

 

그럼 고이대왕이 백제를 창업했다고 하면 백제의 건국이 고이대왕 때부터인가?

즉위: 234년

해씨 辰 → 구씨   (우씨) 백제
온조 → 구태(초고) → 고이

 

이건 고구려와 신라를 비교하면 어느 정도 답이 나옵니다.

고구려는 주몽이 부여에서 내려와 건국했는데, 6대 임금의 왕호가 태조대왕이랍니다.

 

<태조대>

태조대왕[혹은 국조왕(國祖王)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궁(宮)이다. 어렸을 때 이름은 어수(於漱)이며, 유리왕(琉璃王)의 아들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의 아들이다. 어머니 태후는 부여 사람이다. 모본왕이 돌아가셨을 때 태자가 못나고 어리석어 나라를 맡기에 부족하였으므로, 백성들이 궁을 환영하며 모본왕에 이어 임금으로 세웠다. 임금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떠서 볼 수 있었으며, 어려도 남들보다 재능이 뛰어났다. 그러나 이때의 나이가 7세였기 때문에 태후가 수렴청정 하였다.

 

역시 역성쿠데타가 의심스럽습니다.

왕호만으로 따지면 태조대왕이 고구려의 창업자가 됩니다.

즉위: 53년

구려국 → 고구려
주몽(추모): 해씨 → 궁(宮): 고씨

 

삼국사기에 따르면 주몽은 해모수(解慕漱)의 아들로 해씨입니다.

근데 고구려는 임금의 성이 고씨라 하고, 6대 임금의 왕호가 태조입니다.

즉 이 태조대왕의 성이 고씨로 추정됩니다.

 

신라는 임금의 성이 박, 석, 김으로, 김씨부터 세어본다면 김춘추, 즉 태종 무열왕이 신라를 창업한 것이 됩니다.

즉위: 654년

사로국 → 신라
(眞)혁거세 → 金춘추

 

이렇듯 삼국시대 당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왕통(혈통)은 그다지 중요치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고대)

중요한 건, 왕위에 올라 나라만 잘 이끌면 되는 겁니다.

여왕이라도 나라만 잘 다스리면 된다는 얘깁니다.(→ 고이대왕)

 

하지만 정작 중요한 백성들은?

 

고대로 갈수록 왕통 문제는 '그들만의 리그'이다.

백성들은 그저 먹고 살기 바쁘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다스림의 밑바탕엔 돈과 무력이 있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백성들은 먹고 살기 바쁘기 때문에 돈만 주면 누가 왕이 되든, 뭐가 되었든 다 합니다.

혹여 말을 안 들으면 무력으로 누르면 그만입니다.

 

비류가 전사하고 온조가 진왕이 됐을 때도, 구수가 죽고 고이가 여자로서 진왕이 됐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백성 중 누군가 불만이면 돈을 주고, 귀족 중 누군가 불만이면 무력으로 누르면 됩니다.(당근과 채찍)

하지만 대대로 왕후를 진모씨로 세움으로써 있던 불만도 무마됐습니다.

 

주몽이 연타발을 이어 구려국을 이었을 땐 모두가 주몽을 대환호했습니다.

하지만 성이 다른 궁이 왕이 됐을 땐 돈과 무력으로 해결했습니다.

백성들이 7세의 궁을 환영한 이유는, 이들에게 돈을 뿌렸기 때문이며 태후가 수렴청정할 수 있던 이유는 그 집단이 무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궁을 환영하며 모본왕에 이어 임금으로 세웠다. 임금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떠서 볼 수 있었으며, 어려도 남들보다 재능이 뛰어났다. 그러나 이때의 나이가 7세였기 때문에 태후가 수렴청정 하였다.

 

혁거세가 갓난아기 때 사로국에 왔을 땐 백성들이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성이 다른 춘추가 임금이 됐을 땐 그 불만을 전쟁으로 해결했습니다.

그래서 구유신이 5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할 수 있었던 겁니다.(구유신 = 김유신)

 

이랬던 한반도의 역사가 고려시대에 유교관념이 들어와 원본에 손을 댑니다.(원본 = 구삼국사)

즉 삼국사를 새로 편찬한 것입니다.(→ 삼국사기)

 

삼국사기에는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는 내용이 종종 보입니다.

이는 고려시대에 유교관념을 갖고 사관이 가필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유교관념 상의 역사서 존재 의의는 후세에 임금에 대한 충의를 보이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고려, 조선)

 

하늘은 임금을 돕고, 임금은 만백성의 어버이지만 백성은 곧 하늘이다.

 

공자가 노나라의 역사서 '춘추'를 쓴 이유이기도 합니다. ↑

그래서 정통성이 중요하고 백성이 중요한 겁니다.

 

그럼 고려 중기에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유교관념으로 가필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후 김부식은 고려왕에게 삼국사기를 바칩니다.(고려왕 = 인종)

즉 삼국사기는 유교관념이 가필된 것으로, 상기했듯 원본의 내용과는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 새로 삼국사를 편찬한 이유임. ↑

고구려, 백제의 방대한 원본 사료 구삼국사 → 삼국사(삼국사기)
삼한·삼국 시대 → 통일신라 초기 → 고려 초기 → 고려 중기

 

이는 특히 왕위 계승문제에서 '제이자(第二子), 백성들의 추대' 등의 기록으로 나타납니다.

 

그럼 왜 삼국사기는 고이(백제), 태조대(고구려), 태종 무열(신라)부터 1대라 하지않고 온조, 주몽, 혁거세부터 1대라 한 건가?

이는 삼국사기가 편찬된 이유와 관련 있습니다.

 

편찬 이유: 유교관념을 넣어 새로 만들기 위해서.

 

↑ 그들이 시조라 하며 시조묘에 제사 지내는 기록들이 삼국 모두에 나옵니다.

하지만 정작 원본에는 '시조묘'라 나오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손을 안 댔다면)

 

고려 중기에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그들은 '시조'를 넣어 시조묘라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조상, 즉 삼국에는 시조가 있어야 하는 게 유학자들에겐 당연한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고려의 시조가 삼국이고, 삼국의 시조가 삼한이고, 고구려의 시조가 부여이듯이 그들에게 있어 삼국 임금들의 시조가 있어야 함은 당연한 겁니다.(성리학의 理氣론)

 

그외에 자신들 입장에서 불필요하다 싶은 것들은 삭제한 걸로 보입니다.

따라서 원본인 구삼국사는 원래 내용이 훨씬 풍부했다고 추정됩니다.(특히 초반부)

그걸 편찬자들이 유교관념을 갖고 만들다 보니 필요에 의해 삭제한 겁니다.

 

  1. 유교적 입장에서 그대로 두면 안되겠다 싶은 내용들 삭제
  2. 이를 무리하게 시조 설화로 각색, 제이자, 백성 등을 이용해 문맥 연결
  3. 최대한 간략하게 문장 작성하고 삼국사기 편찬

 

2, 3번 관련해서 그들은 삼국의 시조들에 대한 설명을 최대한 간략하게 설정하고 편찬합니다.

어차피 그들의 관심사와 편찬이유는 '시조들에 대한 것'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현재에 사는 우리에겐 중요)

시조들에 대한 것조차도 그들에겐 편찬이유의 한낱 도구일 뿐입니다.

 

즉 그들의 관심사와 편찬이유는 이것입니다. ↓

 

어떻게 하면 구삼국사를 최대한 유교적으로 재해석해서 다시 쓰고 재편집하느냐

그래서 고려왕조를 천대만대까지 후세에 유지하느냐

 

이랬던 고려가 내부에서는 무신들이, 외부에서는 외적이 침입해 무너집니다.(→ 무신정권, 몽골군)

참고로 당시 무신들은 한자를 모를 때입니다.(까막눈)

 

그래서 결국 구삼국사는 최소 2번에 걸쳐 축소, 삭제, 날조 됩니다.

 

  1. 통일신라 초기; 백제·왜와 관련된 기록들
  2. 고려 초기; 한사군·말갈에 관련된 기록들

 

↑ 모두 당시 군부에 의해서 주도됩니다.

각 시대마다 최종 결정자(문무왕과 태조 왕건)의 결제를 받음은 물론입니다.

 

이걸 고려 중기 김부식 이하 편찬자들은 유교적 잣대를 가지고 한번 더 수정을 가합니다.

그래서 백제는 원래 백제가 아니고, 고구려는 원래 고구려가 아니고, 신라는 원래 신라가 아닌 것에서 시작했음에도 현재 우리가 보는 삼국사기가 편찬된 겁니다.

 

辰 → 백제 : 비류·온조 집단이 진을 이음, 고이 때 백제 창업

구려국 고구려 : 연변 연길의 졸본은 구려국으로 (해)주몽이 이음, (고씨) 태조대왕 때 고구려 창업

사로국 신라 : 사로국은 辰의 일개 소국으로 진왕(혹은 마한의 호족)의 친족인 혁거세가 이음, 훗날 말갈 일파에 의해 金신라 창업

 

근데 삼국은 그렇다 쳐도, 그럼 韓과 辰의 역사는?

정작 우리 역사에서 제일 중요한 한과 진의 사료는 언제 사라진 걸까요?

 

설마 온조가 진을 이어받고 왕위에 오른 후, 한·진의 역사를 말살해버린 건 아닐 겁니다.

왜냐하면 온조 집단이 백성들의 지지를 받으려면, 진 왕가를 대우해야 자신들의 위치도 보장받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 것입니다.

이들을 잘 대우해도 기본적으로 돈을 뿌리고 무력으로 제압했음은 물론입니다.(위에 이미 설명했음)

 

<온조 비류>

26년(서기 8) 가을 7월, 임금이 말하였다.
“마한이 점점 약해지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나라가 오래 갈 수 없으리라. 혹시 다른 나라에게 병합되면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격이 될 것이니 뉘우쳐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남보다 먼저 마한을 손에 넣어 후환을 없애는 것이 좋겠다.”
겨울 10월, 임금이 사냥을 한다는 핑계로 병사를 내어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나라를 합병하였으나, 오직 원산(圓山)과 금현(錦峴) 두 성은 항복하지 않았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니 을 뿌리기 너무 좋습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 병합되기 전에 무력으로 먼저 선수를 치자는 것이 비류의 생각인 겁니다.

 

그럼 다시 돌아와 위 질문의 답은 하나입니다.

바로 고구려 장수왕 63년에 하남 한성이 함락됐을 때입니다.

 

<장수>

63년(서기 475) 9월, 임금이 병사 3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공하여 백제의 서울 한성(漢城)을 점령한 후, 백제의 왕 부여경(扶餘慶, 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천 명을 생포하여 돌아왔다.

 

이때 한·진의 모든 사료가 불에 탔을 겁니다.(기습이기에)

역대 왕들의 계보는 물론, 방대한 역사서가 한낱 재가 된 비극적인 날입니다.

 

그럼 전 글에 이어 돌아와 마저 글을 진행하겠습니다.

 

<구수>

16년(서기 229) 겨울 11월, 말갈이 우곡(牛谷)의 경계에 들어와 사람과 재물을 노략질하였다. 임금이 날쌘 병사 3백 명을 보내 막았으나 적의 복병이 협공을 하여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230년 기록삭제
18년(서기 231) 여름 4월, 밤알만한 우박이 떨어져 새들이 맞아서 죽었다.

232, 233년 기록삭제
21년(서기 234), 임금이 돌아가셨다.

 

229년 11월에 고구려의 복병으로 백제군이 대패합니다.

이는 우곡의 경계에서 노략질하면 백제군이 올 것을 노리고 매복한 것으로 보입니다.(유인계 + 매복계)

즉 고구려 측에 유능한 책사가 있던 겁니다.

 

이때 백제 측에선 책사가 이렇게 조언했을 겁니다.

"복병이 의심됩니다."

하지만 구수가 보낸 장수는 그 말을 듣지 않았던 듯 합니다.

 

근데 232년에서 233년까지 고구려와 백제의 삼국사기 양쪽 기록은 삭제되어 없습니다.
이건 백제의 기록을 축소, 삭제, 날조하는 신라·고려 사관의 특성상, 이 당시 백제·고구려 간의 전쟁에서 백제의 대승이 있어서 삭제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대략 이런 시나리오가 예상됩니다. ↓
 
229년 겨울 11월, 우곡에서 고구려의 복병으로 3천 정예병 대패
230년, 3만 대군 집결, 고구려로 1차 북진, 화려성 함락

동년 가을 7월, 고구려 국상 고우루 전사
231년 4월, 군, 고구려로 2차 진격
232년, 군, 고구려 도성 포위 (환도산성)
233년, 구수대왕 부상, 군 퇴각
234년, 구수대왕, 부상 후유증으로 죽음

 

원본 지도 출처: 원삼국 시대 - 위키백과

 

당시 고구려 주변엔 온통 적들로 에워싸여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고구려는 남하하여 무리수를 둔 걸까요?

이제 북쪽은 너무 추워졌기에 동해안을 따라 남하합니다.

 

이는 전 글에서 밝힌, 연변 → 함경도 → 강원도 → 경상도로의 이동방향과 일치합니다.(말갈의 대이동)

그 이유는 고구려의 서쪽엔 강력한 후한의 낙랑군이 있고, 그 남쪽엔 辰(백제)이 있기 때문입니다.

 

훗날 사로국까지 진출해 김씨가 임금이 되는 상황까지 갔고, 이들은 철기병으로 마저 임나가라를 공략, 병합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삼한일통까지 합니다.

고구려 철기병

출처: 고구려 조의선인 개마무사

 

<가야 멸망전 - 나무위키>

562년, 신라의 진흥왕이 장군 이사부, 사다함에게 명령해 가야를 공격, 반파국(대가야)을 정복하여 최종적으로 가야를 멸망시킨 전쟁. 이때 백제와 왜도 지원군을 파병했으나 신라군이 모두 무찔렀다.
이 전투의 결과로 전신인 변한으로부터 수백년간 한국 고대사의 일원이었던 가야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한반도에는 오직 고구려•백제•신라만이 남아 이후 삼국통일전쟁까지 이어지는 삼국시대 후반부 판도로 재편되었다.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관산성 전투와 함께 전성기를 맞은 6세기 신라의 대표적인 전쟁이다.
한때 가야 연맹의 최강국이었고, 거의 가장 마지막에 멸망한 반파국(대가야)의 멸망 과정에서는 상당히 큰 규모의 전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비교적 자세하지만 그 외 나머지 가야의 멸망 과정은 여러 사료를 찾아봐도 명확하지 않다. 그나마 멸망 과정이라도 있는 나라는 대가야를 제외하면 금관가야와 아라가야(안라국) 정도에 불과하며, 그 외 후기가야의 20여개 소국은 대부분 구체적 멸망 연도조차 미상일 정도로 문헌이 빈약하다.

 

<진흥>

23년(서기 562) 가을 9월,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이 이사부에게 명하여 토벌케 하였는데, 사다함(斯多含)이 부장(副將)이 되었다. 사다함은 5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달려갔다. 전단문(栴檀門)에 들어가 흰 기(旗)를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사부가 병사를 이끌고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이사부 - 삼국사기>

이사부(異斯夫)[혹은 태종(苔宗)이라고도 한다.]의 성은 씨이고, 내물왕(奈勿王)의 4세손이다.

 

<사다함 - 삼국사기>

사다함(斯多含)은 진골 계통으로 내밀왕(奈密王, 내물왕)의 7세손이요, 아버지는 급찬 구리지(仇梨知)이다.

 

이사부는 김태종이라고 나옵니다.

사다함은 내물의 7세손이라 합니다.

그럼 내물의 성이 뭔지 볼까요?

 

<내물>

내물 이사금(奈勿尼師今)[또는 나밀(那密)이라고도 한다.]이 왕위에 올랐다. 성은 씨로, 구도(仇道) 갈문왕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각간 말구(末仇)이다. 어머니는 씨 휴례부인(休禮夫人)이다. 왕비는 씨로 미추왕(味鄒王)의 딸이다. 흘해왕(訖解王)이 죽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내물이 왕위를 이었다.[말구와 미추 이사금은 형제이다.]

 

이들 모두가 김씨라고 합니다.

그럼 신라본기에 김씨 임금은 누가 최초일까요?

 

<미추 - 재위 262 ~ 284년>

미추 이사금(味鄒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또는 미조(味照)라고도 하였다.] 성은 씨이다.

그의 선조 알지(閼智)는 계림에서 태어났는데 탈해왕(脫解王)이 데려다가 궁중에서 길러 후에 대보(大輔)로 삼았다. 알지는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은 아도(阿道)를 낳았으며,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보(郁甫)를 낳았다. 그리고 욱보는 구도(仇道)를 낳았는데 구도가 곧 미추왕의 아버지이다. 첨해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미추를 임금으로 세웠다.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다스리는 시초가 된다.

미추의 앞뒤로는 김씨 임금이 아닙니다.

이 당시 사로국에 뭔가 큰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습니다.

(알려져선 안되기에) 그걸 또 대거 삭제했습니다.

이에 대한 건 전 글에서 몇번 언급했기에 여기선 넘어가겠습니다.(마립간은 고구려에서 내린 칭호다, 벌휴는 손자에게 살해되었다)

언젠가 신라편에서 집중분석할 날이 있을 겁니다.

 

다시 돌아와, 하지만 이들이 임나가라는 병합했어도 新彌多離는 공략하지 못했습니다.(新彌多離 = 彌摩那 = 침미다례)

그 이유는 일본서기에 나옵니다.

계체 6년(서기 512) 12월조 (장문이라 생략)

 

그리고 전글에서 이미 그 내용을 밝힌 바 있습니다.(초고대왕 2; 미마나의 뜻과 위치)

 

※ 사상 최초로 밝히는 임나가라와 관가의 뜻

 

● 任那: 전남과 경남의 경계 주위에 있는 소국들 지칭 (任那라 한 이유는 초고대왕 2 참고)

→ 사료에서 변한의 소국들을 뺀 나머지가 임나의 소국이라 보면 됨 (아래 그림 참조)

 

● 가라: 가라국을 중심으로 한 경남의 소국들 = 변한 = 변진 (가라국 = 금관가야)

 

<흠명 - 일본서기>

23년(562년) 봄 정월에 신라가 임나관가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어떤 책에서는 21년(559년)에 임나가 멸망하였다고 한다. 통틀어 말하면 임나인데, 개별적으로 말하면 가라국(加羅國), 안라국(安羅國), 사이기국(斯二岐國), 다라국(多羅國), 졸마국(卒麻國), 고차국(古嵯國), 자타국(子他國), 산반하국(散半下國), 걸손국(乞飡國), 임례국(稔禮國) 등 모두 열 나라이다.].

 

● 관가(官家, 미야케): 辰(백제)에서 열도 왜의 소국들 수장(임금)으로 보낸 마한의 소국을 지칭. 즉 열도 왜에서 부르는 명칭

예: 비미국의 비미호 → 비미국 = 관가

열도 왜의 소국들 = 삼국지 왜전에 나오는 야마토국(邪馬壹國)을 위시한 20여 개의 소국들(→ 담로국).

그외 80여개의 소국은 모두 조몬인의 소국들임.(합 100여개의 소국)

 

먼저 침 뱉으면 임자이기에 미리 여기에 씁니다. ↑

 

이건 장수왕의 한성 공략 때, 장수왕이 한 유명한 말이 그 증거입니다.

→ 백제는 (통째로) 왜의 관가이다.

즉 반대로 해석하면, 야마토는 백제의 담로국(후국)이란 뜻입니다.

또한 '백제는 왜의 부모형제의 나라이다'와 같은 뜻입니다.

 

여기 일본서기에서 말하는 왜는 야마토를 뜻함은 물론입니다.

邪馬壹國 = 왜(倭) = 大和 = 대왜(大倭) = 야마토

 

《일본서기》〈웅략기> 20년

20년(476년) 겨울에 고구려 왕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쳐서 없앴다. 그런데 몇몇의 남은 무리들이 창고 아래에 모여 있었다. 무기와 양식이 이미 다 떨어지고 근심하여 우는 소리가 매우 심하였다. 이때 고구려의 여러 장수들이 왕에게 "백제의 마음가짐이 범상치 않습니다. 신들이 볼 때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정신을 잃습니다. 다시 덩굴이 뻗어 자라듯 되살아날까 두렵습니다. 뒤쫓아 가서 제거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왕이 "그럴 수 없다. 과인이 듣기에 백제는 왜의 관가(官家)가 된 것이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또한 그 왕이 들어가서 천황을 섬긴 것은 사방에서 모두 다 안다."라고 말하니, 그만두었다.

 

즉 '부모형제의 나라'를 건드리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만약 이때 건드리면 열도 왜에서 들고 일어납니다.

백제 멸망 시, 노구를 이끌고 제명(사이메이) 천황 여왕이 수만 대군을 일으킨 것이 그 예입니다.

원본 지도 출처: 해수면 상승 시뮬레이션 - 옐로우의 세계

 

신라가 임나가라를 병합하고 그 여세를 몰아 新彌多離, 즉 彌摩那까지 공략하려고 했지만 백제에 의해 좌절됩니다.

만약 이때 미마나가 신라땅이 됐다면..?

지금 일본인들이 한국말 썼겠죠.(한국말 = 전라도 사투리)

 

한편 다시 돌아와, 이때 사로국은 뭐하고 있던 걸까요?

전 글에서 밝힌 바, 내해와 조분은 쿠데타 세력으로 추정됩니다.(벌휴는 손자에게 살해되었다)

즉 이들이 백제에 원군을 보낼 리는 만무합니다.

 

<내해>

35년(서기 230) 봄 3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조분>

원년(서기 230), 연충(連忠)을 이찬으로 삼아 군무와 정사를 맡겼다.
2년(서기 231) 가을 7월, 이찬 우로(于老)를 대장군으로 삼아 감문국(甘文國)을 토벌하여 격파하고, 그 땅을 군으로 삼았다.
3년(서기 232) 여름 4월, 왜인이 갑자기 쳐들어와 금성을 에워쌌다. 임금이 몸소 나가 싸우니 적이 흩어져 도망하였다. 날랜 기병을 보내어 그들을 추격하여 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4년(서기 233) 여름 5월, 왜의 병사가 동쪽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가을 7월, 이찬 우로가 왜인과 사도(沙道)에서 싸웠다.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질러 배를 불태우니, 적들이 물에 뛰어들어 모두 죽었다.

 

원군은 커녕 멋대로 감문국 토벌에다 왜와 한창 전쟁하느라 나름 바쁩니다.

이 왜는 배를 타고 온 '열도 왜'로 보입니다.

즉 진왕이 이들을 토벌하라고 명한 겁니다.(이들 = 쿠데타 세력)

 

그럼 후한의 낙랑군은 백제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가만히 보고만 있었냐?

평양성과 화려성은 그리 먼 거리가 아닙니다.

고구려와 이 낙랑군은 한 곳에 있을 수 없는 앙숙지간으로, 이때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협공했을 걸로 추정됩니다.

 

<당시 앙숙지간 관계>

고구려 ↔ 낙랑군

고구려 백제

 

적의 적은 뭐다?

나의 아군이다.

 

백제 ♡ 낙랑군

 

원본 지도 출처: 원삼국 시대 - 위키백과

 

이 낙랑군, 즉 한사군은 한 무제 때 처음으로 설치되어 그때부터 한반도 북부는 역동감 넘치는 전례없는 역사를 전개하고 있던 걸로 추정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역사를 알기 위해선 전한서, 후한서가 필수 입니다.

이왕 번역하는거 晉서, 구당서, 신당서까지 번역하면 좋습니다.

너무 방대해서 번역하기 힘들면 한반도 관련 자료들만 번역하면 됩니다.

사실 책으로 번역 안해도 구글링하면 다 나옵니다.

참고로 사마천 사기와 정사 삼국지는 완역돼 있습니다.

 

그래서 끝내 화려성을 함락하고, 2차로 辰·낙랑의 대군은 고구려 도성을 향해 진격, 환도성을 포위합니다.

하지만 고구려 특유의 성 건축법으로 만든 환도성은 산성이라 천혜의 요새로 난공불락, 이번 전투에 친히 참전한 구수대왕은 부상을 입게 됩니다.

 

이상이 삭제된 기록들의 내용이지 않을까 추정해 봅니다.

 

229년 겨울 11월, 우곡에서 고구려의 복병으로  3천 정예병 대패
230년, 辰 3만 대군 집결, 고구려로 1차 북진, 낙랑군과 합세하여 화려성 함락

동년 가을 7월, 고구려 국상 고우루 전사
231년 4월, ·낙랑 연합군, 고구려로 2차 진격
232년, ·낙랑 연합군, 고구려 도성 포위 (환도산성)
233년, 구수대왕 부상, ·낙랑 연합군 퇴각
234년, 구수대왕, 부상 후유증으로 죽음

 

중국 사료에는 이 당시 어떻게 기록돼 있을까요?

사실상 삼국지 한전과 삼국사기 밖에 사료가 없습니다.


<삼국지 한전>
 (후한) 환제(桓帝), 영제(靈帝) 말기에는 한과 예과 강성하여 군, 현에서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다. 많은 백성들이 한국으로 유입되었다.  건안(建安 : 후한 헌제의 연호, 196-220) 연간에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屯有縣) 이남 황무지를 나누어 대방군(帶方郡)으로 만들었다. 공손모(公孫模), 장창(張敞) 등을 파견하여 한의 유민을 모아 군대를 일으키고 한과 예를 정벌하니 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왔다. 이 뒤 왜와 한은 드디어 대방에 복속되었다. 경초(景初 : 위 명제의 연호. 237-239) 연간에 명제(明帝)가 몰래 대방태수 유흔(劉昕)과 낙랑태수 선우사(鮮于嗣)를 보내 바다를 건너 두 군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한국의 신지에게는 읍군의 인수(印綬)를 더해 주고 그 다음 사람에게는 읍장(邑長)을 주었다.

후한 환제 (재위 146 ~ 168년)  영제 (재위 168 ~ 189년) → 위 명제, 경초 (237~239년)
개루대왕 (재위 128 ~ 166년) → 초고대왕 (재위 166 ~ 214년) 초고대왕 (재위 166 ~ 214년) → 고이대왕 (재위 234 ~ 286년)

 

후한 환제와 영제의 시대는 초고대왕의 재위 기간과 겹칩니다.

이때 한예, 즉 辰이 강성했다고 합니다.

역시 초고대왕은 구태로, 저의 추정이 맞았던 겁니다.(초고대왕 1, 2)

 

반면 후한 말기는 환관 때문에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릅니다.(십상시의 난)

 

<십상시의 난 - 위키백과>

십상시의 난은 후한 189년 9월 22일(음력 8월 25일)에 십상시에 의해 발생하여 무려 2,000명에 달하는 환관과 사람들이 죽은 사건으로 동탁이 이 사건을 이용해 권력을 잡았으며, 권력을 휘두르던 대장군 하진이 죽었다.

 

이 십상시의 난은 황건적의 난과 더불어 중국 삼국시대를 연 배경이 됩니다.

 

그럼 辰(백제)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낙랑군의 상태는 2가지 예상이 나옵니다.

 

  1. 후한 중앙의 환관들 때문에 지방 관군이 힘을 못 씀.
  2. 辰(백제)과 동맹 맺고 함께 고구려를 공격함.

 

즉 1번 때문에 2번을 한 경우입니다.

그래서 삼국사기에서 辰·낙랑이 같이 고구려를 공격했기 때문에 이때의 기록이 삭제된 것입니다.

신라·고려 사관은 이걸 숨기고 싶었던 겁니다.

 

그후 건안(196 ~ 220년) 연간에 공손씨가 낙랑·대방군 접수, 경초(237 ~ 239년) 연간에 위 명제가 사마의를 보내 공손씨를 평정합니다.(위 명제 = 조조 손자)

그러다 사마염이 晉 건국(266년), 사마씨 팔왕의 난이 발생하여 낙랑군은 다시 관군이 힘을 못 씁니다.(사마염 = 사마의 손자)

 

정말 당시 중국은 막장의 막장 '끝까지 한번 가보자' 이건가요? ㅡㅡ;

 

<팔왕의 난 - 위키백과>

팔왕의 난(八王-亂)은 291년부터 306년까지 이어진 중국 서진의 내란으로, 서진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황실 내부의 권력 투쟁으로 발생하였으며, 팔왕의 난이라는 이름은 내란을 주동한 주요 황족 제후왕이 8명인 데서 유래하였다. 팔왕의 난이 초래한 계속된 혼란으로 인해 서진의 통치 기반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영가의 난으로 수도인 낙양이 이민족에게 함락되면서 서진이 멸망하였다.
이후 살아남은 황족 사마예가 강남에서 피신하여 나라를 다시 일으켰지만 과거 서진의 영토를 수복하지는 못하였으며, 화북지방에는 흉노 같은 이민족들이 세운 국가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였고 수나라에 의해 통일될 때까지 약 250년 이상 전란의 시대를 겪게 된다.

 

결국 이때 낙랑군과 현도군은 고구려가 접수하게 됩니다.

이는 미천왕(재위 300 ~ 331년) 때의 일입니다.(← 미천왕의 업적)

 

<미천>

3년(서기 302) 가을 9월, 임금이 병사 3만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공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
12년(서기 311)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요동의 서안평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14년(서기 313) 겨울 10월, 낙랑군을 침범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15년(서기 314) 가을 9월, 남쪽으로 대방군(帶方郡)을 침공하였다.

16년(서기 315) 봄 2월, 현도성을 침공하여 깨뜨렸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근데 낙랑군의 평양성은 247년 그러니까 66년 전에 이미 동천왕이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겼었습니다.

313 - 247 = 66년

 

<동천>

21년(서기 247) 봄 2월, 임금은 환도성이 병란을 겪어서 다시 도읍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평양성(平壤城)을 쌓아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의 집이었다. 어떤 기록에는 ‘임금이 왕검(王儉)에 도읍하였다.’라고도 한다.

 

즉 낙랑군이 고구려 땅이었는데 그새 또 중국이 접수했던 겁니다. ↓

 

경초(景初 : 위 명제의 연호. 237-239) 연간에 명제(明帝)가 몰래 대방태수 유흔(劉昕)과 낙랑태수 선우사(鮮于嗣)를 보내 바다를 건너 두 군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한국의 신지에게는 읍군의 인수(印綬)를 더해 주고 그 다음 사람에게는 읍장(邑長)을 주었다.

 

↑ 이때 위나라를 위해 고이대왕의 辰군이 원군을 보냈던 걸 알 수 있습니다.(아직 백제 창업 전)

즉 위·辰 연합군이 공손씨의 대방군과 낙랑군을 공격한 것입니다.

역시 이 내용은 고이대왕 조에 삭제되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때 고구려도 공손씨를 치기 위해 원군을 보냈습니다.  ↓

 

<동천>

12년(서기 238), 위나라 태위(太尉) 사마선왕(司馬宣王)이 무리를 이끌고 공손연(公孫淵)을 쳤다. 임금이 주부(主簿)와 대가(大加)를 보내 병사 천 명을 이끌고 그들을 돕게 하였다.
4년 삭제
16년(서기 242), 임금이 장수를 보내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하여 깨뜨렸다.

 

즉 사마의가 요동의 공손연을 칠 때, 고구려가 원군을 보냈는데 이때 고구려는 낙랑군 평양성을 접수했던 겁니다.

근데 병사 천명이라면, 평양성을 천명으로 기습해 접수한 걸로 추정됩니다.

 

이건 뭘 의미하느냐?

사마의가 요동을 칠 때, 고구려는 낙랑군을 접수하고, 고이대왕은 대방군을 접수했다는 뜻입니다.

근데 학계에선 지금까지 위 + 고구려 연합만 알았던 겁니다.

 

<공손연의 난 - 나무위키>

237년부터 238년까지 요동 공손씨 정권과 조위+고구려 연합군과의 전쟁.

 

<공손연의 난 - 위키백과>

공손연의 난 또는 요수 전투(遼隧之戰)는 237년 요동의 공손연이 연왕(燕王)을 자칭하며 위나라에 대항하자 이듬해 태위 사마의가 이를 토벌한 사건이다.

 

자세한 내용은 나무위키, 위키백과를 참고하세요.

 

이 공손씨 연나라의 도성이 양평성인데, 이는 유명한 요동성이라 합니다.

양평성 = 요동성

 

<요동성 - 나무위키>

고구려의 성으로 유명하지만, 고구려가 처음 지은 성은 아니었다. 고구려가 차지하기 이전에는 요동군의 치소가 있던 양평현(襄平縣)의 양평성(襄平城)이었으며, 이미 한나라 때부터 상당히 크고 견고한 요새가 축성되어 있었다.

 

<요동성 - 위키백과>

요동성(遼東城), 또는 양평성(襄平城)은 만주에 있었던 옛 성으로, 지금의 랴오닝성 랴오양시의 근방에 위치해 있었다. 역사적으로 연, 한, 위, 고구려, 당 등의 나라가 차지했다.

‘요동’은 ‘요하(遼河)의 동쪽’이란 뜻으로, 지금도 랴오둥반도(遼東半島)라는 이름에 남아 있다. 이 지역에는 고조선이 있었으나 기원전 3세기 연이 점령하면서 요동군이 설치되었다. 이 때 기록에 양평성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이후 진 · 한 등의 지배를 거쳤다.
요동성은 오래전 공손연의 조상인 공손도가 다스렸으며 이는 삼국지에 나와있다. 원소가 관도대전에서 패한 직후 조조의 침공을 받아 원소의 세력이 무너지자 원소의 아들 원상과 원희는 요동성으로 달려갔으나 요동성쪽에서 참수를 당하고 말았다.
238년 중국 삼국시대 공손연이 독립을 선언하여 위나라에 반기를 들자 위나라에서는 사마의가 출병하여 함락시키고 공손연을 참수했다.
이후 요동군은 4세기 전연 · 전진 · 후연이 지배하다가 385년(고국양왕 2년) 고구려에 점령되었다. 후한 때 양평성이라고 불렀던 성을 고구려에서는 요동성이라 불렀다.

원본 출처: 요동성 - 나무위키

다른 각도의 요동성. ↓

물색은 해자입니다.

원본 출처: 요동성 - 나무위키

 

그럼 이 양평성의 위치는?

원본 지도 출처: 고구려 - 나무위키

사상 최초로 밝히는 위 + 고구려 + 辰 연합군 vs 공손씨의 燕

 

이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조선·낙랑의 먹고 먹히는 과정은, 고구려 초중기 역사를 알려면 기본으로 알아야 합니다.

(조선 지역 = 낙랑 지역)

이제 낙랑의 주인은 누가 될 것이며, 이런 시국에 고이대왕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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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 아카데미

삼한시대와 삼국 초중기 역사를 심층 분석, 탐구합니다. 삼국은 백제, 신라, 가야 입니다. 왜는 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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