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신라, 가야, 왜

眞혁거세(탄생설화를 사실로 풀다)

scale700 2025. 2. 2. 04:39

 

<혁거세>

시조의 성은 박씨, 이름은 혁거세(赫居世)이다. 전한(前漢) 효선제(孝宣帝) 오봉(五鳳) 원년 갑자(기원전 57) 4월 병진[정월 15일 이라고도 한다.]일에 왕위에 올랐다. 왕호는 거서간(居西干)이다. 이때의 나이는 열세 살이었으며 나라의 이름은 서라벌이었다.

 

신라본기는 시작부터 전한의 연호와 함께 혁거세의 즉위 날짜까지 나오며 시작합니다.

오직 신라본기만 그렇습니다.

중국의 연호를 쓴다는 것은 곧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나타내며 신라가 한반도의 정통성을 가짐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신라는 당의 속국이고, 이 당의 빽으로 한반도의 정통성은 신라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마치 삼한 70여개국은 辰의 속국이고, 이 진의 정치력으로 한반도가 돌아가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밝혔던 바 그 정통성은 신라가 아닌 백제입니다.

辰을 이어받았기 때문입니다.

 

근데 삼한의 명칭은 정사 삼국지가 출처고, 삼국사기 역시 이를 참고하여 편찬했다고 합니다.

한반도에는 삼한고기라는 책이 있었음에도 중국사료를 많이 참고한 듯합니다.

이는 '삼국사기 제40권 잡지 제9 고구려·백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삼한시대에 우리 선조들은 삼한을 어떻게 불렀을까요?

과연 馬韓, 辰韓, 弁韓이라고 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중국인이 쓴 중국 측 사료이기 때문입니다.

 

왜왕 武가 국서를 보낸 晉書에 마한이 모한(慕韓)이라 나오고, 진한을 秦나라의 폭정 때문에 한반도로 많이 이주했다 하여 秦韓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중국인이 쓴 중국사료(진서)입니다.

 

~생략~

조하여 무를 사지절, 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에 제수하였다.
詔除武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

 

삼국사기는 우리의 사료이니 여기서 찾아야 합니다.

백제 동성의 이름이 모대(牟大)이고, 그 할아버지의 이름이 모도(牟都)라고 합니다(삼국사기).

진실여부야 어찌 됐든 중요한 건 이 牟가 성으로 쓰였다는 겁니다.

 

또 동시대 신라 법흥의 이름이 모즉지(牟卽智)입니다(울진 봉평비).

갑진년(524년) 정월 15일에 탁부(喙部)의 모즉지 매금왕(牟卽智寐錦王), 사탁부(沙喙部)의 사부지 갈문왕(徙夫智葛文王), 본파부(本波部)의 무부지(巫夫智) ▨[3]간지(▨干支), 잠탁부(岑喙部)의 미흔지(美昕智) 간지, 사탁부의 이점지(而粘[4]智) 태아간지(太阿干支), 길선지(吉先智) 아간지(阿干支), 일독부지(一毒夫智) 일길간지(一吉干支), 탁부의 물력지(勿力智) 일길간지(一吉干支)[5], 신육지(愼肉智) 거벌간지(居伐干支), 일부지(一夫智) 태나마(太奈麻), 일이지(一尒智) 태나마, 모심지(牟心智) 나마(奈麻), 사탁부의 십사지(十斯智) 나마, 실이지(悉尒智) 나마 등이 교시하신 일이다.

 

백제대왕과 신라 임금의 성이 같은 모씨라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같은 친족일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아래 계속 설명이 이어집니다.

 

백제본기에 보면 眞씨는 백제 초기부터 귀족입니다.

이 진씨는 백제 대성팔족의 첫째입니다.

또한 근초고왕의 왕후가 이 眞씨로 보입니다.

 

진씨(眞氏)는 본래 진모씨(眞慕氏)·진모씨(眞牟氏) 등으로 표기되는 복성이었는데, 나중에 진씨로 단성화되었다고 보고 있다(李弘稙, 1971).

 

이제 뭔가 감이 오는 게 느껴지나요?

진모씨(眞慕氏)·진모씨(眞牟氏)

慕韓이 牟韓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또 신라본기를 보면 眞씨는 신라에서도 귀족입니다.

이 신라의 진씨들은 백제에서 망명했거나 백제대왕이 임명한 신라임금의 후손들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들은 삼한일통 전쟁 때에 다수가 장군·총관으로 활약했지만, 문무는 이들이 더 이상 쓸모가 없어 멸족시켰습니다.

 

<문무>

2년(662) 8월, 대당 총관 진주(眞珠)와 남천주 총관 진흠(眞欽)이 거짓으로 병을 핑계 삼아 방탕히 지내며 나랏일을 돌보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그들을 목베고 아울러 그 일족을 멸하였다.

 

문무는 이들이 훗날 왕업의 유지에 문제가 될까 봐, 즉 쿠데타를 일으켜 얼마든지 왕위를 차치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귀족이기 때문에 모략으로 처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진씨의 일부는 이때 열도로 건너가 하타씨(秦氏)가 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眞氏 → 秦氏

 

참고로 문무는 일본이 쳐들어올까 봐 동해안을 따라 성을 구축했다고 합니다(역·스).

그리고 죽어서도 일본을 막겠다고 수장했습니다.

이는 모두 일본이 보복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眞씨 (백제) - 야마토 시대 일본에서는 왕실 구성원을 "마히토 "(眞人, 真人/진인)라고 불렀으며 많은 학자들은 이 사실을 바탕으로 백제 진씨 일족과 일본과의 연관성을 추정하고 있다(위키백과).

 

그럼 辰韓은 원래 眞韓일 수 있다는 얘깁니다.

진흥이 괜히 眞興이 아닌 겁니다.

 

근데 위에 백제 동성의 이름이 모대(牟大)이고, 그 할아버지의 이름이 모도(牟都)라고 했습니다.

백제는 복성이 단성이 되기도 하는 특성상, 혹시 성이 眞牟, 이름이 각각 大, 都가 아닐까요?

진모대(眞牟大), 진모도(眞牟都)일 수 있다는 겁니다!

 

법흥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즉지(牟卽智) → 진모즉지(眞牟卽智)

모심지(牟心智) → 진모심지(眞牟心智)

 

또한 위에 나온 바 왜 5왕의 성도 추정 가능합니다. 

찬(贊)  → 진찬(眞贊) 혹은 모찬(牟贊) = 진모찬(眞牟贊)

진(珍)  → 진진(眞珍) 혹은 모진(牟珍) = 진모진(眞牟珍)

제(濟)  → 진제(眞濟) 혹은 모제(牟濟) = 진모제(眞牟濟)

흥(興)  → 진흥(眞興) 혹은 모흥(牟興) = 진모흥(眞牟興)

무(武)  → 진무(眞武) 혹은 모무(牟武) = 진모무(眞牟武)

 

또한 부여찬, 부여진, 부여제, 부여흥, 부여무로도 추정 가능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백제 동성이 부여대(삼국유사)라고 나온 것으로 보아 모대(삼국사기)와 같이 쓰인 성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부여씨 = 모씨 = 진씨 = 진모씨인 겁니다.

 

여기서 삼국사기에 동성을 이미 모대라고 했는데, 일연은 왜 다시 삼국유사에서 여대 즉 부여대라고 한 것일까요?

이건 모씨가 부여씨, 즉 모씨가 진씨고, 진씨가 진모씨고, 진모씨가 부여씨라는 걸 말해주기 위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 되면 백제 역시 眞씨의 나라란 뜻입니다.

이제 백제와 신라에 동시에 眞씨가 귀족으로 있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이 백제의 眞牟씨가 단성을 쓰는 신라로 가면서 眞씨와 牟씨로 분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두 나라에 동시에 귀족으로 있는 건 眞씨(牟씨)와 仇씨 뿐으로 알고 있습니다.

구씨는 백제의 구태, 신라의 구도 등 굵직한 유명인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처음엔 마한이 모한이 아닌 眞韓이었을 수 있습니다.

후일 진한과의 발음상 구별을 위해 眞韓이 마한이 된 것일 수 있단 얘깁니다.

 

왜냐 하면 眞韓을 일본어로 '마가라'라고 읽습니다.

이 眞은 마지(진짜)란 뜻으로 쓰입니다.

眞의 간체자가 真, 일본에서는 간체자가 쓰입니다.

眞 = 真

 

<나무위키>

일본어 マジ(마지). "레알", "진짜" "진심" 등으로 해석한다. 어원은 진면목 (真面目(まじめ '마지메')에서 나온 말.

예: 마지데? → 진짜?

 

眞씨 (백제) - 야마토 시대 일본에서는 왕실 구성원을 "마히토 "(眞人, 真人/진인)라고 불렀으며 많은 학자들은 이 사실을 바탕으로 백제 진씨 일족과 일본과의 연관성을 추정하고 있다(위키백과).

 

일본인들도 이 眞을 왜 마라고 읽는지 모릅니다.

그런 한자가 수없이 많습니다.

그건 원래 삼한의 언어이기 때문으로 이걸 쓰는 사람들이 열도로 건너갔기 때문입니다.

자기 조상(야요이인)들이 쓰던 말에다 한자가 들어오는 과도기에 만들어진 말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혹 삼한이기 이전에 원래는 眞韓이라고 한 것이, 중국에 발음상 와전되어 마한이라고 잘못 기록되었거나 한자가 들어오는 과도기에 생긴 오류일 수 있습니다.

후일 북방의 辰이 내려와 辰韓이 되어 眞韓과 발음상 같기에 구별을 위해 중국에서 쓰는 馬韓을 그대로 쓰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 마한 = 牟韓(慕韓) 모씨의 나라 + 眞韓 진씨의 나라 = 眞牟씨의 나라
  • 진한 = 眞韓 - 진씨의 나라
  • 진모씨(眞牟氏) → 진씨가 모씨이고, 모씨가 곧 진씨
  • 馬와 牟는 음이 통하고, 辰과 眞은 동음이다.

즉 眞牟씨 이들은 백제에서도 신라에서도 모두 성골이었던 겁니다.

다시 말해 辰의 성골이란 뜻입니다.

 

그럼 백제의 진골은 뭐냐?

진씨가 모씨이고, 모씨가 곧 진씨라는 이 진모씨(眞牟氏)는, 마치 백제의 왕족 해씨와 우씨를 연상케 합니다.

즉 해씨와 우씨는 백제 우비류와 해온조로 대표되는 두 씨족 집단이 바로 백제의 성골이자 진골입니다.

 

성골 眞씨가 대대로 진왕을 해오다 우비류와 해온조에게 모종의 사건으로 왕권을 넘겼습니다.

이는 박씨와 석씨가 대대로 신라임금을 해오다 김씨에게 왕권이 넘어간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참고로 신라의 진골은 김씨입니다.

 

<정리>

  • 韓의 성골 = ?
  • 韓의 진골 = 기씨(한을 병합 후 한씨로 변신)
  • 辰의 성골 = 眞牟씨?
  • 辰의 진골 = 해씨와 우씨(진을 병합, 해씨 진 건국)
  • 백제의 성골 = 해씨와 우씨(→부여씨로 변신)
  • 백제의 진골 = 仇씨(구태=초고 때 말갈 일족의 해씨 진 병합, 우씨 고이 때 백제 건국하면서 구씨 멸족?)
  • 신라의 성골 = 眞씨(→박씨로 변신), 석씨는 토착왕족
  • 신라의 진골 = 金씨(말갈 일족의 신라 병합, 삼한일통 후 진씨 멸족)
  • ※ 부여씨 백제대왕이 辰의 성골인 眞牟씨와 혼인한 예: 근초고왕
  • ※ 신라의 金씨는 후일 만주의 金나라와 깊은 연관이 있어 보임.

그렇다면 혁거세는 원래 眞혁거세란 뜻이 됩니다.

후일 백제에서 들어온 眞씨와 구별을 위해 이들에게 새로이 성을 만든 것이 朴씨로 보입니다.

이들 진씨들은 후일 문무에게 멸족당함은 위에 썼습니다.

 

<문무>

2년(662) 8월, 대당 총관 진주(眞珠)와 남천주 총관 진흠(眞欽)이 거짓으로 병을 핑계 삼아 방탕히 지내며 나랏일을 돌보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그들을 목베고 아울러 그 일족을 멸하였다.

 

이 혁거세라는 이름도 의심이 가지만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혁거세가 13세에 즉위했다면 건국시조인 만큼 부모를 밝혀야 할 텐데 박에서 나왔다 하고 숨깁니다.

이 혁거세의 부모, 특히 아버지는 누구인가?
신라 말 혹은 고려 초 편찬자들이 혁거세의 부모를 숨겨야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몇 가지 가정이 있습니다.
첫째, 호공과 탈해가 왜인으로 보아 혁거세도 왜인 혹은 토착인이다.
둘째, 목지국 진왕의 왕족이다.
셋째, 스키타이계 혹은 북방 유목민이다.

세 번째는 훗날 김씨에 적용되니, 지금은 첫 번째 아니면 두 번째가 그 답이 되겠습니다.


그럼 첫 번째를 가정하고 풀어보면, 
<혁거세>
이에 앞서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에 나뉘어 살면서 여섯 개의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이하생략~


이렇게 장황하게 6부가 나오는데, 이건 3대 유리조에 촌의 명칭을 바꾸고 성씨를 하사하는 걸로 한번 더 나옵니다.
<유리>
9년 봄,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을 하사하였다.

~이하생략~

 

여기서 이 6부의 성과 울진 봉평비에 나오는 성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양산부(楊山部)는 양부(梁部)로 고쳤으며 성은 이(李)씨이고, 고허부(高墟部)는 사량부(沙梁部)로 고쳤으며 성은 최(崔)씨, 대수부(大樹部)는 점량부(漸梁部)[혹은 모량(牟梁)이라고도 한다.]로 고쳤으며 성은 손(孫)씨, 간진부(干珍部)는 본피부(本彼部)로 고쳤으며 성은 정(鄭)씨, 가리부(加利部)는 한기부(漢祇部)로 고쳤으며 성은 배(裴)씨, 명활부(明活部)는 습비부(習比部)로 고쳤으며 성은 설(薛)씨로 정하였다.

 

탁부(喙部)의 모즉지 매금왕(牟卽智寐錦王), 사탁부(沙喙部)의 사부지 갈문왕(徙夫智葛文王), 본파부(本波部)의 무부지(巫夫智) ▨[3]간지(▨干支), 잠탁부(岑喙部)의 미흔지(美昕智) 간지, 사탁부의 이점지(而粘[4]智) 태아간지(太阿干支), 길선지(吉先智) 아간지(阿干支), 일독부지(一毒夫智) 일길간지(一吉干支), 탁부의 물력지(勿力智) 일길간지(一吉干支)[5], 신육지(愼肉智) 거벌간지(居伐干支), 일부지(一夫智) 태나마(太奈麻), 일이지(一尒智) 태나마, 모심지(牟心智) 나마(奈麻), 사탁부의 십사지(十斯智) 나마, 실이지(悉尒智) 나마 등.

 

1차 사료인 울진 봉평비에 나오는 성을 기준으로 하면,

양산부(楊山部) → 양부(梁部)탁부(喙部)

고허부(高墟部) → 사량부(沙梁部) →  사탁부(沙喙部)

간진부(干珍部)본피부(本彼部) →  본파부(本波部)

대수부(大樹部)점량부(漸梁部)[혹은 모량(牟梁)]  → 잠탁부(岑喙部)

가리부(加利部) 한기부(漢祇部) → ?

명활부(明活部) 습비부(習比部) → ?

 

울진 봉평비에는 6개가 아닌 4개밖에 나오지 않고, 어찌 된 일인지 한자가 다른 명칭이 대부분입니다.

무엇보다 양부(梁部)가 탁부(喙部)로 변신했습니다.

혹시 단순히 명칭만 바뀐 게 아니라 부족 내의 구성원이 바뀌어서 명칭이 바뀐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아니나 다를까 삼국유사의 자료를 찾아보니 실상은 이렇습니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진한>

최치원(崔致遠)은 이렇게 말했다.  "진한은 본래 연(燕)나라 사람이 피난해 와 있던 곳이다.  그런 때문에 탁수(탁水)의 이름을 따서 그들이 사는 읍(邑)과 마을을 사탁(沙탁)·점탁(漸탁)이라고 불렀다."(신라新羅 사람의 방언方言에 탁탁의 음音을 도道라고 했다.  때문에 지금도 혹 사량沙梁이라 하는데, 양梁을 도道라고도 읽는다)

 

즉 연나라의 일부가 조선의 영역이기도 하므로 조선 유민이 진한 땅으로 왔고, 그들이 사는 곳을 따라 명칭이 바뀌었는데 당시 道(중국식 타오)를 탁에 가깝게 읽었기에 梁을 탁이란 글자로 대용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토착민이 사는 양산부에 조선의 유민이 많아져 이들이 권력을 잡고 이들이 살던 곳의 명칭으로 바뀐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양이 탁으로 바뀐 건 단순히 당시 한자를 그런 음으로 불렀던 것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위에 분석한 것에 따르면, 혁거세는 양산부에 사는 사람들 즉 토착민이 득세한 시대의 임금입니다.

즉 혁거세는 나중에 흘러들어와 득세한 조선 유민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3대 유리 때에 조선 유민이 많아져 6부의 명칭을 바꾸고, 어느 때에 탁부 즉 牟씨가 임금이 되었다는 것이 요지입니다.


근데 삼국지 한전에 진한에는 본래 6개국이 있었다고 나옵니다.
사로국에 6개의 촌락을 나열하며, 이것이 진한 6부가 되었다며 마치 진한의 6개국을 사로국으로 묘사합니다.
편찬자는 그걸 노려 "사로국은 처음부터 진한 6개국을 가지고 시작했다"라는 뉘앙스를 풍기게 끔 기록했습니다.
즉 사실과는 맞지 않은 날조된 기록이며, 이들이 의도적으로 신라를 처음부터 좋게 썼습니다.

위에 분석한 바, 처음부터 조선의 유민이 여섯 촌락을 이루진 않았습니다.
여기엔 일명 야요이인이라 일컫는 토착민(선주민)이 살고 있었는데, 이곳으로 조선의 유민이 들어와 산골에 나뉘어 살게 된 것입니다.
즉 초기 사로국의 피지배층은 토착민과 조선의 유민이고, 지배층이 호공과 탈해의 예로 보아 왜인이 됩니다.

조선의 유민이 들어오기 전에 토착민의 지배층이 왜인이란 말은, 피지배층도 같은 왜인이란 뜻이 됩니다.

 

그럼 혁거세도 왜인일 수도 있다는 논리가 됩니다.

그리고 고려 시대는 일본과 경쟁하는 시대라 더욱 혁거세 왜인설을 부정하고 이를 날조했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이 가능성만 열어두고, 여기선 두 번째 가정으로 풀어보겠습니다.
어느 것이 맞을지는 여러분의 판단에 맡깁니다.


<삼국지 한전>
그중에서 12國은 辰王에게 臣屬되어 있다.
辰王은 (그 12국의 왕을) 항상 馬韓사람으로 王을 삼아 대대로 世襲하였으며, 辰王이 (그들을) 자립해서 王이 되지 못하게 하였다.
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辰王不得自立爲王
魏略: 그들은 옮겨온 사람들이 분명하기 때문에 馬韓의 제재를 받는 것이다.
라고 쓰여있는 것에 두 번째 가정은 더욱 뒷받침 됩니다.


근데 토착민에다 조선의 유민 대략 수천 명, 거기에 호공이 사신으로 갔다는 이 기사,
<혁거세>
38년(기원전 20), ~생략~ 이보다 앞서 중국 사람들 중에 진나라가 일으킨 난리로 고생하다 동쪽으로 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하생략~

즉 중국의 유민 대략 수만 명을 합쳐, 인구가 이 무렵 대폭적으로 증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목지국 진왕은 이들 외국인 유민을 모두 진한으로 보냈다는 건, 삼국지 한전에 나와있습니다.

근데 인구만 증가한 게 아닙니다.

이들이 갖고 온 철기 기술과 함께 사로국은 당시 입지조건이 좋은 경주항이라 삼한의 어느 소국들보다 더 빠르게 발전했을 겁니다.
즉 사로국은 토착민이 쓰던 피지배층의 신석기, 지배층의 청동기에다 이들 수만의 유민들이 가져온 철기 기술로 날로 발전해 가는 질풍노도의 시기였던 것입니다.

<혁거세>
고허촌의 촌장 소벌공(蘇伐公)이 양산(楊山)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 옆의 숲 사이에 말이 무릎을 꿇고 앉아서 울고 있었다. 곧장 가서 보니 말은 보이지 않고 다만 커다란 알이 있었다. 그것을 쪼개자 속에서 어린 아이가 나왔기에 거두어 길렀다.

~이하생략~


이제 본격적으로 이 내용에 대해 풀어보자면 이렇습니다.
진왕 혹은 그 친족에게서 난, 갓난아기를 사로국으로 군사들이 호위해 보냅니다.

이 장면은 훗날 무령왕이 열도 섬에서 태어난 때를 연상하면 쉽습니다.

같은 이유로 진왕은 갓난아기를 담로국에 보낸 것입니다.


알은, 이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특별제작한 신생아용 바구니입니다.

나무를 알 모양으로 깍가 만든 것으로, 빨간색으로 주칠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걸 보고 알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을 남긴 것입니다.

 

한반도에서 옻칠한 기물의 흔적은 B.C 3세기경부터 발견되며, 삼국시대에는 고분에서 다양한 종류의 칠기가 발견된 바 있다.(옻칠, 위키백과)

↑고분에서 다양한 칠기가 발견?

이거 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누구 보신 분 계신가요?

 

공주 무령왕릉에서는 백제 칠기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두침, 족좌, 주칠칠기편이 출토되었다. 삼국시대 칠기는 출토된 예가 적고 출토되었다 하더라도 완형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드물다. 무령왕릉 출토 칠기는 출토지가 분명하고 제작연대의 하한을 알 수 있으며 특히 두침과 족좌는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 삼국시대 칠기사에서 중요한 유물이다.

백제 무령왕릉 칠기의 제작기법: 금속장식을 중심으로 : 네이버 블로그


암튼 군사들이 호위하여 목지국에서 사로국으로 온 알(주칠한 신생아용 바구니)은 알천에 도착했습니다.
소벌공이 저 멀리 돌산에서 보니 군사들과 왠 알이 있고, 그걸 열어보니 아기가 들어있던 겁니다.
여기에 나오는 말은 곧 호위대를 말함인데 임무완수 후에 곧 목지국으로 돌아간 것을, 말은 보이지 않았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이 혁거세 알 탄생설화의 진실이라 저는 주장합니다.


혁거세가 13세로 즉위해 재위 61년까지의 기록은 없습니다.

그냥 없다기 보다는 기록이 삭제되어 없다고 봐야 합니다.

왜냐 하면 辰과 엮이어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합니다.

즉 이건 사로국이 진의 속국이라는 걸 의미합니다.


근데 혁거세 38년에 왜인 호공을 마한에 보낸 기록이 있습니다.

이건 사신을 보낸 것이 아니라 혁거세 본인이 직접 진왕을 알현한 것입니다(51세). 
즉 호공이 혁거세이고, 편찬자는 이걸 감추려고 혁거세를 호공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 근거는 호공의 호는 박이고, 탈해조에 나오는 호공과는 시간차가 백년 가까이 나기에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진왕에 대한 호공의 대답도 사실이 아닌 지어낸 대답입니다.

건국시조 원년에서 3년이 가장 중요한데, 혁거세조는 이를 전부 삭제하고 4년부터 나옵니다.
그것도 일식기록이니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건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숨기려고 삭제한 것입니다.

두 번째 가정에 의해 혁거세가 진왕의 왕족으로서 즉위한 것이라면, 즉위 원년에는 당연히 진왕에게 감사표시의 어떤 기록이 나와야 정상인데, 편찬자는 진왕에 관한 모든 걸 삭제했습니다.
이는 곧 두번째 가정이 맞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끔 합니다.

혁거세 5년 알영 역시 출신을 숨기려고 의도적으로 성스럽게 지어내 기록했습니다.
용이 나오는 걸로 보아 어떤 귀족 이상의 혈통으로 보입니다.

혹 알영이 위에 말한 辰의 성골인 眞牟씨인 걸까요?

<혁거세>
8년, 왜인이 병사를 일으켜 변경을 침범하려다가, 시조에게 신령스러운 덕망이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돌아갔다.

이때 왜인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는 것이, 침범하려다가 결국 침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이건 왜가 아니라 21세의 혁거세가 말을 안 들어, 진이 대군을 일으키려다 혁거세의 사죄를 받고 물러났다라고 해야 더 납득이 갑니다.
진이 대군을 일으켜 벌을 줌은, 공납을 안 하거나 명을 안 들을 때입니다.

 

이런 대왕의 행위는 일본서기에 잘 나와 있습니다.

다만 일본서기의 왜왕은 결코 행동에 나서지 않습니다.

왜냐?

그건 백제삼서를 보고 일본서기를 편찬한 것으로, 원래는 백제대왕인 것을 왜왕으로 둔갑시킨 것이기 때문입니다.

 

백제대왕을 왜왕으로 둔갑만 시켰지 행위까지는 거짓기록하지 못했습니다.

거기까지 거짓기록하면 들통날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원 백제삼서에는 공납을 안 바치면 치죄의 대군을 일으켰음은 두말한 나위가 없습니다.

이는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중대사인 것입니다.

이런 납세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17년에 행동으로 나타냅니다.

<혁거세>
17년, 임금이 6부를 두루 돌아보는 길에, 왕비인 알영도 따랐다. 농사와 누에치기를 열심히 하도록 권장하고, 토지의 이로움을 다하도록 하였다.

<혁거세>
19년 봄 정월, 변한이 나라를 바쳐 항복하였다.

뜬금없이 변한이 나라를 바쳐 항복했다 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 기록입니다.
이건 변한이 사로국에게 항복하라고 협박한 것을 이렇게 반대로 고쳤거나, 사로국이 변한에게 항복하라고 협박한 것을 이렇게 고친 것입니다.

물론 전자로 보입니다.

그래서 20년에는 변한과의 전쟁이 있어서 사로국이 졌을 것이고, 21년에 필요에 의해 결국 金성을 쌓습니다.
많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경황이 없었는지 5년 후에서야 궁실을 짓습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이 금성도 당시에는 다른 이름인 것을 후대에 금성으로 명칭을 바꾼 것으로 보입니다.

즉 金이란 글자는 후대에 김씨왕족과 관계가 있는 것이지 이 혁거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아마 역사의 오래됨을 보이려고 날조한 것 같습니다.

<혁거세>
30년 여름 4월, 그믐 기해일에 일식이 있었다. 낙랑 사람들이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려다가, 그곳 사람들이 밤에 문을 잠그지 않고 지내며, 들에는 노적가리가 잔뜩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서로 말하였다. “이 지방 백성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법도가 있는 나라라고 할만하다. 우리가 몰래 군대로 습격한다는 것은 도적과 다름없으니,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곧바로 병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30년 역시 같은 맥락으로, 낙랑에서 사로국까지 쳐들어 올려다가 그만둡니다.
이건 진과 낙랑과의 전쟁에 진의 요청으로 원군을 보낸 것을 이렇게 바꾸어 지어낸 기록으로 보입니다.

 

<사실 1>

30년 여름 4월, 낙랑 사람들이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려다가 辰이 원군이 온다는 말을 듣고 바로 물러났다.

 

<사실 2>

30년 여름 4월, 낙랑이 辰을 공격하기에 辰왕이 우리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우리 군사가 가니 낙랑이 곧 물러갔다.

30년부터 시작해 37년까지 진과 낙랑 간의 7년전쟁에 진이 승리한 모양입니다.
38년 승전축하로 혁거세가 직접 진왕에게 갑니다(51세).
<혁거세>
38년 봄 2월, 호공을 보내 마한을 예방하였다.

하지만 꼬박꼬박 공납이며 원군을 보내지 않았는지 진왕이 역정부터 냅니다.
이에 51세의 노련한 혁거세가 충성맹세의 대답을 잘 한 모양입니다.

역시 41년 새 진왕 즉위 축하사신을 보낸 것을 삭제했습니다.
42년 진에서 답례가 왔을 테지만 삭제됐습니다.
53년까지 10년 이상의 기록을 삭제했습니다.

 

<혁거세>

53년(기원전 5), 동옥저(東沃沮)의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치며 말하였다. 가져왔다.
“우리 임금이 남한에 성인이 나셨다는 말을 듣고, 저를 시켜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이를 철정과 맞바꾸었다.


사로국의 요구에 의해 동옥저에서 좋은 말 20필을 일단 가져와 선보입니다. 그 후 이들과 거래를 하고 기마병을 최초로 양성합니다.
그전 10여 년 동안 기마 양성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나 봅니다.
53년에서 60년까지 또 기록삭제했습니다.

60년, 두 마리의 용에 대해 왕자의 난이다 뭐다 설이 많은데, 혁거세 본인이 사지절단을 당한 걸 보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즉 이건 내란이 아닌 외국에 의해 벌어진 사건인 것입니다.

용 한 마리는 진왕을, 다른 한 마리는 혁거세 본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온조 21년은 삭제되어 기록이 없습니다.

이 때는 마한이 건재했을 때로 마한왕이 곧 辰왕입니다.


모종의 이유 때문에 진의 대군이 와서 금성을 함락시키고, 괘씸죄로 사지절단형에 처한 것입니다.

사지가 잘려 죽은 혁거세의 국상 중 3개월 후 낙랑도 쳐들어와 금성을 포위했지만, 역시 진의 원군이 온다는 말에 물러갑니다.

그게 남해조 원년의 일입니다.

참고로 훗날 이 괘씸죄로 사지절단형에 처해지는 사로국 임금이 여럿 있습니다.