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대왕이 辰왕이다(백제의 위상에 대해 2)

2024. 12. 12. 14:31백제, 신라, 가야, 왜

 

정사 삼국지를 편찬한 서진(西晉)의 진수는 233~297년 사람입니다.

그럼 삼국지 한전은 3세기 중후반의 한반도 상황을 묘사한 걸로 이해됩니다.

이 3세기 중후반은, 백제는 고이~책계, 신라는 첨해~유례에 해당됩니다.

이 시기의 삼국사기를 읽어보면 당시 신라보다는 백제가 우세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근데 삼국지 한전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삼국지 한전>
그중에서 12國은 辰王에게 臣屬되어 있다.
辰王은 (그 12국의 왕을) 항상 馬韓사람으로 王을 삼아 대대로 世襲하였으며, 辰王이 (그들을) 자립해서 王이 되지 못하게 하였다.
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辰王不得自立爲王
魏略: 그들은 옮겨온 사람들이 분명하기 때문에 馬韓의 제재를 받는 것이다.

 

이건 백제왕을 중국에서는 아직 진왕이라 불렀고, 보다시피 진왕이 다른 소국의 왕들을 임명하는 권한을 갖고 있다는 걸 말해줍니다.

 

참고로 저는 고이왕 때에 辰에서 백제로 국명을 바꿨다고 봅니다(구태는 초고다).

온조계에서 왕통이 구태(초고)계로 한번 갈아타고 구태의 아들 혹은 손자인 고이대왕 때입니다.

 

<고이>
10년(서기 243) 봄 정월, 큰 제단을 만들어 하늘과 땅과 산과 하천에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고이 다음 임금인 책계는 전글에서 근초고왕 버금가는 백제대왕이라고 했습니다(삼국사기 최대의 미스터리).

재위기간 10여년이 통째로 삭제됐습니다.

 

이제 일본서기 응신조(재위 390~430)를 보면, 

<응신 3년>
이 해에 백제 진사왕(辰斯王)이 즉위하여 귀국(貴國) 천황에게 무례하였다. 그래서 기각숙녜(紀角宿禰;키노츠노노스쿠네), 우전시대숙녜(羽田矢代宿禰;하타노야시로노스쿠네), 석천숙녜(石川宿禰;이시카와노스쿠네), 목토숙녜(木菟宿禰;츠쿠노스쿠네)를 파견하여 그 무례함을 꾸짖었다. 이에 백제국은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 기각숙녜 등은 아화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마치 왜왕이 진왕이라도 된 것처럼 둔갑시켰지만 실상은 그 반대입니다.

즉 백제대왕이 진왕인 것입니다.

 

<사실>

이 해에 백제 진사왕이 즉위했는데 왜왕에게 입조하라고 명했다. 그래서 기각숙녜 등 4인의 대신을 파견해 알현하고 공물을 바쳐 왜왕이 입조 못 함을 사죄드렸다.

 

숙녜들이 무례함을 꾸짖었는데 백제에서 왕을 죽여 사죄했다?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인지..?

한술 더 떠 그들이 아화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백제인이 보면 기절초풍 합니다.

 

<응신>
8년 봄 3월에 백제인이 내조하였다[『백제기(百濟記)』에 “아화왕(阿花王)이 즉위하여 귀국에게 무례하였다. 그래서 우리의 침미다례 및 현남(峴南), 지침(支侵), 곡나(谷那), 동한(東韓)의 땅을 빼앗았다. 이에 왕자 직지(直支)를 천조(天朝)에 보내 선왕의 우호를 닦도록 하였다.”고 한다.].

 

응신 8년이면 397년입니다.

백제인이 쓴 백제기에 백제에 불리한 기록을 할 리는 없을 것입니다.

훗날 일본이 백제기까지도 기록을 날조했습니다.

즉 일본서기를 편찬하며 백제기에 있는 내용을 저런 식으로 꾸며내 바꾼 것입니다.

그걸 인용하며 마치 사실인양 일본서기를 편찬한 것입니다.

 

사실여부를 떠나 일본서기에서 전왕 삼촌인 진사가 왜왕한테 무례해 죽었는데, 그걸 보고 또 아화도 왜왕한테 무례했다고 합니다.

이거야말로 말이 안 되는 날조라는 걸 보여줍니다.

이건 왜왕이 진왕으로서 삼한의 주인이고 그 땅을 주었다 뺏었다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꾸며낸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진왕은 백제대왕입니다.

 

이때 백제는 어떤지 아신조를 보겠습니다.

<아신>
6년(서기 397) 여름 5월, 임금이 왜국(倭國)과 우호 관계를 맺고 태자 전지(腆支)를 볼모로 보냈다.
가을 7월, 한수 남쪽에서 대대적으로 군대를 사열하였다.

 

왜국에 전지를 볼모로 보냈다는 건, 백제를 깎아내리려는 훗날 신라의 날조입니다.

태자를 볼모로 보내는 나라가 있나요?

태자가 왜국으로 건너갔다는 것은, 그 태자가 곧 왜왕입니다.

이에 대한 증거는 저의 다른 전글들을 참고해 주세요.

 

참고로 응신이 110세에 죽었답니다.

이런 것이 다 일본서기를 믿으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가을에 한강 이남에서 군대를 대대적으로 사열했는데, 응신조에서는 오히려 그 땅을 빼앗았다고 합니다.

역시 날조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계속 보겠습니다.

<응신 16년>
이 해에 백제 아화왕(阿花王)이 죽었다(薨). 천황이 직지왕(直支王)을 불러 “그대는 나라로 돌아가서 왕위를 이으라.”고 말하고 동한(東韓)의 땅을 돌려주면서 보냈다[동한이란 감라성(甘羅城)·고난성(高難城)·이림성(爾林城)이 그것이다.].

 

일본서기를 편찬할 때, 아예 처음부터 작정하고 왜왕을 진왕으로 둔갑시켰습니다.

이걸 믿으면 왜왕이 곧 진왕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왜왕이 하는 말투가 곧 진왕(백제대왕)이 하는 말투입니다.

백제대왕이 실제로 한 말을 조금 수정해 이런 식으로 편찬한 것입니다.

 

백제 멸망 후, 신라는 신라에 불리한 기록을 삭제하고 백제의 기록은 축소, 삭제, 날조 했습니다.

 

일본은 백제대왕을 아예 왜왕으로 둔갑시켰습니다.

백제삼서를 인용한 것이 그 증거입니다.

이들이 왜 백제의 사서를 이용했는지 의도가 뻔합니다.

왜왕을 진왕으로 둔갑시키려면 백제의 사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백제삼서의 내용을 날조해 사실인양 인용하여 왜왕을 진왕으로 둔갑시킨 것입니다.

백제삼서의 내용이 나오면 진왕 행세를 합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백제삼서는 파기했을 겁니다.

 

<효소>
7년(서기 698) 3월, 일본국 사신이 당도하였다. 임금이 숭례전(崇禮殿)으로 불러 만나보았다.

 

아마 이때 일본과 신라는 입맞춤을 했다고 보여집니다.

 

그럼 계속 보겠습니다.

<전지>
전지가 왜국에서 부음을 듣고 울면서 귀국을 요청하니, 왜왕이 1백 명의 병사로 하여금 그를 보호하여 귀국하게 했다.

 

애초부터 볼모가 아니기에 귀국을 요청한 게 아닙니다.

신라의 백제 기록 축소, 날조입니다.

볼모가 아니라 왜왕입니다.

 

<사실>

태자 전지가 왜국에 건너가 왜왕으로 통치하다 부왕의 부음을 듣고 왜군 수천(혹은 만 명?)을 데리고 귀국했다.

 

<전지>
국경에 이르자 한성(漢城) 사람 해충(解忠)이 와서 말하였다.
“대왕이 죽은 후에 왕의 동생 첩례가 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니, 태자께서는 경솔히 들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大王棄世 王弟碟禮殺兄自立王 願太子無輕入
전지가 왜인을 머물게 하여 자기를 호위하게 하고, 바다 가운데의 섬에 의지하여 기다리고 있었는데, 백성들이 첩례를 죽이고 전지를 맞이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왕비는 팔수부인(八須夫人)이고, 아들 구이신(久尒辛)을 낳았다.

 

해충이 경솔히 들어가지 말란 것은, 궁 안에서 왜군과 전투가 날 우려 때문이니 때를 기다리라 한 것입니다.

여기서 팔수부인은 왜국의 여인입니다.

辰의 왕족과 혼인하면 그 비는 왕후라 칭합니다(근초고왕조 참고).

일반인과 격이 아예 다릅니다.

 

그리고 여기서 원문에 해충이 백제왕을 대왕으로 칭한다는 것에 주목해 주세요.

그냥 왕이 아닌 대왕인 것입니다.

大王棄世 王弟碟禮殺兄自立王 願太子無輕入

 

<응신>
25년에 백제의 직지왕이 죽었다(薨). 이에 아들 구이신(久爾辛)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이 어려 대왜(大倭)의 목만치(木滿致)가 국정을 잡았다. 아울러 왕모(王母)와 밀통하여 무례한 행위를 많이 저질렀다. 천황은 이를 듣고 소환하였다[『백제기』에서는 “木滿致는 목라근자가 신라를 정벌할 때 그 나라 부인을 얻어서 낳은 자식이다. 아버지의 공적으로 임나에서 전횡을 하다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귀국(貴國)과 왕래하였다. 천조(天朝)의 명령을 받아서 우리나라의 정사를 장악하고 권세를 세상에 떨쳤다. 그러나 천조가 그 포악함을 듣고서 소환하였다.”고 한다.].

 

이 일본서기의 기록은 문제가 좀 있습니다.

하긴 일본서기가 문제없으면 그게 이상합니다.

응신 25년은 414년으로, 삼국사기에 전지는 420년에 죽었습니다.

 

근데 송서에 416년에 여영(전지)이 백제왕으로 책봉받았고, 424년에도 사신을 파견했다고 합니다.

그럼 전지는 424년까지도 살아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럼 구이신은 재위 424~427년이 됩니다.

 

근데 일본서기에 구이신이 어려 백제의 목만치가 국정을 잡았습니다.

대왜가 아니라 백제입니다.

목만치는 목라근자의 아들로 백제인이지 왜인이 아닙니다.

즉 이것도 날조입니다.

 

근데 "왕모와 밀통해 무례한 행위를 많이 저질렀고 그래서 왜왕이 이를 듣고 소환했다"고 하는데 이것도 날조한 것입니다.

날조한 이유는, 왜왕이 진왕처럼 대신을 소환할 수 있는 소환권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날조한 것입니다.

 

실상은 이럴 것입니다.

『전지가 죽었는데 구이신이 어려 大臣 목만치가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백성들이 목만치를 죽이고 전지의 서자 비유가 왕위에 올랐다.』

 

백제기에 인용한 것도 반은 맞고 반은 날조입니다.

근초고왕이 목라근자에게 군대를 위임했고 신라에서 여자를 얻어 자식을 낳았다고 하니, 당시 목라근자는 30대 전후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날조>

아버지의 공적으로 임나에서 전횡을 하다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귀국(貴國)과 왕래하였다. 천조(天朝)의 명령을 받아서 우리나라의 정사를 장악하고 권세를 세상에 떨쳤다. 그러나 천조가 그 포악함을 듣고서 소환하였다.”고 한다.

 

왜왕의 명을 받아 백제의 정사를 좌지우지했다는 걸 보여주려고 꾸며내 지은 것(날조)입니다.

 

백제 멸망 후, 왜국은 그 궁전 이름을 백제궁이라 하고, 백제에 관한 것들이 무수히 많음은 모두 알 것입니다.

 

※ 백제의 태자 혹은 왕자가 왜국으로 건너가 왜왕으로 통치하다 부왕인 백제대왕이 죽으면 백제로 돌아와 백제대왕이 되는 시스템입니다.

그다음 태자가 건너가기 전까지의 공백기간은 백제대왕의 친족 혹은 외척이 태자가 올 때까지 대리섭정을 행합니다. ※

 

이 시스템은 잘 이해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백제대왕이 갓 즉위하면 몇 년 동안은 태자가 없거나 혹은 길게는 10년 동안 태자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길게 왜왕 자리를 방계가 차지하고 있으면 문제가 생길 수 있기에, 백제대왕의 친족 즉 친동생(동복)을 보내 그가 왜왕이 됩니다.

또 태자가 있어도 부왕이 태자를 곁에 데리고 싶으면 왜국에 안 보냅니다.

대신 동복동생을 보냅니다.

 

만약 왜왕이 죽었는데 아들이 있으면 세습하고, 아들이 없으면 백제대왕이 친족을 또 보내 왜왕을 잇게 합니다.

 

근데 그가 임금감이 아니거나 문제가 있다 싶으면 언제든 백제대왕이 갈아치울 수 있습니다.

이는 신라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그래서 재위가 짧은 임금들이 여럿 있는 이유가 이것인데, 사실 이런 경우 죽이진 않고 왕위에서 하차시키고 기록에만 죽었다고 썼을 겁니다.

일본서기의 왜왕들이 대개 그렇습니다.

 

<삼국지 한전>
그중에서 12國은 辰王에게 臣屬되어 있다.
辰王은 (그 12국의 왕을) 항상 馬韓사람으로 王을 삼아 대대로 世襲하였으며, 辰王이 (그들을) 자립해서 王이 되지 못하게 하였다.
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辰王不得自立爲王
魏略: 그들은 옮겨온 사람들이 분명하기 때문에 馬韓의 제재를 받는 것이다.

 

이렇게 유기적이고 유연성 있는 시스템인 것입니다.

 

이것으로 일본서기를 봐야 합니다.

숭신은 119세, 응신과 인덕은 110세에 죽은 이유가 이것과 관련 있습니다.

 

대리섭정은 아스카 시대의 권신 소가 가문이 좋은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가문은 원래 백제왕족의 방계로 봐야 합니다.

 

<소가, 나무위키>
소가(蘇我)는 고대 아스카 시대의 중심지였던 나라현에 있던 지명으로, 지금도 나라현에는 소가천(蘇我川)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참고로 당대 아스카에서 소가 바로 북쪽의 명칭은 다름아닌 백제(百濟)였다고 하며, 소가천도 백제천(百濟川)이라고 불렸다.
일본 학계에서는 소가 가문의 뿌리를 나라현 일대의 대호족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소가 가문이 6세기 후반 권력을 장악한 이후 천황의 거처가 이곳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거한다.

 

일본 학계도 그들이 왜 백제를 지명에 썼는지 모릅니다.

바로 위에 쓴 ※백제의 시스템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 이런 시스템은 계속 이어져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 초대 쇼군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죽고 싯켄 호조가문이 권력을 잡은 것과도 연관됩니다.

이런 일본의 복잡한 쇼군 정치의 뿌리는 바로 진왕 시스템 즉 백제의 시스템에서 시작합니다.

즉 쇼군이 진왕 즉 백제대왕의 행세를 계속 이어서 하는 것입니다.

 

결국 백제 멸망 후, 왜왕 자리는 방계가 왕통을 차지했다고 봅니다.

그 방계의 왜왕이 정통성을 위해 백제삼서를 이용해 진왕으로 둔갑한 것입니다.

주변의 많은 왜 소국들을 다스리려면 백제대왕(辰왕)의 정통성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본서기를 편찬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증명은 계속 이어나갈 것입니다.

 

이제 이 한 장의 사진으로 끝맺을까 합니다.

이것이 모든 걸 말해줍니다.

 

 

 

 

 

 

 

 

왜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 만드는 「백제금동대향로」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