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대왕 1(大王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전 글에서 개루대왕의 치세 말기 20여년 동안 열도 왜의 정벌을 끝으로 글을 마쳤습니다.
그래서 개루대왕의 열도 왜 정벌전을 간단하게 설명하고 다음으로 진행하겠습니다.
<개루>
14년(서기 141) 변진 정국 수습 안정화
15년(서기 142) 열도 왜로 사신 보냄
16년(서기 143) 열도 침공군 전쟁준비
17년(서기 144) 삼한의 대군, 열도 왜로 침공
~ 20여년 간 열도 왜 침공 기간 + 수습 안정 기간 ~
39년(서기 166) 임금이 돌아가셨다.(향년 79세?)
<요약>
먼저 개루대왕은 1차로 큐슈를 침공합니다.
군선 100척 이상 + α + 백제 기마대 + 삼한의 대군
당시 열도 왜의 병력수준(=오합지졸)은 전 글 참고(백제대왕, 금동관을 하사하다)
큐슈 평정 후, 2차 침공군 세토 내해로 긴키까지 들어갑니다.(신무의 동정 모티브)
긴키 평정 후, 야마타이국 외 각 지방수장들을 마한인으로 교체(고분시대 시작)
야마타이국 왕은 특별히 금동관 외 종합선물셋트 하사?
<고분시대> 나무위키
고훈 시대(古墳時代)는 일본의 시대 구분 중 하나이다. 보통 서기 3세기 중후반~7세기 무렵을 가리킨다. 고훈(こふん)은 오래된 무덤을 뜻하는 '고분'(古墳)의 일본어 독음으로, 지배층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각지에 전방후원분 등 대형 고분을 세웠던 시기다. 이런 고분은 시신을 안치하기 위한 석실을 가지고 있었으며 무덤 주위에 호를 둘러쳐 놓은 것도 있다.
2세기 중후반에 열도 왜 침공군이 열도를 평정합니다.
그래서 1세기 후, 이들의 아들, 손자 대인 3세기 중후반에 고분시대가 시작됩니다.
당시의 마한계 부장품이 묻혀있음은 물론입니다.
그리고 온조의 백년대계를 다시 보겠습니다.
<온조의 백년대계>
온조 - 창업, 경기 공략
다루 - 마한 공략 ①
기루 - 마한 新彌多離 공략 ②
개루 - 변한 공략 ③
?? - 진한 → 사로국 → 삼한일통 ④
개루 - 열도 공략 ⑤
보다시피 개루대왕은 ③과 ⑤를 이뤄냈습니다.(기록 대부분이 삭제된 이유)
④를 건너뛴 이유는 당시 사로국 외 진한이 원군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호적인 관계의 사로국을 정벌할 수 없었던 겁니다.
대신 열도를 정벌합니다.
여기서 동예는 대체 어느 편인 걸까요?
<파사>
23년(서기 102) 가을 8월, ~생략~ 임금이 노하여 병사를 일으켜 음집벌국을 공격하니, 그 우두머리가 무리와 함께 스스로 항복하였다. 실직(悉直) 압독(押督) 두 나라 임금도 와서 항복하였다.
음집벌, 실직, 압독 이들 나라는 모두 동예의 소국들로 파사 23년에 이미 사로국의 속국이 됐습니다.
말갈은 이들을 정벌하려면 태백산맥 대관령을 넘어야 합니다.
지리적 잇점 상 이들은 오랫동안 그 정체성을 유지한 듯 보입니다.
개루대왕의 기록은 대부분이 삭제되어 치적을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시대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간략하게나마 그 짐작되는 것들을 전 글에 쓴 것입니다.
삼국에서 제일 많이 삭제된 왕입니다.
제일 많이 삭제됐다는 건 그만큼 후세에 알려져선 안되는 뭔가가 많다는 뜻입니다.
이에 대해선 앞선 글들에 누차에 걸쳐 설명했습니다.
훗날 개로대왕이 근개루라고도 불린 점으로 보아 개루대왕은 분명 백제의 첫 정복군주였을 겁니다.
개로대왕이 고구려(장수왕)와 피터지게 싸우다 사로잡혀 참수 당하고 하남 한성은 함락 당합니다.
이 때 백제는 (결국 말갈에 의해) 멸망한 거나 다름없다고 봅니다.
백제의 첫 정복군주라면 삼한일통은 물론 열도 왜까지 정복해야 정복군주라고 할 것입니다.
이에 치세 말기에 열도 왜를 정복한 것으로 개루대왕에 대한 글을 마친 겁니다.
이제 초고대왕에 대해 진행하겠습니다.
개루 다음으로 초고가 즉위하는데, 이 초고는 개루의 아들이 아닙니다.
개루가 재위 39년에 죽습니다.(향년 79세 전후 추정)
그럼 그 아들은 60세 전후는 된단 얘깁니다.
근데 초고는 재위 49년에 죽습니다.
그럼 60 + 49 = 109세 전후
즉 초고는 개루의 아들이 아닌 겁니다.
물론 109세 전후에 죽을 순 있지만 그럴 확률은 낮습니다.
즉 아니다에 한표 던집니다.
<초고>
초고왕(肖古王)[혹은 소고(素古)라고도 한다.]은 개루왕(蓋婁王)의 아들이다. 개루왕이 재위 39년에 돌아가시자 왕위를 이었다.
肖古王[一云素古] 蓋婁王之子 蓋婁在位三十九年薨 嗣位
즉 초고(재위 166~214년)는 말갈 예맥계 인물로 이름과 당시의 정황, 시기 상으로 보아 백제의 또다른 시조 구태로 추정됩니다.(구태는 초고다 1,2 참고)
구태(仇台)가 본명이고 소고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쓰는 가명으로 보입니다.
저는 구태가 초고라고 보아 글을 진행하겠습니다.
즉 구태는 초고입니다.
근데 당시에 부여왕 위구태(尉仇台)가 있습니다.
구태는 혼동을 피하기 위해 공식적인 자리에서 쓰는 가명을 하나 만듭니다.
그것이 초고(肖古)입니다.
소고(素古)라고도 합니다.
말갈이 고구려로 밝혀진 이상(천년의 미스터리 참고) 고구려는 백제와 숙적이기에 초고는 고구려계가 아닌 옥저계의 구파해 후손으로 봄이 맞습니다. ↓
옥저인은 예족으로 말갈 맥족과는 다르지만, 당시는 혼혈화가 진행되어 예맥으로 불립니다.
그럼 구파해 집단은 말갈을 피해 귀순한 것이니 말갈(고구려)을 대대로 원수라 생각할 겁니다.
혹 남옥저가 말갈에 멸망 당한 걸지도 모릅니다.
만약 이게 맞다면 구파해의 후손인 구태는 辰왕에 즉위하여 말갈을 주적으로 삼아 역사가 흘러갈 겁니다.
실제로 살펴보니 구태백제는 신라, 고구려 모두와 전쟁합니다.
구태가 어떻게 해서 개루대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는지는 기록이 없어 확증이 어렵지만, 이것도 추정 가능합니다.
대개 이런 경우는 역성쿠데타입니다.(아래 설명)
즉 초고는 개루대왕 말기에 역성쿠데타에 성공한 인물로 남옥저의 왕족 구파해의 후손입니다.(증손?)
즉 구태입니다.
<온조>
43년(서기 25) 가을 9월, 기러기 100여 마리가 왕궁에 모여들었다. 일자(日者, 날의 길흉을 점치는 사람)가 말하였다.
“기러기는 백성을 상징하니 장차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이 귀순해오는 일이 있을 듯합니다.”
겨울 10월, 남옥저(南沃沮)의 구파해(仇頗解) 등 20여 가족이 부양(斧壤)에 이르러 귀순을 청하니 임금이 받아들여 한산 서쪽에서 편히 살게 하였다.
↑ 일자(日者)의 말을 인용해서까지 중요하게 기록한 점을 보면 구파해 집단은 20여 가족만 온 것이 아닙니다.
100이란 숫자는 동양에서 많은 수를 뜻하니 이는 리더 구파해를 위시한 왕족·귀족 20여 가족과 그들을 따르는 많은 백성들로 봐야 합니다.
그럼 이들이 또한 많은 말(馬)들을 데리고 왔음은 물론입니다.
남옥저에서 월지국(한성)으로 오는 중간에 말갈이 있는데 고작 20여 가족만이 왔다?(기록의 축소)
그건 말이 안되고, 이들은 철갑으로 중무장한 기마대의 호위를 받으며 망명했다고 봐야 합니다.
(개마국의 철갑기병, 가야의 철갑기병 등은 모두 낙랑의 철기문화로 이해됩니다.)
옥저는 낙랑계로 예족입니다.
백제의 우수한 금속 제련은 대개 이 낙랑의 철기문화에서 이어받은 것으로 추정됩니다.(천년의 미스터리 참고)
그럼 구파해 집단 안에도 금속을 다루는 장인들이 있었단 얘깁니다.
그래서 온조는 이들을 받아들여 지배층은 편하게 살게 하는 대신 금속 장인들은 자신들의 금속제련 집단에 흡수한 것입니다.
그럼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아달라>
11년(서기 164) 봄 2월, 용이 서울에 나타났다.
↑ 이건 개루대왕이 말년 순행길에 사로국에 행차한 겁니다.
예: 진시황의 말년 전국순행
서기 164년은 개루대왕 37년으로 죽기 2년 전이고 77세 전후로 추정됩니다.
참고로 봄 2월이면 양력 봄 3월로 겨울이 지나 날이 풀릴 때입니다.(춘삼월)
그래서 보통 삼한·삼국시대의 사신은 봄 2~3월에 활동합니다.
개루대왕은 덥지도 춥지도 않은 춘삼월에 전국순행을 한 겁니다.
이 때의 정황은 마한 북남부, 변진을 정벌했는데 진한만이 남아있습니다.
개루대왕은 사로국 임금을 한번 만나보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어떤 인물인가 볼려고 행차한 겁니다.
여차하면 진한까지 정벌할려고 할 속셈인 것입니다.
그 결과는 아래에 계속 설명 이어집니다.
근데 다음 해에 길선이 모반을 꾀합니다.
<개루>
28년(서기 155→165) 봄 정월, 그믐 병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0월, 신라의 아찬(阿飡) 길선(吉宣)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탄로나서 도망쳐왔다. 신라의 왕이 글을 보내어 길선을 돌려달라고 청했으나 임금이 보내지 않았다. 신라왕이 분노하여 군대를 내어 쳐들어왔으나 모든 성을 굳게 지키고 나가지 않으니, 신라군이 양식이 떨어져 돌아갔다.
↑ 이 사건은 신라 아달라조에도 나오는데 10년 뒤의 사건으로 기록합니다. ↓
<아달라>
12년(서기 165) 겨울 10월, 아찬 길선(吉宣)이 반란을 꾀하다가 발각되자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백제로 도망쳤다. 임금이 글을 보내 그를 요구하였으나 백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임금이 노하여 군사를 내어 정벌하였는데, 백제는 성 안에서 지키기만 하고 나오지 않았다. 우리 군사는 양식이 떨어져 돌아왔다.
구 삼국사의 편집 중에 신라사관이 둘 중 하나를 잘못 편집한 오류입니다.
그럼 이 중에서 어떤 것이 옳은 것이냐?
추정 가능합니다.
서기 155년은 개루 28년으로 재위 39년 기간 중에 10년 전 쯤으로 최전성기일 때입니다.(정복군주라는 가정 하에)
이 때의 사로국 임금은 아달라 2년으로 새로 즉위한 시점입니다.
그럼 최전성기의 정복군주한테 그런 이유로 노해서 군대를 보내 정벌하려 했다?
새로 즉위한 젊은 임금이 70 넘은 정복군주한테?
이건 말이 안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서기 165년을 봅시다.
<개루>
39년(서기 166) 임금이 돌아가셨다.
개루대왕이 죽기 1년 전이고, 아달라 12년입니다. ↑
이게 훨씬 납득이 가는 시점입니다.
그럼 개루대왕이 노환으로 병석에 누워있고 그 다음 해에 79세 전후의 나이로 병사한 겁니다.
즉 155년이 아니라 165년이라는 얘깁니다.
다시 돌아와 개루대왕은 말년 전국순행에 나서 순행길에 사로국에 행차합니다.
사로국의 새 임금인 아달라(일성의 장자)를 만나보니 호전적임을 알고 길선을 이용해 제거공작을 시도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 (길선의 반란)
결국 발각되어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고, 아달라가 분노해 개루를 공격하게 된 것입니다.(서기 165년)
바로 이 때 구태는 이걸 기회삼아 역성쿠데타를 시도해 성공합니다.(기회는 찬스다!)
- 개루대왕의 말년 전국순행(서기 164)
- 사로국에 입성해 아달라와 대면
- 아달라의 호전적임을 알아봄
- 길선을 이용해 제거공작
- 공작실패, 길선 망명
- 아달라 분노, 辰과 전쟁발발(서기 165)
- 사로국, 승전을 거듭해 월지국으로 군대 진입
- 이 때 개루대왕은 노환으로 병석신세(78세 전후)
- 사로국 군대 하북 한성 포위
- 이 때 한성 방어 지휘관은 구태
- 사로국 군대 퇴각(군량 부족)
- 구태, 기회 잡고 역성쿠데타 성공(서기 166)
당시 구태는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고위 장수로, 이는 남옥저의 왕족 구파해 후손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낙하산?)
구파해 집단 망명 이 후 150여년이 지난 오늘날 개루대왕 말기, 그 후손 구태는 개루대왕의 고위 장수로써 기회를 잡습니다.
그와 그의 병사들이 철갑으로 중무장했음은 물론입니다.
<개루>
28년(서기 155→165) 봄 정월, 그믐 병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0월, 신라의 아찬(阿飡) 길선(吉宣)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탄로나서 도망쳐왔다. 신라의 왕이 글을 보내어 길선을 돌려달라고 청했으나 임금이 보내지 않았다. 신라왕이 분노하여 군대를 내어 쳐들어왔으나 모든 성을 굳게 지키고 나가지 않으니, 신라군이 양식이 떨어져 돌아갔다.
→ 이 때 역성쿠데타를 일으켜 성공시키고 노환으로 병석에 누워있는 개루대왕을 안전하게 모십니다.
그렇게 구태는 실권을 장악하고 개루대왕을 뒷전으로 편히 모십니다.(즉 유폐)
하지만 그 다음 해에 개루대왕은 파란만장한 삶을 마칩니다.(향년 79세 전후, 독살?)
↑ 이게 첫번째 시나리오 A입니다.
하지만 정황에 맞춰 시나리오를 더 추정할 수 있습니다.
- 길선의 반란 때 기회잡고 역성쿠데타 성공
- 개루대왕이 구태에게 양위
- 개루대왕이 죽고 백성들의 추대로 즉위
- 개루대왕이 부상 후유증으로 죽을 경우
1번을 A라 하고 2, 3, 4번 합친 걸 B라 하겠습니다.
어떤 시나리오든 결국 구태가 辰왕이 됩니다.
1번은 위에 이미 설명했습니다.(A)
2번과 3번은 이런 경우에 해당됩니다. ↓
- 개루대왕이 노년에 왕위를 물려줄 아들이 없는 경우
- 마땅한 자질의 친족이 없는 경우
- 구태가 능력면, 혈통면에서 자격이 있는 경우
이 경우 구태가 남옥저의 왕족으로서 개루의 사위면 더욱 가능성이 높습니다.
개루의 사위가 아니라도 辰의 성골 眞牟씨의 부인을 얻은 경우도 됩니다.
마지막 4번은 이런 경우입니다. ↓
165년 길선의 반란 때 쳐들어온 사로국 군사의 화살에 맞아 부상 후유증으로 몸져 누웠다가 죽은 경우, 역시 2번과 3번이 될 수 있습니다.
즉 굳이 역성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아도 된다는 얘깁니다.
그럼 2, 3, 4번 전부 적용해 보면 어떨까요? ↓
<2, 3, 4번 전부 적용한 시나리오 B>
- 개루대왕의 말년 전국순행(서기 164)
- 사로국에 입성해 아달라와 대면
- 아달라의 호전적임을 알아봄
- 길선을 이용해 제거공작
- 공작실패, 길선 망명
- 아달라 분노하여 辰과 전쟁발발(서기 165)
- 사로국, 승전을 거듭해 월지국으로 군대 진입
- 이 때 날아온 화살에 맞아 개루대왕은 부상으로 몸져 누움(78세 전후)
- 사로국 군대 하북 한성 포위
- 이 때 한성 방어 지휘관은 구태
- 사로국 군대 퇴각(군량 부족)
- 구태, 개루대왕의 양위와 백성들의 추대로 즉위(서기 166)
↑ 이게 가장 자연스럽고 당위성이 높아 보입니다.
그 당위성이란?
사로국으로 쳐들어갈 때 한달 후 바로 2만대군 집결과 8천 정예기병이 모인 것이 그것입니다.(아래 설명)
이 당위성으로만 보면 A보단 B가 맞습니다.
뭐가 됐든 구태가 辰왕이 되는 건 변함 없습니다.
근데 만약 구태가 말갈이고 개루대왕 말기에 쳐들어와 스스로 辰왕에 오른 것이라면?
그럴 확률은 없습니다.
왜냐 하면 말갈이 고구려이기 때문입니다.
즉 구태가 말갈이면 백제는 진작 멸망하고 고구려가 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기에 구태가 말갈이 아니란 얘깁니다.
이왕 말 나온 김에 하나 더 쓰고자 합니다.
삼국사기에 보면 말갈이 쳐들어와 재위 말년에 임금이 죽었다는 기록들이 꽤 있습니다.
근데 이걸 갖고 말갈족이 왕위에 즉위했다고 해석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말갈이 고구려라는 걸 모르고 하는 잘못 된 해석입니다.
말갈 = 고구려 입니다.
다시 돌아와 이 때 삼한은 구태파와 반구태파로 나눠집니다.
구태파는 구태를 辰왕으로 섬겨 말갈에 계속 대항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반구태파는 구태를 진왕으로 인정치 않고 해씨 중에 진왕으로 섬길 인물을 추대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바야흐로 해씨 辰에서 구씨 辰으로 왕조가 바뀌는 격동기가 시작됩니다!
초고(재위 166~214년)는 재위 49년째에 죽습니다.
즉 구태가 즉위할 때 30세는 되야 79세에 죽은 게 됩니다.
앞서 쓴 고위 장수로서 20세는 너무 젊기에 적어도 30세 전후는 되지 않았을까 추정합니다.
즉 개루대왕과 마찬가지로 79세 전후에 죽습니다.
<초고>
2년(서기 167) 가을 7월, 병사를 몰래 보내 신라 서쪽 변경의 두 성을 습격하여 남녀 1천 명을 사로잡아 왔다.
8월, 신라왕이 일길찬(一吉飡) 흥선(興宣)에게 병사 2만을 거느리고 백제의 동쪽 여러 성을 침범하게 하고, 신라왕도 또한 친히 정예병 8천을 거느리고 뒤를 이어 한수(漢水)에 밀어닥쳤다. 임금이 신라군의 수가 많아 대적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잡았던 사람을 돌려보냈다.
즉위 2년째면 거의 즉위하자마자 이유없이 사로국을 공격해 백성 1천명을 생포해 옵니다.
이에 사로국이 쳐들어와 구태는 방어만 하는 입장이었단 얘깁니다. ↑
과연 그럴까요?
이제부터 구태 대신 초고라고 하겠습니다.
구태가 辰왕이 되기 전에는 구태란 본명을 썼고, 진왕이 되고나선 소고 즉 초고라는 공식적인 가명을 쓴 것입니다.
온조 이후 개루까지 위업을 이룬 해씨 辰을 이어받았는데 즉위하자마자 사로국이 쳐들어옵니다.
근데 당시 아달라의 기록이 의심스럽습니다.
먼저 신라의 17관등을 보겠습니다.
<삼국사기 제38권 잡지 제7 직관 상 신라 중앙관부 1>
유리왕 9년(서기 32)에 다음과 같은 17등급을 두었다. 첫째는 이벌찬(伊伐飡)[혹은 이벌간(伊罰干), 우벌찬(于伐飡), 각간(角干), 각찬(角粲), 서발한(舒發翰), 서불한(舒弗邯)이라고도 한다.]이다. 둘째는 이척찬(伊尺飡)[혹은 이찬(伊飡)이라고도 한다.]이다. 셋째는 잡찬(迊飡)[혹은 잡판(迊判) 혹은 소판(蘇判)이라고도 한다.]이다. 넷째는 파진찬(波珍飡)[혹은 해간(海干) 혹은 파미간(破彌干)이라고도 한다.]이다. 다섯째는 대아찬(大阿飡)이다.
이로부터 위로 이벌찬까지는 오직 진골만이 될 수 있으며 다른 계통은 안 된다.
일길찬은 ↑ 여기에 낄 수도 없는 7번째입니다.
즉 흥선은 진골이 아니란 얘깁니다.
즉위 2년에 흥선을 일길찬으로 삼았는데 이는 소위 낙하산으로 추정됩니다.
<아달라>
2년(서기 155) 봄 정월, 흥선(興宣)을 일길찬으로 삼았다.
155년에 일길찬인데 12년 후인 167년에도 일길찬입니다.
이는 등급을 올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근데 고위관등도 아닌 7번째 일길찬에게 2만대군이나 맡깁니다.
아달라가 흥선을 얼마나 믿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칩시다.
14년(서기 167) 가을 7월, 백제가 나라의 서쪽에 있는 두 성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백성 1천 명을 붙잡아 돌아갔다.
8월, 일길찬 흥선에게 명하여 군사 2만 명을 이끌고 그들을 치게 하였다. 임금도 또한 기병 8천을 거느리고 한수(漢水)로부터 그곳에 다다랐다. 백제는 크게 두려워하여 잡아갔던 남녀들을 돌려보내고 화친을 구걸하였다.
근데 1년 후에 이 흥선을 두번째 등급인 이찬으로 삼았답니다.
15년(서기 168) 여름 4월, 이찬 계원이 죽었으므로 흥선을 이찬으로 삼았다.
아니 믿고 안 믿고를 떠나 진골이 아니면 절대 될 수 없는 다섯 등급을 뛰어넘어 이찬으로 삼았다?
이 기록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가?
혹시 사실은 이거 아닐까요?
<아달라>
14년(서기 167) 가을 7월, 우리 군이 백제의 동쪽에 있는 두 성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백성 1천 명을 붙잡아 돌아왔다.
8월, 백제가 군사 2만 명으로 우리의 서쪽 여러 성을 침범하였다. 백제왕도 또한 기병 8천을 거느리고 한수(漢水)로부터 그곳에 다다랐다. 우리 임금이 백제군의 수가 많아 대적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잡았던 사람을 돌려보냈다.
王又率騎八千
아달라조 원문에 한수(漢水)로부터 그곳에 다다랐다(自漢水臨之)는 신라 사관이 미쳐 고치지 못 한 중요한 증거입니다.
즉 한성으로부터 사로국으로 갔다는 얘깁니다.
<초고>
2년(서기 167) 가을 7월, 신라군이 몰래 우리 동쪽 변경의 두 성을 습격하여 남녀 1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
8월, 우리 왕이 사백개로(沙白蓋盧)에게 병사 2만을 거느리고 신라의 서쪽 여러 성을 침범하게 하고, 우리 임금도 또한 친히 정예병 정예기병 8천을 거느리고 뒤를 이어 한수(漢水)로부터 그곳에 다다랐다. 신라 임금은 크게 두려워하여 잡아갔던 남녀들을 돌려보내고 화친을 구걸하였다.
羅王又親帥精騎八千繼之
사로국이 155년의 침범 이 후 또 변경을 습격하여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분노한 초고가 이번엔 대대적으로 2만대군을 일으켜 사로국을 공격한 겁니다.
그리고 따로 초고가 친히 8천 정예기병을 이끌고 나섭니다.
여기서 정예 기병이란?
바로 아래 사진과 같은 철갑 기병을 말함입니다.
이들은 낙랑에서 온 철 제련 기술로 중무장한 걸로 추정됩니다.(예: 개마무사=개마국=낙랑=조선=예족)
즉 온조 말기에 남옥저에서 망명한 구파해 집단 속에 상당수의 철갑 기마대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구파해 등 20여 가족의 왕족·귀족을 호위한 것입니다.
구파해의 후손 구태는 이 철갑 기마대를 이끄는 대장이었던 겁니다.
그 숫자도 추정 가능합니다.
총 8천 정예기병 중,
- 구태 직속 철갑 기마대 약 4~5천
- 백제 기마대 1~2천
- 나머지 1~2천은 그동안 키운 기병들
해서 총 8천기 입니다.
이들이 삼한정벌 후 열도 왜를 정벌하러 쓰임은 물론입니다.
근데 문장 말미에 뭐라 쓰여있는지 주목해주세요.
신라 임금은 크게 두려워하여 잡아갔던 남녀들을 돌려보내고 화친을 구걸하였다.
'크게 두려워하여'
이건 일본서기에 잘 보이는 표현으로, 특히 천황의 명을 안 들을 때나 조공을 안 받쳐 천황이 한소리 할 때 삼한의 임금들에게 하나같이 저런 표현을 씁니다.
즉 辰왕·백제대왕의 권위가 그 정도였다는 것만 쓰겠습니다.
여기서 사백개로(沙白蓋盧)는 신공 49년조에서 데려왔습니다.(우정출연)
어차피 일본서기 편자들이 백제삼서를 보고 짜맞춘 것이기 때문에 문제는 없습니다.
또 사씨인지 사백인지 개로인지도 모릅니다.
초고 2년에 2만대군을 통솔케 한 장수가 사백개로일 확률이 신공 49년의 것보다 십중팔구 높습니다.
때문에 문제 1도 없습니다.
사백개로 혼자면 외로우니 사사노궤(沙沙奴跪)도 깜짝출연 시키렵니다.(아래 출연 예정)
이 참에 당시의 이름에 대한 소견을 밝혀봅니다.
연 개소문(淵 蓋蘇文)
을 지문덕(乙 支文德)
↑ 이렇듯 아래도 이렇습니다. ↓
사 백개로(沙 白蓋盧)
목 라근자(木 羅斤資)
사 사노궤(沙 沙奴跪)
목 협만치(木 劦滿致)
조 미걸취(祖 彌桀取)
근데 학계는 왜 복성에 연연하나요?
혹시 이거 때문인가요?
<개로>
문주가 곧 목협만치(木劦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목협, 조미는 모두 두 자 성인데, 『수서(隋書)』에서는 목과 협을 두 개의 성으로 보았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를 데리고 남쪽으로 떠났다.
김부식도 모른다고 하는데 왜 굳이 복성에 연연합니까?
혹시 백제인을 왜인으로 보아 일본인처럼 복성으로 간주한 건가요?
이들이 일본서기에 나와서 복성이라고 보나요?
하지만 백제의 지배층은 부여족입니다.
위에 연개소문과 을지문덕의 예와 같이 백제의 지배층도 단성으로 봐야 합니다.
단 원래 辰의 지배층은 부여족이 아니기에 복성입니다.
예: 眞牟씨 => 眞씨 => 牟씨
즉 시대가 가고 변함에 따라 복성이 단성으로 쓰였다고 봐야 합니다.
단성을 쓰는 말갈이 남하해 지배함에 따라 복성을 쓰던 삼한인이 점차 단성화 해갔다고 봄이 맞습니다.
열도 왜로 건너간 삼한인은 그대로 복성을 쓰고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는 걸 보면 그렇습니다.
그럼 개로왕을 죽인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은 뭐냐고 하실 겁니다.
이들은 지배층이 아니라 하급 장수들입니다.
그래서 복성을 쓰는 겁니다.
- 백제의 지배층: 부여족 출신으로 단성
- 피지배층: 왜족, 복성
그럼 또 부여씨(扶餘)는 뭐냐고 하실 겁니다.
백제왕의 조상이 부여에서 왔다 하여 성을 부여씨로 했습니다.
부여족은 단성을 쓰기에 실제로는 여씨(餘)라고 쓰는 겁니다.
고대일본은 어떤지 볼까요?
헤이안 시대 원평합전(源平合戦)이 있었습니다.
두 무사 귀족의 성은 단성으로 원씨(源)와 평씨(平)입니다.
이건 삼한의 지배층(부여족)의 영향으로 볼 수 있거나, 이들의 조상이 삼한의 지배층으로 보면 무리가 없습니다.
물론 이들이 일본 고유의 읽는법으로 읽습니다.
하지만 일본인들도 왜 源이 미나모토인지 平이 타이라인지 모릅니다.
암튼 위 상황을 지도로 보면 이렇습니다.
여기서 이미 군대가 출진했는데 ↓ 이거 했다고 군대를 돌리나요?
잡아갔던 남녀들을 돌려보내고 화친을 구걸하였다.
어림도 없습니다.
초고는 아달라한테 단단히 분노한 상태입니다.
초고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新彌多離에 원군을 대기하라 명합니다.
하지만 명을 안 듣습니다.
해씨 辰의 체재 안에서 돌아가던 삼한이 듣보잡 초고에게 망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초고는 처음부터 다시 온조의 백년대계를 세워야 합니다.
사실 아달라가 초고 2년에 병사를 보내 백성 1천명을 노략질한 것도 떠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근데 한달 만에 2만대군을 일으키고 또 친히 8천 정예기병을 거느릴 줄이야?
2년(서기 167) 가을 7월, 아달라가 초고를 떠봄(백성 천명 노략질)
가을 8월, 2만8천대군 사로국으로 출격
↕ 이 사이 3년 삭제
5년(서기 170) 겨울 10월, 병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침범하였다.
↕ 이 사이 16년 통삭제
21년(서기 186)
여기엔 초고의 또다른 노림수가 있었습니다.
초고가 바보가 아닌 이상 역성쿠데타로 辰왕에 올랐는데 자신을 따라주리라곤 생각치도 않았을 겁니다.
즉 해씨 선왕들이 했듯이 무력으로 눌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앞서 초고는 남옥저의 왕족 후손으로 개루대왕의 고위 장수라 했습니다.
혹 초고가 역성쿠데타로 개루의 뒤를 이어도 軍은 지지한 걸까요?
만약 왕건이나 이성계의 명성과 실력이 있다면 납득이 됩니다.
재위 2년에 2만대군을 한달만에 집결시키고 곧이어 자신도 8천의 정예기병을 거느릴 정도면 충분히 납득가는 얘깁니다.
다만 지방에서는 초고를 잘 모르기 때문에 명을 안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럼 이 참에 초고는 지방세력들을 무력으로 누를 필요가 있는 겁니다.
그래야 말갈과의 전쟁에 힘을 합쳐 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달라>
14년(서기 167) 가을 7월, 우리 군이 백제의 동쪽에 있는 두 성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백성 1천 명을 붙잡아 돌아왔다.
8월, 백제가 군사 2만 명으로 우리의 서쪽 여러 성을 침범하였다. 백제왕도 또한 기병 8천을 거느리고 한수(漢水)로부터 그곳에 다다랐다. 우리 임금이 백제군의 수가 많아 대적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잡았던 사람을 돌려보냈다.
15년(서기 168) 여름 4월, 이찬 계원이 죽었으므로 흥선을 이찬으로 삼았다.
→ 초고가 대군을 이끌고 사로국에 진입합니다.
신라 임금은 크게 두려워하여 잡아갔던 남녀들을 돌려보내고 화친을 구걸하였다.
화친의 조건으로 고위 관등인 이찬 계원을 죽입니다.
아마 거열형에 처해졌을 걸로 추정합니다.(=사지절단형)
그리고 흥선이 이찬이 됩니다.
근데 16년이 삭제됐고 17년에 또 쳐들어갑니다.
17년(서기 170) 겨울 10월, 백제가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초고>
5년(서기 170) 겨울 10월, 병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침범하였다.
→ 16년에 이찬 흥선의 반초고 연합군 격서(목간)가 돌고, 이를 초고가 읽습니다.
분노한 초고가 이번엔 사사노궤에게 대군을 이끌게 해 흥선을 잡아 죽입니다.(거열형)
이에 흥선은 역사에서 조용히 사라집니다.
<초고>
2년(서기 167) 가을 7월, 아달라가 초고를 떠봄(백성 천명 노략질, 이찬 계원의 계책)
가을 8월, 2만8천대군 사로국으로 출격, 이찬 계원 거열형으로 처단
3년(서기 168) 이찬 흥선, 반초고 연합군 격서 돌림
4년(서기 169) 초고, 격서 읽고 분노
5년(서기 170) 겨울 10월, 병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침범하였다. 흥선, 거열형 처단
↕ 이 사이 16년 통삭제
21년(서기 186)
이 때 단순히 ↑ 이 사건만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초고는 2만8천대군으로 사로국에서 볼일(계원 거열형 처단)을 본 후 新彌多離와 남부로 향합니다.
즉 자신을 따르는 지방세력의 충성을 확인할 겸 따르지않는 세력에 본때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167년 8월부터 169년까지 약 2년 동안 초고는 2만8천을 거느리고 新彌多離와 남부를 평정합니다.
철갑 8천기를 거느리고 가는 곳마다 최전방의 군사는 이렇게 외칩니다.
"대왕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참고로 新彌多離는 남부가 아닙니다.
이들에겐 완전 자치국으로 대우해준 것으로 보입니다.(백제령 자치국)
이렇게 평정할 때마다 혹은 원군을 보낼 때 그 보답으로 또 종합선물셋트를 하사한 걸까요?
이 때 사백개로와 사사노궤에게 군사를 나눠 각지로 보냄은 물론입니다.
170년 10월엔 사사노궤에게 약 2만대군을 이끌고 사로국을 치게 합니다.
그리고 흥선은 결국 거열형으로 처단됩니다.
이 남정 때 2만8천대군이 가는데 누가 감히 초고를 거역합니까?
대부분 순순히 복종했으리라 짐작됩니다.
초고는 이왕 나서는 김에 민정도 보살핍니다.
보통 즉위하면 재위 2년에 사면령을 내리거나 식량을 더해주거나 노약자들을 위한 정책을 폅니다.
그래서 약 2년이란 시일이 소요됐습니다.
이 기간에 모두가 초고를 칭송하고 '나라를 새로이 세웠다'라고 소문이 난 건 아닐까요?
그럼 시나리오 A가 아닌 시나리오 B에서 시작해 여기까지 온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 때 말갈 즉 고구려는 무얼 하고 있던 걸까요?
<신대>
4년(서기 168), 한나라 현도군 태수 경림(耿臨)이 침입해 우리 군사 수백 명을 죽였다. 임금이 스스로 항복하고 현도에 속하기를 빌었다.
5년(서기 169), 임금이 대가 우거(優居)와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을 보내 병사를 거느리고 현도 태수 공손도(公孫度)를 도와서 부산(富山)의 적도들을 토벌하였다.
8년(서기 172) 겨울 11월, 한나라에서 많은 병사를 이끌고 우리나라로 쳐들어왔다.
後漢과 전쟁하느라 한창 바쁠 때입니다.
그래서 초고가 대군을 거느리고 남정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칼을 뽑은 김에 열도까지 평정할 기세입니다.(아래 설명)
근데 여기에 현도 태수 공손도가 나옵니다. ↑
삼국지 동이전에는 부여왕 위구태라고 합니다.
《삼국지》 위서 권30 오환선비동이전 동이전 부여
부여는 원래 현도군에 속하였다. 한말에 공손도가 해동에서 힘을 일으켜 바깥 오랑캐들을 복속시키니 부여왕 위구태는 이제 요동에 속하였다. 구려와 선비가 강성해지고, 부여가 (구려와 선비) 두 오랑캐 사이에 있는 것을 본 공손도는 종실의 여자를 (위구태왕에게 보내) 처로 삼게 했다. 위구태가 죽자 간위거가 즉위했다.
수서와 북사에는 요동 태수 공손도라고 합니다.
《수서》 권81 동이열전 백제
동명(東明)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자가 있으니,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 대방(帶方)의 옛 땅에 처음 나라를 세웠다.한나라의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나라가 점점 번창하여 동이(東夷) 중에서 강국이 되었다. 당초에 백여 가(百家)가 바다를 건너 왔다(濟)고 해서 백제(百濟)라 불렀다. 그로부터 십여대 동안 대대로 중국의 신하 노릇을 하였는데, 이전 나라의 역사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북사》 권94 열전 백제
동명(東明)의 후손에 구태(仇台)가 있으니,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 처음으로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의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는 딸을 시집보냈는데, 마침내 동이(東夷) 중에서 강국이 되었다. 당초에 백여 가(百濟)가 건너 왔다(濟)고 해서 백제(百濟)라고 불렀다.
이건 공손도가 종실의 여자를 위구태에게 보내 처로 삼게 했고, 따로 자신의 딸을 구태에게도 보내 처로 삼게 한 것으로 해석됩니다.(양다리?)
즉 부여왕 위구태와 백제왕 구태는 동시대 사람들이며 같은 사람은 아닙니다.
위구태는 부여, 구태는 대방(황해도)에 나라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구태가 나라를 세웠다는 대방은 황해도가 아닙니다.
중국측이 사료를 쓰는데 대방이 황해도라면 당연히 '대방군'이라고 했을 겁니다.
대방(帶方)의 옛 땅에 처음 나라를 세웠다.
↑ 이건 辰(韓)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는 뜻입니다.
즉 월지국입니다. ↓
<한강, 나무위키>
한강은 삼국시대 초기까지는 '대수(帶水)'라 불리었고 ~생략~
대방의 옛 땅 = 辰(韓) = 帶수 = 월지국
요동태수 공손도는 북으로는 위구태, 남으로는 구태와 동맹을 맺은 것입니다.
이름이 공교롭게도 같아서 후대에 혼동이 온 것일 뿐입니다.
169년 현도 태수에서 요동 태수는 189년에 되었으니 189년 이 후에 구태에게 딸을 보낸 겁니다.
근데 ↓ 이거는 근거가 뭔가요?
당초에 백여 가(百濟)가 건너 왔다(濟)고 해서 백제(百濟)라고 불렀다.
혹시 중국에서 건너갔다고 하는 건가요 지금?
<공손도> - 나무위키 -
169년에는 사필이 공손도를 유도(有道)[7]로 천거해서 공손도는 중앙 정계에 진출하기도 했다.
189년에 동탁의 수하 장수였던 서영이 공손도와 동향 출신이었기 때문에 공손도는 그의 추천으로 요동 태수가 되었지만, 중원 지역이 혼란해지자 왕을 자칭하였다.
189년이면 초고 24년으로 앞서 나이를 역산한 바 30 + 24 = 54세 전후입니다.
즉 초고는 나이가 많으니 아들이 공손도의 딸과 혼인한 겁니다.(정략결혼)
혹 그 아들이 맏아들인 구수일까요?
<구수>
구수왕(仇首王)[혹은 귀수(貴須)라고도 한다.]은 초고왕(肖古王)의 맏아들이다.
이는 훗날 고이대왕의 역성쿠데타의 빌미가 됩니다.(← 추정)
그럼 다시 돌아와 보겠습니다.
<초고>
5년(서기 170) 겨울 10월, 병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침범하였다. 흥선, 거열형 처단
↕ 이 사이 16년 통삭제
21년(서기 186)
요 16년 통삭제 기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난 걸까요?
<고국천>
6년(서기 184), 한나라 요동 태수가 군사를 일으켜 우리나라를 쳤다. 임금이 왕자 계수(罽須)를 보내어 한나라를 막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임금이 직접 날쌔고 용감한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한나라 군사와 좌원(坐原)에서 싸워 물리쳤다. 베어진 적의 머리가 산처럼 쌓였다.
184년까지는 확실하게 고구려가 후한과 전쟁하느라 너무 바쁩니다.
그럼 초고는 공손씨와 혈맹에다 말갈이 바빠 북방을 마음 놓을 수 있으니 新彌多離와 남부를 평정합니다.(위 설명)
그리고 이제 사로국과 열도 왜를 평정할 차례입니다.
166년 개루대왕이 죽고 열도 왜는 첫번째 왜국대란이 옵니다.
초고를 辰왕으로 인정치 않아 辰왕의 공백기라 생각하고 그새 세력다툼을 한 것입니다.
<아달라>
20년(서기 173) 여름 5월, 왜(倭)의 여왕 비미호(卑彌乎)가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이에 초고는 170~173년에 대군을 보내 열도 왜를 평정합니다.
단기간 접수를 위해 철갑 기병 수천기를 보냈음은 물론입니다.
그리고 비미국에서 비미호를 보내 야마대국 왕으로 즉위시킵니다.
사로국은 구도를 기용해 초고와 대립할 기세입니다.
<아달라>
19년(서기 172) 봄 정월, 구도(仇道)를 파진찬으로 삼고 구수혜(仇須兮)를 일길찬으로 삼았다.
구도는 구태의 친족으로 서로 사이가 나빠 보입니다.
초고의 대군이 쳐들어가면 구도가 방어하는 식입니다.
<초고>
25년(서기 190) 가을 8월, 병사를 내어 신라 서쪽의 변경의 원산향(圓山鄕)을 습격하고 나아가 부곡성(缶谷城)을 포위하였다. 신라 장군 구도(仇道)가 기병 5백 명을 거느리고 대항하였다. 우리 병사가 거짓으로 물러나니 구도가 와산(蛙山)까지 추격해왔다. 우리 병사가 반격하여 크게 이겼다.
이제 초고대왕의 재위 49년 중에 반도 안 왔습니다.
앞으로 초고대왕의 행적은 어떻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