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0. 27. 00:55ㆍ백제, 신라, 가야, 왜

고이대왕(재위 234 ~ 286년)
드디어 대망의 고이대왕 편에 이르렀습니다.
지난 글 구수대왕에서 고이대왕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하고 끝맺었습니다.
그럼 고이대왕이 과연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 맞느냐?
이 고이대왕에 대한 것까지 풀면 백제사의 미스터리는 거의 전부 풀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미 부제에서 고이대왕이 여성이라는 걸 (사상 최초로) 밝혔으니 이에 대한 것부터 먼저 써보겠습니다.
- 대백제의 고이대왕은 여왕이다?
- 구수대왕을 이은 고이대왕은 역성 쿠데타인가?
- 고이대왕은 백제의 창업 군주인가? (비류의 후손?)
- 신분고국과 기리영의 위치
그전에 먼저 언급해둘 게 있습니다.
전 글에서도 썼지만, 역사는 수학이 아니기에 정답이 없습니다.
다만 전기차의 예를 들어, '누가 먼저 정답에 가깝게 퍼즐을 풀어내느냐'가 관건이라 했습니다.
지금까지 써온 글들에서 분석과 탐구를 통해 뒷글에선 오류의 수정, 다른 가설 등도 있다는 정도를 감안하시면 좋겠습니다.
즉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전 글 온조대왕 1에서 백제국와 우휴모탁국의 위치를 각각 인천과 철원으로 비정했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이걸 반대로 보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됩니다. 즉,
백제국: 철원 (철원일 수도 있고 인천일 수도 있음)
우휴모탁국: 인천 (인천일 수도 있고 철원일 수도 있음)

즉 비류·온조 집단이 처음 진왕에게 의탁 받은 땅이 우휴모탁국(미추성, 인천)이고, 그후 말갈을 방어하라고 보낸 동북 100리의 땅이 백제국(위례성, 철원)이란 얘깁니다.이게 여러모로 훨씬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고대사의 퍼즐을 맞추다 보면 분석·탐구하는 과정에서 견해, 주장, 생각 등이 뒤늦게라도 바뀔 수 있습니다.
역사는 수학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여기서 진한의 위치도 경북에서 강원도로 변경했습니다.
그동안 사료를 분석·탐구해보니 강원도가 진한이고, 이곳에 한군현이 내려와 있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이 한군현이 낙랑으로 나옵니다.
그럼 사로국 주변의 경북은 뭐냐?
전 글에서 밝힌 바, 경북엔 여러 소국들이 있었습니다.
감문국, 골벌국, 다벌국, 소문국 등이 그것입니다.
이들이 삼한에 속해있지 않다는 건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이에 대한 건 신라 편에서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그럼 고이대왕이 어떻게 해서 여성인가?
전 글에서 당시 한반도는 북방의 말갈이 남하해 내려오는 시기라 했습니다.(말갈의 대이동)
당장 비류·온조 집단이 주몽 집단에게서 갈라져 나온 말갈로, 이들은 모두 말갈어를 썼음은 물론입니다.
즉 현대 한국어의 언어적 직계 조상인 고대 한국어 입니다.
그럼 한국인이 아니고선 절대 알 수 없는 고이란 이름은, '곱다'의 파생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순우리말로 이름을 지은 경우란 얘깁니다.
예: 벼리, 슬기 등
고이대왕의 고이란 이름을 처음 봤을 때 뭔가 느낌이 온 건 저 뿐인가요?
다른 백제대왕들의 이름과는 사뭇 다른 느낌입니다.
어딘가 여성스러운 느낌인데, 업적은 또 창업군주이니 그래서 고이가 여성이란 걸 모두 생각치를 못 하는 겁니다.
우고이(優古尒).
이름이 참 이쁩니다.
외모는 둘째치고, 실제로 고이대왕은 당시 최고로 매력적인 여성이었을 걸로 추정됩니다.
우리는 당대의 매력녀 1호인 소서노가 누군지 알고 있습니다.
연변 연길의 호족인 연타발의 딸로, 기본적인 한문, 무술, 궁술, 기마 등의 능력녀임은 물론입니다.
즉 연소서노 입니다.
말이 호족이지 연타발은 그곳의 임금입니다.(추장 = 부족장 = 왕)
고이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위에 우고이라고 했듯이 성은 우씨입니다.
삼국사기 고이 27년, 28년 조에 동생 우수(優壽)를 내신좌평, 우두(優豆)를 내법좌평으로 삼습니다.
<고이>
27년(서기 260) 봄 3월, 임금의 동생 우수(優壽)를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28년(서기 261) 봄 2월, 진가(眞可)를 내두좌평으로 삼고, 우두(優豆)를 내법좌평으로 삼고, 고수(高壽)를 위사좌평으로 삼고, 곤노(昆奴)를 조정좌평으로 삼고, 유기(惟己)를 병관좌평으로 삼았다.
그럼 백제 우씨의 시조는?
온조의 해씨 辰을 실질적으로 창업한, 온조의 형인 비류입니다.(온조대왕 1, 2)
이 비류의 아버지는 우태(優台)로, 우비류의 후손들은 줄곧 백제국 혹은 우휴모탁국에 거주하고 있었던 겁니다.
즉 우고이는 왕족이란 얘깁니다.
이는 예를 들어, 오늘날 비류가 회사를 차린 사장인데 말년에 병으로 죽었습니다.
자식이 어려 동생인 온조가 사장을 이었고, 회사가 점점 커져 재벌이 되었습니다.
그럼 비류의 후손은 계열사를 맡은 경우라고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그럼 다시 돌아와, 고이가 여성이었다는 증거가 이름말고 다른 사료는 없나?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간접적인 증거는 있습니다.(나이)
<고이>
고이왕(古尒王)은 개루왕(蓋婁王)의 둘째 아들이다. 구수왕(仇首王)이 재위 21년에 죽고 맏아들 사반(沙伴)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나이가 어려 정사를 돌보지 못하므로, 초고왕(肖古王)의 친동생인 고이가 왕위에 올랐다.
古尒王 蓋婁王之第二子也 仇首王在位二十一年薨 長子沙伴嗣位 而幼少不能爲政 肖古王母弟古尒卽位
구수대왕이 죽고, 그 맏아들인 사반이 어려 고이가 왕위를 이었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에 제이자라 하는 임금들이 여럿 보이는데, 이는 친아들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위에 고이가 개루의 둘째 아들이고, 초고의 친동생이라고 합니다.
그럼 초고가 개루의 맏아들이란 얘기고, 구수의 맏아들인 사반이 나이가 어려 삼촌인 고이가 섭정도 아닌 왕위에 올랐다고 합니다.
전 글들에서 나이를 역산한 바 있으므로, 여기선 다시 역산하지 않고 참고하여 옮기겠습니다.
개루대왕: 온조의 후손, 해씨
39년(서기 166) 임금이 돌아가셨다.(향년 79세?)
초고대왕: 구파해의 후손, 구씨
13년(서기 196) 여름 4월, 궁궐 남쪽의 커다란 나무에 벼락이 쳤다. 또 금성의 동문에 벼락이 쳤다.
임금이 돌아가셨다.(향년 80세?)
구수대왕: 초고의 맏아들, 구씨
21년(서기 234), 임금이 돌아가셨다.
고이대왕: 비류의 후손, 우씨
53년(서기 286) 봄 정월,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
겨울 11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개루가 25세에 차남을 낳았다면, 고이는 87 + 25 = 112년생 전후가 됩니다.
그럼 고이의 재위가 234 ~ 286년으로, 234 - 112 = 122세 전후에 왕위를 이은 것이 됩니다.
그리고 재위 53년(286년)에 죽었으니, 286 - 112 = 174세 전후에 죽은 게 됩니다.
또한 초고 역시 개루의 아들이 아니기에 초고와 고이는 더욱 형제가 아닙니다.
그럼 이건 무얼 뜻하는가?
역성쿠데타 아니면 구수대왕(또는 사반)의 양위, 둘 중 하나란 얘깁니다.
삼국사기에는 사반의 양위를 직접적으로 보여줍니다.
사반(沙伴)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나이가 어려 정사를 돌보지 못하므로, 초고왕(肖古王)의 친동생인 고이가 왕위에 올랐다.
근데 234년에 구수가 전쟁 후유증으로 죽었다면, 병상에 누워있을 때 고이를 불러 왕위를 이으라 유언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반의 나이가 어려 말갈이 언제 재침할 지 모르는 전시 상황이기에 대의를 위해 마땅한 후계자를 정하고 죽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겁니다.
얼핏 삼국사기의 내용만 보면 고이가 역성쿠데타로 왕위를 이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고구려와의 전쟁 위기 속에 쿠데타라니요?
그건 아닌 것 같고, 그럼 양위했다고 봐야 합니다.
문제는 고이가 여성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여성이라도 비류의 후손으로서 왕위를 이을 자질이 충분하다면 고대에 문제될 것은 없다고 봅니다.
당장 당나라에도 측천무후, 훗날이지만 신라에도 3명의 여왕, 고대 일본에도 여성천황들이 있었습니다.
영국은 빅토리아 때 최성전기, 엘리자베스 1세 때는 셰익스피어, 스페인 무적함대 격파 등 대영제국으로 발돋움하는 시대였습니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여성들의 지위는 높았다고 함.
고이 조를 보면 오히려 辰에서 백제로 새로 창업한 여걸로 보입니다.
정통성에서도 어차피 비류가 창업한 나라이니 만큼 고이가 이어 즉위해도 문제될 건 없습니다.
오히려 늦은 감이 있습니다.
즉 辰의 진골입니다.(성골은 眞牟씨)
고이가 정통성은 물론 자질에서도 여걸이었다는 건 바로 나옵니다.
3년(서기 236) 겨울 10월, 임금이 서해의 큰 섬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손수 40마리의 사슴을 맞혔다.
비록 1, 2년은 삭제되었으나 왕위를 잇고 제일 처음 나오는 기록이 위 사냥 기록입니다.
이 한 기록으로 손수 40마리의 사슴을 맞혀 자질은 물론, 여걸로서의 증명은 차고도 넘칩니다.
재빠른 사슴들을 걸어 다니면서 맞춘 건 아니고, 준마를 타고 달리며 활을 쏘아 맞춘 거라고 봐야 합니다.
넷플릭스 킹덤 아신전에 여주인공이 명궁으로 나오는데, 고이도 역시 명궁인 겁니다.
사슴 40마리 잡을 정도면 명궁을 넘어 신궁 아냐?
고이가 여성이라 혹 있을지도 모르는 불만과 무시 등을 잠재우기 위해 사냥 가서 이런 기록을 남긴 것이라 해석됩니다.
말하자면 고이라는 여성캐릭터의 홍보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계획된 것이란 겁니다.
이 고이를 보좌하는 명신은 고이 조에 나오는데, 아래에 가서 설명하겠습니다.
이때 서해의 큰 섬은 강화도로 보입니다.
원나라 시대까지도 제주도엔 사슴이 많았다고 하는 걸 보아, 이 당시 강화도에 사슴이 많았던 겁니다.
(사슴 = 꽃사슴, 지구상에서 제일 이쁜 동물, 수많은 동물들이 살았던 3천리 우리 강산)

이 사슴들을 사냥하는 기록은 삼국사기에 많이 나옵니다.
<꽃사슴 - 나무위키>
한반도에 살던 아종은 대륙사슴이며, 2012년 7월 27일 대한민국 환경부에서 멸종위기 야생생물Ⅰ급으로 지정해 보호되고 있다. 과거 한반도 거의 전역에 널리 서식하였지만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남획되어 남한에선 절멸되었다고 보고 있다. 복원 사업도 진행했으나 좌초되었다.
저는 이 많은 사슴들의 멸종이 말갈의 대이동과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즉 조선시대 전에 이미 꽃사슴이 거의 멸종한 상태인 겁니다.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신령스러운 동물, 꽃사슴과 말입니다.
근데 일본 나라현에 사슴공원이 있습니다.
한반도 꽃사슴의 아종이라고 합니다.

저..저기 백제의 건..!
사슴 자료를 찾다 발견한 이 사진 속에 백제의 건축물이 있습니다.
백제 건축물의 특징: 웅장, 화려
위 건물은 처마 밑의 단청이 빛바래 없어진 듯.
화려한 단청을 입히면 엄청 아름다울 듯.
이것이 백제의 건축물입니다!
한편 이 강화도에는 유명한 고인돌이 있습니다.

즉 삼한시대에 강화도에는 이 고인돌을 만들 정도의 인구가 있었다는 얘깁니다.
대략 5천에서 1만 명은 되지 않았을까 추정합니다.(삼국지 한전, 역·스)
<삼국지 한전>
주호(州胡) 마한의 서쪽 바다 가운데 큰 섬에 있다. 그 사람들은 키가 조금 작고 말도 한(韓)과 같지 않다. 선비족처럼 머리를 삭발하고 오직 가죽옷을 입으며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옷은 위만 있고 아래는 없기 때문에 벗은 것과 같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에서 물건을 사고 판다.
학계에서는 이 주호를 제주도라고 하지만, 사료엔 뻔히 마한의 서쪽 바다라고 나옵니다.(기절초풍)
주호 = 강화도 입니다.
근데 이곳의 거주민이 왜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반도 왜인)
즉 한반도의 선주민인 겁니다.(원주민은 고아시아인 = 조몬인)
그 사람들은 키가 조금 작고 말도 한(韓)과 같지 않다. 선비족처럼 머리를 삭발하고 오직 가죽옷을 입으며 ~후략~
키가 조금 작고, 머리를 삭발한 건 왜인을 뜻합니다.(→ 반도 왜인 = 야요이인 = 삼한인)
근데 韓과 말이 같지 않다는 건, 이렇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
조선의 준왕 집단이 내려와 한왕이라 칭했습니다.(삼국지 한전)
辰 역시 조선의 역계경 집단이 진으로 갔습니다.(삼국지 한전)
백제 역시 비류·온조 집단이 내려왔습니다.(삼국사기)
이들 모두는 조선어(예족)와 말갈어(맥족)를 쓰는 지배층입니다.(예맥)
피지배층은 한왜로 한어를 씁니다.(한왜)

진수가 여기서 뜻하는 한어란 곧, 지배층의 언어인 예맥어를 말함이고, 주호인들의 언어는 피지배층의 언어인 한어를 말하는 겁니다.(예맥어 = 예족의 억양이 들어간 말갈어)
진수가 당시 辰의 지배층이 예맥족인지 아닌지를 어찌 알겠습니까?
이들 지배층이 쓰는 언어를 한어로 알았다고 봐야 합니다.
정작 주호인들은 피지배층의 언어인 진짜 한어를 씁니다.
그래서 주호인의 말이 한과 같지 않다고 한 겁니다.
혹시 여기서 예맥어는 고대 한국어, 한어는 고대 일본어라고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고대 일본어는 조몬인의 언어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고대 한국어는 예맥어가 맞지만, 한어는 우리 반쪽 조상들인 삼한인(야요이인, 반도 왜인)들이 썼지만 이미 잃어버린 언어입니다.
이 한어는 오늘날 제주도의 방언을 통해 조금이나마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고 봅니다.(탐라어)
위치상 삼한은 조몬과 가까우니 조몬의 언어와 닮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한어가 고대 일본어라면, 조몬인의 언어가 붕 떠버리게 됩니다.
즉 열도 대다수를 차지하는 조몬인이 쓰는 조몬어의 실체가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물론 일본 학계에서는 자신들이 조몬인이 아닌, 보다 훨씬 우월한 존재인 야요이인의 후예라 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자신들이 조몬인의 후예라고 인정해야 비로소 고대일본사를 바로 세울 수 있습니다.
조몬인의 언어가 고대 일본어라는 증거는, 열도에서 한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연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당장 한자를 백제의 왕인이 전해줬다고 합니다.(천자문과 논어 등)
만약 한자를 한반도 삼한에서 줄곧 쓰고 있던 상태의 고대 일본어라면, 왕인이 전해줄리 만무합니다.그것과 이건 별개라고 한다면 더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암튼 다시 돌아와, 고이가 즉위 3년째 되는 해에 이 강화도에서 사냥했으니, 고이의 즉위 전에 적어도 주호는 이미 진의 영토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초고의 대에 이를 증명하는 기록이 나옵니다.
<초고>
48년(서기 213) 가을 7월, 서부 사람 회회(茴會)가 흰 사슴을 잡아서 바쳤다. 임금이 상서로운 일이라 하여 곡식 1백 섬을 주었다.
방향상 강화도는 서부이니 이때 주호의 임금인 회회가 흰 사슴을 잡아 바칩니다.
즉 이때 초고대왕의 속국이 된 겁니다.
- 초고대왕의 위명이 삼한에 널리 퍼짐.(초고대왕 1, 2)
- 주호의 임금, 흰 사슴을 바치고 속국으로 들어감.(초고 48년)
- 초고대왕, 주호를 서부로 편입하고 곡식 1백 섬을 줌.
주호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 곡식을 준 것입니다.
그럼 계속 보겠습니다.
<구수>
16년(서기 229) 겨울 10월, 임금이 한천(寒泉)에서 사냥을 하였다.
11월,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말갈이 우곡(牛谷)의 경계에 들어와 사람과 재물을 노략질하였다. 임금이 날쌘 병사 3백 명을 보내 막았으나 적의 복병이 협공을 하여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아니 말갈이 쳐들어왔는데, 辰의 대왕이 보낸 군대가 고작 3백 명이라니요? (장난해 지금?)
170년 후 전지대왕 때, 선왕이 죽고 전지가 열도 왜에서 왜군의 호위를 받고 즉위합니다.
근데 이때도 고작 왜군 백명이 호위했다고 합니다. ↓
그래서 일부에선 백제는 백명으로 나라를 이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전지>
전지왕(腆支王)[혹은 직지(直支)라고도 한다.]의 이름을 『양서(梁書)』에서는 영(映)이라고 하였다. 그는 아신왕(阿莘王)의 맏아들이다. 아신왕 재위 3년(서기 394)에 태자가 되었고, 6년에 왜국에 볼모로 갔다. 14년에 아신왕이 죽자 왕의 둘째 동생 훈해(訓解)가 정사를 대리하며 태자의 귀국을 기다렸는데, 막내 동생 첩례(碟禮)가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전지가 왜국에서 부음을 듣고 울면서 귀국을 요청하니, 왜왕이 1백 명의 병사로 하여금 그를 보호하여 귀국하게 했다. 국경에 이르자 한성(漢城) 사람 해충(解忠)이 와서 말하였다.
“대왕이 죽은 후에 왕의 동생 첩례가 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니, 태자께서는 경솔히 들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전지가 왜인을 머물게 하여 자기를 호위하게 하고, 바다 가운데의 섬에 의지하여 기다리고 있었는데, 백성들이 첩례를 죽이고 전지를 맞이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이는 역시 신라 사관이 축소기록한 걸로 봐야 합니다.
전지대왕의 호위는 적어도 1천 명, 구수대왕이 보낸 군사는 적어도 3천 명은 돼야 합니다.
천 단위를 백 단위로 축소기록한 겁니다.
혹 천 단위가 아닌 만 단위였다면..?
원래는 만 단위였는데 신라 사관이 축소하려고 보니, 천 단위도 쓰면 안될 것 같아 백 단위로 확 줄였다고 봅니다.
이게 아니라면 이런 겁니다.
신라 사관: 만명을 천명으로 줄였습니더.
이걸 본 신라왕: 천 말고 백으로 줄이라 카이.
(신라왕 = 문무왕)
군사 만 단위는, 대백제라면 충분히 납득할 만한 숫자입니다.
백제는 삼한을 호령하는 종주국이기에 마한 50여국, 변진한 24개국의 군사가 모이면 만 단위는 훌쩍 넘어갑니다.
이에 대한 것도 전 글에서 이미 역산한 바 있습니다.
근데 삼한 70여국은 辰왕 때이고, 백제가 멸망할 땐 삼국시대 말기이니 더욱 만 단위여야 합니다.
그 증거가 성명대왕의 3만 대군이 진흥왕의 신라군에게 전멸한 기록입니다.(554년)
그리고 김유신은 정병 5만 대군으로 백제를 공격했습니다.(660년)
여기서 김유신에 대해 잠깐 보겠습니다.
김유신의 성은 金이라 하지만 실은 김씨가 아닙니다.
김춘추(혹은 문무왕)에 의해 김해 김씨를 사성 받았습니다.
유신의 증조부는 금관가야 구형왕으로, 신라 법흥왕이 보낸 이사부의 대군에 의해 항복합니다.
고조부 - 겸지왕
증조부 - 구형왕
할아버지 - 무력
아버지 - 서현
<구형왕 - 나무위키>
아버지는 겸지왕이고 어머니는 출충(出忠) 각간(角干)의 딸 숙(淑)이라고 한다. 구해왕(仇亥王), 구충왕(仇衝王)이라고도 불리며 김해 김씨 족보에는 양왕(讓王)이라고도 불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는 "(중략) 수로왕의 10세손인 구해(仇亥)에 이르렀는데 구차휴(仇次休)라고도 하며 김유신에게 증조부가 된다. (후략)"이라고 되어 있어서 구차휴라고도 불렸던 듯하다.
↑ 보시는 바대로 원래는 구씨였던 겁니다.
이 구씨에 대해서는 전 글들에서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즉 백제대왕이 보낸 임금이었던 겁니다.(백제의 담로국 = 가야)
아시는 바대로 김춘추와 유신은 정략혼인 관계를 맺습니다.
<법흥>
19년(서기 532), 금관국(金官國)의 왕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세 아들인 맏아들 노종(奴宗), 둘째 아들 무덕(武德), 막내 아들 무력(武力)과 더불어 자기 나라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하였다. 임금이 예를 갖추어 대접하고 상등(上等)의 직위를 주었으며, 금관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아들 무력은 벼슬이 각간(角干)에 이르렀다.
532년 백제는 왜 이때 금관국으로 원군을 보내지 않았던 건지는 백제본기를 보면 나옵니다.
<성명>
7년(서기 529) 겨울 10월, 고구려왕 흥안(興安, 안장왕)이 직접 병사를 거느리고 침범하여 북쪽 변경의 혈성(穴城)을 함락시켰다. 임금이 좌평 연모(燕謨)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오곡(五谷) 벌판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
530, 531년 기록삭제
10년(서기 532) 가을 7월, 갑진일에 별이 비오듯 떨어졌다.
즉 고구려와 백제는 전쟁중이었던 겁니다.
이틈을 타 신라군이 금관국을 공격, 버티지 못하고 항복합니다.
그후 구형왕 이래로 자손들은 신라에 충성합니다.(→ 무력과 유신의 활약)
다시 돌아와, 또한 당시 열도 왜는 남아도는 게 사람의 머릿수입니다.(→ 조몬인)
672년 나카노오에(덴지)가 죽고 오오아마(덴무)가 오와리국에서 군대를 동원한 것이 1만 대군이었습니다.

참고로 훗날이지만, 임진왜란 때 쳐들어온 왜군이 17만 대군입니다.
큐슈에 또 10만이 대기 중이고, 본토에 수십만 대군이 있었습니다.
그럼 명색이 백제대왕인데, 전지대왕의 호위를 천명이 아닌 만명은 가야 무리가 없는 겁니다.
이에 위 기록을 이렇게 고쳐야 합니다. ↓
전지가 열도 왜에서 왜군 1만의 호위를 받으며 바다 건너 군선 타고 옵니다.
가는 중간마다 군량을 확보하며 감은 물론입니다.
신운신국, 비미국, 비리국 등에서 합세하는 원군까지 더하면 2만 대군에 육박하는 군세입니다.

이때의 군선은 돛단배로, 그 크기가 대략 군사 50명은 들어가는 중형의 군선입니다.(역·스)
참고로 임진왜란 때의 판옥선은 대형 군선으로 80명이 승선했습니다.

그럼 10000 ÷ 50 = 200 척입니다.
해충이 전지 등이 온다는 파발을 전해 듣고 나가보니 인천 앞바다에 200척의 군선이 들어차 있는 겁니다.
이 1만의 왜군이 성 안으로 들어오면 피치못할 격전이 벌어질 것이기에 해충이 일단은 들어오지 말라 한 것으로 보입니다.
멀리서 배타고 오느라 수고했으니 왜군들 접대한 건 물론입니다.(개장국?)
이때 개장국으로 이들을 접대했음은, 백제의 일본어 훈독인 구다라(狗多羅)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즉 한성 근방은 개가 많은 지역이었던 겁니다.
실제로 마한 50여국 중 개 狗자가 들어가는 나라가 몇개 됩니다.즉 우리 민족은 옛부터 개고기를 즐겨먹었습니다.
원래 백제를 백제인이 구다라로 읽던 것을, 열도 왜(일본)에 그대로 전해져 '쿠다라'로 읽고 알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백제인이 백제를 구다라라고 읽은 이유는, 원래 한성 근방이 구다라(狗多羅)였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이는 전 글에서 밝혔던 바, 辰의 지방행정 체제인 10주인 것입니다.

辰의 지방행정 10주
위에 이왕 임진왜란이 나왔으니 여기서 노부나가에 대한 얘기를 잠깐 해볼까 합니다.
오다 노부나가에 대한 설명은 위키백과, 나무위키에 자세히 나와있으니 참고하시구요, 여기선 일본 역사 중에서도 최고의 미스터리라 할 수 있는 '노부나가의 죽음'에 대한 저의 견해를 밝혀볼까 합니다.(혼노지의 변)
예나 지금이나 노부나가의 드높은 위상을 생각하면 이 고이대왕 편에 쓰는 것도 나름 의미 있다 하겠습니다.
노부나가의 죽음이 백제와 아주 연관이 없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언제 또 노부나가의 죽음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까.
노부나가가 중부(기나이)를 장악한 후, 핵심 부하장수들에게 각기 군대를 나눠 그 군사력으로 천하통일에 한걸음씩 다가서고 있었습니다.
(대략적인 서열로 순서는 임의로 정함)
1군단 - 시바타 카츠이에
2군단 - 니와 나가히데
3군단 - 아케치 미츠히데
4군단 - 타키가와 카즈마스
5군단 - 하시바 히데요시

이때 노부나가의 거성인 아즈치 성의 천수각에서 이 제장들을 불러모아 놓고 군의를 합니다.
※ 軍議 : 앞으로의 계획과 누가 군사를 얼마나 갖고 어디를 공략하나 등의 군사회의.

천하를 통일한 후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이때 제장들과 대략적인 얘기를 나눴다고 봅니다.
노부나가의 성격 등으로 봤을 때, 역시 조선침공, 명나라 공격, 인도 정벌 등의 얘기를 했음직 합니다.
(이미 노부나가는 중세시대의 지도, 지구의를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갖고 있음)
그럼 미츠히데가 왜 노부나가를 배신해 혼노지의 변을 일으켰는지 답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아케치 미츠히데는 명문가 출신으로 그 조상이 야요이인, 즉 삼한인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가 조선침공 운운하는 걸 눈앞에서 듣고 속으로 뜨끔했을 겁니다.
'조선은 부모·형제의 나라인데..!'
이때 미츠히데의 심정은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미국이 한반도를 공격한다고 하면, 미국에 사는 수많은 교민들의 심정인 겁니다.
그래서 미츠히데는 이때부터 속마음을 숨기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때마침 히데요시를 도우라는 노부나가의 명을 받습니다.
(→ 일본인의 혼네와 다테마에)
기회는 찬스다!
휘하의 1만 대군으로 고작 백명이 수비하는 혼노지를 공격하는 아케치군.
적은 혼노지에 있다!
그리고 자다가 봉변을 당하는 노부나가.
이렇게 천하통일을 눈앞에 두고 노부나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훗날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조선을 침공함은 물론입니다.
이들은 야요이인과는 하등 상관없는 조몬인들이기 때문입니다.
히데요시가 조선침공군을 큐슈인들로 한 건 이유가 다 있는 겁니다.
다시 돌아와, 만약 왜군 백명이었으면 첩례가 이랬겠죠.
"어 왔어? 드루와, 드루와!"
사실이야 어찌 됐든 삼국사기의 액면 기록 그대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다시 기록을 보겠습니다.
국경에 이르자 한성(漢城) 사람 해충(解忠)이 와서 말하였다.
“대왕이 죽은 후에 왕의 동생 첩례가 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니, 태자께서는 경솔히 들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전지가 왜인을 머물게 하여 자기를 호위하게 하고, 바다 가운데의 섬에 의지하여 기다리고 있었는데, 백성들이 첩례를 죽이고 전지를 맞이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지금 열도 왜에서 군선 200척 타고 왔는데, 국경이라니요? (니가 거기서 왜 나와?)
어디와 어디의 국경을 뜻하는 걸까요?
참고로 삼국사기에는 훗날 신라 무열왕, 문무왕 대에 군선 수백척 타고 열도에서 신라, 백제로 왔다갔다 합니다.
이건 나중에 기회되면 논하기로 하겠습니다.(백제 멸망전)
한성에서 해충이 온 걸로 보아, 전지가 이끄는 軍은 인천 포구에 있어야 합니다.
그걸 증명하는 것이 바다 가운데의 섬으로, 영종도입니다.(현 인천국제공항)

이때 왕위를 찬탈한 첩례軍도 상당한 군세를 이루고 있었을 겁니다.(약 1만?)
전지軍 - 열도 왜의 본군 1만 + 마한의 원군 5천 이상 = 약 1만5천 ~ 2만
첩례軍 - 반역 도당 5천 + 하남 한성의 내외 수비군 5천 = 약 1만
이후 이런 시나리오가 예상됩니다.
- 전지군의 진격
- 양측의 격전
- 첩례군, 한성으로 퇴각
- 전지군, 한성 포위
- 해충, 성문을 엶
이런 시나리오가 예상되지만, 신라 사관이 이 기록을 축소, 삭제, 날조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기껏 왜군 1만을 호위케 해서 데려와 놓고 영종도에 머물러 있으니 백성들이 일을 끝마쳤다?
이건 해충이 성문을 열고 왜군이 들이닥쳐 첩례를 잡아죽인 거라고 봐야 합니다.
즉 왜군 1만이 백제대왕의 즉위를 도운 겁니다.
이 기록을 날조한 이유는, 문무왕 입장에서 '일본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싶어서' 일 겁니다.
왜군이 백제대왕의 즉위를 도운 걸 일본이 알면 온갖 꼬투리를 잡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그래서 두려움)
"우리 일본이 백제왕의 즉위를 도왔는데, 니가 뭔데 백제를 멸망케 하고 대왕이 되냐?"
이걸 명분 삼아 쳐들어오면 큰일인 겁니다.
<전지>
2년(서기 406) 봄 정월, 임금이 동명왕의 사당에 참배하고 남쪽 제단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고 죄인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2월,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해충을 달솔로 삼고, 한성의 벼 1천 섬을 주었다.
이때 해충을 달솔로 삼았는데, 벼 1천 섬도 같이 준 것으로 보아 이는 그때의 논공행상으로 보입니다.
근데 상식적으로 단순히 해충이 와서 왜군의 입성을 제지한 것만으로는 달솔 감도 아니고 벼 1천 섬이나 줄 공로도 아닙니다.
그럼 이 달솔의 위치는 어느 정도냐?
<고이>
27년(서기 260) 봄 정월, 내신좌평(內臣佐平)을 두어 왕명출납에 관한 일을, 내두좌평(內頭佐平)을 두어 재정에 관한 일을, 내법좌평(內法佐平)을 두어 예법에 관한 일을, 위사좌평(衛士佐平)을 두어 친위병에 관한 일을, 조정좌평(朝廷佐平)을 두어 형벌에 관한 일을, 병관좌평(兵官佐平)에게는 지방의 병사에 관한 일을 맡겼다. 또 달솔(達率)ㆍ은솔(恩率)ㆍ덕솔(德率)ㆍ한솔(扞率)ㆍ내솔(奈率)과 장덕(將德)ㆍ시덕(施德)ㆍ고덕(固德)ㆍ계덕(季德)ㆍ대덕(對德)ㆍ문독(文督)ㆍ무독(武督)ㆍ좌군(佐軍)ㆍ진무(振武)ㆍ극우(克虞)를 두었다. 6좌평은 모두 1품, 달솔은 2품, 은솔은 3품, 덕솔은 4품, 한솔은 5품, 내솔은 6품, 장덕은 7품, 시덕은 8품, 고덕은 9품, 계덕은 10품, 대덕은 11품, 문독은 12품, 무독은 13품, 좌군은 14품, 진무는 15품, 극우는 16품이다.
2월, 명을 내려 6품 이상은 자주색 옷을 입고 은화로 관을 장식하고, 11품 이상은 붉은색 옷을 입고, 16품 이상은 푸른색 옷을 입게 하였다.
좌평의 바로 아래 관등으로 높은 고위직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즉 고작 왜군을 제지한 것만으로 달솔이란 고위직을 주었을 리는 만무합니다.
1만 대군이 가는데 적어도 성문을 열어 제껴야 비로소 고위직을 줄 수 있는 겁니다.
또한 이때 수고한 해충의 군사들을 먹이라고 벼 1천 섬을 상으로 준 것입니다.
즉 군사 한명 당 벼 한섬이라 치면 해충의 군사는 1천 명입니다.
해충의 군사가 1천 명인데, 열도 왜에서 호위한 왜군이 고작 백명이라 함은 사실이 아닌 겁니다.
그래서 구수대왕이 말갈을 치러 보낸 군대 역시 3백 명이 아닌 3만 대군이란 얘깁니다.
<사실>
말갈이 우곡(牛谷)의 경계에 들어와 사람과 재물을 노략질하였다. 대왕이 정병 3만 명을 보내 막았으나 적의 복병이 협공을 하여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여기서 우곡은 춘천으로, 비록 3만이 복병에 걸려 대패했어도 백제는 건재했습니다.
<구수>
16년(서기 229) 겨울 10월, 임금이 한천(寒泉)에서 사냥을 하였다.
11월,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말갈이 우곡(牛谷)의 경계에 들어와 사람과 재물을 노략질하였다. 임금이 날쌘 병사 3백 명을 보내 막았으나 적의 복병이 협공을 하여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18년(서기 231) 여름 4월, 밤알만한 우박이 떨어져 새들이 맞아서 죽었다.
232, 233년 기록삭제
21년(서기 234), 임금이 돌아가셨다.
232년에서 233년까지 약 2년 동안 고구려와 백제 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로 보여집니다.(무슨 일 = 전쟁)
즉 이번엔 백제의 대승인데 신라 사관이 기록을 삭제한 겁니다.
이 당시의 고구려왕은 동천왕(재위 227~248년)으로, 246년 위나라 사마의가 보낸 관구검의 침략으로 고구려 도성이 함락 당합니다.(당시 고구려 도성 = 환도성)
<위나암성 - 위키백과>
《삼국사기》에는 위나암성(尉那巖城) 또는 위나야성(尉那也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산상왕 원년인 197년에 공손탁(公孫度)이 고구려를 침략하자, 이듬해인 198년에 위나암성을 전면적으로 증축하고, 환도성(丸都城)이라 하였다.
<산상>
2년(서기 198) 봄 2월, 환도성(丸都城)을 쌓았다.
13년(서기 209) 겨울 10월, 임금이 환도(丸都)로 도읍을 옮겼다.
삼국사기를 보면 산상왕 때 환도성을 쌓고 도읍을 새로 옮깁니다.
근데 학계에서는 국내 위나암성을 환도성이라고 합니다.(무슨 근거로?)
혹시 이걸 근거로 한 건가요? ↓
<고국원>
12년(서기 342) 봄 2월, 환도성을 수리하고, 국내성을 쌓았다.
十二年 春二月 修葺丸都城 又築國內城
가을 8월, 임금이 환도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환도성 수리와 국내성을 쌓았다는 건 별개입니다.(又 → 또 우)
먼저 이름부터가 다르고, 국내성은 국내에 있는 위나암성을 말하는 겁니다.(국내 = 불내 = 함북 길주)
즉 고구려의 도읍은 이렇게 4번 옮깁니다.
졸본성 → 국내 위나암성 → 환도산성 → 평양성

제가 지금 고이대왕에 대해 쓰는거라 이 고구려의 도읍인 환도성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쓰지 않겠습니다.
(분석과 탐구가 필요함, 즉 시간)
그래서 학계에서 말하는 환도성이 저곳으로 알고 계속 하겠습니다.(이번엔 믿어도 됩니까?)
다시 돌아와, 이때 고구려는 거의 멸망 직전까지 갑니다.
도성이 함락 당한 거라 사실상 멸망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즉 고구려의 방대한 사료가 이때 처음으로 불에 타 재가 됐습니다.
근데 당시 동천왕이 전투에 패하고 옥저 땅 어디인가로 도망을 갑니다.
이 과정을 추적하다 환도산성의 위치가 대략 어디인지 발견하게 됐습니다.(사상 최초)
<동천>
20년 겨울 10월, ~전략~
이번 전쟁에서 위나라 장수가 숙신(肅愼) 남쪽 경계에 이르러 돌에 그 공을 새겨 기념하고, 또한 환도산(丸都山)에 이르러 불내성(不耐城)에 공을 새기고 돌아갔다.
즉 환도산과 불내성이 지척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아래 설명대로 산상왕이 환도산에 산성을 새로 쌓아 도읍을 옮긴 겁니다.
<환도산성 - 나무위키>
원 고구려의 성이었으며 현재 위치는 중국 지린성 지안시 국내성 터로부터 북쪽에 있다. 아직까지도 고구려 시대의 성벽이 일부 남아있다. 고구려 왕조의 두 번째 수도이자 두 번째 이중수도인데 환도성은 산성 수도였으며, 짝으로 평지성 수도인 국내성이 있었다.

즉 산상왕은 위나라와의 전쟁을 대비해 환도산성을 쌓고 그곳으로 도읍을 옮긴 것이었습니다.
이는 일본 전국시대 때 본성과 주변 여러 지성을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적군 입장에서 공략하기 어렵게 하기 위해선데, 고구려의 이 산성과 평성이 그것의 원형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학계의 주장은 틀린 것이 됩니다.(← 환도성의 위치)
또한 고구려의 천도 과정도 아래 지도대로 입니다.

고구려-위 전쟁에 대해서는 고구려 편에서 하기로 하고 이쯤에서 접겠습니다.
사마의에 대해서도 쓸 것이 좀 있어도 그때로 미루겠습니다.이 시대가 또 중국 삼국시대라서 얘기가 끝이 없습니다.
다만 언제가 될지는 모릅니다.
저는 무엇보다 백제에 관심이 있어 이 블로그를 만들고 글을 쓰고 있는 겁니다.
고구려에 대해서는 글을 쓰다 보니 나오게 됐는데, 알고보니 한일고대사 못지않게 한중고대사의 미스터리가 또 어마어마 하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한사군에 관련한 것이 그것입니다.
이걸 알려면 역사학도 중국 수재 10명, 한국 수재 10명이 함께 사료를 가지고 분석·탐구해야 그나마 알 수 있습니다.
즉 퍼즐을 짜맞출 수 있는 겁니다.(↑ 한일고대사도 마찬가지임)
자국의 역사라도 지극히 객관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어야 하며(← 기본자세), 중국의 방대한 사서들부터 제대로 번역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전한서, 후한서, 晉서, 구당서, 신당서 등)
https://www.youtube.com/channel/UCXUNWHzvqruUqV0D_jw5c1A
삼국사 아카데미
삼한시대와 삼국 초중기 역사를 심층 분석, 탐구합니다. 삼국은 백제, 신라, 가야 입니다. 왜는 덤입니다.
www.youtub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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