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립간은 고구려에서 내린 칭호다?(충격적인 반전!)

2024. 12. 9. 02:37백제, 신라, 가야, 왜

 

삼국사기에, 내물의 왕비는 미추의 딸이고 실성의 왕비도 미추의 딸입니다.

 

근데 여기엔 지독한 근친혼이 보입니다.

신라사에서 뭔가 이상하다 싶은 근친혼은 유심히 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내물의 아버지는 유명한 구도의 아들인 말구이고, 미추, 말구, 대서지(실성의 아버지)는 형제입니다.

내물은 사촌(미추 딸)과 혼인해서 눌지(맏아들)를 낳은 게 됩니다.

 

근데 이상하게 내물과 실성의 왕비는 모두 미추의 딸인데, 무슨 부인인지 이름이 없습니다.

이건 아마 두 부인이 같은 사람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이름이 없는 것 자체가 이를 감추기 위함인 것입니다.

 

근데 내물의 아들인 눌지의 어머니가 미추의 딸인데, 눌지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 부인의 이름이 나옵니다.

 

<눌지>
어머니는 보반부인(保反夫人)[또는 내례길포(內禮吉怖)라고도 한다.]으로 미추왕(味鄒王)의 딸이다

 

다른 이름으로 내례길포라고 하는데, 이름도 이상할 뿐더러 이 보반부인만 특이한 이명이 있는 걸 봐서 이를 갖게 된 어떤 사유가 있는 걸로 추측됩니다.

 

어찌 됐든 여기선 내물과 실성의 부인이 같은 사람으로 간주하고 계속 보겠습니다.

 

눌지가 내물의 아들이라 하니 그 어머니인 보반은 미추의 딸이고, 삼촌 실성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는데 왕비가 그 딸이라고 합니다.

 

즉 실성의 부인은 눌지의 어머니인 보반인데, 그 사이에 낳은 딸(동모남매)과 혼인해서 맏아들 자비를 낳은 겁니다.

 

이 딸의 이름은 삼국사기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저의 추측(뭔가를 숨김)이 거의 맞다고 보여집니다.

 

근데 눌지는 삼촌이자 양아버지인 실성을 죽이고, 동모남매를 취해 혼인까지 했습니다.
재위 42년까지 오래 임금자리에 올랐습니다.

이런 사람이 이렇게 오래토록 재위에 있었던 충격적인 이유가 나중에 밝혀집니다.

 

그럼 내물이 재위 47년 차인데도 어째서 그 아들(눌지)이 어리다고 쓴 것인지 보겠습니다.

  • 내물 할아버지 - 구도
  •   〃  아버지 - 말구(미추, 대서지와 형제)
  •   〃  왕비 - 미추 딸(즉 사촌, 보반)
  •   〃  아들 - 눌지, 미사흔, 복호

구도는 구태와 친족(형제?)으로 AD 2세기말 사람이고 미추의 아버지입니다(친족이란 건 저의 주장).

백제대왕 고이의 명으로 신라 첨해와 미추를 세운 후, 유례, 기림, 흘해, 내물까지 모두 백제대왕이 분봉합니다.

이것에 대한 설명은 나중에 글을 따로 올리겠습니다.

 

그 근거는, 제가 항상 쓰는 비밀의 열쇠입니다.


<삼국지 한전>
그중에서 12國은 辰王에게 臣屬되어 있다.
辰王은 (그 12국의 왕을) 항상 馬韓사람으로 王을 삼아 대대로 世襲하였으며, 辰王이 (그들을) 자립해서 王이 되지 못하게 하였다.
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辰王不得自立爲王
魏略: 그들은 옮겨온 사람들이 분명하기 때문에 馬韓의 제재를 받는 것이다.

 

첨해부터 실성까지 7대 동안 아들이 아닌 제삼자가 왕위를 이었습니다.

 

근데 내물의 즉위년이 356년이니 백제의 최전성기인 근초고왕 시기입니다.
내물의 전왕인 흘해가 재위 47년인데도 아들이 없어 내물이 즉위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아들이 없으면 지엄하신 백제대왕의 명으로 다른 사람, 즉 내물이 즉위한 것입니다.
참고로 첨해도 아들이 없었다 합니다.

 

<구도>
185년, 군주 임명(30세?) 20세는 너무 적어서 30세로 봅니다.
188년, 모산성 방어(33세)
189년, 백제군 격파(34세)
190년, 부곡성주 좌천(35세)
200년, 미추 출생(45세) 이때 미추를 낳았다고 하면 미추는 200년생입니다.

 

50세 이후도 자식을 볼 수 있으나 최대로 잡은 것이 45세입니다.

 

근데 내물과 실성의 왕비가 미추의 딸(보반)이랍니다.
이건 약 150년 후입니다.

 

즉 이건 연대가 맞지 않은 조작된 기록입니다.

적어도 미추는 200년생으로, 262년 즉위하고 284년에 죽었습니다.

62세에 백제대왕의 명으로 즉위하고, 장수하여 84세에 죽었다고 하면 납득은 갑니다.

 

하지만 구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45세, 즉 245년에 딸(보반)을 낳았다고 하면, 내물이 356년에 즉위했으니 356 - 245 = 111세로 대충 역산해 봐도 100년이 훌쩍 넘어갑니다.

 

그럼 둘 중에 하나입니다.

내물의 왕비는 미추의 딸이 아니거나 연도를 조작한 것입니다.

 

저는 전자에 가능성을 둡니다. 즉,

<내물>
성은 김씨로, 구도(仇道) 갈문왕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각간 말구(末仇)이다. 어머니는 김씨 휴례부인(休禮夫人)이다. 왕비는 김씨로 미추왕(味鄒王)의 딸이다.

 

이것이 전부 거짓인 겁니다.
내물은 성이 김씨인지는 모르겠으나 훗날 김씨 성을 추증한 것으로 보여지고, 구도의 손자도 아니고 왕비도 미추의 딸이 아닌 것입니다.

아버지인 말구의 나이가 그 형제인 미추와 비슷하니 말구의 아들인 내물(미추 딸과 사촌) 역시 위의 계산처럼 245년생에 356년에 즉위하면 111세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실성도,

<실성>
알지(閼智)의 후손으로 이찬 대서지(大西知)의 아들이다. 어머니 이리부인(伊利夫人)[이(伊)를 또는 기(企)라고도 한다.]은 아간(阿干) 석등보(昔登保)의 딸이다. 왕비는 미추왕(味鄒王)의 딸이다.

 

알지의 후손도 아니고 왕비도 미추의 딸이 아닌 겁니다.

앞서 썼듯이 백제대왕 근초고왕의 명으로 내물이 신라의 왕위에 오릅니다.

 

근데 내물이 제일 먼저 한 일이, 백성들에게 베푼 것이니 그 정통성이 없음을 말해 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근데 후에 배신 때리고 고구려에 붙습니다.

 

<내물>
37년(서기 392) 봄 정월,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고구려가 강성하였으므로 임금은 이찬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볼모로 보냈다.

 

392년이면 진사왕 말기로 광개토왕이 한창 남벌할 때입니다.

 

<광개토>
8년(서기 392) 가을 7월, 고구려왕 담덕(談德, 광개토왕)이 4만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석현성(石峴城) 등 10여 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즉 진사왕 말기, 담덕의 백제공략을 보고 고구려에 붙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처음에 썼듯이 내물과 실성의 왕비가 (사실 여부를 떠나) 왜 하필 미추의 딸인지 의문이고, 눌지는 삼촌(실성)을 죽였는데 어떻게 왕비가 그의 딸인지도 의문입니다.
즉 그 딸은 아비의 원수와 혼인이 가능한 것인지 의문입니다.

혹 기록에만 그렇게 적은 건 아닐까요?

이렇게 되면 그 아들인 자비까지도 어머니가 실성의 딸이라는 것도 의심이 갑니다.

 

이제 충격적인 반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당시에는 시대 정황상 미추의 딸보다 한창 전성기의 고구려의 왕녀를 왕비로 맞아야 납득이 갈 텐데, 어찌 된 일인지 백제는 물론 신라도 고구려와는 혼인을 안 맺습니다.

 

근데 아니나 다를까 삼국사기에는 눌지부터 마립간의 칭호를 씁니다.
삼국유사에는 내물부터 마립간이라고 써서 나무위키에는 내물 마립간이라고 나옵니다.

 

여기에 충격적인 비밀이 있습니다.

 

실성(402~417)이 담덕(391~413)과 친한 상태에서 담덕이 먼저 죽고, 실성은 조카(눌지)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만약 담덕이 살아있었으면 눌지가 감히 실성을 헤칠 수 없을 겁니다.


실성과 담덕에 대해서는 다른 글을 참고하세요.

 

이건 장수왕이 뒤에서 눌지를 사주했든가 아니면 눌지부터 마립간의 칭호를 쓰는 걸로 보아(삼국사기) 어떤 군사적 세력이 받쳐 주었던 걸로 보여집니다.

 

<눌지>
2년(418) 임금의 동생 복호(卜好)가 고구려에서 나마 제상(堤上)과 함께 돌아왔다.

 

역시 장수왕이 뒤에서 봐주고 동생 복호가 움직였던 겁니다.

 

즉 눌지는 장수왕이 앉혀서 왕이 된 인물이고, 마립간은 고구려에서 내려준 칭호입니다!

다시 말해 백제대왕의 분봉(이사금)을 버리고, 고구려가 내려주는 칭호를 받고 그 臣民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내물~실성~눌지 이 삼대에서부터 고구려로 신민화 되어간 것입니다.

 

이는 광개토와 장수의 시기와 완벽히 겹칩니다.
물론 신라 문무~신문 대에서 그 기록은 삭제됩니다.

 

<내물>
37년(392) 봄 정월,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고구려가 강성하였으므로 임금은 이찬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볼모로 보냈다.

 

바로 이때 담덕이 내물에게 마립간의 칭호를 주고, 신라는 실성을 볼모로 보낸 것입니다. 
즉 백제에서 고구려로 갈아탄 것입니다.

혹은 1대 혁거세 거서간처럼 신라 자체에서 마립간 칭호를 쓴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내물>
38년(393) 여름 5월, 왜인이 와서 금성(金城)을 포위하고 닷새 동안 풀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진사왕이 왜를 움직여 금성을 포위케 한 것입니다.

 

그럼 다시 돌아와서 결론을 말하겠습니다.

 

-결론-
내물과 실성의 왕비는 바로 고구려의 왕녀인 것입니다. 
그것을 문무~신문 대에서 미추의 딸로 바꿔치기 했습니다.

 

즉 신라 임금들의 근친혼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이를 날조하는 과정에서 어쩌다 보니 결과적으로 근친혼이 된 것입니다.

 

눌지의 어머니 역시 고구려의 왕녀였습니다.
따라서 눌지의 이름 없는 왕비도 고구려의 왕녀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은 모두 광개토와 장수의 친족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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