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3. 13. 08:45ㆍ백제, 신라, 가야, 왜
전 글에서 기루대왕이 죽기 3년 전 사로국의 원군 요청으로 다섯 갈래로 말갈의 본진을 공격하는 상황까지 진행했습니다.
<지마>
14년(서기 125) 봄 정월, 말갈(靺鞨)이 북쪽 변경을 크게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했다.
가을 7월, 그들은 또다시 대령(大嶺) 목책을 습격하고 이하(泥河)를 넘어왔다. 임금이 백제에 서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자, 백제는 다섯 명의 장군을 보내 돕게 하였다. 적병은 이 소식을 듣고 물러갔다. ↓ ↓

이 때 기루대왕이 보낸 군대는 니하에서 퇴각하는 말갈군을 기다려 매복·기습 공격으로 대승을 거둡니다.
다섯의 장수를 보냈다고 하는 걸 보아 적어도 1만의 군사는 보냈을 겁니다.
한명당 2천 군사를 통솔하고 각지에 매복한 겁니다.
말갈군이 오면 밑(남쪽)에서부터 차례로 기습, 이걸 5번을 반복합니다.
말갈 역시 1만~2만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추정합니다.
이 정도 병력이면 일개 부족이 아닌 여러 부족을 통합한 연맹체의 수장급입니다.
결국 포위되어 말갈은 궤멸됩니다. ↓
이 때의 고구려왕은 태조대왕으로 72년(서기 124)서부터 80년(서기 132)까지 8년 통삭제입니다.
아마 이 때의 궤멸을 숨기기 위한 것 같습니다.
이에 서기 137년까지 장장 12년 동안 말갈은 쳐들어오지 않습니다. ↓
<일성>
4년(서기 137) 봄 2월, 말갈이 국경에 쳐들어와서, 장령(長嶺) 지방의 다섯 군데 목책을 불태웠다.
말갈을 격파해 대승을 거둔 기루대왕의 명성은 삼한 곳곳에 울려퍼집니다.
50여국의 임금들이 축하사절을 보냄은 물론입니다.
그것이 기루 50년~51년의 삭제된 기록일 겁니다.
하지만 '세월에는 장사 없다'고 기루대왕은 향년 96세로 죽습니다.
<기루>
52년(서기 128) 겨울 11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이번엔 마한 50여국의 임금들이 몸소 빈소를 찾음은 물론입니다.
이제 위의 말갈은 고구려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 = 말갈
고구려본기를 보니 고구려의 기록을 통삭제했음도 어마어마 합니다.
즉 고구려가 말갈임을 숨기기 위함입니다.
<대무신>
20년(서기 37), 임금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정확히 100년 전에 이미 낙랑은 고구려한테 망했습니다.
근데 낙랑 멸망 후, 이 100년 동안 삼국사기는 고구려라 하지않고 말갈이라고 합니다.
혹시 고구려가 말갈의 한 일파인 걸까요?
아니면 고구려 자체가 말갈인 걸까요?
저는 지금까지 말갈은 북방족의 통칭으로 이해했습니다.
말갈 = 부여족
통칭의 다른 예: 고구려 = 맥족, 옥저 = 예족
말갈 = 예맥
즉 고구려를 말갈이라 해서 이상할 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삼국사기에서 고구려라 하지않고 말갈이라 한 겁니다.
또 이것도 성립됩니다.
말갈 = 조선의 유민
즉 조선이 말갈인 겁니다.
→ 조선이 말갈이 아님은 아래에 밝혀집니다.
조선 = 말갈 = 고구려 => 말갈(통칭)→(멸칭)
중요한 건 이 북방족인 말갈과 남방족의 韓倭가 구별을 한단 겁니다.
<삼국지 한전>
(후한) 환제(桓帝), 영제(靈帝) 말기에는 ①한과 예과 강성하여 군, 현에서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다. 많은 백성들이 한국으로 유입되었다. 건안(建安 : 후한 헌제의 연호, 196-220) 연간에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屯有縣) 이남 황무지를 나누어 대방군(帶方郡)으로 만들었다. 공손모(公孫模), 장창(張敞) 등을 파견하여 한의 유민을 모아 군대를 일으키고 ②한과 예를 정벌하니 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왔다. 이 뒤 ③왜와 한은 드디어 대방에 복속되었다.
①, ②는 한반도 남부의 마한(전체가 아닌 마한의 북부)과 북부의 예를 뜻함
③은 남부 왜, 변진한을 뜻함(이 왜가 新彌多離)
★ 황무지(늪지대)였던 황해도가 토지로 바뀌는 시기(건안 연간 196~220)
즉 경주항, 전주항, 광주항, 천안항, 평양항, 김해항 등의 바닷물이 빠지는 시기
(왕건의 가문이 송악의 큰 바닷상인임을 생각하면 고려 초까지 개성은 항구였음)
즉 漢나라가 황해도에 대방군을 만든 후 군대를 보내 마한의 북부(경기, 충청), 한강 이북의 예를 정벌하니 그 후에 新彌多離와 변진한이 대방에 복속되었다는 얘깁니다.
이 때 맥은 언급이 없는 걸로 보아 한반도가 아닌 더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즉 고구려(맥)는 요동, 간도에서 한반도로 남하하였던 겁니다.
<대무신>
20년(서기 37), 임금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27년(서기 44) 가을 9월, 한나라 광무제가 병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와서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살수(薩水)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
서기 44년은 백제본기에서 첫번째로 통삭제되는 10년 사이의 중간에 있는 년도입니다.
다루 11년(서기 38) - 10년 통삭제 - 21년(서기 48)
즉 해씨 辰의 다루대왕이 후한과의 전쟁에 휘말려 어떤 사건이 있던 걸 통삭제했습니다.
근데 강원도 낙랑은 37년에 고구려에 멸망, 평안도 낙랑은 44년에 후한에 멸망합니다.
이건 무얼 의미하나요?
혹시 이건가요? ↓
백제본기 온조에도 낙랑이 보이고, 신라본기 혁거세에도 낙랑이 보입니다.
그럼 이 낙랑은 결국 위 지도와 같은 영토가 됩니다. ↑
이 낙랑이 북방에서 남하하는 맥, 즉 말갈에 이렇게 밀립니다. ↓
그래서 옥저와 동예가 생겨난 겁니다. ↓
그 후 37년에 고구려 = 말갈은 강원도 낙랑을 멸망시킵니다. ↓
<대무신>
20년(서기 37), 임금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러다 7년 후 44년에 끝까지 살아남은 평안도 낙랑은 후한에 의해 멸망하고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
평안도 낙랑은 평양성을 최후의 보루 삼아 끝까지 저항한 듯 합니다.
이 낙랑의 역사가 말살된 것이 아쉽습니다.
<대무신>
27년(서기 44) 가을 9월, 한나라 광무제가 병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와서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살수(薩水)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그 후 고구려 = 말갈과 후한의 낙랑군(한사군)은 피터지게 싸웁니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에 나오는 말갈은 결국 고구려라는 얘기가 됩니다.
즉 비류·온조 집단도 말갈이라는 겁니다.
근데 왜 삼국사기는 이들이 말갈이라는 것을 숨겼을까요?
또 고구려가 말갈이라는 걸 왜 밝히지 않은 걸까요?
그리고 왜 고구려라고 안 하고 말갈이라고 한 걸까요?
그건 바로 이들이 한반도로 이주한 이방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삼국지 한전>
그 중에서 12國은 辰王에게 臣屬되어 있다.
辰王은 (그 12국의 왕을) 항상 馬韓사람으로 王을 삼아 대대로 世襲하였으며, 辰王이 (그들을) 자립해서 王이 되지 못 하게 하였다.
魏略: 그들은 옮겨온 사람들이 분명하기 때문에 馬韓의 제재를 받는 것이다.
혹시 맥족이 한반도로 남하하면서 예족을 학살한 건 아닌지 의문입니다.
즉 고대엔 전쟁에 승리하면 남자는 대부분 죽이고 여자는 노예로 만듭니다.
이건 중세까지도 그랬고 역사기록에도 남아있는 겁니다.
예: 칭기즈칸의 몽고군
이 몽고군한테 우리는 40여년 간 유린당했습니다.(여몽전쟁)
1270(원종 항복) - 1231(몽고 침략) = 39년
중세에 그 정도인데 하물며 고대겠습니까?
학살하면서 남하하는 맥족을 밑에서 지켜보고 있는 건 삼한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만행을 역사에 기록하고 말갈이라는 멸칭으로 부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고려는 이들을 기록한 삼한, 즉 백제·신라·가야의 역사기록을 축소, 삭제, 날조한 것입니다.
그 전에 신라는 신라대로 백제와 가야의 역사를 말살했습니다.
근데 이상한 점이 2개 있습니다. ↓
☆ 이상한 점 하나
서기 37~44년은 고구려 3대 대무신왕(재위 18~44년)의 시대입니다.
그럼 선왕인 주몽과 유리의 대에 이미 남하가 거의 끝난 시기라는 걸까요?
살펴본 바 거의 그런거 같습니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그럼 이들의 지배구조는 이렇습니다.
곧 고구려의 지배구조입니다.
지배층: 맥인(말갈, 부여)
피지배층: 예인(조선, 낙랑, 옥저, 동예 등)
그래서 이들을 합쳐 예맥이라 부릅니다.
이제 말갈이 고구려라는 게 밝혀진 이상 앞으로 한층 더 삼국사기가 읽기 수월해질 겁니다.
말갈의 정체 = 고구려
백제본기, 신라본기에서 고구려라 안 하고 말갈이라고 부른 건 결국 멸칭이었던 겁니다.
☆ 이상한 점 두울
<대무신>
27년(서기 44) 가을 9월, 한나라 광무제가 병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와서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살수(薩水)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 후한 광무제의 낙랑 침략 150년 전에 전한의 무제가 위씨 조선을 침략해 멸망시켰습니다.
왕검성 전투(王儉城戰鬪) 기원전 109년 ~ 기원전 108년
이들이 왜 이렇게까지 바다 건너와 조선·낙랑을 멸망시켰던 걸까요?
나중에 기회되면 한번 파헤쳐보겠습니다.
<한민족의 비밀>
근데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서 보면 원래 이거였던 걸까요? ↓
즉 고조선의 영역이라 보면 됩니다.
하지만 말갈한테 요동을 빼앗기고 저렇게 강을 끼고 대치상태입니다. ↑
차츰 말갈이 남하해 낙랑은 남으로 밀려납니다. ↓
낙랑의 남하로 韓과 혼혈이 일어납니다. ↓
그것이 삼한이고, 한반도 남부 끝으로 갈수록 혼혈의 빈도가 낮습니다.
그래서 후세에 이곳을 왜라고 부르게 됩니다.
이 왜가 열도로 건너가고, 중국에서는 이 열도의 왜를 기록한 겁니다.
혹시 북에서 말갈이 내려오니까 새로운 땅을 개척하려고 열도로 넘어간 걸까요?
<사족>
삼한 특히 백제의 우수한 문화가 혹시 낙랑에서 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즉 이제까지 알고있던 고구려·부여의 말갈 문화가 아니라 고조선·낙랑의 예족 문화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반쪽 조상의 수많은 유산들이 북녙 땅 밑에 고스란히 묻혀있습니다.
백제문화의 원형을 알 수 있는, 백제의 장인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 수 있는 겁니다.
이는 언젠가 통일이 되면 세상에 진실이 드러날 날이 올 것입니다.
<신라 유리>
13년(서기 36) 가을 8월,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朶山城)을 점령하였다.
14년(서기 37), 무휼(無恤, 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키자, 그 나라 백성 5천 명이 투항해왔다. 그들을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17년(서기 40) 가을 9월, 화려(華麗)와 불내(不耐) 두 현(縣)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거느리고 북쪽 국경을 침범하였다. 맥국(貊國)의 우두머리(貊國渠帥)가 병사를 동원하여 곡하(曲河) 서쪽에서 맞아 공격하여 이들을 물리쳤다. 임금이 기뻐하여 맥국과 친교를 맺었다.
이 맥국의 우두머리가 위 14년에 나오는 무휼로 보입니다. ↑
왜냐 하면 위에 설명했듯이 고구려는 맥족, 동예는 예족이라 함이 정설입니다.
그럼 동예일리는 만무하니 기록의 연결 정황상 무휼입니다.
딱 누구라고 쓰지않고 맥국의 우두머리라고 돌려 쓴 것은 훗날 신라나 고려 사관이 고친 겁니다.
그리고 맥국의 우두머리는 ↓이곳에서 사로국과 친교를 맺습니다.(동그라미 맥국)
고구려 대무신왕 무휼로 추정되는 이 맥국의 우두머리가 무슨 이유에선지 경북 영주까지 내려옵니다.
그리고 사로국을 침범한 화려, 불내를 공격해 격퇴시켜 사로국 유리의 환심을 삽니다. ↓
여기서 화려와 불내의 등장이 무휼의 계책일 수 있습니다.
즉 유리의 환심을 사기 위한 속임수란 겁니다.
17년(서기 40) 가을 9월, 화려(華麗)와 불내(不耐) 두 현(縣)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거느리고 북쪽 국경을 침범하였다. 맥국(貊國)의 우두머리(貊國渠帥)가 병사를 동원하여 곡하(曲河) 서쪽에서 맞아 공격하여 이들을 물리쳤다. 임금이 기뻐하여 맥국과 친교를 맺었다.
19년(서기 42) 가을 8월, 맥국의 우두머리가 사냥을 하여 새와 짐승을 잡아 바쳤다.
근데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 다음 부분이 충격적입니다.(좀 아래쪽에 설명)
<대무신>
27년(서기 44) 가을 9월, 한나라 광무제가 병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와서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살수(薩水)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겨울 10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그를 대수촌(大獸村) 언덕에 장사지내고, 호를 대무신왕(大武神王)이라 하였다.
대무신왕이 후한 광무제가 보낸 漢군에 의해 전사합니다.(후유증?)
여기서의 낙랑은 평안도 낙랑입니다.(한사군; 낙랑군)
대무신이 죽고 민중, 모본에 이어 태조대왕이 즉위합니다.
(이 시기의 고구려왕들의 죽음도 심상치 않음)
<신라 유리>
19년(서기 42) 가을 8월, 맥국의 우두머리가 사냥을 하여 새와 짐승을 잡아 바쳤다.
↕ 이 사이 12년이 통삭제됐습니다.
맥국과 사로국 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31년(서기 54) 봄 2월, 자미(紫微)성좌에 혜성이 나타났다.
<충격적인 정황>
그리고 사로국에 용이 나타나고 묘사가 이렇습니다. ↓
33년(서기 56) 여름 4월, 금성 우물에서 용이 나타났는데 얼마 후에 소나기가 서북쪽에서 몰려왔다.
5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 이건 태조대왕이 서북쪽(맥국)에서 쳐들어와 금성을 유린한 정황입니다.(금성이란 이름이 의심가나 일단 금성이라 함)
한달 후, 태조대왕이 사로국의 왕좌에 앉습니다.
즉 유리가 태조대왕에게 무릅 끓고 속국이 된 것입니다!
광개토왕 비문에 보이는 '옛부터 신라 속국'이 이 때의 일을 말함인가 봅니다.
혹 대무신왕은 진심일 수 있으나 태조대왕은 다릅니다.
유리가 병사할 정도로 능욕한 것입니다.
34년(서기 57) 가을 9월, 임금이 병환이 나자 신하들에게 말했다.
“탈해는 신분이 임금의 친척이요,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고, 여러 번 공을 세웠다. 나의 두 아들은 재능이 그를 따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죽은 뒤에는 탈해를 왕위에 오르게 하리니, 나의 유훈을 잊지 말라.”
겨울 10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사릉원(蛇陵園)에 장사 지냈다.
유리는 목숨은 건졌으나 병이 나고 위와 같이 유언을 남기고 죽습니다.(충격 받아서 홧병?)
즉 왕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인 탈해에게 왕위를 넘겨줍니다.
왜 그럴까요?
탈해의 호전적임을 이미 우리는 잘 압니다.(전 글 기루대왕 참고)
이는 한반도 남부의 왜를 연합해 맥국을 물리치고 복수해 주길 바래서 입니다.
탈해가 이끄는 사로국이 주축이 되어 진한·왜 연합군이 다루대왕을 상대한 것이 전 글의 내용입니다.
근데 실은 이 진한·왜 연합군은 태조대왕의 말갈을 주적으로 하고 있던 겁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삼한은 이 때부터 이미 고구려와 원수지간이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29년(서기 56) 봄 2월, 임금이 동부에 우곡성(牛谷城)을 쌓도록 명령하여 말갈을 방비하였다.
- 7년 통삭제 -
36년(서기 63) 겨울 10월, 임금은 낭자곡성(娘子谷城)까지 국경을 개척하였다.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모임을 청하였으나 신라왕이 듣지 아니하였다.
다루 나름대로 말갈(태조대왕)을 방비하고 있던 거군요.
7년 동안 나름 말갈과 싸워 국경도 넓혔습니다.
근데 탈해는 이 다루대왕도 못 믿어서 만나주지 않습니다.
다루가 원래는 부여족이고, 그 선왕인 비류·온조가 辰왕을 죽여서 그렇습니다.
탈해 입장에서는 다루대왕이 그저 말갈로 보였던 걸까요?
전 글 기루대왕에서의 의문이 여기서 풀립니다.
즉 탈해는 늙고 귀찮아서도 아니고 한창 젊은 다루한테 무릅 끓기 싫어서도 아니었습니다.
이런 정황이 있었기 때문에 탈해는 다루대왕을 안 만났던 겁니다.
<바로 이것이 충격>
근데 위에 유리가 충격받아서 병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혹시 태조대왕이 사로국의 왕비를 추행하고, 그 병사들까지 궁녀들을 건들였던 걸까요?
갑자기 견훤이 생각나는..
그 후 탈해조를 보면 탈해는 백제 와산성 쟁탈전으로 일생을 보내다 죽습니다.
하지만 주적은 백제가 아니고 말갈임을 위 설명을 통해 우린 이제 압니다.
말갈(태조대왕)이 단 1도 안 나오는 걸로 보아 말갈에 대한 모든 걸 삭제했습니다.
즉 이건 신라 사관이 삭제한 게 아니고 고려 사관이 삭제한 겁니다.
이 말은 1차적으로 왜를 지울려고 신라 사관이 삭제했습니다.(→ 구 삼국사 원 사료)
2차적으로 고구려계 말갈을 지울려고 고려 사관이 삭제했습니다.(→ 구 삼국사)
참고: 삼국사=삼국사기
그럼 다시 보겠습니다.
<지마>
14년(서기 125) 봄 정월, 말갈(靺鞨)이 북쪽 변경을 크게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했다.
가을 7월, 그들은 또다시 대령(大嶺) 목책을 습격하고 이하(泥河)를 넘어왔다. 임금이 백제에 서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자, 백제는 다섯 명의 장군을 보내 돕게 하였다. 적병은 이 소식을 듣고 물러갔다.
사로국 지마의 절박한 원군 요청으로 기루대왕이 대군을 보내 이들 말갈을 물리쳐줬습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위 정황과 연결시켜 보세요.
이 얼마나 다이나믹하고 드라마틱한 감동의 대서사시 같나요?
새삼 기루대왕의 위업이 느껴집니다.
제가 역사소설 쓰는 거 같나요?
보다시피 실시간으로 삼국사기 보면서 설명하는 겁니다.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한가지 아래의 의문점을 보겠습니다.
<태조대>
70년(서기 122), 임금이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침입하였다. 부여왕이 병사를 보내 요동을 구하고, 우리를 격파하였다.
[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에 멸망하였는데, 지금 고구려왕과 함께 군사 행동을 한 것은 아마도 멸망한 후 다시 일어난 것인가?] ← 김부식
이 마한은 정황상 기루대왕의 영역인 마한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태조대왕의 말갈과 숙적이기 때문에 이들과 함께 군사행동을 하지않음은 물론입니다.
그럼 이 마한은, 태조대왕의 속국인 사로국으로 봐야 합니다.
즉 진한을 마한으로 잘못 기록한 오기이거나 신라 사관이 고친 겁니다.
속국인 사로국 이하 진한이 군사를 보내 태조대왕의 군대에 편입된 것입니다.
이에 사로국은 병사가 부족해 왜병이 온다는 헛소문을 듣고도 무서워서 백성들이 숨습니다. ↓
흉흉한 당시 분위기를 잘 전해줍니다.(4월 ↓ )
<지마>
11년(서기 122) 여름 4월, 큰 바람이 동쪽에서 불어와 나무를 꺾고 기와를 날리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그쳤다.
서울의 사람들이 왜병이 크게 몰려온다는 헛소문을 듣고 산골짜기로 다투듯 들어가 숨었다. 임금은 이찬 익종 등을 시켜 그들에게 사실을 알리도록 하였다.
기루대왕은 어떨까요?
아쉽게도 9년 통삭제됐습니다.
<기루>
40년(서기 116)
- 9년 통삭제 -
49년(서기 125)
다만 태조대왕의 말갈군과 전쟁했으리라 짐작될 뿐입니다.
♤ 여기까지가 개루대왕이 즉위하기 전의 한반도 상황입니다.
이 시대적 배경을 알아야 개루대왕의 기록 대부분이 왜 통삭제됐는지를 그나마 알 수 있습니다.
<개루>
개루왕(蓋婁王)은 기루왕(己婁王)의 아들이다. 성품이 공손하고 행동을 바르게 했다. 기루왕이 재위 52년에 돌아가시자 왕위를 이었다.
蓋婁王 己婁王之子 性恭順 有操行 己婁在位五十二年薨 卽位
4년(서기 131) 여름 4월, 임금이 한산(漢山)에서 사냥하였다.
5년(서기 132) 봄 2월,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쌓았다.
10년(서기 137) 가을 8월, 경자일에 형혹성(熒惑星, 화성)이 남두성(南斗星)을 침범하였다.
28년(서기 155) 봄 정월, 그믐 병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0월, 신라의 아찬(阿飡) 길선(吉宣)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탄로나서 도망쳐왔다. 신라의 왕이 글을 보내어 길선을 돌려달라고 청했으나 임금이 보내지 않았다. 신라왕이 분노하여 군대를 내어 쳐들어왔으나 모든 성을 굳게 지키고 나가지 않으니, 신라군이 양식이 떨어져 돌아갔다.
39년(서기 166) 임금이 돌아가셨다.
<지마>
14년(서기 125) 봄 정월, 말갈(靺鞨)이 북쪽 변경을 크게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했다.
가을 7월, 그들은 또다시 대령(大嶺) 목책을 습격하고 이하(泥河)를 넘어왔다. 임금이 백제에 서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자, 백제는 다섯 명의 장군을 보내 돕게 하였다. 적병은 이 소식을 듣고 물러갔다.
<일성>
4년(서기 137) 봄 2월, 말갈이 국경에 쳐들어와서, 장령(長嶺) 지방의 다섯 군데 목책을 불태웠다.
서기 125년의 역사적인 기루대왕의 원군에 의해 말갈(고구려)은 크게 궤멸하고 한동안 쳐들어오지 않습니다.(137년까지)
이에 대한 설명은 위에 이미 했습니다.
그래서 개루대왕은 한가하게 사냥도 하고 북한산성을 쌓아 말갈의 재침입에 대비합니다.
4년(서기 131) 여름 4월, 임금이 한산(漢山)에서 사냥하였다.
5년(서기 132) 봄 2월,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쌓았다.
기루대왕이 96세에 죽었으니 그 아들인 개루의 나이가 적어도 60은 넘었을 겁니다.
근데 즉위년에서 3년까지 삭제된 건 둘째치고, 재위가 39년입니다.
그럼 60 + 39 = 99세가 되는데, 이건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 하면 '적어도'라는 전제가 붙기 때문에 '적어도'가 아니라면 100세가 넘게 되기에 그렇습니다.
그럼 이건 뭐냐?
아들이 아닌 손자이거나 쿠데타가 일어났다고 봄이 맞습니다.
근데 쿠데타는 희박한 것이, 기루대왕이 말년에 대말갈전에서 크게 승리했는데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건 아닌거 같습니다.
그럼 아들이 아닌 손자입니다.
즉 개루는 기루의 손자인 겁니다.
삼국사기엔 子가 즉위한 임금이 꽤 되는데, 이렇듯 나이를 따져 애매하면 손자라고 봄이 맞습니다.
또한 孫子라고 한 임금이 한명도 없는 걸로 보아 子라고 나오면 손자입니다.
그럼 개루의 나이는 즉위년에 40세 전후로 추정됩니다.
40 + 39 = 79세 전후에 죽었습니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40세는 늦은 나이이긴 해도 할아버지 기루대왕의 업적을 보면서 태자수업을 착실히 받았습니다.
5년(서기 132) 봄 2월,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쌓았다.
↕ 이 사이 5년 동안 기록이 왜 삭제된 걸까요?
10년(서기 137) 가을 8월, 경자일에 형혹성(熒惑星, 화성)이 남두성(南斗星)을 침범하였다.
130년대는 고구려, 신라 모두 특별한 기록이 없는 태평한 시기로 보입니다.
그럼 5년 동안이나 기록이 없는 이유는 단 하나 뿐입니다.
바로 변한과의 문제때문입니다.
여기서 온조의 백년대계를 다시 보고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온조의 백년대계>
온조 - 창업, 경기 공략
다루 - 마한 공략 ①
기루 - 마한 新彌多離 공략 ②
개루 - 변한 공략 ③
?? - 진한 → 사로국 → 삼한일통 ④
?? - 열도 공략 ⑤
선왕들이 ②까지 정벌해 이제 개루대왕의 숙제는 ③을 정벌하는 겁니다.
말갈도 잠잠해진 지금이 최적의 시기입니다.
하지만 전방을 공격하기 전에 후방이 안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혹시나 모를 월지국 방어를 위해 먼저 북한산성을 쌓습니다.
5년(서기 132) 봄 2월,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쌓았다. → 말갈의 재침 대비
6년(서기 133) 변한에 사신 보냄, 변한이 명을 안 들음
7년(서기 134) 변한 공격준비, 新彌多離도 준비하라 명함
8년(서기 135) 마한 연합군, 변한으로 진격
9년(서기 136) 변한·왜 연합군과 대치, 소강 상태, 사로국에 공격 명함 → 양동작전
<일성>
3년(서기 136) 봄 정월, 웅선(雄宣)을 이찬으로 삼고, 겸하여 중앙과 지방의 병마의 일을 맡겼다. 근종(近宗)을 일길찬으로 삼았다.
→ 사로국도 개루대왕의 명에 따라 공격 들어갑니다. ↑
<개루>
10년(서기 137) 가을 8월, 경자일에 형혹성(熒惑星, 화성)이 남두성(南斗星)을 침범하였다.
<일성>
4년(서기 137) 봄 2월, 말갈이 국경에 쳐들어와서, 장령(長嶺) 지방의 다섯 군데 목책을 불태웠다.
→ 하지만 사로국은 말갈 방어를 위해 병력을 회군합니다. ↓
11년(서기 138) 2차 열도 왜병, 변한에 도착
12년(서기 139) 1차 대회전, 무승부, 다시 소강상태
개루대왕 본군: 2만5천
신미국 외 마한 원군: 1만5천 (신운신국 + 비미국)
사로국 외 진한 원군: 1만5천
공격측 총 5만5천대군
구야국 외 변한 본군: 2만
열도 왜 1차 원군: 2만
열도 왜 2차 원군: 1만
수비측 총 5만대군
<변진 12국>
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凍國) 변진접도국(弁辰接塗國),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 변진고순시국(弁辰古淳是國), 변진반로국(弁辰半路國)) 변진낙노국(弁辰樂奴國), 변진미오야마국(弁辰彌烏邪馬國), 변진감로국(弁辰甘路國),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 변진주조마국(弁辰走漕馬國), 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 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
☆ 열도 왜는 구야국의 철이 필요하기에 이해관계에 따라 원군을 보냄
<일성>
4년(서기 137) 봄 2월, 말갈이 국경에 쳐들어와서, 장령(長嶺) 지방의 다섯 군데 목책을 불태웠다. → 방어를 위해 회군
5년(서기 138) 가을 7월, 알천(閼川)의 서쪽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 다시 변한 공격준비
겨울 10월, 임금이 북쪽을 두루 살펴보고, 태백산(太白山)에서 몸소 제사 지냈다. → 말갈이여 오지마소서~
6년(서기 139) 8월, 말갈이 장령을 습격하여 백성들을 노략질하였다.→ 말갈의 정탐 겸 시간 벌기 작전?
겨울 10월, 말갈이 다시 습격해왔으나, 눈이 심하게 내리자 물러갔다. → 하늘이 도우심, ↑ 제사의 효과?
7년(서기 140) 봄 2월, 장령에 목책을 세워 말갈을 방어하였다. → 이제야 변한 공격함
<개루>
13년(서기 140) 2차 대회전 → 사로국의 뒤늦은 참가, 양동작전, 승부 결정남(결정타를 먹임)
이제 구야국은 구야한국(狗邪韓國)으로 바뀌고 개루대왕의 직할지가 됩니다.
철이 생산되고 열도 왜와 통하는 중요 요충지이기에 그렇습니다.
변진에 대한 감찰은 덤입니다.
또한 변한은 변진으로 명칭이 바뀝니다.
<개루>
14년(서기 141) 변진 정국 수습 안정화
15년(서기 142) 열도 왜로 사신 보냄
16년(서기 143) 열도 침공군 전쟁준비
17년(서기 144) 삼한의 대군, 열도 왜로 침공
~ 20여년 간 열도 왜 침공 기간 + 수습 안정 기간 ~
<요약>
먼저 개루대왕은 1차로 큐슈를 침공합니다.
군선 100척 이상 + α + 백제 기마대 + 삼한의 대군
당시 열도 왜의 병력수준(=오합지졸)은 전 글 참고(백제대왕, 금동관을 하사하다)
큐슈 평정 후, 2차 침공군 세토 내해로 긴키까지 들어갑니다.(신무의 동정 모티브)
긴키 평정 후, 야마타이국 외 각 지방수장들을 마한인으로 교체(고분시대 시작)
야마타이국 왕은 특별히 금동관 외 종합선물셋트 하사?
39년(서기 166) 임금이 돌아가셨다. (향년 79세?)
그 후 辰왕, 세습이 끊기면 야마타이국 외 각 지방수장들을 새로운 마한인으로 임명(반란 방지용)
예: 비미호, 비미궁호
<아달라>
20년(서기 173) 여름 5월, 왜(倭)의 여왕 비미호(卑彌乎)가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삼국지 변진한전>
그 중에서 12國은 辰王에게 臣屬되어 있다.
辰王은 (그 12국의 왕을) 항상 馬韓사람으로 王을 삼아 대대로 世襲하였으며, 辰王이 (그들을) 자립해서 王이 되지 못 하게 하였다.
魏略: 그들은 옮겨온 사람들이 분명하기 때문에 馬韓의 제재를 받는 것이다.
이 개루대왕 대에 이미 열도 왜를 정벌했기에 비미호가 나올 수 있던 겁니다.
열도 왜의 침공과정은 신무천황기에 잘 나와있으니 일본서기를 참고하세요.
그럼 이 위대한 개루대왕이 죽고 말갈과 대치상태의 한반도는 이제 어찌 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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