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신라, 가야, 왜

고구려 국내(國內)의 위치를 밝히다!

scale700 2025. 4. 6. 04:25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지가 국내란 곳입니다.

 

<국내성> - 위키백과 -

국내성(國內城)은 고구려 제2대 유리왕 22년(서기 3년)부터 장수왕 15년(427년)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고구려의 수도였으며, 고구려는 이곳을 중심으로 영토를 넓히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의 틀을 갖추어 나갔다.

 

<유리명>

22년(서기 3) 겨울 10월, 임금은 국내(國內)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이곳은 그동안 설이 분분하며 학계에서는 그 위치가 여기랍니다.

출처: 국내성, 나무위키

 

하지만 고구려의 첫 도읍지 즉 주몽의 졸본성이 연변 연길이라 이미 밝혔던 바, 그 두 번째 도읍지는 졸본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왜냐 하면 고구려 초기 역대 임금들이 즉위하면 주몽묘에 제사 지내러 졸본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대무신>

3년(서기 20) 봄 3월, 동명왕(東明王)의 사당을 세웠다.

<신대>

3년(서기 167) 가을 9월, 임금이 졸본으로 가서 시조묘(始祖廟)에 제사 지냈다.
겨울 10월, 임금이 졸본에서 돌아왔다.

<고구천>

2년(서기 180) 가을 9월, 임금이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동천>

2년(서기 228) 봄 2월, 임금이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 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먼저 유리 11년에 졸본의 북쪽에 위치한 걸로 추정되는 선비를 정벌합니다.

 

<선비족> - 나무위키 -

선비(鮮卑)는 만주, 내몽골, 몽골, 다싱안링(대흥안령) 산맥 서쪽, 일부 러시아 극동 남부 지역에 분포했던 동호계 민족이었으며, 유목·수렵·목축·농업 등을 영위했다.

 

<유리명> ▣

11년(기원전 9) 여름 4월, 임금은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선비(鮮卑)는 그들의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우리와 화친하지 않으면서, 이로우면 나와서 노략질하고 불리하면 들어가 지키니 나라의 근심거리로다. 만약 이들을 없애버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장차 그에게 큰 상을 줄 것이다.”
부분노(扶芬奴)가 나와서 말하였다.
“선비는 지세가 험하고 수비가 견고한 나라로, 사람들이 용감하나 어리석습니다.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지만 꾀로 굴복시키기는 쉽습니다.”
임금은 말하였다.
“그러면 어찌하면 좋은가?”
부분노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사람을 시켜 배반한 것처럼 해서 저들에게 보내 거짓말을 하되, ‘우리나라는 작고 군대가 약하므로 겁이 많아 움직이기 어렵다.’고 말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선비는 필시 우리를 쉽게 생각해서 대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 틈을 기다렸다가 정예병을 이끌고 사잇길로 들어가 수풀에 숨어서 그 성을 엿보겠습니다. 이때 임금께서 군사를 그 성 남쪽으로 출동시킨다면 그들이 반드시 성을 비우고 멀리 쫓아올 것입니다. 그러면 신은 정예병을 이끌고 그 성으로 달려 들어가고, 임금께서는 친히 용감한 기병을 거느리고 양쪽에서 협공을 한다면 이길 수 있습니다.”
임금은 그 의견에 따랐다. 선비는 과연 문을 열고 군대를 출동시켜 뒤쫓았다. 이때 부분노는 군사를 거느리고 그 성으로 들어가니 선비가 그것을 보고 크게 놀라 되돌아 달려 들어왔다. 부분노는 성문을 지키며 막아 싸워 수많은 선비들의 목을 베어 죽였다. 임금은 깃발을 들고 북을 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선비가 앞뒤로 적을 맞게 되자 계책이 없고 힘이 다해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그리고 한 사건이 일어난 후에 설지의 보고를 듣습니다. ↓

<유리명>
21년(서기 2) 봄 3월,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쓸 돼지가 달아났다. 임금은 희생(犧牲)을 관장하는 설지(薛支)에게 명하여 뒤쫓게 하였다. 그는 국내 위나암(尉那巖)에 이르러 돼지를 찾아서 국내 사람의 집에 가두고 기르게 하였다. 설지가 돌아와 임금을 뵙고 말하였다.
“신이 돼지를 쫓아 국내 위나암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의 산수가 깊고 험한데다 땅이 오곡을 키우기에 알맞고, 게다가 고라니와 사슴, 물고기와 자라 등 산물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임금께서 만약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시면 백성의 이익이 끝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전쟁의 걱정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도읍을 옮긴 후 이제 마음이 태평해져 사냥을 즐깁니다.

22년(서기 3) 겨울 10월, 임금은 국내(國內)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12월, 임금이 질산(質山) 북쪽에서 사냥하면서 5일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대보(大輔) 협보(陜父)가 간하여 말하였다.
“임금께서 새로 도읍을 옮겨 백성들이 아직 안정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부지런히 힘쓰고 치안 관련의 행정을 돌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말을 달려 사냥을 가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습니다. 만약 임금께서 잘못을 고쳐 자신을 새롭게 하지 않는다면, 저는 정치는 황폐하고 백성들은 흩어져서 선왕의 업적이 땅에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임금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협보의 관직을 파면하고, 그에게 관청의 동산을 맡아보게 하였다. 협보는 분개하여 남한(南韓)으로 가버렸다.

 

여기서 유리가 국내로 도읍을 옮긴 이유가 나옵니다. ↓

<유리명>

28년(서기 9) 봄 3월, 임금은 사람을 보내 해명에게 말하였다.
“내가 도읍을 옮긴 것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튼튼하게 하여 위업을 다지려는 것이다. 그런데 너는 나를 따르지 않고 힘센 것을 믿고 이웃나라와 원한을 맺었으니, 자식 된 도리가 이와 같을 수 있느냐?”

 

앞서 위에 유리가 선비를 정벌했습니다. 

그후 별거 아닌 거 가지고 해명 태자에게 자살하라고 합니다.

황룡국(동부여?)이 선물로 보낸 강궁을 부러뜨려서 원한을 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태자의 목숨보다 이웃나라가 쳐들어오는 것이 두려웠던 겁니다.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튼튼하게 하려는 건 표면적인 이유입니다.

 

<유리가 도읍을 옮긴 진짜 이유>

  • 비록 북쪽의 선비를 이겼으나 언제 또 배신하고 공격해 올지 몰라 두려움 (두 나라가 가까움)
  • 주변에 적들이 많아 보다 안전한 곳으로 이전할 필요가 있음 (더 남쪽으로)

 

<유리가 옮긴 도읍의 단서들>

  • 오곡을 키우기에 알맞다는 건 땅이 넓고 기름진 평야가 있다는 뜻
  • 짐승 등의 산물이 많다는 건 먹을 것의 걱정을 덜어 백성의 이익을 끝없이 준다는 뜻
  • 또한 전쟁의 걱정도 면할 수 있다는 건 방어하기 유리한 곳이란 뜻
  • 그리고 위나(尉那)은 주변이 바위가 많다는 뜻
  • 즉 한반도 지형의 특성상 화강암 지대로 추정됨

 

그리고 낙랑 동부를 보겠습니다.

동이현(東暆縣)[동부도위]
잠태현(蠶台縣)[동부도위]
불이현(不而縣)[동부도위] (삼국사기 출전)
화려현(華麗縣)[동부도위] (삼국사기 출전)
사두매현(邪頭昧縣)[동부도위]
전막현(前莫縣)[동부도위]
부조현(夫租縣)[동부도위] (고고학 유물 발견)

 

불이(不而)는 불내(不耐)라고도 합니다.

한자의 특성상 생길 수 있는 오류입니다.

여기선 보편적으로 불리는 불내로 쓰겠습니다.

불이(不而) = 불내(不耐)

 

이 중에서 불내와 화려는 신라본기에도 보입니다.

<신라 유리>

17년(서기 40) 가을 9월, 화려(華麗)와 불내(不耐) 두 현(縣)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거느리고 북쪽 국경을 침범하였다.

즉 당시 사로국의 북쪽 국경 너머에 위치해 있습니다.

 

근데 국내는 불내라고도 합니다. ↓

국내(國內) = 불내(不耐)

 

< 삼국사기 제37권 잡지 제6 고구려>

주몽이 흘승골성에 도읍을 정한 때로부터 40년이 지나서 유류왕(孺留王) 22년(서기 3)에 도읍을 국내성(國內城)[혹은 위나암성(尉那巖城)이라 하고 혹은 불이성(不而城)이라고도 한다.]로 옮겼다.

 

그럼 국내는 낙랑 동부의 불내현이고 이곳만 밝혀내면 됩니다.

아까 위에서 이렇다 했습니다. ↓

  • 그리고 위나(尉那)은 주변이 바위가 많다는 뜻
  • 즉 한반도 지형의 특성상 화강암 지대로 추정됨
그럼 화강암 지대를 찾아보면 이렇습니다. ↓
출처: 개마고원, 나무위키
즉 주변에 암석들이 많아 고구려는 석조성이 발달한 듯 합니다.
처음부터 석조성이 발달하기 쉬운 위치였던 겁니다.

 

이제 여기를 주목해주세요.
 

저곳이 바로 국내 즉 낙랑 동부의 불내현이 위치해 있는 지역입니다!

그럼 구글맵을 보며 저곳에 무슨 도시가 있는지 보겠습니다.

지도를 보니 저 지역엔 도시가 없고 읍락만이 있을 뿐입니다.

근데 역사적으로 유명한 곳이 있습니다.

바로 함북 길주입니다.

 

<길주군> - 나무위키-

역사 속에 등장하는 함경도라는 게 원래는 함길도(咸吉道)였다. 정확히 말하면 영길도(永吉道)에서 함길도로 개칭했다가 세조 대에 이르러서 영안도로 강등성인 개칭을 하고, 다시 중종 대에 함경도로 개칭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최소 세조 대까지는 함경도 일대의 군 중에서 단연 중심을 차지했다는 말이 된다.

 

<길주군> -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함경북도 남서부에 위치한 군.

한동안 '함길도(咸吉道)'라 한 것과 같이 길주는 함경북도의 중심지였으므로 개발 역사가 길어 벼·보리·감자 등의 농산물도 많다.

지세는 함경산맥(咸鏡山脈)과 마천령산맥(摩天嶺山脈)의 교차점에 있어 서북부의 반은 산지로 되어 있다. 동쪽은 대소 구릉의 기복은 있으나 비교적 넓은 평원을 이루고 있고, 서북 방향에서 동남 방향으로 점차 낮아진다. 서북쪽 일부 지역은 편마암과 화강암 지질로 되어 있으나, 그 밖의 지역은 퇴적암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토양은 도내에서 비옥한 편에 속한다. 특히, 남대천 하류 이북은 길주·명천지구대를 형성하고, 남대천 유역에는 비교적 넓고 비옥한 평야가 전개되어 있다.

이 군에는 성터와 보루가 산재하여 있다. 읍성은 높이 2.5m에 주위 1,371m인 석성으로 매우 견고한 성곽이다.

 

참고로 이곳에서 핵실험을 6차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곳은 고구려 두 번째 도읍인 국내입니다!

 

그럼 함북 길주로 도읍을 옮기면 영역을 좀 수정해야 합니다. ↓

 

이 국내로 도읍을 옮겼다면 국내는 북옥저입니다.

즉 북옥저는 함북이고, 남옥저는 함남이라는 걸 말해줍니다.

왜냐 하면 남옥저는 북옥저 멸망 후 53년 후에 멸망하기 때문입니다.(대무신왕 때)

<동명성>

10년(기원전 28) 겨울 11월, 왕이 부위염(扶尉猒)에게 명하여 북옥저(北沃沮)를 정벌하여 멸하게 하고,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

<온조>

43년(서기 25) 겨울 10월, 남옥저(南沃沮)의 구파해(仇頗解) 등 20여 가족이 부양(斧壤)에 이르러 귀순을 청하니 임금이 받아들여 한산 서쪽에서 편히 살게 하였다.

 

즉 북옥저에 속한 불내(국내)를 이미 영토화 했기에 도읍으로 정할 수 있던 겁니다.

반면 남옥저는 아직 영토가 아닙니다.(낙랑 동부임)

 

그럼 화려는 어디인가?

남옥저에 속해 있다고 봐야 합니다.

거긴 발음이 비슷한 화령으로 추정됩니다.

 

<화령> - 위키백과 -

화령(和寧)은 함경남도 영흥의 옛 이름이며 조선 왕조를 수립한 이성계의 출생지이다. 고려 왕조를 멸망시키고 새 왕조를 수립한 이성계가 명나라에게 제시한 두 가지 국명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영흥군> - 나무위키 -

함경남도에 존재했던 군. 서쪽은 평안남도에 접하며, 동쪽은 동해에 면한다.
영흥은 북한 행정구역상으로는 금야군으로 불리며, 1952년 이래 군의 서부지역은 요덕군이 되었다.
한사군 시대에는 임둔군(臨屯郡) 화려현(華麗縣)이었다.

 

이곳 역시 역사적으로 유명한 곳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이 화령이라 불렸을 수도 있던 곳입니다.

 

앞서 위에 함경도의 옛 이름 영길도에서 함남 흥과 함북 주가 대표적인 중심지였던 겁니다.

즉 함남 금야=영흥=화령=화려

함북 길주=불내=국내 입니다.

 

그럼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 겁니다.

→ 함경도에는 더 큰 도시들이 있는데요?

함북 청진과 함남 함흥이 그겁니다.

 

하지만 이 도시들은 당시엔 항구였습니다.

즉 북방 기마족인 고구려는 도읍지로 항구는 어울리지도 않고 맞지가 않습니다.

 

먼저 청진부터 보겠습니다. ↓

시내 전체가 바다입니다.

 

다음은 함흥입니다. ↓

 

위에 함남 금야=영흥=화령=화려라고 했습니다.

즉 위 지도에서 함흥과 금야도 모두 시내가 바다에 잠긴 항구였습니다.

 

근데 길주만은 당시 항구가 아니었습니다.(검은 화살표)

함북 길주=불내=국내

즉 유리가 이곳을 새 도읍으로 정한 게 우연이 아니란 겁니다.

낙랑인들이 기반을 쌓은 불내현 위에 새 도성 즉 위나암성을 쌓았던 겁니다.

이 위나암성은 석조성임은 물론입니다.

 

근데 삼국사기에 이상한 기록을 발견했습니다.

서기 3년에 이미 유리가 국내(불내)로 도읍을 옮겼는데, 이상하게 서기 40년에 또 화려와 함께 불내현이 나옵니다. ↓

<유리명>

22년(서기 3) 겨울 10월, 임금은 국내(國內)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신라 유리>

14년(서기 37), 무휼(無恤, 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키자, 그 나라 백성 5천 명이 투항해 왔다. 그들을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 이 낙랑은 사로국의 북쪽 국경 너머의 낙랑 동부로 이해됩니다.

 

근데 그 소속현인 화려, 불내가 또 나옵니다. ↓
17년(서기 40) 가을 9월, 화려(華麗)와 불내(不耐) 두 현(縣)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거느리고 북쪽 국경을 침범하였다. 맥국(貊國)의 우두머리가 병사를 동원하여 곡하(曲河) 서쪽에서 맞아 공격하여 이들을 물리쳤다. 임금이 기뻐하여 맥국과 친교를 맺었다.

 

이건 무얼 의미할까요?

 

이건 낙랑 동부가 말갈한테 정벌 당해 7현 중 화려·불내현만 남고 모두 멸망했다는 뜻입니다.(서기 37년)

그리고 화려·불내현의 패잔병들은 모의 끝에 남쪽 진한을 공격하는 걸로 뜻이 정해집니다.(서기 40년)

이때 이들은 말갈군한테 쫓기는 신세였던 겁니다.

 

특히 불내현의 군사들은, 기록상으로만 보면 37년 동안이나 쫓기는 신세입니다.(40-3=37)

하지만 그건 쫓기는 게 아닌 동부도위를 옮긴 것입니다.

현도군이 몇 번에 걸쳐 옮겨진 것과 같은 겁니다.

 

<현도군> - 위키백과 -

현도군(玄菟郡)은 전한(前漢)의 무제(武帝)가 기원전 107년에 세운 한사군(漢四郡) 중 하나이다. 기원전 75년에 토착민들의 저항으로 인해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겨갔으며, 후한(後漢) 초기(1세기)에 고구려의 압박으로 인해 다시 서쪽인 푸순 시(撫順)로 이치되었다.

 

결국 추격하는 말갈군에 의해 사로국 북쪽 국경에서 전멸된 듯 보입니다.

맥국(貊國)의 우두머리가 병사를 동원하여 곡하(曲河) 서쪽에서 맞아 공격하여 이들을 물리쳤다.

이로써 낙랑 동부는 역사에서 사라집니다.(서기 40년)

참고로 이 맥국의 수장은 대무신왕 혹은 대무신왕이 보낸 장수로 추정됩니다.


이제 동옥저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태조대>

4년(서기 56) 가을 7월, 동옥저(東沃沮)를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삼았다. 국경을 개척하여 동으로는 창해(滄海), 남으로는 살수(薩水)에 이르렀다.

 

<후한서>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 동쪽에 있다. 동쪽으로 바다에 임한다. 북쪽으로 읍루, 부여가 있고 남으로 예맥에 접하고 그 땅은 동서가 좁고 남북은 길다. 가히 천리이다. 흙은 비옥하고 좋으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하고 오곡이 마땅히 잘되며 밭농사에 좋다. 읍락에는 우두머리가 있다. 인성이 곧고 강직하고 용맹스러워 창을 가지고 보병전을 한다. 언어, 음식, 거처, 의복은 고구려와 닮았다. 장사는 큰 목곽을 만드는데, 길이가 십여장이나 되고 한쪽에 개구부를 만든다. 새로 죽은 자는 이를 임시로 묻었다가, 피부와 살이 썩어지면 이에 뼈만을 취하여 넣는다. 가족이 모두 이에 들어간다. 나무에 '生'자를 새기어 죽은 자의 수를 헤아렸다.

 

<후한서>

《후한서》(後漢書)는 중국 이십사사 중의 하나로 후한의 역사를 남북조 시대 송나라의 범엽(398년 ~ 445년)이 정리한 책이다.

범엽이 445년에 죽었으니 후한서는 대략 5세기 초반에서 중반의 사이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나, 실은 그전에 편찬되어 있었습니다.

《후한서》 - 범엽이 좌천되어 있던 시기에 저술한 것으로 미완성본 1개를 제외한 당시 세상에 전해져 있던 7종의 《후한서》를 수집하고 원굉(袁宏)이 지은 《후한기(後漢紀)》를 참고한, 현전하는 《후한서》. 후세에 전사서(前四史)의 하나로 꼽히게 된다. 5세기에 처음 서술한 원본은 현존하지 않으며, 6세기 중반에 양나라에서 편찬한 후한기가 현존하고 있다.

즉 범엽이 후한서를 정리만 한 것입니다.

 

후한(後漢, 기원후 25년~220년)이 3세기 초에 멸망했으니 후한서의 편찬시기가 5세기가 아니라 3~4세기입니다.

 

<옥저 멸망시기>

북옥저 - 기원전 28 (기원전 1세기 초)

남옥저 - 서기 25 (1세기 초)

동옥저 - 서기 56 (1세기 중)

 

이건 무얼 말하는가?

역사기록이 당대에 쓰여진 게 아니라 이삼백년 후대에 쓰여진 겁니다.

즉 기록의 정확성에 의심이 가게 됩니다.

하지만 의심이 가기도 전에 정황상 추정이 가능하기에 그대로 진행합니다.

 

보통 동옥저의 영역은 이렇다고 합니다. ↓

출처: 동옥저. 위키백과

제가 수정한 영역은 이렇습니다. ↓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 동쪽에 있다. 동쪽으로 바다에 임한다. 북쪽으로 읍루, (동)부여가 있고 남으로 예맥에 접하고 그 땅은 동서가 좁고 남북은 길다. 가히 천리이다.

 

즉 남미 칠레를 생각하면 됩니다.

동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모두 말갈에 의해 동쪽 바닷가로 밀려난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channel/UCXUNWHzvqruUqV0D_jw5c1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