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15. 18:26ㆍ백제, 신라, 가야, 왜
3세기말 진서에 신미국은 주변 소국 20여 국을 거느리고 동진에 사신을 파견하는데, 이 무렵은 고이(재위 234~286년)와 책계(재위 286~298년)의 치세기에 해당합니다.
신라는 미추(재위 262~284년)와 유례(재위 284~298년)에 해당합니다.
중국 서진(西晉)에서 동진(東晉)까지 156년의 역사를 기록한 『진서(晉書)』 「동이열전」 마한조에는 태강원년(太康元年[서기 280년]부터 태희원년(太熙元年)[서기 290년]까지 마한이 9차례 사신을 보낸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기록은 최소한 마한이 290년까지 건재하였음을 보여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그럼 온조가 마한(辰)을 이미 멸하고 이를 이어받아 辰왕이 되었음에도 290년까지 마한이 존재한 게 됩니다.
이건, 온조가 백제라고 국호를 바로 정한 게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즉 우리가 아는 온조백제는 적어도 290년까지 대외에 마한이라고 한 것입니다.
290년이면 책계 5년인데, 이 책계대왕은 재위 3년~12년까지 기록이 삭제되어 없습니다.
재위 대부분의 기록 10여 년이 삭제되었다는 뜻은, 그만큼 무언가 대단하다는 반증으로 봐야 합니다.
저의 다른 전글에서 백제라는 국호는 고이대왕 대에 칭했다고 했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조를 보면 고대국가의 기틀이 잡혀가는 시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국내에는 백제라고 썼어도 중국에는 종전대로 마한이라고 썼다고 봐야 합니다.
이는 3세기 중후반의 한반도를 보여주는 삼국지 한전과도 일치합니다.
<삼국지 한전>
진왕은 목지국을 통치한다.
이 진왕이 우리가 아는 백제왕이라면 목지국은 한성에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전글에서도 목지국이 한성에 있다고 한 것입니다.
만약 이 진왕이 백제왕이 아니라면, 그때까지 따로 마한이 존재했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의 백제본기를 부정할 수밖에 없고,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사서로서의 신뢰성에 금이 가게 됩니다.
그래서 고고학적인 문제도 있고 해서 이를 한번에 해결하려면 저의 주장이 가장 납득성이 높고 타협점이 될 수 있습니다.
즉 백제는 원래 초기부터 마한(=辰)이고 辰왕이라고 쓰다가, 3세기 중후반 어느 시점에 국호를 백제로 바꾸고 진왕에서 백제대왕으로 칭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게 아니라면 이걸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 다른 설이 있나요?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
그럼 다시 돌아와, 진서에 보이는 마한 9차례(280~290)의 사신 기록은 고이와 책계가 보낸 것이 됩니다.
공교롭게도 동진에 사신을 보낼 때 고이와 책계조엔 삭제되어 기록이 없습니다.
만약 9차례 중에 하나라도 있다면 저의 추측이 맞을 확률이 그만큼 올라간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신라는 진왕의 존재를 철저히 지우려는 속샘이라 아쉽지만 사신 기록이 없습니다.
하지만 위에 논증한대로 백제왕이 진왕이라는 걸 알 수 있고, 진왕이기에 백제대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삼국지 한전>
그중에서 12國은 辰王에게 臣屬되어 있다.
辰王은 (그 12국의 왕을) 항상 馬韓사람으로 王을 삼아 대대로 世襲하였으며, 辰王이 (그들을) 자립해서 王이 되지 못하게 하였다.
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辰王不得自立爲王
魏略: 그들은 옮겨온 사람들이 분명하기 때문에 馬韓의 제재를 받는 것이다.
전글에 책계는 근초고왕 버금가는 백제대왕이라고 했습니다.
학계에서는 고이 역시 대왕이라 인식하고, 이 고이에 이어 책계의 치세기에 침미다례(新彌多離)까지 밀고 내려간 듯합니다.
고이조를 보면 재위 7년부터 50년까지 사로국(편의상 이하 신라)을 수차례 공격하는데, 그 옆에 있는 침미다례(新彌多離)는 기록이 없어 복속시킨 것인지 대립관계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고이는 재위 53년(286), 신라에 화친 사신을 보내는 것을 끝으로 죽습니다.
화평이 성사되었는지 오랫동안 백제·신라 간에 전쟁이 없습니다.
<고이>
39년(서기 272) 겨울 11월, 병사를 보내어 신라를 침범하였다.
45년(서기 278) 겨울 10월, 병사를 내어 신라를 공격하여 괴곡성(槐谷城)을 포위하였다.
50년(서기 283) 가을 9월, 병사를 보내어 신라의 변경을 침범하였다.
53년(서기 286) 봄 정월,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
겨울 11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신미제국(=침미다례(新彌多離))의 기록은 없습니다.
이건 삭제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럼 고이가 진왕 즉 백제대왕으로서 그만한 국력을 갖고 신라를 수차례 공격했다면, 신라를 공격하기 전에 신미제국을 복속했다고 봐야 맞습니다.
근데 282년에 신미제국은,
<출처: 나무위키>
동이 중 마한 신미제국(新彌諸國)은 산을 의지하고 바다를 띠고 있었으며 유주와의 거리가 4,000여 리였다. 지난 세월 동안 귀부해오지 않던 나라가 20여 개나 되었는데, 함께 사절을 보내서 조정에 공물을 바쳤다.
《진서》 장화전
(태강) 3년(282년) 봄 정월 갑오일, 상서 장화를 도독 유주제군사로 삼았다. ... 9월, 동이 29개국이 귀화하여 그들의 방물을 바쳤다.
《진서》 무제기
고이 49년(282) 9월에 이들이 한꺼번에 백제에 등을 돌린 것일까요?
정확히 1년 후, 고이는 다시 신라를 공격합니다.
<고이>
50년(서기 283) 가을 9월, 병사를 보내어 신라의 변경을 침범하였다.
이들이 한꺼번에 몰려 가서 중국황제(사마염)한테 단순히 조공만 했을까요, 아니면 백제 때문에 못 살겠다고 하소연했을까요?
기록상 백제가 중국에 최초로 사신을 보낸 건 89년 후 근초고 27년의 일입니다.
<근초고>
27년(서기 372) 봄 정월, 진(晉)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즉 중국과 백제는 이 당시 정식으로 사신교환을 안 했을 때입니다.
중국이 분열되어 혼란기여서 조공할 필요가 없어서입니다.
조공은 강자한테 하는 법입니다.
신미제국 이들은 이때(282)만 한차례 사신을 보내고 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중국이 통일되었으니 단순히 인사차 예의상 조공만 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그럼 "백제는 사신을 안 보내고 왜 이들만 조공했을까"가 의문입니다.
혹시 이들이 고이대왕한테 중국이 통일됐으니 조공사신을 보내야 한다는 뜻을 전했지만, 늙은 고이가 반대한 게 아니었을까 나름 짐작해 봅니다.
반대한 이유는 "조공할 필요성을 못 느껴서"이겠지요.
하지만 신미제국은 전남에 위치해 있기에 바닷길을 통해 중국에 대한 정보를 빨리 접하고, 무역을 통해 이익을 남겨야 하기에 조공사신단을 꾸려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즉 백제와 달리 신미제국은 입장이 다른 것입니다.
백제로선 이들이 따로 조공사신을 보낸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으니 허락을 한 게 아니었을까 추정해 봅니다.
혹 허락해 줄 테니 신라칠 때 병력 좀 보태라 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다음 해에 신미제국과 연합해 또 신라를 공격합니다.
<고이>
50년(서기 283) 가을 9월, 병사를 보내어 신라의 변경을 침범하였다.
이것으로 3차 미스터리는 설명되었습니다.
'백제, 신라, 가야, 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변진한은 왜인의 땅이다?(신라 초중기 역사의 진실) (0) | 2024.12.21 |
---|---|
벌휴는 손자에게 살해되었다?(충격적인 신라의 왕위찬탈) (0) | 2024.12.17 |
진흥의 모후는 백제왕족이다?(추가: 삼국사기 2차 미스터리) (6) | 2024.12.14 |
백제대왕이 辰왕이다(백제의 위상에 대해 2) (2) | 2024.12.12 |
삼국사기 최대의 미스터리(2개의 시나리오) (0) | 2024.1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